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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란 무엇인가?

최근 신화에 대한 책을 한권 보았는데, 이 책을 보면서 신화에 대해 한번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일단 신화를 다룰 때 어려워지는 면은, 모든 학자들이 신화의 정의를 제각각으로 내리지만, 그러한 정의의 동기를 정확히 밝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떤 특정한 맥락에서 협소한 신화 정의를 사용하는 것은 절대로 단점일 수가 없다.

그는 신화의 다른 면모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이유에서 의미를 제한함으로써 얻어지는 효과를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효과를 지향한다고 해서 기만적인 것도 아니다. 이는 투명하게, 상호적-대칭적으로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일러나 프레이저(사실 프레이저는 이런 입장이 아니다)가 신화를 자연세계에 대한 것으로 한정지은 것은 당시에 그들이 논의하고 싶었던 신화가 자연세계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이지, 신화 자체가 그렇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뭐 이건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알 수 있는데, 당장 자연세계를 설명하지 않는 신화도 많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신화 일반을 다뤘다기보다는 신화라고 분류되는 것들 중 어떤 것들에 대한 것을 논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다른 학자들에게도 그대로 정의된다.

신화가 실존적 문제에 대한 답이라고 해석한 학자는 바보가 아니다.

신화들 중에는 실존적 문제랑 무관한 신화들도 많다.

그럼에도 그들이 신화를 그렇게 규정한 것은 어떤 유형의 신화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타일러는 실존적 문제를 신화와 연결하지 않았고, 그렇기에 현대의 신화란 말은 불필요했겠지만, 그들은 현대의 신화를 찾거나, 현대에 필요한 현대의 신화를 고민하기 위해서, 실화들 중 실존적 문제를 다룬 신화들을 선택하여 이것들을 분석한 것이다.

 

뭐 이런 관점에서 보면 후속 세대들은 이전 세대의 학자들을 비판하고 이전의 이론을 폐기했다기보다는 다양한 주제로, 다각적인 관점에서 분석한 경우가 많다고 할 수 있다.

특정 신화에 대해서도 당연히도 여러 해석이 가능하고, 이러한 해석들은 다층적이기 때문에, 해석들을 추가하는 것은 다른 해석이 가능하고 설득력 있다고 해서 이전의 해석들을 폐기할 이유는 없는 법이다.

 

뭐 그럼에도 신화에 대해서 몇 가지는 좀 전제할 필요가 있고, 전제했을 때 얻어지는 득이 좀 있다. 그걸 좀 정리해보려고 한다.

 

일단 신화와 관련해서 명시해야할 것은 신화를 적당히 신과 영웅이 등장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화는 문학과 관련이 있고, 문학이 신화에서 파생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문학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신화에 적당히 이야기의 지위를 줄 수 있는 것은 역사적인 맥락 덕분인데, 이는 서구의 독특한 사상적 배경과 관련이 있다.

 

현대 연구자들은 신화가 의례와 관련이 클 뿐만 아니라 의례와 독립된 신화는 특수한 신화라고 생각한다. 신화와 의례 중 무엇이 우선이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어도, 신화와 의례가 분리된다는 사고는 특정한 신화 이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의례 없는 신화가 전제될 수 있었던 것은 서구의 그리스도교화 관련이 크다.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교 이외의 것들은 이교였고, 당연히도 그리스 종교도 이교였다. 문제는 그리스의 문화는 문화적으로 중요했고, 그것들이 고전이라는 형태로 전수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믿는 서양 문화에서 그리스 신화들은 빠질 수가 없었다. 특히 그리스 신화가 극작품이라는 형태로 전수되기도 했고, 저런 문학들은 문학의 정수로 여겨졌으니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신화들이 이교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전수되었고, 그것들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과, 그 속에 얻을 것이 있다는 것이 동시에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즉 이교도적이지만 좋은 것은 그리스도교적인 뭐 그런 인지부조화를 극복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화는 종교나 의례와 독립적으로 텍스트 자체로 이해되기도 하였고, 텍스트 자체로 읽는다고 하였을 때, 특유의 해석법이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뭐 쉽게 얘기하자면 등장하는 신들은 상상이지만(혹은 악령 같은 것이지만), 그것들을 읽으면서 얻을 수 있는 특유의 지식 영역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화는 이야기, 우화의 연장이 되기도 했고(fable이라는 단어로 퉁쳐지곤 했음), 뭐 아무튼 그러니 이게 독자적 텍스트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럼에도 신화는 일반적인 창작물과는 달랐는데, 그것들이 갖고 있는 공적 성향이 어떤 의미에서든 전수되었기 때문이다. 좋은 문학이고, 신들이 등장해도 문학은 문학이고 신화는 신화다. 이는 신화가 의례와 결합되었고 공동체와 결합된 것이기에 생긴 차이로, 누군가가 창작했어도 그것이 사회(전체든 일부이든)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로 역할한 것이 아니라면 신화일 수는 없는 것이다.

 

뭐 여기까지의 얘기는 이정도로 정리될 수 있겠다.

신화는 공적으로 확립된, 가치가 부여된 이야기란 소리고, 이것은 공적이기에 특정 사회와 결합해서 이해해야한다는 얘기다.

이런 특정 사회와의 연관이 끊기면 특별한 방식으로 이해되는데, 이 분리를 극복할 방법으로 이게 타자 연구나 그것들이 가리킬 수 있는 보편적인 이해나 보편적인 가치를 논하게 되는 것이다.(타자 연구란 얘기가 나와서 하는 얘기지만, 그리스 신화가 고전이었고, 그것이 특별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신화를 매개로 그들의 우상 고대 그리스와 당대의 야만 사회를 비교 연구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신화가 가진 특정 사회 의존성과 이교도라는 타자성이 만나면서 신화 연구는 타자 연구 방법론이 될 수 있었다)

 

신화가 공적이라는 것을 전제하면 재미난 풀이법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타일러는 왜 애니미즘을 원시-과학으로 이해했는가? 여기에 답을 해보자.

이를 위해서는 신화에 대한 알레고리 해석의 꽤나 이른 창시자 중 한 명인 플라톤의 주장을 이해하면 좋다.

 

플라톤은 신화에서 나오는 신들의 무쌍을 자연활동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각각의 신이 자연원소를 상징하고, 그들의 싸움을 자연현상(특히 재해)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그냥 이해할 수 있다정도면 모르겠지만, 플라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게 그게 아니라면 도대체 뭔 소리겠니?”였다.

, 이렇게 안 읽으면 말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여러모로 복잡한 정치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는 바로 신화에 드러나는 플롯이나 내러티브는 무시하고, 그 속에서 발견될 수 있는 자연의 원소(원리)들만을 보자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런 주장 속에는 신화는 사실 이런 것들을 탐구하려고 생겨난 것인데, 당대인들이 무식해서(신화제작자나 청자 둘 다) 어쩔 수 없이 저렇게 한 것이지 이제 나처럼 걍 산문으로 하면 된다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다.

즉 자신을 과거 신화제작자들, 영감을 얻어 신성한 가르침을 내린 자들과 동일시하면서도, 그들의 권위만 갖고 오고, 그들의 원천은 부정하는 짓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 신화에서 특정한 부분을 따오면서, 그것 말고 신화에서는 볼 것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그것이 신화를 단순히 비판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지녔던 신화의 권위를 뺏어오는 활동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즉 신화의 권위는 고스란히 내 꺼(플라톤 꺼) 신화의 헛짓거리는 소피스트 꺼라는 구도가 되는 것이다.

 

뭐 이거랑 타일러의 작업을 비교하면 좋다.

타일러는 애니미즘 연구를 통해서 한편으로는 원시인들의 사고 방식이 어처구니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의 우상숭배적 성격을 보라는 것이다.(말 나와서 하는 얘기지만, 다신교->일신교 진보서사라는 역사발전론적 구도는 흄이 완성해냈다)

그런데 그의 논법에는 신화의 과학적면모를 밝히는 것이 포함되고, 이로 인해 문제가 복잡해진다.

원시인들이 멍청하긴 하지만, 그들 또한 세계를 이해하고 싶어했고, 그것에 대해 설명하면서 애니미즘이 나온 것이라는 소리다.

그들은 잘못된 답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이 주장은 과학에도 그대로 이어지는데, 과학자들의 활동은 신을 제작하는 활동이 합리적으로 변용된, 과거 종교들이 맡았던 역할을 도맡는 것이라는 소리가 되기 때문이다.

즉 종교에게서 어떤 특정한 기능을 탈취하고, 그것이 갖고 있는 신성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논법에 드러나는 원시인들의 우상숭배는 그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 그들은 틀린 답을 냈는데, 그것은 그것들을 신으로 받아들여 숭배했기 때문에 오류란 것이다.

문제는 내용이 아니라 태도라는 소리가 되겠다.

그들이 설사 틀린 답을 냈어도, 우상숭배를 피했다면, 그들은 한계가 있지만 매우 합리적인 존재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으니 원시적이란 논법이다.

이런 논법은 무엇을 함의하는가?

당대 과학 숭배 비판을 함의한다.

과학의 진정한 업적은 바로 과학적 성취를 우상숭배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타일러 눈에는 당대인들은 과학을 우상숭배하고 있었다.

과학적 자연법칙과 자연법(둘은 단어가 같다)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작업은 한편으로는 원시를 향해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를 향해 있다.

, 그의 칼날은 현대의 원시에 향해있다.(원시인들이야 원래 그렇게 살은 것이지 비판할 게 뭐 있겠나)(사실 이러한 맥락이 있기에, 타일러는 과학과 구별되는 윤리학과 형이상학, 현대적 종교를 과학과 구별되는 것으로 분류했다)

 

뭐 이런 관점에서 보면 타일러가 자연에 대한 설명이라는 관점에서만 신화를 분석한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는 신화의 여러 기능 중 하나인 자연에 대한 설명이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서 이에 집중한 것이지 모든 신화가 자연에 대한 설명으로 정의되어야한다고 생각해서 이에 집중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시급한, , 당대에 현대적문제였던 과학의 정체라는 문제에 답하기 위해, 인간의 본성적 활동으로서, 과학의 기원이 될 활동을 탐구한 것이란 소리가 되겠다.

 

언제나 그렇지만 세상은 복잡하다.

하지만 세상이 복잡하다고 손가락 빨 수는 없는 것이고, 부분에 불과한 것을 전체로서 다뤄야할 필요도 있다.

뭐만 얘기하면, “그것은 복잡한 문제다!”라고 외치기만 할 뿐 아무런 적극적 답변은 제공하지 못하는 얼간이들은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취미활동을 신으로 모시면서 헛소리나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학자는 언제나 실재론을 취해야한다. 그것은 언제나 상식과 양식 사이에서 얻어질 수 있다.

이는 "실재론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 보론" 정도로 답변해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