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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의 이해를 위해서

애도의 이해를 위해서.

 

애도라는 단어는 알고는 있어도 볼일은 없는 단어 중 하나이다. “삼고빔” 같이 입에 착착 잘 달라붙는 단어가 있으니, “애도”라는 단어가 나올 일은 거의 없는 듯하다. 물론 우리가 하는 다양한 활동들이 “애도한다”라는 말에 잘 맞아 떨어지겠지만 말이다.

 

그런데 요즘 애도라는 단어들이 자주 목격된다. 세월호 사태 이후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하고, 철학에는 예전부터 들락거렸던 놈 같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자주 목격되고, 목격담이 들려오는 듯하다. 사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철학 바깥에서의 공습이다. “환대” 따위의 말로 표현되던 것들이 “애도”로 둔갑해서 신출귀몰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자를 말하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애도” 또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애도하다...?” 무엇을 어떻게 왜? 답은 항상 환대와 다르지 않다. 이런 물음들은 타자 지향적이지 않고, 이기적이고, 인간중심주의적이고, 반자연적이고, 서양-백인-남성주의적이라는 소리만 들려온다. 하여간 환대는 좋은 것이고, 하여간 애도는 좋은 것이다. 타자의 얼굴과 타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명령과 함께, 존재론적 전환, 비인간 행위자, 존재론적 기호들, 여성-되기 따위가 함께하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는 것인지 물으면 왠지 공격적인 답만 돌아온다. 누구든, 서양인, 백인, 남성, 인간의 낙인이 찍힌다.(마지막은 나쁜 것이긴 한가?) 하여간 너의 존재의 근원이 저것들이라 문제라고 한다. 타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이 타자를 포용한다고 말한다. 뭐가 되었든 반성하고 배우라고 한다.

 

이런 경험 속에서 말만 들어도 기분 좋은 말들이 목격된다. “애도의 애도를 위해서” 뭔지는 모르겠지만, 기분은 좋다. 구체적인 실천들을 위한 유형 분석들이 나오길 바란다. <사상의 좌반구>는 그런 점에서 DIY 목공 입문서 같아 보인다. 몸을 움직이면서 패턴들을 비교하게 만드는 그런 책 말이다. 하지만, 애도의 애도는 너무 나간 것 같기도 하다. 모르는 활동으로 모르는 활동을 수행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철학이 사용하는 근본적인 능력이 “이해력”이고, 그 작업들은 항상 “이해”를 수반한다는 고전주의적 견해를 받아들여, 아는 활동으로 모르는 활동을 수행하는 것이 나아보인다. 애도의 이해를 통해 애도를 애도하는 그런 것 말이다.

 

여기저기서 목격되는 것 같지만, 애도라는 단어는 일관되게 프랑스 철학의 냄새를 풍긴다. 보들레르의 <무덤>이 떠오르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애도는 무덤이라는 것을. 애도는 타자 지향적인 무엇처럼 소개되지만, 실제로 여기서 등장하는 타자는 항상 유령이자 유골이고, 무덤 속으로 봉인되는 타자이다. 타자 지향적인 것 치고는 매우 타자를 억압하는 짓거리처럼 보인다. 환대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요상하게도 “이것 먹고 떨어져”의 냄새가 풍긴다. 무덤 앞에서 애도하는 것이 틀린 것일까? 당연히도 애도 담론은 무덤 앞을 우리의 장소로 가리킨다. 그렇다 그것은 실제로 타자를 폭력적으로 억압하는 한 형식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타자 지향적이라는 것인가? 그것은 여기서 다뤄지는 타자가 위치하는 장소가 실재로 존재하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는 타자를 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령을 목격할 필요가 있다.

 

유령과 영혼을 분간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좋은 구별법은 이것이다. 보이지만 알 수 없는 것은 유령이고, 알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혼이다. 나의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항상 느낀다. 그 정체가 명료하다. 나 자신은 나 자신에게 타자이기도 하지만, 영혼은 나에게 느껴지는 바로 그 무엇이기도 하다. 우리는 영혼의 존재에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반면 유령은? 유령은 보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엇이다. 신출귀몰한다. 하나인지 여럿인지도 알 수가 없다. 유령을 쫓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일은 그 정체를 파악하는 일이다. 이름과 수가 정해지면, “사냥법”은 항상 존재한다. 그것이 “이름 있는” 존재라면, 그 혼령의 원을 달래고, 시신을 수습해서 묘를 세운다. 그렇게 마을은 평화를 되찾을 뿐 아니라, 그 묘로부터 보호 받는다. 우리는 산자와 죽은자 사이에서의 계약을 목격한다. “이름 없는” 존재는 좀 복잡하다. 그런 애들은 “봉인”하거나, “명멸”해야 한다. 뭐가 되었든 유령 또한 정체 파악이 핵심이다.

 

유령의 정체를 파악한다고? 그렇다면 영혼과 다를 게 없지 않나! 같을 때도 다를 때도 있다. 이름 있는 유령은 그래서 영혼인 것이고, 이름 없는 유령은 일종의 귀신인 것이다. 귀신은 개체성이 없다. 유형만 존재한다. 그것들의 이름은 종을 가리킬 뿐 개개인을 가리키지 않는다. 도깨비와 귀신은 종적으로만 구별되지 개체로서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정체가 없고 영혼일 수 없다.

 

애도를 이해시킨다면서 심령적인 이야기만 잔뜩 꺼내고 말았다. 하지만 이것 또한 다 이해의 한 양태이다. 애도는 바로 유령들 중, 이름 있는 자들을 식별하여, 그들과 관계 맺는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사라졌음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흔적으로 남았다. 그들의 원한이 만들어낸 어떤 현상들로 말이다. 그것들은 반복되는 사건들로 자신을 표현한다.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반복된다. 낯선이의 얼굴을 보면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드는 할머니처럼, 전쟁은 그저 세트장 속의 연기라고 말하는 한 병사처럼. 이해될 수 없는 무엇이라도, 그것이 반복되면 눈에 띄기 마련이다. 하나인지 여럿인지 몰라도, 일단 눈에 띄는 것은 하나이다. 그 반복들이 남긴 흔적들을 통해 유령의 정체를, 영혼의 이름을 밝히는 것이 애도의 첫 단계이다. 그렇다면 다음은? 역설을 해소할 일만 남았다. 이름을 가진 영혼이 유령이 된 것은 그의 이름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이름 있는 유령의 존재는, 그 존재는 없어지지 않았음에도, 그 존재를 잃어버린 역설을 가리킨다. 이런 역설에 이유가 없을리 만무하다. 그 이유를 사로잡는 것이 “애도”라고 할 수 있다.

 

무당들이나 관심 가질 이상한 소리들을 철학자들이 하고 있으니 요상한 일이다. 무당과 철학자 모두 연결자들이라는 점에서 비슷하긴 하여도 이것은 아니지 않은가 싶다. 이런 요상함은 역사 앞에서는 무당과 철학자 모두 미천하다는 불변하는 자연법칙에서 비롯된 것이다. 자연 앞에서는 항공모함과 쪽배가 평등하듯, 무당과 철학자 모두 역사 앞에서는 평등하다. 이미 이루어진 일이 있다. 이 일은 이해를 거부한다. 그것은 날선 것이라 품기에는 너무나도 위험하다. 하지만 내가 원하지 않았어도 그것은 이미 내 품안에 들어왔다. 그것이 나를 상처 입히게 만든 것의 원인은 내가 아니라도, 그것이 나를 상처 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유는 없고, 이해할 수 없어도 말이다. 강산도 10년이면 변하는 법인데, 60년간 변하지 않는 집이 있다. 그 집의 불변함은 기이함을 갖고 있다. 전쟁 때 헤어진 아들이 집을 찾지 못할까 걱정인 부모님의 마음은 세월마저 무력하게 만든다. 그것은 60년 동안 변치 않고 있다. 우리는 그 광경에서 기이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 사라지지 않는 광경은 낯익은 낯섦을 뿜어낸다. 하지만 이 광경은 지금 내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이다. 이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것을 안 볼 수는 없다. 그렇기에 애도가 필요하다.

 

애도는 전쟁의 산물이다. 우리는 과거를 잊고 싶어도, 그것은 잊히길 거부하곤 한다. 잊혀진 줄 알았던 기억도 기회가 되면 우리의 기억으로 회군해온다. 그것은 잊히는 것을 거부하는 것을 자신의 본성으로 삼고 있는 것만 같다.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심리학에서 기억보다 망각이 더 어려운 주제라는 것이 실감이 난다. 잊고 싶은 기억은 망각 이후에도, 망각함의 기억으로 우리를 기습하곤 한다. 낯섦과 낯익음을 모두 품고 말이다. 이러한 사태 앞에서 우리는 그것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워야한다. 그 기억이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들어야만 한다. 그 기억의 이름을 찾아주어야만 한다. 그것을 무시하는 것은 현명한 대처가 아니다. 무시하면 통제되지 않는 일만 벌어질 뿐이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은, 터져도 괜찮은 곳으로 옮겨질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라도 찾아질 필요가 있다. 그렇게 그것들은 터져도 괜찮은 곳으로 옮겨진다. 무덤 속으로.

 

애도는 그저 타자를 위한 것이 아니다. 타자는 전형적인 무한정자이다. 그것은 여럿이고, 무엇이 들어있을지도 모르는 그런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아무거나 다 된다. 그렇기에 타자를 말할 때는 타자들 중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잘 분간해야한다. 이것을 지키지 못하는 것을 경솔함이라고 부른다. 동면에 빠진 뱀을 일으켜 난롯가에 모시는 것처럼 말이다. “배은망덕하다!”라고 외칠 때는 늦었다. 손님에게는 환대를 담은 밥그릇을 차버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애도의 타자는 기억, 그중에서도 잊혀졌지만 잊혀지지만은 않은 기억이다. 그것들은 사라졌어야만 했던 것이기에 억압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억압은 항상 손해 보는 장사이다. 억압하는 자는 억압당하는 자에게 을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달래는 법은, 그들이 아니라 저들에게 달려있으니 말이다. 애도는 억압이지만, 억압지만은 않은 억압이다. 애도는 타자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화해이다. 애도는 타자와 공존하지만, 함께하지는 않는 함께함이다. 애도는 과거를 잊지 않으면서도 과거와 화해하는 외교전술이다.

 

마지막이 중요하다. 이것은 외교전술이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전술이다. 모루와 망치 전술처럼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때그때 달라지는 전술이다. 모두가 모루와 망치를 알지만, 모두가 이기진 않는다. 누군가는 지고 누군가는 이기는 법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활용들이다. 우리는 <전쟁론>에서 유형들을 보게 된다. 승리로 가는 왕도는 없다. 자로는 무게를 잴 수 없고, 저울로는 온도를 잴 수 없는 법이다. 상황의 압박들 속에서 돋아나는 추상들에 집중해야한다. 원래부터 생태계는 최악의 환경을 최적의 세계로 만듦으로써 형성되는 법이다. 변수들을 단순화하고, 그들의 힘을 역전시켜야한다. 형태들을 탐구하고, 그것들을 일반원리의 부름에 복속시켜야한다. 우리는 여기서 판단력의 성취를, 정신과 천재성의 업적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애도를 위한 교과서는 없다. 하지만 사례집을 통해 우리는 시뮬레이션해볼 수 있다. 애도를 위한 철학은 그렇기에 그 실용성에 의해 평가 받아야한다.

 

애도의 애도를 위해서는 올바른 판단 원리가 필요하다. 실용성 없는 글들은 몰아내자. 실용성이 있다면, 그것들이 우리 현장에 적합한지 생각해보자. 우리의 작전계획 속에 사막이라는 전장이 없다면, 사막전은 단숨에 지워버리자. 애도의 애도를 위해서 우리는 조금 손해 보는 장사를 시작해야한다. 맨날 야근하는 작전참모가 되는 것이다. 그는 지휘관의 영원한 봉이다. 하지만 지휘관은 작전참모의 다른 얼굴이다. 애도의 애도를 위해서 우리는 사례 수집에 뛰어들어야한다. <사상의 좌반구> 다음에는 <우반구>가 필요할 것이다. 좌와 우만 필요한가? 우리는 위아래, 앞뒤도 분석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삼차원에 살고 있으니까. 우리가 여섯 방향을 모두 되찾았을 때, 그때서야 우리의 눈은 방향을 되찾을 것이다. 어디가 앞이고 뒤인지, 어디가 좌고 어디가 우인지,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가랑이 사이에 겨드랑이 상에 배위에 눈이 달리지 않고, 어깨 위에 자리한 얼굴에 눈이 달릴 것이다. 그제서야 팔다리가 제대로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이때까지 제멋대로 움직이던 그 신체들은, 팔과 다리의 이름에 걸맞은 근육과 핏줄로 부풀어 오를 것이다. 눈이 달리고, 팔다리가 부풀어오르면 우리는 달리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우리에게 하루가 주어질 것이다. 목표가 생길테니까. 탈구된 관절들이 제자리를 되찾듯, 탈구된 시간이 제자리를 되찾고, 우리에게 “시대”가 열릴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애도의 이해가 필요하다. 갈기갈기 찢긴 유해를 수습해야 디오니소스와 오시리스가 돌아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