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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철학에 대한 오해들

학부 2학년 때인가에 중세철학 수업을 들었고, 그 뒤로 나의 중세철학 이해는 매우 크게 달라졌음에도 중세철학에 대한 나의 평가는 바뀌지 않았다.

 

중세철학은 뛰어나다 그 이상의 평가를 내린 적이 없으니 바뀔 것도 없었지만, 하여간 중세인들은 멍청하지 않았고, 그들의 고전 텍스트 이해는 탁월하다는 생각은 단한번도 바뀐적이 없다.

 

다만 중세철학을 논하는 사람들이랑은 딱히 좋은 사이가 된 적이 없었는데, 그들의 관심사랑 나의 관심사가 많이 달라서 그런 것 같다.(부차적으로 그들의 얌전함이 나랑 잘 안 어울려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항상 얘기하는 바이지만, 중세의 신학자들은 나만큼이나 가볍고 광신적이면서 폭력적인 인물들이었다. 예의범절이 미덕이 되기 이전, 중상모략과 투박함으로 자신의 정신을 세계에 알린 루터를 사랑하는 이유는 중세철학자들을 사랑하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일단 중세철학하면 떠오르는 것이 이성과 신앙의 조화 문제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사이비에 가깝다. 이런 오해는 현대에나 등장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를 논하자면 이렇다.

 

많은 사람들은 중세의 철학, 즉, 신학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당연한 게 아니다.

교회랑 상관없이, 어떤 몇몇 인물들이 성서와 철학책들을 가지고 떠는 이야기가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사람들이 그들의 얘기를 귀담아 들을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날에는 그래도 학문이란 것이 공적으로 제도화되어 있고, 많은 이들이 학자들을 그렇다고 좋게 평가하진 않지만, 그래도 완전히 무시하진 않고 있지만, 중세에는 그런 것이 있을 이유가 없다.

대학이 탄생한지 얼마되지 않은 시점이고, 대학이란 것도 결국 “조합”이나 “길드”랑 크게 다르지 않은 집합체이지, 그것에 다수의 사람들, 심지어 교회가 구속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들이 권위를 얻을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한 일이고, 학자라고 스스로를 이해한 인물들이 갖고 있던 독특한 자기 이해가 설명되어야할 일이다.

루터에게서 드러나듯이, 당대 신학자들은 자신들이 교황보다 (신학적으로) 우월하다는 알 수 없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광기이지, 상식이 아니다. 교회는 전통이라고 할 때, 자신들이 뭔가를 믿는 심리학적인 사태가 왜 진리에 도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고, 그 설명이 공적으로 합당해질 때에나 말이되는 짓거리니 말이다.

 

그러니 초기 신학자들이 교황과 교회에게 뚝배기 깨진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방법을 찾아냈는데, 그것이 바로 법학자들이라는 모범이었다.

 

법학자들은 요상하게도 민간집단이면서도 공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이었다. 이는 고대 로마의 전통이었는데, 고대 로마에서 공법을 현시하는 전통(성문법 전통, Lex는 눈에 비치는 분명한 법이란 의미다)이 생겨났고, Roman Form 중심의, 형식에 입각한 판결이 중시되면서 법학자들이 자연스레 등장했다. 뭐 그냥 법과 전통을 잘 아는 사람들이 주변 시민들을 돕는 그런 일이었는데, 그것이 규모가 커지면서 일종의 학자집단 비슷한 게 생겨난 것이다. 공적인 판결 기구가 이들의 논의 결과를 따른 것은 여러 이유가 있는데, 역시 가장 큰 이유는 성문법 전통 자체가 그런 성향을 갖는 체제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튼 로마에서는 법학자들은 민간인이면서도, 그들이 법을 모으고, 분석하고, 모순을 조정하고, 원리 원칙을 공시하는 요상한 “기능”을 수행하는 집단이 되었다.

 

물론 이러한 법학자가 중세까지 존속했던 것은 아닌데, 그것이 재등장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로마법이 세속 세계의 절대적 질서일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 아래에서 연구한 중세의 지식인들(사실 그냥 글 좀 읽는 놈들이지만...)은 “법학자”의 역할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들은 그렇게 스스로를 법학자로 만드는 작업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뭐 그렇게 교황혁명이라는 교회법 혁명이 일어난 것이고, 볼로냐 법대가 생겨난 것인데, 이것의 영향이 중요하다. 교회법 전통은 당연히도 교황중심주의라는 세속세계에 정신적 영향력을 끼치는 공권력으로 이어졌고, 볼로냐 법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비호아래 영토 내의 귀족들을 규제하는 공법-공권력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법학자들은 자기 어필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어필되는 좋은 세상이었고, 그렇게 법학자들은 세상에 발을 내딛었다.

 

신학자들은 이런 법학자들의 성공을 모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법학적 서술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숨마든, 주석(코멘터리든 그로스든)이든 중세 철학-신학 텍스트는 대체로 법학 장르를 모방한 것이다.(여기에서 예외가 되는 장르들은 재미나게도 신학은 학문이 되어선 안 된다는 프란치스코 전통으로 이어진다) 단지 그들이 법학자만큼이나 당연하게 그 쓸모가 확보된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만 차이가 있었지만 말이다.

 

뭐 어쨌든 신학자들은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고, 그들은 그렇기에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성을 옹호했다. 인간들이 전부 갖고 있는 이성적 능력이 있어야 그들이 “이성적”으로 뭘 떠드는 게 세상에 당연하게, 그리고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러니 이성을 공격하는 신학자는 자기논박적인 헛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었고, 너무나도 당연하게 이성 자체를 공격하는 머저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그들 사이에서 이성에 대한 비판은 있었는데, 그것은 보통 경계 문제로 이어진다. 즉, 자율적으로, 보편적으로 작동되고 적용될 수 있는 영역의 한계가 어디인가이고, 보통 그런 한계 정하기가 그들의 “철학적” 작업이었다. 당대만 해도 모순은 아주 단순한 원칙들(특별법 우선의 원칙, 신법 우선의 원칙 따위의 원칙들)로 정리될 수 있는(이를 종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것이었고, 그렇게 분할분배하는 게 철학자들의 이성적 작업이라고 믿어지던 시대였다.(이는 법학자들의 활동을 모방한 것이다)

 

뭐 그러니 “신앙과 이성은 갈등하는가?”에 대해서 중세 신학자-철학자들은 일단 “No!”라고 외치는 놈들이었고, 문제는 어떤 원칙에 입각해서, 그것들이 갈등하지 않게 되냐가 핵심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도 잘못된 물음인데, 애초에 그들이 피하고 싶었던 것은 신앙와 이성의 “갈등”이라기보다는 이성의 활동이 오만으로 이어지는 것을 어떻게 막느냐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이성을 너무 신봉하면 안 되는 종교였고(바로 가불기 들어간다. 네가 그걸 알 수 있다고?->그런 판단은 그리스도만 하는 건데?->너 그리스도라는 거임?->너도 신이네?->너 범신론->이단 공식이 존재한다. 이는 “펠라기우스주의”라고 라벨링되는 조류들을 비난할 때 항상 반복된다) 계시의 영역을 온존하면서도 정확히 구별해낼 수 있는 원칙을 찾아내는 게 중세신학자들의 핵심 고민거리였다고 할 수 있다.(뭐 사실 이게 핵심이라고 할 것도 없는게, 정리할 것이 많은 상황이라 대부분은 정리에 몰두했다)

 

그러니 신앙과 이성의 조화라는 구도로 중세신학을 보면 헛소리가 나오기 십상이다. 중세철학자들은 근대인들보다 더 센 합리주의자고, 이성주의였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보통 근대=이성, 중세=신앙이라는 구도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구도인 거 같은데(확인 안 해봐서 모르겠으나, 대체로 종교=비이성<->과학=이성 구도가 널리 알려지면서 생긴 구도 같다), 이는 애초에 잘못된 구도를 만들어낸다. 중세철학=이성, 중세신학=이성?+이성이면 좋을텐데?가 합당한 구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문은 이런 것이 될 것이다.

중세철학이 이성이면, 근대철학과 중세철학은 뭐가 다르냐는 것이다.

우리는 몇몇 사이비 철학자들이 널리 배포시킨 근대철학=이성 구도에 너무 익숙하니, 중세도 이성이고 근대도 이성이라면 뭔가 이상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뭐 여기에 대해서는 그냥 인간의 학문적 활동은 다 이성이라 이성 자체로 구별하는 것은 무의미한 구별법이란 것이고(인간을 인간으로 구별하자는 헛소리랑 같다. 1은 1로 구별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근대철학은 이성보다는 “자유”에 초점이 맞춰져야할 조류란 것 정도가 될 것이다.

 

근대 철학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서 몇몇은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걍 상식이 오류이니 그냥 오류를 범하는 이들도 있다(로자나 툴민이 그렇다). 뭐 그들도 은근슬쩍 인정하는 게 근대 철학자들은 자유를 위해 투쟁한 집단이지 과도한 이성주의로 규정될 집단이 아니란 것이고, 현대에 필요한 것은 어쩌면 그들의 투쟁일 수도 있겠다 정도의 문제의식은 갖고 있다.(뭐 근대 철학을 옹호하면 생길 부작용을 걱정해서 그것을 본격적으로 얘기하진 않지만...) 사실 중세철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애초에 그들의 텍스트를 직접 읽지 않았거나, 아주 소수만 읽어서 생기는 사태이다. 제발 좀 역사책도 좀 보고, 책도 좀 많이 읽으면서 도대체 뭐가 이 사람들의 논쟁거리였는지를 고민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