옛날에 나눈 대화. 관련하여 상기할 것이 있어 다시 찾아보고 올림.
Q.
맥락이라는 걸 어떻게 정의하시나요? 역사 연구의 방법론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다보니, 또 제 조사를 뭐 이것저것 하다보니 해석의 타당성은 결국 맥락 설정에서 오는 것 같더라구요. 그럼 대체 맥락이란 건 어떻게 경험적으로 조사할 수 있는 것인가, 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되어서요.
우선 저는 맥락이란 게 특정 관찰이 다른 관찰에 반해 더 개연적으로 선택되게 만드는, 한편으로는 명시적이고 또 한편으로는 암묵적인, 참조적 인덱스의 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성사적 방법을 가지고 얘기해보자면, 이건 작가가 참조하고 활용한 그 인덱스의 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작가는 결국 자기 작품의 첫번째 독자이기도 하잖아요 ㅎㅎ 그가 뭘 생각하면서 그 언어와 문장들을 배치했는지에 대해서 다시 진입하는 게 지성사의 강점이라 생각하는데, 이건 작품을 쓸 당시 작가가 처해있던 상황에서 특정 언어와 문장들을 쓰면서 참조했던 그 망에 재진입하려는 방법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언어는 다 따로따로 노는 게 아니라, 다른 언어들과의 관계 속에서 절합되어articulated 존재하는 것이죠.
뭐 근데 이건 교과서적인 얘긴 거 같고.. 맥락을 조망한다 했을 때 제가 좀 궁금한 지점은 맥락이 다층적일 때 그 다층성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에 있는 것 같아요. 뭐 근데 이것도 책에서 참조되는 것들을 따라다니면서 그 참조의 망을 대략적으로 매핑하고, 상호참조되고 참조되지 않는 것들을 구별해내면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려나요..
A.
참 어려운 질문을....ㅋㅋ
교과서적인 답변을 제시하면서 질문하셨기에, 제가 쉬운 답을 할 가능성은 없어졌군요.
뭐 그래도 예정조화의 힘으로 어느 정도 방향을 가지고 답할 수는 있을 듯합니다....
전 최근 파블로프에 대한 책을 보고 있는데, 이게 관련하여 좋은 맥락을 제공해줄 듯합니다.
보통 “파블로프=조건반사”로 유명하잖아요.
“종소리→침 분비”로 도식화되고요.
이 사람의 맥락을 보면 이게 졸라졸라졸라 대단한 거란 걸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파블로프는 조건 반사 연구 이전에 이미 노벨상을 받은 사람이고, 원래 전공이 생리학, 특히 소화기 연구로 유명했습니다.
자신의 생리학 연구를 토대로 조건 반사를 연구한 것인데, 그래서 본인은 심리학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동구권에서는 “고등신경작용 생리학”으로 이러한 활동을 가리키고 있다더군요.
그런데 이 사람은 “심리학의 선구자”로 여겨지고 있죠. 이 사실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 양반은 조건 반사를 토대로 피실험체의 “지각적 차이”를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니까 조건 반사의 전제가 되는 자극에 차이를 주어서 해당 차이를 지각/인지하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만든 것이죠.
파블로프는 침 나온다에서 끝낸 게 아니라, 이러한 조건들을 매우 정교하게, 양적으로 질적으로 차이를 주며 복잡화하였고, 이러한 차이들이 어떤 결과적 차이를 주는지를 가지고서 내적 메커니즘을 연구하려고 했습니다.
뜬금없이 조건 반사 얘기를 한 게 이상하겠지만, 이게 미독이 언급한 “개연성” 문제랑 직결됩니다.
조건 반사에서 중요한 요소는 결국 “기대”입니다.
즉, 자극들을 articulating하면서 예측 가능성을 증대시킨다는 것이죠.
조건 반사의 조건 자극(CS로 약칭되는... 하루종일 CS, UCS, CR 등을 보았습니다...)이 유동적으로 변화되어 불확실성이 증대될 때에도, 이를 어떤 방식으로 분절시킴으로써 예측을 형성하고, 해당 예측을 토대로 자극에 대한 대응을 자극하거나 억제하는 것이 조건 반사의 핵심적인 통찰입니다.(사실상 심리학적 실험 설계의 윤곽을 제시한 것입니다... 졸라 대단한 새끼죠)
맥락은 개연성의 차이를 만드는 단서/자극을 해석해내는 기대 구조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파블로프의 실험보다 복잡하고, 예측 가능성이 떨어집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서도 예측 가능성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를 제시하는 게 맥락 연구의 기교가 될 것이고요.
지성사가, 특히 스키너는 자꾸 이걸 텍스트로 몰고 간 경향이 있습니다.
뭐 맥락이란 단어 자체가 텍스트를 연상시키는 단어context인 것도 사실이죠.
하지만 중요한 것은 “기대”이지, 용어가 아닙니다.
맥락 연구의 핵심은 “무엇이 기대 가능했는가?”입니다.
뤼시앵 페브르가 위대한 것은 라블레가 문자적으로 무신론자인지 무신론자가 아닌지를 평가하는 것을 넘어서서, 당시에 “무신론자”라는 용어를 매개로 기대되는 관념이 무엇이고, 해당 기대를 지탱하는 단서들이 무엇인지를 탐구해서입니다.
“무신론자”라는 단어를 매개로 작동하는 “기대”들을 유형화하고, 그것들을 지탱하는 자극-강화 작용들이 무엇인지를 보려고 한 것이죠.(“무신론자”라고 하면 너무 “타자화”하는 느낌인데, 자기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자극-강화는 긍정적 체험으로서, 자기 강화로도 드러날 수 있죠)
뭐 그럼 문제는 이런 게 되는 거죠.
“기대를 어떻게 알 수 있는데?”
여기에 도움이 되는 것은 “기대”가 임의적이지 않다는 것이고, 우리가 연구해보려고 할 만한 주제라면, 기대 형성이 매우 통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기대 형성은 까다로워요. 긍정적 피드백과 부정적 피드백이 졸라 잘 작동해야 겨우겨우 형성될 그런 기대들이거덩요. 그러니 아무렇게나 기대되진 않는 거고, 그런 기대를 지탱하는 경험-체험-관념 구조물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죠.
삶의 유형(?) 같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실제로 그렇게 유형화가 시도되었고요) 나름 모범적 연구들을 통해 어느 정도 유형화가 된 상태이니 그런 게 비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거 같습니다.(충분히 다양한 유형들을 포괄하고 있는가는 문제될 수 있겠지만, 이게 이런 접근을 부정할 이유는 되지 못하고, 오히려 촉발만 할 수 있죠)
재미난 것은 이런 유형화가 순전히 사회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죠.
관념을 매개로 하는 부분이 있다는 소리가 되겠습니다.(사실 파블로프는 실험을 통해 “관념”이 중요한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 것이었고 성공해낸 것입니다ㅋㅋ 파블로프는 “주의력”이란 심적 능력의 중요성을 밝히는 데에도 엄청난 기여를 했더군요. 실제로 주의력의 중요성과 이에 기반한 심리학은 소련 연구를 많이 참조하고, 그 연구들은 파블로프의 연구를 계승하는 것으로 자신을 표상하고 있습니다)
관념들의 내적 성격을 가지고 연구하는 영역이 일종의 “사상” 연구라고 할 수 있겠죠.
이게 어케 가능한 것인지는 요런 식으로 말하면 좋을 듯합니다.
최근 전 과학에서의 “이해” 문제에 꽂혀 있습니다.
뭐 이게 한동안 열심히 파던 “유추” 문제 랑도 관련이 있죠.
유추 관련해서 재미난 사실은 유추가 창의성 때문에 옹호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19세기에 과학철학이 형성되던 시점에서 유추는 “제한 원리”였어요. 창의성이 아니라 제한을 위해서 유추가 얘기되었다는 것이죠.(사실 19세기 중반에 논란이 된 유추의 유의미성 문제는 외려 유추의 제한성 때문에 문제된 거였어요. 빛이 파동이면서 입자란 것은 유추로 이해될 수 없지만 받아들여야만 할 사실로 여겨졌고, 과학에서 유추는 상상을 돕는 보조물이지 본질이 아니란 비판이 등장해서 문제가 된 거죠. 유추론자들도 저 사실은 받아들여서 골머리를 썩힙니다)
유추는 이미 알고 있는 어떤 “사물-관념”들의 관계로 특정한 규칙성들을 환원하는데 사용되었어요.
이게 진정한 설명/이해라고 주장되었고요.
저게 뭔 소린가 할텐데 이런 겁니다.
양자역학 교과서를 펼치면 유추가 제시됩니다.
“우주가 용수철들과 이에 매달린 추들로 이루어져있다고 가정해보자.”
특정한 규칙성은 제한된 영역에서 발견되는 규칙성이죠.
그런데 이걸 확대 적용하는 게 과학적 기술이죠.
그런데 확대 적용된다고 할 때, 그런 확대 적용은 어케 가능한가요?
전 단순히 부분과 전체를 혼동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이미 연구된 사례를 가지고, 아직 연구되지 않은 사례로 들어갈 때, 도대체 어케 같은 방식으로 연구할 수 있냐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죠.
여기서 이전 연구의 등가물들이 제시되어야하는데, 바로 여기에서 유추가 작동하는 것이죠.
지금 진행하는 연구에서, 이전 연구에서 제시된 특정한 요소들에 대응하는 등가물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유추가 필요합니다.
쓸데없이 유추 얘기를 한 거 같아 보이지만 생각보다 이게 중요합니다.
양자역학이 문제가 되었던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사물들의 운동”(뉴튼 역학의 대상이 되는 것들... 움직이는 돌멩이 이런 겁니다)이란 유추로 포착될 수 없는 영역이었기 때문이죠.
지금 제가 얘기하는 바로 이 문제는 제가 제시하는 게 아닙니다.
하이젠베르크 본인이 <부분과 전체>에서 제시하는 문제입니다.
어린 하이젠베르크가 “과학적 ‘이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이지?”란 고민에 빠지게 만들었던 문제이자,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를 특별한 사이로 만든 물음이죠.
중요한 것은 이런 겁니다.
“사물의 운동”으로 유추되지 않는 게 뭔 문제지?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 저런 유추의 토대가 소실되면, “기대”를 가지기가 어려워져요.
정확히 말하자면 “기대”를 객관화하기 어려워집니다.
데이비와 페러데이 일화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데이비가 페러데이에게 “이거랑 저거 섞어서 실험해봐!”라고 권고합니다.
근데 그게 터져서 패러데이가 크게 다치죠.
당근 당대 사람들은 데이비 이 시발새끼가 사람 죽이려고 했다고 빡쳐했는데,
경건한 그리스도인 패러데이는 “데이비 선생께서 저의 부족함을 시험하신 것이고, 제가 그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죠.
여기서 재미난 것은 데이비는 저 결과를 알고 패러데이는 모르게 한 근거입니다.
데이비가 이미 실험했으면 뭐 쉬운 답이죠.
근데 정말 그랬을까요?
당대 화학자들은 자신들이 무슨 성분을 다루는지 정확히 몰랐지만, 재미나게도 예측을 잘했습니다.
실력이 늘면 뭔가 아는 것이죠.
사실 그러니까 “분류”란 것이 가능했고요.(보이는 것도 아니고 만져지는 것도 아닌데, 실험 결과물들을 가지고 구성 요소를 분간한다는 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들은 어떤 조합이 어떤 결과를 유발할 거라고 기대하면서 작업했고, 그런 기대가 어떻게 되는지를 가지고 재검토하였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감각적으로 구별 안 되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말이죠!
정수론자들이 수들에서 개성을 느끼는 것이나, 군론 전문가들이 존재 불가능하다고 증명된 군이 존재한다고 느껴 이를 증명하게 되는 일은 다 비슷한 일이죠.
저런 기대 속에서 해당 차이를 만들어내는 변별요소를 식별해내면 그게 “기본 요소들”이 되는 겁니다.
뉴튼 역학이란 것은 이런 기본 요소들의 제한성과, 그것이 만들어내는 결과물들의 풍부함을 모두 보여줄 수 있는 유추 토대였습니다.
이게 흔들리면 서로 다른 분별 속에서 도대체 이 차이의 원인 요소를 제시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진다는 게 하이젠베르크의 고민이었고요.(어차피 운동으로 포착 안 되면 중간이 그냥 신비가 되거든요. 걍 다르다고 말하게 되는 건데, 그건 설명이 아니죠. A는 A라 다르다는 주장이 됩니다)
말이 좀 길어졌는데, 핵심은 이런 겁니다.
관념적 대상들이 기대를 만들어낼 때, 그것은 임의적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특정한 요소들의 선택적 친화력이 있고, 해당 요소들의 역학관계에서 만들어내지는 포텐셜 에너지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걸 잘 조립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제한적이고요.
관념적 구조물의 목적은 여럿이지만, 결국 싸우다보면 “생존”하기 위한 조건은 제한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물들이 생존하려면 적어도 유동적인 환경 속에서 에너지를 계속 공급할 수 있어야하는 것처럼 말이죠.
게다가 이는 생명이랑도 잘 어울리는데, 바로 이런 점에서 그렇습니다.
관념적 구조물들도 생물에서와 마찬가지로 생태계도 있어요.
언어는 복잡한 계를 이룹니다.
단어나 음절은 DNA 같은 거죠.
그게 어떻게 결합해서 반복 재생산되냐는 한정하기 어렵고, 이걸로 생성되는 구조물들은 이미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어떤 생태학적 관계를 차지할 수 있냐 이거죠.
특정 맥락이란 것은, 해당 관념적 구조물이 어떤 것으로부터 양분을 얻고, 어떤 것들의 포식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해야하는지, 그리고 이런 생존 속에서 경쟁자들(사실 진화론에서 경쟁자는 대체로 같은 개체군에 속하는 다른 개체들입니다ㅋㅋ)로부터 특화할 수 있는지를 분별해내는 것이죠.
뭐 유비하자면 “기대”라는 것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계들을 만드는 일과, 그 기계들이 어떤 환경에 놓여 있었는지를 아는 일, 그래서 환경 속에서 어떤 생태학적 관계를 이루었는지를 연구하는 게 맥락 추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게 가능한 것은 작동하는 기계에 필수적인 요소들이 있다는 것이고(생물학으로 치자면 “문”에 해당되는 차이 목록), 그게 사회학적으로 제공되는지 유무도 포착 가능하다는 것이고(당대의 상황이 “툰드라”, “사바나” 이런 특정 생태학적 경관에 비유시킬 수 있음) 그 속에서 해당 대상의 자연사(발생부터 변이까지)를 기술하는 뭐 그런 일이 되겠죠.
뭐 전 이런 걸 이론화하는 것에 나름 집중하고 있습니다.
저번 미술사 얘기할 때 말한 것 같이, “포착될 수 있는 단위체들”이란 접근과, 이것들이 결합할 수 있는 가짓수(칸트의 초월론적 요소론의 핵심 통찰, 단위체들의 결합은 임의적이지 않고 제한적이다!), 이것들이 만들어진 성공적인 사례 분석, 성공적인 사례를 바탕으로 주변의 것들과 비교하며, “성공”의 원인이 있는 것인지 파악 등이 되겠네요.
(참고로 “실험”이란 단어는 제가 이때까지 추적한 바로는 바로 저런 구조물들의 구조적 동형성을 전제하고, 유사한 것들을 비교 검토하며 차이를 확인하는 작업을 뜻했습니다)
니체가 figure들 가지고 composition 어쩌구 말하면서 얘기한 게 이런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여기에 니체-프로이트 이런 애들은, 저런 걸 하게 만드는 “동기”를 첨가한 것이죠.
핵심은 욕망의 대상을 마음대로 정하지 않고, 내적 동요를 어떤 방식으로 제어하는가(통제, 제어가 단순 억압이 아니라, 배출까지도 포함한다는 통찰)를 유형화하면서 비교 검토한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뭐 저도 그쪽 파라고 생각하는데, 저거까지 나가면 좀 과해질 거 같아서 마음속으로만 갖고 있습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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