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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판단력 비판> 해석 - 취미판단의 도덕적 효용

허치슨은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핵심적인 인물이다. 허치슨이 이러한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세속주의자라던가 자연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종교와 독립적인 도덕의 영역을 학문적으로 확립했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 그는 비록 무신론자는 아니었지만 무신론의 혐의를 받았고, 이러한 혐의는 부당한 것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의 도덕철학은 기독교와 독립적으로 작동할 수 있는 체계였기 때문이다. 하여간 허치슨의 도덕의 문제를 학문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고, 이러한 토대를 바탕으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가 꽃핀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흄과 스미스가 허치슨의 후예라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증명 가능한 사실이니 말이다. 하지만 국내에 허치슨 연구는 거의 없는 상황이고, 나 또한 허치슨이 구체적으로 무슨 주장을 했는지 모르는 상황이라 최근 허치슨 관련된 연구들을 약간 들춰보았다. 허치슨이 정확히 어떤 토대를 제공했는지를 알아야 후대의 사상가들이 허치슨의 토대 위에서 새롭게 만든 것과, 허치슨이 제공한 것을 구별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허치슨에 대해 이래저래 찾아보고 허치슨의 텍스트를 조금 읽어보면서 흥미로운 것도 많았지만 결국 칸트가 생각 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물론 내가 칸트 전공자라서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칸트의 아름다움과 도덕의 유비 문제가 허치슨의 토대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것은 사실이며, 내가 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칸트는 허치슨과 매우 다르다는 점에서 특유함을 갖고 있다.

 

아름다움은 도덕의 유비이다. 아름다움은 도덕을 상징한다. 칸트 연구자들은 이 말 자체가 놀라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분석하는 것에 집중하지만, 이는 꽤나 식상한 이야기였다. 아름다움을 세속 이상의 질서를 가리키는 입구로 본 철학자는 칸트가 처음이 아니다. 이는 플라톤과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통찰이며, 칸트 직전의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자들에게는 흔해 빠진 주장이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주장을 통해 어디까지 나가는가이다.

일단 이러한 구도가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근대까지만 하여도 기독교는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었고, 그 속에서 구원과 관련되지 않은 현세의 일은 세속적이고, 자연적이고, 욕망에 관련된 일로 여겨졌다. 즉 현세=세속=자연=본성=욕망의 구도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꽤나 문제가 될 수 있는데, 세속 세계에 좋은 질서를 확립하려고 하는 시도를 거부하는 데 이러한 구도가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왕이 독재를 하니 저항하자는 주장은 꽤나 도덕적으로 정당해보이는 주장이지만, 당대에는 이것을 바로 저 구도가 방해하곤 하였다. 도덕적인 일은 현세를 위한 것이 아니란 것이 기독교적인 사고였기 때문이다. 도덕적인 일은 구원을 위한 것인데, 구원은 현세의 일로 판단될 수 없다. 물론 이것이 현세에서 막살아도 회개하면 천국 간다는 소리는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현세에서 어떤 일을 달성했다고해서 그것이 구원을 보장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게 설득력 없어 보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도덕적 확신을 갖는 일이 갖고 있는 위험성을 생각해보면 꽤나 당연한 주장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것이 체계적으로 거부의 위협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고, 이것이 해결될 필요가 있는 문제였다는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왕의 독재는 해결할 필요가 있는 문제인 것도 사실이니 말이다.

한 가지 가능한 답변은 세속 세계의 일을 본성의 영역으로 국한시키는 것이었다. , 세속세계의 일은 욕망과 관련된 일이고, 욕망들을 잘 실현시킬 수 있는 합리적 질서만을 창출하면 된다는 것이다.(사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늘날에도 문제는 경제야 븅신새꺄!”라는 사고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다만 세속 세계의 일을 욕망의 실현시킬 수 있는 합리적 질서로 국한 시키는 것은 당연히도 한계가 생기는데, 당장 그러한 합리적 질서가 왕의 독재를 배제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다. 지금도 박정희 빠들이 세상에 존재하고 잘 살게 해주면 독재가 뭐가 문제냐는 사람이 있었고, 실제로 욕망들을 잘 실현시킬 수 있는 합리적 질서는 독재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러한 질서를 잘 확립할 수 있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도는 게다가 오히려 독재를 부추길 수 있는데 국개론을 바탕으로 독재를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이 개돼지이니 현명한 독재자가 필요한 거 아니겠냐는 주장은 매우 사실 이러한 구도에서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도 자체가 그렇게 설득력이 없었는데, 정치는 단순히 욕망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욕망이란 단어는 애매하다. 이게 단순히 먹고 싸는 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정치가 욕망의 문제가 아니란 것은 정치가 단순히 먹고 싸는 일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란 주장과 같다. 홉스가 지적한 것처럼 정치는 먹고 싸는 일보다 명예과 관련이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인정받는 것과 관련이 있다. 때문에 욕망만으로는 정치를 환원할 수 없고, 뭐가 되었든 도덕적인 문제는 개입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어떻게 도덕적 문제를 개입시키는가이다.

여기서 홉스의 사상을 약간 건드릴 필요가 있다. 홉스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주장들을 내놓았기 때문이다.(내가 자주 언급하지만 홉스는 매우 위대한 사상가이다. 우스갯소리로 그는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전제와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추론 규칙으로 모두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결론을 도출해낸 인물이다) 그에게 있어 정치는 명예의 문제였는데, 문제는 명예가 아무런 토대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에게는 위대한 사람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븅신일 수가 있다. 그런데 명예는 권력에 직결되는 문제이기에, 누군가가 어떤 사람을 븅신으로 보는 것은 그 사람의 권력에 타격을 입힌다. 그런데 권력은 생존에 달린 문제이다. 세상사에서 대부분의 일은 돈 이상의 것에 달려 있고,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권력이기에 권력은 생존에 직결된다. 당장 어떤 사람이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의 수를 결정하고, 그가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의 수에 의해서 전쟁의 승패가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의 명예를 침해하는 행위는 생존의 위협이고 전쟁을 야기한다. 이렇게 명예는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명예는 토대가 없다. 앞서 언급했지만, 니편 내편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게 명예이기 때문이다.

홉스는 명예의 중요성과 그 토대 없음에 근거해서 절대왕정을 주장하였다. 명예의 기준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인데, 이를 합리적으로 따질 근거는 없으니, 하나의 기준을 무조건 신봉하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당연히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주장 자체는 탄탄해도 결론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그런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바로 이 명예를 평가할 수 있는 합리적인 기준을 만드는 것에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명예의 토대가 생기면 절대왕정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을 한 이가 허치슨이라고 할 수 있다. 허치슨은 이것을 <미와 도덕의 기원에 대하여>에서 다루는데 핵심은 구별의 논리이다. 홉스의 구도에서 명예욕은 욕망에 불과하고, 그것의 근거는 개인의 욕구에 달린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실제로 명예욕은 그런 것이 아니란 게 허치슨의 주장이다. 이는 도덕적인 욕구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욕망과 근본적으로 형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떻게 다른가? 욕망은 대상들이 있는 욕망-실현의 구도를 갖는다. 그것은 세계 속의 구체적인 대상을 향한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욕망은 그런 것이 아니다. 도덕적인 것은 그 대상이 세상 속 대상에 있지 않고,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허치슨은 이러한 현상의 예로 미를 제시한다. 아름다움은 대상 자체가 갖고 있는 속성이 아니다. 조각상의 아름다움은 소화기가 빨간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대상에 속한 게 아니라, 대상을 바라보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다. 그것은 대상에 인간이 의식적으로 부과하는 속성이다. , 대상을 특정한 관점에서 바라봄으로써 파악되는 반성적인 인식이고, 이것은 대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식을 수행하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주장까지는 홉스와 똑같다. 홉스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근거가 없다고 생각했다. 대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허치슨은 바로 이 문제에서 있어 그것이 대상이 없음에도 공통적인 것이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대상 자체는 다를지라도, 그것을 반성하는 인식에 있어서 그 형식이 같다는 것이다. 즉 대상 자체에는 공통적인 게 없어 기준이 없지만, 인식 자체에는 공통적인 게 있으니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즉 반성형식을 분석하여 그 기준을 공고히 하면 명예의 기준은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흄과 스미스는 이를 구체적으로 발전시켜나가며, 이 과정에서 취향의 문제를 중시한다.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는 것은 귀찮기도 하고 분량만을 늘리는 것이니 간략히 넘어가자면 이러하다. 흄은 이러한 반성의 형식이 그 자체로는 규칙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이 무규범을 도출할 이유는 없는데, 사람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홉스의 구도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분열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통용되는 기준이 있는 덕분이다. 모두가 다른 기준을 가지면 사람들의 평가는 중구난방이고 예측이 불가능할 텐데, 세상은 그렇지 않다. 세상은 예측이 가능하고, 이는 통용되는 기준들이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는 것이다. 흄은 이러한 통용되는 기준 자체를 분석하기보다는 바로 이러한 기준들을 더욱 넓게 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즉 갈등이 격화되는 것은 서로 다른 통용되는 기준들의 갈등인 것이고, 이를 해결하는 것은 더욱 포괄적인 기준을 유통시키는 것을 통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흄은 이러한 통용여부는 역사적인 경로에 의존한다고 생각했고(습관은 역사에 의존한다), 또한 포괄적인 것은 결국 역사를 얼마나 더욱 포괄적으로 다룰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그는 역사서를 탐독하며 교양을 쌓는 대중들이 많아질수록 다툼을 줄일 수 있는 통용되는 기준이 확립되고 갈등이 줄어들 수 있다고 보았다.

스미스는 좀 더 형식적인 입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스미는 그 유명한 공평한 관찰자를 통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공평한 관찰자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게 꽤나 중요하다. 스미스는 흄에 +a를 한 거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흄은 앞에서 내가 제시한 해결책 속에서 자아의 경계를 확장하는 것의 중요성을 가르친다. 그게 무슨 소리냐? 더욱 포괄적인 역사관은 협소한 기준을 넘어서고, 그러한 기준에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다. 즉 협소한 기준을 옳다고 믿는 자아에 비해 더욱 넓은 기준을 자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기에 흄에게 있어 역사적 포괄성은 자아의 포괄성과 같다. 더욱 폭넓은 기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더욱 폭넓은 자아를 갖는다는 것과 같으며, 역사적 포괄성은 기준의 포괄성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다만 흄은 이것을 포괄성으로만 주장하고, 여러 사람들이 그러한 포괄적 기준에 자아를 일치시키려는 욕망에 의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약간 부족한데, 같은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이 같은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어떤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은 같아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려로 발전할 이유는 없다. 자신만 그런 사람이고 남들은 븅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흄은 이러한 문제를 인간이 갖고 이는 인정 욕망으로 해결한다.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하기 때문에 뻘짓을 안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욕망의 산물이기에 원래 계획했던 학적 의미는 다시 소실되고 만다. 스미스는 욕망이 아니라 자아 정체성을 통해 이를 해결한다. 기준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욕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고, 이는 단순히 내가 그 기준을 따른다고 믿는 것 이상을 함축한다는 것이다. , 자신의 정체성은 자신이 믿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객관적으로 성찰해보았을 때, 실제로도 그러한지에 달려 있고, 이는 결국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그러한 시선 이상의 것을 요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구를 판단하는 기제가 바로 공평한 관찰자이고, 이는 자아를 성찰하는 하나의 형식이 도덕을 추구하는 욕망을 욕망에 불과하지 않게 만드는 기제인 것이다.

 

말이 많이 셌는데 중요한 것은 칸트이다. 칸트는 이것을 어떻게 해결하려고 했는가? 일단 칸트는 애초부터 흄의 해결책은 배제한다. 그는 사교성geselligkeit”은 경험의 문제니 빼고 선헌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만 다룬다고 얘기한다.(애초에 선험적인 것을 포함한 것만 학문이니 이는 당연한 선택이다) 그는 욕망과 다른 무엇이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욕망들 중 일반적인 욕망과 다른 욕망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느슨한 소리니까 이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안아키를 추구하는 욕망 같은 것은 일반적인 욕망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것이 미적 욕망이나 명예욕, 도덕적 추구는 아니니 말이다.

그는 이러한 욕망을 구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연미를 선정한다. 여기서 의도적으로 선정했다는 것은 꽤나 중요하다. 미는 여러 종류가 있고 칸트는 의도적으로 자연미를 선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미는 자연으로부터 얻어지는 미인데, 이것은 무목적적 합목적성을 대표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이러하다. 자연은 목적이 없다. 칸트가 주장하듯이 목적론적 사고는 인식이 아니다. 자연에는 목적이 없다. 그냥 물질들이 자연적 메커니즘에 따라 복잡하게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아름다움을 배제하지도 않고, 자연의 목적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칸트가 지적하듯이 우리는 자연을 바라보며 아름다움을 느낄 때가 있다. 이때 느끼는 아름다움은 조화의 아름다움인데, 이것은 정확히 어떤 질서를 추구하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겠지만, 자연이 어떤 목적을 가진 것처럼 질서를 이루는 것을 목격할 때 느끼는 아름다움이다. 여기서 정확히 어떤 질서를 추구하는지 모른다는 것은 중요한데, 이로 인해 이것은 구체적인 개념이 없는 것이고, 이 질서가 무엇인지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한 게 전제가 된다. 그럼에도 그것이 목적이 있는 것처럼 아다리가 딱 맞게 조화를 이루면서 그 전체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느끼게 해줄 때, 그때 느끼는 아름다움을 칸트는 자연미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핵심은 그게 정확히 어떤 질서인지는 모른다는 것이고, 종속된 것들은 딱히 목적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것을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판단에도 활용한다. 이때 동원되는 것이 바로 유비이다. 유비는 A:B=C:D라는 관계에서 성립한다. 닮은 것, 혹은 같은 것은, AC가 아니라, AB의 관계, CD의 관계이다. 칸트는 여기서 취미 판단의 아름다움의 판단 자체가 자연미에 유비된다고 생각한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자연:아름다움=본성:아름다움 추구(취미판단)” 구도가 성립한다는 것이다. 칸트에게 있어 이런 논의는 꽤나 중요한데, 여기서 본성은 욕망을 뜻하기 때문이다. 개개 욕망은 그 자체로 뭔가를 추구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이 없다. 그것은 자연 속의 사물들처럼 맹목적인 메커니즘을 따르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맹목적 메커니즘이 복잡한 것을 창출하고, 이러한 복잡한 것이 구체적인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처럼 우리 본성=욕망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은 그 자체로도 자신을 판단하게 하는데, 우리가 아름다움을 자연에서 찾는다는 사태 자체가, 우리의 본성이 맹목적인 욕망 메커니즘 이상인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의 아름다움 판단은 자연의 무목적적 합목적성처럼 본성의 무목적적 합목적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합목적성이 무엇인가? 앞에서 자연미를 분석할 때 언급했지만, 칸트는 이러한 자연미의 목적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정해진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무목적적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파악은 개념 없는 도식화, 개념이 있다면 인식이기에 당연히도 아름다움 추구는 개념이 없고, 이념이 없고, 그렇기에 목적이 없다. 하지만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 되긴 한다. 바로 이러한 파악되지 않는, 그럼에도 추구하게 되는 조화 탐색을 아름다움이라고 부르게 되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것이 도덕의 유비가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도 A:B=C:D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A:아름다움=C:도덕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문제는 AC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A에는 본성=욕망이, C에는 의지가 해당되는 것이 맞다. 그리고 이러한 구도에서 유비는 꽤나 잘 성립한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의지 자체이다. 의지가 욕망이랑 무엇이 다른지 자체가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아름다움=본성:아름다움 추구(취미판단)” 같은 우연한 유비 이상의 유비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유비는 맷돌과 폭정 사이의 유비처럼 우연적이지 않았다. 칸트는 이러한 유비가 성립하게 되는 가능성, 즉 능력 자체의 동일성에서 이러한 유비가 유비 이상의 상징임을 밝혔다. 즉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파악하는 능력과, 우리가 아름다움을 파악하는 능력 자체는 같은 것이고, 외부적 현상과 내부적 현상의 일치되는 형식 속에서 칸트는 자연미와 미적 판단이 형식적으로 동일함을 밝혔다. 이러한 동일함(동형성)은 도덕에도 적용된다. 본성(욕망):아름다움 추구(취미판단)=의지:도덕 추구(도덕판단)의 형식에서 동일한 것은 욕망과 의지, 아름다움 추구와 도덕 추구가 아니다. 둘의 관계이다. 둘의 관계가 무엇인가? 칸트는 본성과 아름다움 추구가 자연에 대해서는 무목적적 합목적성인 것처럼 본성에 대해서 무목적적 합목적성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이 본성의 무목적적 합목적성이 무엇인가? 바로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일치이다.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일치가 무엇인가? 칸트의 답은 이렇다. “자발성인식은 이념에 종속되어 객관적인 것을 파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렇기에 수동적이다. 그것은 외부의 힘을 내재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적 추구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개념 없이 작동된다. 그 속에서 욕망들 개개와 상관없이 자신의 질서를 창출하려고 한다. 이것은 외부의 힘을 내재화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적인 질서 창출이고 자발성이다. 도덕추구가 자발적인 힘이고, 자율을 쟁취해내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자발성이 가져오는 효과로 우리는 의지와 욕망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다. 욕망은 대상 추구인 반면 의지는 법칙 추구이다. 그런데 도덕은 단순한 법칙 추구와는 다른 것이란 게 스미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런 법칙 추구를 하는 게 도대체 자유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스미스는 인간이 학문적이기 위해서는 그런 공평한 관찰자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이지만, 우리가 그것을 욕망할 이유는 없고, 그것이 도덕 추구를 담보해줄 이유도 없다. 그것이 기준-자아정체성의 필연적일 이유도 없고, 그것이 왜 하필 도덕이냐고 말할 이유도 없다.(사실 그렇기 때문에 스미스는 도덕과 경제를 혼동하였다) 칸트는 도덕을 세상 이상의 것을 추구하게 되는 자유를 실현하려는 힘으로 이해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가능하기라도 한 것인가? 그것은 꿈 아닌가? 광신 아닌가? 칸트는 일단 그것이 자유가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발견하는 합당한 방식이 있는 덕분에 가능한 것이고, 꿈이나 광신과 다르다고 생각하였다. 중요한 것은 발견하는 합당한 방식이다. 칸트는 이를 법칙 추구로 연결하는데, 이것의 동기와 이것의 미덕이 무엇인지가 중요하다.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은 법칙들을 추구하는 특이한 욕망들(의지들)이 질서를 창출하게 되는 광경, 그것이 하나로 수렴되는 것만 같은 광경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선의지라고 붙이는 것은 아름다움의 개념없는 도식화와 비슷하다. 그것은 실재도 아니고, 그 자체로 적극적 개념도 아니지만, 법칙을 추구하다가 발견되는 총체적 질서이며, 그것을 발견한 이후 잊지 못하게 될 총체적 질서이다. 즉 자별성은 하나의 등급을 구별하게 만든다. 그것은 단순한 개별 욕망들과 그 이상의 무엇을 구별하게 만드는 체험이다. 그것이 일반 욕망에는 아름다움이라는 초월적인 무엇을 체험케 하였다면, 의지에는 선함이라는 초월적인 무엇을 체험케 한다. 이러한 초월은 자발성의 체험 덕분에 가능하다고 믿어질 수 있는 것이고, 의지가 단순한 욕망으로 전락하지 않게 만드는 안전장치이다.

이러한 주장이 무엇을 함의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칸트의 도덕은 대체로 법칙 복속으로 이해되곤 한다. 하지만 칸트는 이런 입장이 아니다. 그것은 미를 추구할 때 생겨나는 것처럼 자발적으로 일어난다. 자신 내부에서 목적 없이 목적이 창출될 때의 경험이 도덕적 체험과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결과적으로 따르게 되는 법칙 자체가 아니라, 자발성을 체험하며, 바로 그러한 법칙을 발견해내는 힘이기도 한다. 이념을 쫓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숭고지 아름다움이 아니다. 칸트는 아름다움이 도덕을 상징한다고 말하지, 숭고가 도덕을 상징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는 다른 말로는 칸트에게 있어 도덕은 의도적으로 추구되는 것이 아니고 고통 자체에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 물론 칸트가 인정하듯 고통 속에서 실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고통을 느낌에도 문득문득 그것들이 아다리 맞게 실현되고 있을 때 느껴지는 그러한 경이 체험이지 고통 그 자체는 아니다.

여기서 허치슨--스미스와 칸트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에서는 미와 도덕이 구별되긴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구별되는지가 불명확하다. 소코틀랜드 계몽주의에서는 취향들을 성숙시켜 우리가 소위 도덕이라고 부르는 행동을 취향으로 육성시킬 수 있다는 것은 담보해주지만 도덕의 고유성은 담보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칸트는 이를 구별시켜줄 수 있다. 칸트는 이것을 구별할 수 있으며, 욕망을 넘어선다는 것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를 분석하게 해준다. 욕망을 넘어선다는 것은 단순히 욕망들 중 특이한 욕망들이 아니라, 그러한 욕망들을 총체화하게 하는 무엇을 체험하는 것을 통해서만 보장되며, 그러한 체험은 욕망들을 분류하면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칸트의 작업은 언제나 그렇듯 구별되지 않던 무한정한 것들을 구별하고 한정짓는 것이었다. “욕망을 넘어서는 것들이라는 구별되지 않던 무한정한 것들을 한정되는 무한정한 것들로 구별하고 그 속에서 질서를 창출해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칸트의 <판단력 비판>은 단순한 미학 서적이 아니며, 그의 인간학과 세계관, 도덕관의 가장 중요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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