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쪽글

죽음의 생태학을 위한 시론

1. 생태학이란 무엇인가?

죽음의 생태학을 논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태학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어야한다. 하지만 생태학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매킨토시가 토로하듯, 생태학은 생태학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하는 모든 짓거리가 되어버린 형국이다.(매킨토시 1999 p.14) 그가 “생태학”이라는 개념을 연구하려고 한 것은 모두가 생태학을 얘기하지만, 모두가 생태학을 얘기하기 때문에 생태학이 몰락하는 아이러니한 현실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죽음의 생태학을 다루기에 앞서 생태학을, 완벽한 정의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생태학 규정하고 논의를 시작하려고 한다.

생태학은 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무엇이다. 생태학을 학문으로 규정하려는 매킨토시도, 생태학을 (자연이든, 세계이든, 총체이든 간에) 타자를 향한 태도로 규정하려는 워스터도 모두 생태학을 부분과 전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고찰임을 지적한다. 생태학은 구별되는 특정한 부분이, 전체로부터 어떻게 구별될 수 있으며, 그렇게 구별된 부분이 전체로부터 분리됨에도 어떻게 전체에 귀속될 수 있는지를 다루는 학문이다. 여기서 생태학의 특유함은 부분과 전체를 분리를 한쪽으로 환원하려고 하지 않는 애매함으로부터 탄생한다. 즉, 생태학은 부분에 대한 규정과 전체에 대한 규정의 상호성에 입각하여 그 관계의 총체성을 고찰하는 시도라고 규정할 수 있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총체적으로 고찰하려는 시도는, 단순히 부분에 대한 고찰과 전체에 대한 고찰과 다르다. 부분과 전체의 분리와 결합 모두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분이 부분으로서 독립성을 갖는다는 것이 설명되어야한다. 이러한 설명들을 우리는 “균형”의 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균형은 서로 다른 것들이 평형상태에 놓일 때에만 성립할 수 있는 개념이다. 때문에 생태학은 서로 다른 것들의 균형을 다룬다. 그런데 서로 다른 것들의 균형은 두 가지 관점에서 고찰될 수 있다. 하나는 정적 평형으로, 다른 하나는 동적 평형이다. 정적 평형의 관점에서는 구별된 것들의 의존성만이 고찰된다. 그들은 필수불가결한 안정상태만을 가리키며, 각 부분은 독립성을 중심으로 고찰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상들은 분류되며, 그들이 수행하는 역할의 의존성에 입각해서 총체를 이룬다.

반면 동적 평형의 관점에서는 부분과 전체의 의존성뿐만 아니라 투쟁관계가 중시된다. 즉 평형상태는 그 질서가 안정적일지라도, 사실은 대립과 투쟁 속에서만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토 레만이 기획했던 박물관에서처럼, 각각의 부분이 발톱과 이빨을 적시는 피로써 하나의 평형 관계를 이루는 것을 가리킨다. 즉 동적 평형의 관점에서는 부분이 전체 속에서 필수불가결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을, 부분들이 가진, 무목적적인 힘들에 의해 달성된다는 것이 중요시된다. 이러한 무목적적인 힘들은 충동Trieb이라고 불리든, 조형력plastical power이라고 불리든, 힘에의 의지[각주:1]라고 불리든, 창조적 생명력Élan vital이라고 불리든, 창조의지kunstwollen라고 불리든 이러한 힘을 담지하고 있는 부분들은 그들을 부분으로 만드는 이 힘들의 무목적성에 의해 기능으로 환원되지 않게 된다.[각주:2][각주:3] 때문에 동적 평형을 주창하는 이들이 단 하나의 균형을 동적 평형의 이상으로 여길지라도, 그것은 변천 가능한, 조건에 따라 변화무쌍한 균형으로 이해될 여지가 크다. 균형 상태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일 수 있으며, 그것이 변화가능하다는 사고는 동적 평형의 관점의 생태학에서만 가능하다.[각주:4]

정적 생태학과 동적 생태학은 이제 구별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한 가지 관점을 추가해야한다. 생태학은 단순히 부분과 전체를 구별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들의 균형 상태를 다룬다. 하지만 균형을 고찰한다는 것으로 총체성은 유지될 수 없다. 만약 균형이 생태학의 한계지점이라면, 생태학은 이론적일 수는 있어도 실천적일 수는 없다. 하지만 생태학은 분명 어떠한 실천적 입장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실천성은 생태학의 대상에 생태학을 수행하는 우리가 포함되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단순히 균형 상태를 기술descript하는 것을 넘어서서, 적어도 어떤 것이 현명한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균형 상태는 설사 도덕적인 좋음은 아닐지라도 실리적으로 좋은 상태일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생태학은 설사 그것이 동적생태학처럼 기능적이지 않은 관점일지라도 기능적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다. 생태학이 산출하는 결과물이 특정한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균형상태의 재생산을, 혹은 부분들의 재생산의 재생산을, 생산수단의 재생산을 요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생태학은 기능주의적이며 실천적이다. 생태학은 생산의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조건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조건을 확립하는 앎이다. 다른 말로 생태학은 지속가능성을 미덕으로 삼는 학문인 것이다.

 

2. 죽음의 특유함

죽음은 생명의 부재가 아니라 생명의 소멸을 뜻한다. 때문에 죽음을 생태학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생명의 소멸을 재생산할 수 있는 균형 상태를 다룬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생명 탄생의 재생산을 다른 한편으로는 생명 소멸의 재생산을 다뤄야한다. 문제는 이것들의 균형 상태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개별 영혼의 동일성을 믿지 않는 우리는 생명의 수가 늘고 줄어드는 것에 이상함을 느낄 이유가 없다. 인류의 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비축된 영혼의 수가 고갈되는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각주:5] 또한 우리는 어떠한 종류의 살육을 금지시킬 명분 또한 없는데, 일단 그것이 불가능한 일임과 동시에, 죽음의 재생산은 말 그대로 죽음을 일으키는 것이기도 해서 죽음을 막는 것은 오히려 죽음의 지속가능성을 저해한다는 점이다.[각주:6] 다시 말해 죽음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죽음과 탄생은 여기저기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생태학에서 죽음을 다루기 위해서는 죽음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죽음의 질이 문제가 된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물음은 어떤 죽음과 어떤 탄생이 (재)생산되어야하는지이지, 죽음과 탄생을 얼마나 촉발하고 저해해야하는지가 아니다.

죽음은 양적 문제가 아니다. 이는 죽음이라는 것이 어디에나 존재해서 생산과 재생산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해서 부과된 죽음의 특징인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이 양적으로 논해질 수 없는 것은, 그러한 소극적인 규정 때문이 아니라 죽음을 적극적으로 규정할 때 필연적으로 부과되는 특징이다.[각주:7] 즉, 죽음의 질적 특징은 죽음의 본성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죽음의 본성이라는 것에 우리는 주의해야한다. 이는 죽음이라는 실체의 속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을 인식하는 일은 사실 판단이 아니다. 죽음은 단순히 물질적인 결합과 분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사실의 문제de facto가 아니다. 이는 특정한 사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포함한 권리의 문제de jure다. 즉, 죽음은 미, 숭고, 우울과 같이 특정한 대상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시공간 속의 대상들을 그렇게 구별하게 만드는 전체에 대한 태도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왜 죽음은 권리의 문제인가? 죽음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생명이 가능해야하며, 생명은 생명체organic body에 대한 판단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체는 단순히 물질이 아니다. 물질들은 그것들의 물질적 특징이 야기하는 맹목적인 인과로 설명되지만, 생명체는 그 이상의 인과를 요구한다. 그것들은 그것들의 본성에 기초한 목적을 인과로 갖는다. 예컨대 그들은 살기를 원한다. 이러한 원하는 것want은 필요한 것need과 다르다. 마찬가지로 필수불가결한 것necessary한 것은 의욕하는 것voluntary과 다르다. 그것들이 설혹 강제력을 갖더라도, 그것의 원천은 개별자에게 귀속되지 외적 조건으로 귀속되지 않는다. 물질과 유기체의 차이는 인과를 단순히 물질적으로 동등한 특정한 요소들로 환원할지의 여부에서 비롯된다. 때문에 유기체는 물질적으로 동등한 것들을 유기체인 것과 유기체가 아닌 것으로 구별케 한다. “물 35리터, 탄소 20킬로그램, 암모니아 4리터, 석회 1.5킬로그램, 인 800그램, 염분 250그램, 질산칼륨 100그램, 유황 80그램, 불소 7.5그램, 철 5그램, 규소 3그램, 기타 미량 원소 15가지”와 사람 한명을 구별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특정한 물질적 요소들의 합을 특정한 유형(여기서는 “사람”)으로 구별하는 것은 물질적인 인과와 다른 해당 유형의 고유한 인과력을 가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인과의 원천을 해당 종의 본성에 기초하여 그것들을 고유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목적론적인 판단이다.[각주:8] 이러한 목적론적 판단은 사실 판단을 넘어서, 사실들을 총괄하는 법칙을 부여하는 권리 판단이다. 즉, 대상적 판단이 아니라, 대상-주체-세계의 관계를 통솔하는 판단이란 것이다. 이것을 “권리의 문제”라고 부르며, 이는 취미 판단과 내용적으로는 구별되지만 형식적으로 같은 유형의 판단이다.

“모든 생명은 존엄하다” 이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단순하고 소박한 진리이다. 하지만 죽음의 문제가 권리의 문제이기에 이토록 단순하고 소박한 진리는 까다로운 검토를 요구한다. 생명의 존엄성은, 생명이라고 분류되는 것들의 물질적 특징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판단을 가진 지성적 존재가 대상-주체-세계의 관계를 정립하는 특정한 질서를 언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각주:9] 도대체 이러한 질서는 무엇인가? 그것이 구체화될 때에만 우리는 죽음과 생명의 재생산하게 하는 재생산의 조건을 고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찰을 위해서 우리는 꽤나 단순한 진리를 진실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한다. 모든 생명은 존엄하다는 것은 외부적인 법칙, 외적으로 부과되는 명령이 아니란 것이다. 그것은 내적으로 동기화된, 스스로가 부과할 이유가 있는 법칙이며 스스로에게 내리는 명령이다. 죽음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의 문제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생명과 죽음을 규정하게 하는 질서를 내적인 원천, 즉, 우리의 마음, 다른 말로 “현상”erscheinung-phenomenon에서 해당 질서가 어떻게 창발할 수 있는지를 고찰해야한다.[각주:10]

 

3. 루소와 연민, 동정심이라는 수수께끼

나는 현재 인간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모든 학문적인 책들을 버리고, 인간의 마음에 제일 먼저 일어나는 보다 단순한 작용들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야만 했다.” (루소 2020 pp.35-36)(번역 일부 수정)

루소는 고매한 법학자들만 알 수 있는 자연법과 물질들의 맹목적인 경향성만으로 충족되는 자연법을 모두 거부하면서, 마음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는 일인 현상에서부터 자신은 시작할 것임을 선언한다. 그가 현상에서 발견한 두 가지 힘은 자기애와 연민이다. 자기애는 무엇인가를 지속하게 만드는 인력을, 연민은 무엇인가를 혐오하게 만드는 척력을 뜻한다.[각주:11] 많은 주석가들을 당황케 한 것은 바로 연민이었다. 루소는 자신이 발견한 두 힘(혹은 두 원리)이 사회성sociability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어떻게 인간이 (폭압적인) 사회를 이루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겠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많은 주석가들에게 연민이 이미 그러한 사회성을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이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주석가들은 “연민이 사회성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물으며, 연민 덕분에 사회가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결국 문제의 해결을 문제의 해결능력을 전제하여 해결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곤 했다. 또한 연민의 대상이 “자기와 닮은 존재”라는 점에서, 연민은 비교를 요구하고, 루소에게 비교는 인식이고 이후 “타락”을 통해 설명될 것이기에, 연민은 원초적인 현상일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 두 비판에 반대하며 루소가 어떻게 이 두 힘이 하나의 자연인이라고 생각했는지를 설명하면서 생명과 죽음의 문제를 설명해보도록 하겠다.

코스가드가 『규범성의 원천』에서 보여준 가장 날카로운 문제의식은 좋은 것이 그 자체로 이끌림을 낳지 않는다는 통찰이었다. 이 통찰은 어떤 것이 객관적으로 좋고, 심지어 자신의 관점으로 보기에도 좋아 보일지라도 그것이 동기를 낳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자신의 관점으로 보기에도 좋아 보일지라도 그것이 동기를 낳지 않는”는 것은 그것이 덜 좋아서 생기는 현상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너무 좋은 것이기에 생길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러한 역설적인 현상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코스가드는 이러한 통찰을 단순한 맹목적인 이끌림과 구별되는, 동기부여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의욕함은 “자아”와 분리될 수 없다는 진실을 통해 이끌어내었다. 즉, 어떤 것이 의욕할 만한 것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나”와 특정한 관계 맺음을 가능케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 맺음에서 “나”는 그것의 형이상학적인, 거창한 본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의욕함을 산출하기 위해서 가치 있어야만 한다. “나”라는 존재가 가치를 누릴만한 존재라는 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어떤 것이 좋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진정으로 의욕을 낳는 것은 “나”의 가치와 대상의 가치가 일치할 때이다. 내가 가치를 누릴 자격이 있는 존재일 때, 그것에 걸맞은 가치 있는 대상을 향유하는 것만이 의욕을 낳을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소비하는 것과 같은 만족을 이끌어내는 행동은 가치를 낳는 행위가 아니게 된다. 그러한 행동은 단지 맹목적으로 산출된 결과물이며, 스스로가 받아들일 수 없는, 충족되지만 향유되지 않는, 만족 없는 충족이라는 것이다.

내가 코스가드의 행위자적 윤리학을 언급한 것은 이것이 윤리의 본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만이 아니라, 루소가 이런 문제를 발견해내고 있고, 이것이 드러나는 것이 자기애와 연민에 대한 분석이기 때문이다. 자기애는 이기심과 다르고 연민은 이타심과 다르다. 자기애와 연민을 루소는 충동으로 설명하지, 이해력에 기초한 계획적은 행위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끌림과 밀어냄이지 계획에 입각한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인 행위가 아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자기애라는 것이고, 무엇이 연민이라는 것인가? 또한 이러한 “충동”은 단순히 물질적 경향성, 동물적 충동과는 다른데, 루소는 자연법의 대상에 동물이 포함되지만, 자연법의 주체는 인간이라고 설명하며,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목적은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 인간이 인간 종으로서 같게 하는 힘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라고 밝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기애와 연민은 동물적 욕망과는 다른, 정신적인 것이면서도, 충동적인 무엇으로 설명해야한다. 정신적이면서도 충동적인 것, 자기애와 연민을 가능케 하는 것, 이는 추상적이며 소극적인 접근이다. 이러한 이상야릇한 힘을 설명하는 적극적인 이론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코스가드의 윤리적 통찰이 필요하다. 코스가드의 윤리학적 통찰은 정신적인 것이 단순히 대상의 속성이 아니라, 나의 속성과 대상의 속성의 관계에서 비롯된다는 통찰에서 비롯되었다. 즉 우리가 안과 밖으로 구별하며, 나와 대상을 구별하지만, 의욕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안과 바깥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고, 그것들의 동일성을 탐구해야한다는 것이다.

안과 바깥의 경계를 흐리게 만들 필요가 이는 것은 좋음을 향유하는 주체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각주:12] 무엇을 향유할 때 좋은 것은 팔다리도 아니고, 눈도 아니고, 배도 아닐 수 있다. 이때 좋은 것이자 좋아하는 것은 “나” 그 자체인데, 문제는 이러한 자아는 단순히 신체와 동일시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란 것이다.[각주:13] 신체와 동일시되지 않는 자아라고 해서 그것이 물질을 초월한, 실체적인 영혼일 필요는 없다. 콘이 보여주듯이, 이는 자아가 가지고 있는 다수적 성격을 가리킬 뿐이다. 즉 “나”는 나에게만 귀속된 것이 아니다. 자아는 애매한, 바로 보이지 않는 것이고, 무엇인가를 느끼게 하는 무엇이며, 그것들을 좋게도 나쁘게도 하는 무엇이다. 나의 행동이 그러한 “나”와 관련을 맺을 때, 그것은 자기애로 작동할 수 있다. 즉, 자기보존이라는 것을 가치 있게 만들며 의욕하게 하는 것이다. 반면 이 “나”는 나에게 온전히 귀속되지 않기에 대상들에게 속할 수 있다. “나”를 가진 내가 “나”로 인해 고통을 나쁜 것으로 피하게 하듯, “나”를 가진 것들은 모두 고통 같은 나쁜 것은 피하게 만든다. 이 때 “나”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나”를 가진 모든 것들에게 동일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나”를 가진 나와 “나”를 가진 다른 것들은 “나”로서 같은 것이기에 동일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즉, 여기서의 “나”는 좋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좋은 것으로서, 세계에 창출시킬 만한 이유가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별도의 존재이기에, 나와 대상을 구별하지 않고, “나”가 창출될 수 있는 것은 모두 “좋은 것”으로 의욕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해석은 꽤나 신비적이고 사변적인 해석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기성과 이타성은 “나”를 가진 것들의 경계를 칼처럼 그어냄으로써 가능해지는 반면, 여기서 등장한 신비적이고 사변적일만한 “나”의 애매함은 경계의 불분명함에서 비롯된다.[각주:14] 즉 전자는 사고를 통해 엄격한 분류를 창출해야 낸 후 가능해지는 사고인 반면, 후자는 애매할 때 발생하는 사고인 것이다. 그렇기에 후자가 전자보다 단순하며 원초적이다. 콘과 카스뜨루가 보이듯, 애니미즘이라고 불릴 만한, 프로이트의 언어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종교, 혹은 인류 최초의 형이상학은 바로 이 불분명한 경계에서 비롯되는 이끌림과 밀어냄의 충동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각주:15] 때문에 우리가 루소로부터 받아들여야하는 자연인의 핵심 특징은 바로 경계의 애매함이라고 이해해야한다. 루소의 자연인은 분명 독립적인 존재이다. 그렇기에 사회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욕구에 따라 결합하고 분리한다. 하지만 이들의 독립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결합하고 분리할 수 있는 경계의 애매함에서 비롯된다. 설사 일회적일지라도 도움을 주는 행위는 바로 그 자연인이 타인을 자신과 혼동하기에 가능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이는 사회성과는 다르다. 사회성은 경계짓기가 명확해질 때, 자신을 특정한 무리와 동일시할 때 형성되는 것인 반면,[각주:16] 여기서의 자기애와 연민은 자신의 경계도 모르고, 다른 인간들, 혹은 다른 생명들의 경계도 모르기에 가능해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받아들이면 루소의 자연인이 비교를 함축하지 않고, 사회성도 함축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나와 내가 아닌 것을 혼동하며, “나”를 이곳저곳에서 창출해내는 존재, 자아의 경계가 흐릿하면서도 자아의 경계를 만들어내는 존재인 것이다.[각주:17]

 

4. 자아의 위태로움

경계짓기는 부수적인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나” 혹은 자아가 이곳저곳에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의 세계 인식은 곧바로 난점을 낳는다. 우리가 “나”를 낳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다른 자아들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콘이 지적하듯, 사냥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실존을 위협한다. 사냥은 왜 근본적으로 우리의 실존을 위협하는가? 우리는 사냥을 하기 위해서 사냥감의 자아로 진입할 필요가 있다. 나카자와 신이치가 보여주듯, 사냥꾼이 되는 것은 자신이 사냥감이 되는 그 존재와 같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뜻한다. 사슴을 부인으로 얻을 때, 그들이 자신의 자식이 될 때, 그들이 자신의 장인과 처형이 될 때, 그는 사슴을 사냥할 수 있다. 또한 콘이 지적하듯, 자연이 “자아의 생태계”를 이룬다는 것을, 즉, 그들의 자아들이 우리의 자아들과 같다는 것을 전제할 때만 사냥이란 것이 인식될 수 있다.하지만 이는 바로 역설을 낳는다. 내가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나”인 자아가 나의 행동으로 파괴될 수 있음을 목격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의 존재란 것이 별 거 아닌 행동(화살 쏘기 등)에 의해 소멸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은 “저세상”을 고안하고, 이것들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란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현상에서 드러나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아에 가해지는 폭력, 그들이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을 부과하는 것이며, 그러한 폭력이 제대로 작동하여 그러한 자아를 곧 소멸 시킨다는 현실이다. 때문에 이는 실존적 위협이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바로 나의 “나” 또한 저들의 “나”만큼 취약하며 위태롭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자아의 취약함과 위태로움, 이를 스탠리 카버Cavell와 코라 다이아몬드는 “작은 죽음들”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내가 가진 “나”의 죽음은 아니기에 “큰 죽음”은 아니지만, 여기저기에서 발견되는 “나”를 훼손시킨다는 점에서 “작은 죽음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부여하는 가치들의 원천이 되는, 우리의 의욕을 가능케 하며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원천을 훼손하기에 위협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법의 문제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나”의 가치를 통해 세계와 대상을 이어 목적을 부여한다. 여기서 “나”는 칸트가 “예지계의 나”로 가리킨 것처럼, 나의 신체나 상상으로 환원되지 않는 것일 수밖에 없다. 칸트가 지적했듯이, 이 “나”는 그 자체로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각들을 구조화할 때, 그러한 구조화에 의미를 부여하는 매개항으로서 투사project되는 것이다.[각주:18] 이러한 목적부여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갈등이 너무 커서는 안 된다. 지각되는 것들이 자신의 세계 인식과 괴리가 되어서도 안 되고, 자신의 “나”로서의 정체성이, “나” 일반, 즉 예지계의 나와 괴리되어서도 안 된다.[각주:19] 즉, 자신의 행동이 “나”를 위협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나” 일반을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상황이 권리의 문제를 만들어낸다. 여기서 일반화될 수 있는 의무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즉 개별적인 “나”인 내가, 나로서의 “나”를 위협하는 것이 모순적이기에 금지되듯,[각주:20] 나와 다른 개별적인 “나”를 위협하는 것은 모순적이기에 금지된다. 개별적인 “나”에 대한 위협은 일반적인 “나”에 대한 위협이기에 바로 나의 “나”에게도 위협이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치의 원천을 위협으로부터 지켜내는 자동적인 의무관계를 명제적으로 표현한 것이 루소나 칸트의 자연법이라고 할 수 있다. 자연법은 자아의 위태로움을 막는 장치인 것이다.[각주:21]

 

5. 죽음의 생태학을 위하여 – 생명과 죽음의 경관 가꾸기

이렇게 도출된 자연법은 생명의 위협에 대해서 모두 반응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나”는 인간으로 분류되는 특정한 유형들보다 앞서기에 동물들이 가진 “나”가 위협받는 것에도 반응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루소가 지적하듯 동물들의 생명을 존중하는 의무로 드러나게 된다. 이로서 우리는 인간을 넘어서는 자연법을 발견할 수 있다. 생명과 죽음이라는 일반적인 사태들을 규정케 하고, 작동시키는 기본적인 규칙을 발견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문제는 죽음의 생태학이다. 즉, 이러한 규칙들이 지속가능한 조건을 고찰해야한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우리는 여기서 사냥이 만들어내는 “작은 죽음들”이 우리의 자아를 위협하면서도 가능해질 수 있는 조건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한다. 사냥으로 인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죽음들을 계속 발생하며, 이러한 죽음들로부터 비롯되는 위협을 견디는 것이 죽음의 생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목격되는 사실로의 죽음들과, 자신의 의도로서 산출하는 죽음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우리의 자아를 위협으로부터 구해낼 수 있는가가 죽음의 생태학의 핵심 문제이다.

콘은 이러한 문제를 『숲은 생각한다』에서 다루고 있다. 『숲은 생각한다』의 원제는 “어떻게 숲처럼 생각하는가?”이며, 콘은 숲처럼 생각하기는 숲이라는 자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이라고 답하고 있다. 즉, 자아들의 생태계라는 “나”를 나로서 받아들일 때 숲처럼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고가 사냥을 가능케 하면서도 위협을 준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이 바로 숲은 생각한다의 3장 「혼맹」이다. “혼맹”은 혼을 인식하지 못하게 된 자아들을 가리킨다.[각주:22] 이러한 자아들은 한편으로 루나족에게 생명의 위협을 가한다는 점에서 그를 위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아면서도 자아로서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협적이고, 자아를 가진 것이 자아를 가진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 이상한 현실을 창출한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다.[각주:23] 콘은 루나족들이 이러한 자아들을 (재)배분함으로써 죽음을 완성시킴으로써 그 위협을 통제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자아들의 적절한 위치를 정하고, 문제가 되는 자아들을 옮기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의 작업이다. 한편으로는 죽은 자들의 저세상을 만드는 작업을 통해 영혼이 위협되지 않는 공간을 창출해내는 작업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공간으로 문제가 되는 자아들을 보내는 방법을 만들어냄으로써 사냥과 같은 상황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죽음을 생산하는 방법을 창출해내는 작업이다.[각주:24]

하지만 콘은 이러한 것을 상술하면서 “자아의 생태학”의 위기를 말하지, 죽음의 생태학을 다룬다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콘의 관심에서 이탈할 필요가 있다. 콘은 자아의 생태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을 목적으로 『숲은 생각한다』를 저술하였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이러한 생태계의 위협들은 부수적으로 다뤄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위협들을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목적으로 “죽음의 생태학”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환경을 이해해야한다. 콘이나 신이치가 지적하듯, 수렵채집 문화에서 동물들의 죽음은 한편으로는 위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위협 속에서 죽음이 통제되고 자아들의 공고함이 확인되는 과정이다. 즉, 그러한 위협들을 이겨냄으로써 자아는 공고해지는 것이다.[각주:25] 역설적이게도 사냥과 같은 위협 속에서 인간은 자아의 존엄함을 체험한다.[각주:26] 그 위기와 그것의 극복 속에서 자아를 직접 체험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체험되는 자아는 특정한 욕구의 원천이 되는 그런 자아가 아니다. 이것은 그냥 어떤 대상에 대한 집착이라기보다는 그러한 대상에 국한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욕구를 낳는 원천을 들여다보는 일에 가깝다. 즉, 단순히 어떤 의무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의무감을 가능케 하는 원천이 위협되면서 그 원천을 직시하게 된다는 것이다.[각주:27] 이를 우리의 환경과 비교해보자. 우리는 사냥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냥을 하더라도 그 속에서 “작은 죽음들”이 가져다오는 실존적 위기를 체험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냥을 경험하지 않고서 고기를 먹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먹는 고기는 사냥의 흔적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각주:28] 그것은 생명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 않은 상태로 우리에게 진열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사냥은 단순히 고기를 찾는 활동일 뿐만 아니라 자아가 가진 일반성을 확인할 수 있는 체험의 장이었다. 하지만 환경이 바뀌면서 우리는 이러한 체험을 가능케 하는 경관을 상실하였다. 즉,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위기와 극복이라는 특유의 서사를 가진 환경세계를 상실한 것이다.[각주:29] 때문에 문제는 단순히 동물들의 권리가 침해되고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아닌 생명들의 존엄성이 훼손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문제는 인간이든 다른 동물이든, 생명이라는 것을 가능케 하며, 그것의 존엄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위협적이지 않은 환경세계가 상실되었다는 것이다.[각주:30] 때문에 이는 단순히 동물들을 적당히 잘 보호하고 채식을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동물을 얼마나 적게 죽이느냐가 아니라, 동물이든 인간이든 우리가 자아가 있고, 생명이 있는 것들과 공유할 수 있는 가치 창출의 원천으로서의 자아를 확인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체험을 제공하는 매체로서, 사냥으로부터 이탈한 이후 종교나 정치가 부상했었지만, 이는 현대적으로는 소실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 둘은 한편으로는 그것이 “현대”라는 환경에서 중요한 체험을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나, 체험을 가능케 할 경우 (나치즘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오히려 큰 문제를 야기시킨다는 문제 때문에 거부될 수밖에 없다.

결국 죽음의 생태학은 종교의 귀환으로 귀결된다. 여기서 동물들의 권리는 종교가 적용되는 범위의 문제이지 본질적 문제가 될 수 없다. 문제는 도대체 어떤 종교가 귀환해야하냐는 물음이고, 그것이 종교이긴 한 것인가라는 물음이다.[각주:31] 나는 여기서 이렇게 귀환한 것이 종교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상식에 입각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자아관을 제공하며 생명과 죽음을 체험할 수 있는 제도를 수립하게 할 수 있는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설혹 우리에게 더 이상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상식은 존재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문제 상황이 사실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이것을 기술이나 기교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고안된다는 점에서 기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각주:32] 여기서 콘의 작업, 카스뜨루의 작업은 일종의 수단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체험을 재생산하는 사람들이 가진 기계를 분석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것이 “현대”라는 조건 속에서 작동할 수 있을 만큼 공고하냐는 것이다. 즉, 기계가 있어봤자 이를 운용할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죽음의 생태학은 고찰될 수 있다. 어떤 기계가 좋은 기계인가? 그리고 그 기계가 작동될 수 있는 환경, 계속 생산을 지속할 수 있는, 생산의 재생산을 가능케 하는 조건은 무엇인가? 이 문제를 고찰하는 것이 바로 죽음의 생태학이다. 죽음의 생태학은 여기서 시작해야할 것이다.

 

참고도서

Emden, Christian, Nietzsche's Naturalism: Philosophy and the Life Sciences in the Nineteenth Century,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9.

 

글래컨, 클래런스, 『로도스 섬 해변의 흔적: 고대에서 18세기 말까지 서구 사상에 나타난 자연과 문화』 총 4권, 최병두 등 옮김, 나남, 2016.

기어츠, 클리퍼드, 『문화의 해석』, 문옥표 옮김, 까치, 2009.

노글, 데이비드, 『세계관: 그 개념의 역사』, 박세혁 옮김, 도서출판CUP, 2018.

도즈, 에릭 R., 『그리스인들과 비이성적인 것』, 주은영·양호영 옮김, 까치, 2002.

드발, 코르넬리스, 『퍼스 철학의 이해』, 이윤희 옮김, 한국외대출판부, 2019.

라파포트, 로이, 『인류를 만든 의례와 종교』, 강대훈 옮김, 황소걸음, 2017.

로자, 하르트무트, 『소외와 가속』, 김태희 옮김, 앨피, 2020.

루소, 장 자크, 『인간 불평등 기원론』, 이충훈 옮김, 도서출판b, 2020.

리글, 알로이스, 『조형예술의 역사적 문법』, 정유경 옮김, 갈무리, 2020.

매킨토시, 로버트, 『생태학의 배경: 개념과 역사』, 김지홍 옮김, 아르케, 1999.

베이트슨, 그레고리, 『마음의 생태학』, 박대식 옮김, 책세상, 2006.

베커, 어니스트, 『죽음의 부정』, 노승영 옮김, 한빛비즈, 2019.

볼, 필립, 『형태학 3부작: 모양, 흐름, 가지』 총 3권, 김명남 등 옮김, 사이언스북스, 2014.

섀그넌, 나폴리언, 『고결한 야만인』, 강주헌 옮김, 생각의힘, 2014.

셸링, F.W.J., 『조형예술과 자연의 관계』, 심철민 옮김, 책세상, 2017.

솔로몬, 셸던 등, 『슬픈 불멸주의자』, 이은경 옮김, 흐름출판, 2016.

슈미트, 칼, 『정치적 낭만주의』, 조효원 옮김, 에디투스, 2020.

스넬, 브루노, 『정신의 발견:희랍에서 서구 사유의 탄생』, 김재홍·김남우 옮김, 그린비, 2020.

스미스, 데이비드 리빙스터, 『생물학이 철학을 어떻게 말하는가: 자연주의를 위한 새로운 토대』, 뇌신경철학연구회 옮김, 철학과현실사, 2020.

스미스, 앤서니 D., 『민족의 인종적 기원』, 이재석 옮김, 그린비, 2018.

스타로뱅스키, 장, 『투명성과 장애물』, 이충훈 옮김, 아카넷, 2012.

슬로터다이크, 페터, 『너는 너의 삶을 바꿔야 한다: 인간공학에 대하여』, 문순표 옮김, 오월의봄, 2020.

시걸, 로버트, 『신화란 무엇인가』, 이용주 옮김, 아카넷, 2017. 

신이치, 나카자와, 『사랑과 경제의 로고스: 물신 숭배의 허구와 대안』, 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2004.

애디, 피터, 『모빌리티 이론』, 최일만 옮김, 앨피, 2019.

워스터, 도널드, 『생태학: 그 열림과 닫힘의 역사』, 강헌·문순홍 옮김, 아카넷, 2002.
프로이트, 지그문트, 『종교의 기원』,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4.

카스뜨루, 에두아르두 비베이루스 지, 『식인의 형이상학: 탈구조적 인류학의 흐름들』, 박이대승·박수경 옮김, 후마니타스, 2018.

칸트, 임마누엘, 『순수 이성 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6.

『판단력 비판』, 백종현 옮김, 아카넷, 2009.

콘, 에두아르도, 『숲은 생각한다』, 차은정 옮김, 사월의책, 2018.

콜라피에트로, 빈센트, 『퍼스의 자아』, 고경난 옮김, 한국외대출판부, 2020.

콜링우드, R.G., 『자연이라는 개념』, 유원기 옮김, 이제이북스, 2004.

하트, 허버트, 『법의 개념』, 오병선 옮김, 아카넷, 2001.

헤젠, 앙케 테, 『박물관 이론 입문』, 조창오 옮김, 서광사, 2018.

 

Vilaça, Aparecida, "Chronically Unstable Bodies_Reflections on Amazonian Corporea-lities", Royal Anthropological Institute 11, pp.445-464, 2005.

 

양선이, 「허치슨, 흄,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나타난 공감의 역할과 도덕의 규범성」, 『철학연구』 114권 0호, 철학연구회, 2016.

  1. 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생물학에서 탐구되어야할 “생명” 개념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 속에서 등장하였다. [본문으로]
  2. 내가 이렇게 많은 단어들을 나열한 것은 이러한 주장이 한 사람의 주장이 아니라, 18-19세기에도 흔한 사고방식 중 하나였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형태론적 전환”이라는 사태는 분명 다르시 톰슨이 유발한 것이지만, 필립 볼이 지적하듯, 톰슨의 형태론적 전환은 형태 창발을 법칙으로서 다루기에는 수학적으로 미흡하였고, 이러한 직관은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톰슨의 선배들은 조금 더 느슨한 일반법칙에 입각하여 형태 창발을 다뤘기에, 수리적 법칙에 입각하여 형태 창발을 다룬 톰슨은 매우 기획적인 작업을 추진한 것이라고 평할 수 있다. [본문으로]
  3. 때문에 형태론적인 관점을 중요시하는 자신의 입장은 기능주의적이지 않기 때문에 생태주의가 아니라는 라파포트의 주장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 물론 그의 이러한 거부는 “생태주의”에 대한 기능주의적 이해에서 그의 주장이 환원적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반발이었지만 말이다. [본문으로]
  4. 물론 정적 평형의 생태학에서도 변화와 다양성은 존재한다. 하지만 균형으로 되돌아가거나 이탈하는 양자택일적 변화와, 동형적인isomorphic 다양성만이 고찰된다는 점에서 균형 자체의 변화는 동적 평형의 관점에서만 고찰될 수 있다. [본문으로]
  5. 우주의 영혼의 수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님을 뜻한다. [본문으로]
  6. 그런 점에서 모든 도살을 막길 요구하는 극단적인 윤리적 채식주의는 불가능한 것을 명령하는 무의미한 규범일 뿐만 아니라, 생태학적이지도 않다. [본문으로]
  7. 여기서 소극적 적극적은 각각 negative, positive를 가리키며, 소극적 규정은 무한 판단을 적극적 규정한 유한 판단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8. 이러한 구도는 칸트의 도식이다. 이는 현대에도 통용되는 도식이다. 결국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은 목적론적 판단의 합리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다만 현대 과학에서는 물질적 실체 개념을 사용하지 않기에, 과학적 사고 자체가 목적론적 판단을 요구한다. 이는 돌튼의 원자론이 받아들여지면서 표준이 된 과학적 상식이다. 이런 점에서 환원주의적 물리주의는 사이비 과학적인 입장이다. [본문으로]
  9. 기어츠는 대상-주체-세계 관계를 표현하는 “세계관”이라는 개념 사용에 대해서 거리두기를 하는 편이다. 그는 이것이 물질과 분리된 관념적 형이상학을 가리키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노글처럼 세계관을 기호 시스템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이 경우 기어츠의 문화 개념을 통해 세계관을 분석할 수 있다. [본문으로]
  10. 목적 부여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것으로 생각해야만 할 이유는 없다. 나는 내가 여기서 제시하는 자아 개념이 퍼스의 기호학적인 자아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정확히 말하자면, 퍼스의 기호학적 자아개념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다) 퍼스의 자아 개념은 에두아르도 콘이 사용하는 자아 개념이기도 하다. 목적 부여의 문제는 현대 정보 이론과 대립되지 않는다. 이는 복잡계에 기초한 형태론적 창발이 평형적 질서를 창출한다는 것을 고려하는 학자들의 공통적 전제이다. [본문으로]
  11. 인력과 척력은 자연적 힘의 두 유형이라 생각되었다. 우리는 흔히 뉴튼이 중력을 발견했다고 말하지만, 뉴튼은 정확히 “일반 인력”, 모든 사물이 갖고 있는 일반적인 인력을 발견했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교정하는 “특수 인력들”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이러한 “일반”과 “특수”의 구별은 로마법의 전통에서 비롯되었다) 17-18세기 과학은 이러한 인력과 척력들의 종류를 파악하고 나아가 그 정체를 파악하는 작업이었다. [본문으로]
  12. 정확히 말하자면 팔다리에 좋은 것과 눈에 좋은 것과 배에 좋은 것은 모두 다른 것이고, “나”에게 좋은 것은 저러한 각각에 좋은 것과는 다른 무엇이란 것이다. 이런 각각의 좋음은 영혼이 처소에 깃드는 현상과 상토하며, 비교종교학, 고전학, 고대철학에서 주장되는 통일되지 않은 영혼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13. 나는 “나” 그 자체를 2장 말미에서 “자아self”라고 소개하였다. [본문으로]
  14. 실제로 현대적 공리주의는 바로 이 경계짓기 문제에서 실패하고 있다. 결국 최대다수의 경계와 최대행복의 경계를 구획하지 못하면 아무런 준칙도 제공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의 실패는 공리주의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리주의를 최초로 정교화한 벤담은 이 경계짓기 문제로부터 공리utility” 개념을 추상해낸 것이지 쾌와 불쾌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벤담식의 공리주의에 대한 가장 뛰어난 현대적 정교화는 그렇기에 현대 공리주의라기보다는 하트(H. L. A. Hart)로 대표되는 분석법학 전통이다. 그들은 이미 따르고 있는 규칙들을 조정하는 것으로 공리 개념을 추상해내며, 그렇기에 최대 개념은 실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경계의 단위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조정되는 것이다. 이 경우 경계짓기는 실효적 경계의 조정으로 이해되기에 애매함이 생기지 않는다. [본문으로]
  15. 나는 이러한 점에서 카스뜨루가 이러한 “나”가 세계 전반에 펼쳐진 “세계영혼”으로 해석하는 것은, 원주민의 사고라기보다는 카스뜨루 본인의 형이상학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애니미즘이 반드시 세계영혼Anima mundi 개념으로 귀결될 이유는 없다. 세계영혼은 애니미즘을 정교화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방향일 뿐이다. [본문으로]
  16. 근세적 사회성이 이러한 특정 집단과의 동일시를 포함한다는 것을 양선이 선생은 잘 보여준다. [본문으로]
  17. 이는 레비-스트로스가 해석한 루소와 같다. 그가 자기애를 언급하지 않고 연민만을 언급한 것은 이러한 혼동에서 자기애와 연민의 구별은 별로 중요치 않기 때문이었다고 선해할 수 있다. [본문으로]
  18. 많은 오해와 달리 칸트는 이러한 예지계의 나를 실체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러한 실체화를 거부한다. 그는 이것이 하나의 표상(즉 기호)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표상이 요구되는 것은, 우리가 이치에 맞는, 즉 합리적이라고 스스로가 생각하려면 요구되는 전제(정확히 말하자면 이는 논리학에서 말하는 선제presupposition에 해당)여서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신비적인 형이상학이 아니라 실존과 기호가 결합된 기호학이다. [본문으로]
  19. 어느 정도의 괴리는 문제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근본적인 위협이다. 인식의 문제에 있어 이러한 위협을 쿤은 패러다임의 “위기”라고 부른다. 실존의 문제에 있어서 이러한 위협을 베이트슨은 거짓화의 문제라고 부른다. 베이트슨은 실존을 가능케 하는 명제들이 거짓으로 판정될 위기에 처하는 사태로 은유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20. 여기서 모순적이라는 것은 가치부여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가치 있는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가치 있는 존재여야만 한다. 코스가드가 지적하듯이, 가치 부여가 가능한 자살은 “가치 있는 존재”로서의 자신을 지키기 위한 행위에 가깝다. 자살의 가치부여는 현재 존재하는 자신과 “나”를 동일시하지 않고, 현재의 자신을 공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나”에 동일시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1. 이를 사냥의 문제로 엮지는 않지만 카스뜨루에 영향을 받은 Vilaça도 이와 비슷한 “자아의 불안정성”을 고찰한다. 카스트루 또한 이 문제를 다루며 그가 증여가 약탈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문제 때문이다. [본문으로]
  22. 정확히는 혼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는 능력 상실의 상태를 가리킨다. 맹인이 시각을 상실한 것처럼, 영혼이 영혼으로서 다른 영혼들을 인식하는 근본적인 능력을 상실한 것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23. 즉 자연법을 어긴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24.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 장례나, 문제가 되는 영혼들을 달래는 주술이 가능해진다. [본문으로]
  25. 베이트슨의 용어를 따라 이를 재기술하자면, 반증들을 논박함으로써 실존을 지탱하는 명제들이 공고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반증가능성 속에서 공고해지는 과학자들의 사회라는 포퍼의 관점과 유비되는 도덕적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26. 농경으로 인해 사냥이 삶에서 부차적인 것이 됨에 따라 사냥에서 얻던 의식을 의례로 통해서 얻게 된 것이라는 주장 또한 있다. 인류학자 클럭혼과 종교학자 발터 부케르트가 이런 입장이다. [본문으로]
  27. 위기 상황에서 민족적 정체성이 고취되는 것이나, 물에 빠졌을 때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게 되는 것과 비슷하다. [본문으로]
  28. 할랄은 이런 점에서 이러한 “사냥” 특정한 제도 속에서 잔존한 흔적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으로]
  29. 나는 여기서 특정한 상징적 의미를 보유한, 서사처럼 상징화를 가능케 하는 요소들을 포함한 환경세계를 경관으로 정의한다. 이는 앤서니 스미스와 하르트무트 로자의 구도를 발전시킨 것이다. 환경이 서사를 갖는다는 것은 공간적 배치와 이를 경유하는 단계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섀그넌은 야노마뫼 족이 이러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생애를 구축한다고 진술한다. 이는 모빌리티 이론에서도 언급되는 한 가지 가능한 구조화 방식이다. [본문으로]
  30. 내가 여기서 “위협적이지 않은 환경세계”라고 서술한 것은, 전쟁과 같은 위협적 상황에서는 존엄성의 중요성이 체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31. 이는 슬로터다이크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32. 또한 이를 기계로 이해하는 것은 윤리적으로도 중요하다. 슈미트가 지적하듯 유기체론은 책임을 전가하는 구조를 갖는다. 기계라는 은유는 증여가 약탈이기도 하며, 우리의 생명은 다른 생명들의 죽음을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은유이다. 폭력적인 은유는 폭력적인 사태를 기술하는 데 있어 적합하다. 내가 짐작하기로는 섀그넌은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뒤르켐적 인류학을 비판하고 있다. 죽음을 체계적으로 생산해내는 전쟁상태를 분석할 수 있을 때여야만 인류를 온전하게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