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쪽글

김재인 선생에게 반대하며 - 철학의 의의

최근 알라딘 서재를 탐방하다가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은 책에 대해서 말도 안 되는 글을 쓴 것을 보고 화가 나서, 그 사람이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 받은 카페에 들어가봤다. 카페 글들을 보던 중 김재인 선생의 글을 옮긴 것이 있어 읽어봤는데, 반박할 필요가 있어서 반박을 해보았다. 평소에 내가 하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반응을 보였음을 눈치챌 것이다. 나에게 철학 공부는 철학의 쓸모 자체를 고민하는 것이니 너무나도 당연한 반응이다. 내 블로그에 방문할 혹시모를 독자를 위해 카페에 남긴 글을 공유해본다.

 


 

철학함의 의의에 대해서

 

최근 어느 분께서 김재인 선생의 철학, 되도록 공부하지 말자를 공유해주셨습니다.(https://1boon.kakao.com/ppss/5bc443bb709b530001a3415d)

저는 김재인 선생의 진단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결론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가 없기에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일단 제가 동의하는 것부터 말씀드리죠.

김재인 선생이 지적한 것처럼, 철학은 대체로 아마추어 철학자들을 통해서 발전을 하였고, 그들의 철학은 자신의 삶 속에서 등장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행된 것입니다. 그러니 철학을 제대로 하고 위해서는 삶 속에 등장하는 문제들을 포착할 줄 알아야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전문적으로 철학을 다루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의식을 제대로 갖고 있지 않기도 하고, 이것들을 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김재인 선생의 경험이나 제 경험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이때까지 본 철학 제도와,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철학적 문제의식을, 단순히 문장, 명제, 말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이 삶 속에서 어떤 구체적인 문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에 대해서 무관심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철학 전문가=제도 속에서의 전문가=철학 교수 및 철학 박사=철학함에 대해 무관심함이라는 김재인 선생의 진단이 들어맞는 것이지요. 저도 이러한 현실은 잘 알고 있고, 우리가 철학 전문가라고 할 때, 제도적으로 전문성이 담보된 철학 박사들, 직업적인 철학 교수들을 가리킨다는 것도 사실인 듯합니다.

 

김재인 샘은 이러한 진단 속에서 두 가지 결론을 내놓습니다. 모든 사람이 철학을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과, 철학은 문제의식이 생기고 나서 하면 된다는 주장이지요. 이러한 결론도 자연스러워보입니다. 저 또한 모두가 철학을 해야만 한다는 주장은 과도하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주장은 김재인 샘이 지적한 것처럼, 철학에 대한 이상한 환상에서 비롯되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하지만 저는 모두가 철학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 사회적으로 좋다고 생각하며, 살다가 문제의식이 생기고 나서야 철학을 하면 된다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앞에 제가 단서를 단 사실 판단과 관련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철학을 하면 사회적으로 좋거든요.

 

여기서 제가 많은 사람이 하면 좋다는 철학이 무엇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겠군요. 김재인 샘도 말씀처럼, 저 또한 철학을 사고방식으로, 사고의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구나 생각은 하고 살기 때문에 사고방식이나 사고의 기술이란 말로는 철학을 규정하기에는 부족하죠. 철학은 서술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규범적인 의미에서의 사고방식, 사고의 기술입니다. , “좋은사고방식, “좋은사고의 기술이지요. 이렇게 얘기를 하면 철학이 좋다는 말은 말장난처럼 담보될 수 있지요. 좋은 사고방식을 배우는 것은 당연히도 좋을 테니까요. 중요한 것은 여기서 말장난처럼 좋은을 이곳저곳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좋은 사고방식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지요.

 

저는 철학을 좋은 사고방식”, “좋은 사고의 기술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 말은 이런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도 합니다. 사고방식은 여러 종류이고, 사고의 기술도 여러 종류이며, 그 중에서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나쁘다는 것이지요. 제가 좋은을 붙였던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고방식이, 여러 종류의 사고의 기술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충 합리와 비합리로 구별하지만, 사실 합리적인 사고방식도 여럿이고, 합리적인 사고의 기술도 여럿입니다. 문제는 어떤 것들이 좋은 것이냐는 것이겠죠. 이것은 단순히 특정한 사고방식, 사고의 기술만을 옹호하는 것만도 아닙니다. 어떤 사고방식이 어떤 경우에는 좋은 사고방식이지만, 같은 사고방식이 다른 경우에는 좋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케이스 바이 케이스란 소리입니다) 그렇기에 좋은 사고방식을, 좋은 사고의 기술을 철학이 수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사고방식과 사고의 기술이 어떤 것들이 있으며(유형에 따라 나열하는 것이지요), 어떨 때 어떤 것을 사용해야하는지를 다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철학은 사고(thought)를 공학(engineering)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김재인 선생도 저의 철학 정의에 대해서는 동의할 것입니다. 때문에 사고 공학으로서의 철학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 이러한 사고 공학은 누구나 배우면 좋은 것입니다. 아마도 선생께서 저와 다른 결론을 내린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겠지요. 이러한 사고 공학을 우리가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겠지요. 앞서 언급했듯이, 현실적인 철학들은, 삶을 살면서 특정한 문제를 마주하고, 그러한 문제를 해결할 때, 특별한 사고법이 필요하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러한 사고법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위대한 철학자로 기억되는 이들과 같은 문제를 고민할 수 있어야하지요. 그런데 그러한 문제를 의식하는 일, 그러한 문제가 정말로 해결되어야할 문제라고 고민하는 일이 모두에게 열린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마따나 이것은 이미 고민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고민될 수 있는 종류의 문제일 수 있는 것이지요. 아마도 김재인 선생은 이 이유에서, 이러한 문제를 의식하는 일은 이미 그러한 문제를 의식한 이들만 수행할 수 있는 것 같다는 점에서 철학이 모두에게 열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은 오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철학자들과 같은 종류의 문제의식을 갖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제의식을 가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전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철학적 문제의식은 단순히 성격적 차원에서 누구에게 생겨나고, 누구에게 생겨나지 않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철학적 문제의식을 갖기 위해서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틀이 필요하고, 무엇이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고민할 수 있는 능력을 계발할 필요가 있지요. 철학적 문제의식은 살다보면 그냥 형성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훈련을 통해 계발되는 능력입니다. 저는 여기서 훈련을 통해 계발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다른 말로 하자면,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철학책을 읽지 못하고, 어려워하는 이유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려워하는 것은 도대체 왜 이 철학자가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지요. 그들이 도대체 왜 이런 소리를 이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지는 역사적으로 탐구할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주제입니다. 그것들이 역사적으로 탐구될 수 있다는 것은 이것들이 학문적으로 연구될 수 있고,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설명들은 대중들에게도 제공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설명을 듣고도 문제의식이 생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지금보다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고, 가지게 될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적어도 지금처럼 철학자들이 왜 이런 소리를 하면서 인생을 낭비했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뜬구름 잡는 소리를 늘어놓지 않는다면 말이죠.

 

여기서 저는 한 가지 문제에 대해 더 대답해야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지금보다 많은 사람들이 철학적 문제의식을 갖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해도, 그것이 정말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지 물어볼 수 있는 것이지요. 철학의 사고 공학이 정말로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그런 능력이냐고 물어볼 수 있는 것입니다. 좋은 것이라고 해도, 모두가 그런 좋은 것을 갖는 것이 딱히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소주보다 위스키가 좋다고 해서 온 세계 사람이 위스키를 소비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앞서 제가 언급했듯이, 특정한 경우에 좋은 사고방식, 사고의 기술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모든 경우에 좋은 사고방식, 사고의 기술은 아닐 수 있거든요.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이 카페에 올라오는 많은 문제들, 행복한 삶, 정의로운 세상, 좋은 삶과 좋은 세상을 꿈꾸는 것이 정말로 가치 있는 일일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들. 이러한 물음들에 대해 고민하고 답하는 것이 과거 철학자들이 작업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철학이 제공하는 좋은사고방식과 좋은사고의 기술은 그러한 물음들에 대해서 좋은 사고방식과 좋은 사고의 기술을 가르쳐주는 것이지요. 저는 그러한 것들이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해보입니다. 또한 좋은 세상을 만드는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세상을 이루는 우리들이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이것은 국가적 차원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 좋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국가 또한 더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는 김재인 선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김재인 선생은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철학의 무쓸모에 대해서 지적한 것이지요. 하지만 전 이것이 철학의 진정한 얼굴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이것을 우리가 바꿔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력한다면, 제도 속에 있는 많은 이들도 현실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곳에서 더 나은 철학이 세상에 제공될 수 있겠지요. 철학함은 현실을 인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바꾸기 위한 것이란 것을 우리가 다시 기억한다면, 제도로서의 철학도, 현실로서의 철학함도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이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아야합니다. 단순히 환상을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문제들을 철학자들에게 제기해야합니다. 그러한 문제들을 철학자들이 해결해냄으로써 철학의 쓸모는 입증되고, 철학의 효용이 현실화될 테니까요.

 

너무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철학에 대해 회의하는 것은 이러한 변화의 시작점입니다. 지금 여기서부터 철학함은 시작됩니다. 칸트의 말마따나 감히 알려고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