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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탐사를 위한 여행지도: 생성과 존재, 성관계와 결혼

현대철학, 특히 프랑스 철학에서는 성관계에 대한 얘기들이 난무한다. 가타리처럼 인기남이라면 몰라도, 별로 인기도 없었을 거 같은 아싸 철학자들이 성관계 어쩌구하는 건 좀 웃긴 일일지언데, 그걸 읽는 사람들이 진지하게 그것들을 분석하는 걸보면 이제 웃을 수만도 없다. 사실 성관계 어쩌구하는 연구들이 나온 것은 정신분석학 덕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대체로 그게 나온 맥락은 도외시되고 말만 남아서 논의되는 것 같다. 자신들의 부족한 경험에 비추어보고 이러쿵 저러쿵 씨부리고, “성관계는 없다는 등의 요상하고 말도 안 되는 말들을 반복재생산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나의 주된 논점은 성관계를 씨부리는 담론들을 세상에서 제거하자는 철권통치를 옹호하는 데 있지 않다. 적어도 그런 얘기를 맥락에 맞춰서 의미 있게, 요상하지 않게 쓰자는 데에 있다. 이러한 재맥락화, 무대 설계하기는 한편으로는 역사적인 방법을 통해 성취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구조화를 통해 성취될 수 있는데, 오늘은 구조화를 선택해보려고 한다. 정신분석의 역사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명확하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1. 생성과 존재, 비정언적 존재?

 

일단 생성과 존재에 대한 이상야리꾸리한 소리들은 집어 치우자. 대충 고대 그리스어를 염두에 두고 단순화를 하겠지만, 그 동네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말이나 한문, 인류학에서 연구된 다양한 부족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현상이다. 바로 이다와 있다가 연결되는 그런 것 말이다. 보통 이 현상을 존재사와 계사가 혼동되어서 생긴 서양철학의 2천년동안의 비극 따위로 얘기하고, 우리말에는 존재사랑 계사가 구별된다다하면서 정신승리하곤 하는데, 우리말도 엄격히 따지고 들면 헷갈리는 용례들이 목격되고, 애초에 이게 단순히 말로 구별만 잘 해둔다고 좋은 것도 아니란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애초에 이 애매함을 통해 새로운 사고가 침투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존재사와 계사뿐만 아니라, 동일시하는 표현도 바로 이것과 관련된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사실 존재사 계사 구별이 우리말에 있다고 좋아라하는 양반들은 바로 이 동일시의 용법에 대해 아무 생각도 안 해서 천하태평인 것이다. 문법적으로 이다의 정체는 매우 불분명하고, 여기에 대한 논쟁이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문제는 그렇게 쉽게 해결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단 용례로 시작해보자.

아프로디테는 아름답다.”

이 말을 좀 더 적극적으로 형식화해보자.

아름다움=아름다움

여기서 “=”를 무조건 등호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다-있다를 뜻하는 기호라고 생각하자.

이 경우 아름다움=아름다움이 성립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적어도 아름다움 그 자체는 아름다움이랑 뭔가 관련이 있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다른 경우이다. 아름다움은 다양하게 붙는다. 인물에게도 붙고, 사물에게도 붙고, 추상적인 것에도 붙는다.

아이유=아름다움”, “봄의 생동=아름다움”, “우주=아름다움등등

우리는 다양한 용법에서 아름다움을 쓴다. 그렇다면 이것이 아름다움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여기서 앞의 것들이 뒤의 것들에 포함된다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은 별로 도움되지 않는다.

즉 아이유, 봄의 생동, 우주는 아름다운 것에 속한다는 등의 소리는 어차피 순환논법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아이유, 봄의 생동, 우주 따위가 아름다움이랑 어떤 관련을 맺고, 아름다움이라고 불릴 만하다는 것을 설명하는 일이다.

 

이게 존재와 생성과 뭔 상관이 있는지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매우 상관이 크다. 이다-있다를 퉁칠 경우에, 아름다움=아름다움은 항상 이다-있다가 성립해서 항상 그렇고 항상 있다. 하지만 아이유, 봄의 생동, 우주 따위는 항상 이다-있다가 성립하지 않는다. 맥락에 따라 다르고,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그러니 이것은 항상 그렇고 항상 있는 게 아니라, 어떨 때는 그렇고 어떨 때는 그렇지 않는 그런 것이다. 어떨 때는 그렇고 어떨 때는 그렇지 않으니, 당연히 어떨 때는 있고, 어떨 때는 없다.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다. 그러니 생성이다.

 

존재와 생성 중 존재가 앞선다는 것이 한 주장이지만, 대체로 도움 되는 것은 생성이다. 우리는 아름다움=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사용할 일이 참 없다. 대체로 오 저거 아름다운데? 하면서 이것저것에 붙이고, 이게 정보값이 크다. 그런데 어떨 때 붙이고, 어떨 때 붙이지 않는가? 그때그때 다르다고, 아무렇게나 붙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류학적 가상공간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

 

2. 생성으로서의 성관계, 교접과 탄생

 

우리의 가상 공간은 좀 단순한, 원시적인 마을이다. 그냥 산과 들이 있고, 농사 짓고 사는, 다만 국가는 없는 그런 동네라고 생각해보자. 옆동네랑 더불어 살지만 싸우기도 하고, 싸우면 죽는 사람도 나오는 그런 가상의 세계이다. 이런 마을에도 고귀하다라는 말은 있을 것이다. 없으면, 칭찬의 말 중, 극찬의 말로 아무거나 생각해보자. 이 사람들은 마을 사람들 중 어떤 사람들을 고귀하다고 할 것이다. 예컨대 갑돌이랑 갑순이를 고귀하다고들 말하고 살고 있다. 모두들 이구동성으로 고귀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어느날 사건이 터진다. 옆동네에서 마을을 습격한 것이다. 이때 동네에서 조용히 밭만 가는, 허우대만 멀쩡하지 별신통치 않은 과묵한 사내가 홀홀단신으로 나섰다. 습격당한 마을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어그로를 끌어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었다. 게다가 그는 적들의 공격에 굴하지 않고 반격을 해 옆동네 놈들을 몇 십이나 막아내고 죽였다. 그는 그런 성과와 함께 죽는다. 서서 말이다. 이쯤되면 마을 사람들은 눈이 돌아간다. 영웅적 행태와 죽음은 이 사내를 고귀하다고 부를 수밖에 없게 한다. 그의 이름은 철수, 이제 철수는 고귀한 자이다. 철수를 고귀한 자로 모시기 시작하자, 마을 사람들은 고귀한 자의 급이 보이기 시작한다. 갑돌이랑 갑순이도 성실하고 고귀하긴 한데, 철수랑은 비교가 안 된다. 철수는 고귀함 그자체이고 갑돌이랑 갑순이는 그렇지 않다. 얘넨 그냥 인간이고, 철수는 킹갓엠퍼러 고귀한 자이다. 철수는 고귀함의 아이콘이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용법들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전까지는 적당히 말 잘하고 친절한 사람이 고귀한자였다. 하지만 고귀함의 아이콘 철수는 그렇지 않았다. 붙임성이 없고, 무뚝뚝했다. 이제 누가 붙임성이 없고, 무뚝뚝하다고 뭐라 하면 할 말이 생긴다. “철수도 그랬는데?” 할 말이 없다. 아니면 이런 말 정도? “철수님과 너랑 같니?”

 

철수가 고귀한 자인 것은 분명히 특수한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철수 자체가 고귀함의 아이콘이 되면, 특수한 사건에 해당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실제로 그 경계는 모호할 법하다. 과묵함은 대체로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지만, 말 없는 사람이 야마가 돌면 정말로 더 무서운 법이다. 이때 야마 돌아 아무나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은 꽤나 중요하다. 대체로 진정한 위업은 아무나 못하는, 정신 나가야만 할 수 있는 일과 관련이 크다. 경험적으로 말 없는 게 야마 도는 것과 관련이 있고, 야마 도는 게 위업과 관련이 있으면, 말 없는 게 위업과도 관련을 맺는 것인가? 애매하다. 하지만 우리의 사례, 철수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설득력이 커진다. 철수가 애매한 관계들은 좀 더 투명하게 만들어준다. 철수라는 이름으로. 즉 과거에는 고귀함에 직접 연결되지 않던 것들이, 철수라는 예외적 사례가 갖는 효과로 인해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즉 철수는 고귀함과 관련을 맺었고, 이전에는 고귀함과 관련 없다고 생각되었던 것을 철수의 영향으로 고귀함과 관련 맺게 된 셈이다. , 철수-고귀함 관계가 과묵함-고귀함을 낳은 것이다! 물론 철수를 매개로; 고귀함-(철수)-과묵함-철수

 

양자가 결합해서 새로운 것을 낳는다. 익숙한 사례가 무엇인가? 우리의 (가상이든 실재이든) 원시인들은 남녀가 아이를 낳는 일을 떠올렸다. 서로 다른 것이 결합을 하고, 둘 모두를 닮은 것을 낳는다. 남녀 관계만큼 비슷한 것도 없다. 그래서 이러한 주어-술어 결합과 의미의 생성을 남녀관계에 은유로 표현하곤 한 것이다.(물론 의도적 은유가 아니기도 하다) 유사한 것을 유사한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표현의 일반법칙이기에, 유사한 것을 유사한 것으로 표현하게 되고, 유사한 것을 유사한 것으로 설명하게 된 것이다. 즉 주어와 술어의 결합을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표현하고, 이 결합의 특수성으로 인해 생겨난 새로운 의미를 그 자식으로 둔 것이다. 여기서 성관계의 은유가 나온 것이다.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약간 부연할 것이 있다. 그럼 어느 쪽이 여자고 어느 쪽이 남자인가? 이건 책마다 다르고 문화마다 다르다. 그래서 단호히 이거다 저거다 말하기 어렵다. 그냥 어느 쪽이든, 하나의 방향으로 설명하기 시작하면 설명되기 시작한다고 보면 된다. 예컨대 주어가 남자라고 상상해보자. 철수=고귀함, 철수=과묵함, 철수=남자 등등. 철수는 이곳저곳에 붙으면서 뭔가 연결을 성사시키고, 새로운 것을 낳게 한다는 점에서 남자로 은유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이는 남자의 의무를 상기시키게 한다. 즉 씨를 뿌리면 가꾼다는(농사의 은유는 성적 결합의 은유와 항상 결합한다), 남자는 임신시킨 여자에게 의무를 다해야한다는 그런 논리가 여기에도 적용된다. 즉 어떤 것이랑 결합되는 순간 일종의 의무가 생긴다. 마땅함이 생기는 것이다. 철수=남자 관계가 성립할 때, 철수가 남자라는 의무를 다하지 않으면 비난받는 것은 비슷한 논리에서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에 걸맞지 않으면 관계가 깨져버린다. 철수가 자신이 관계 맺은, 자신과 다른 무엇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면 그 의무는 수행되어야하고, 아니면 이름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술어를 남자라고 해보자. 고귀함은 이곳 저곳에 붙는다. 철수에게도 붙고, 갑돌이에게도 붙고, 갑순이게도 붙는다. 그렇게 붙어서그들에게 고귀함의 씨앗을 뿌린다. 그러면 이제 철수도 갑돌이도 갑순이도 이것을 품고 키워낸다. 그리고 어떤 특별한 위업과 함께 고귀하다라고 불릴 일을 해낸다.(산출한다) 이렇게 보면 술어가 남자고 주어가 여자가 된다. 그러니 어느 쪽이든 상관없고 일관적이기만 하면 된다.(설명은 역방향으로, 남자가 아니라 여자의 은유를 중심으로도 설명될 수 있다)

 

3. 존재로서의 성관계, 결혼

사실 정신분석에서 성관계에 대한 얘기는 딥따 나오지만, 결혼에 대한 얘기가 나오는 책은 적다. 다만 몇몇 철학책에서 가끔씩 언급되기도 하고, “상징개념이랑 큰 관련이 있는 만큼 설명할 이유는 많다.

 

이때까지 얘기한 사례를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보자. “철수=고귀함이 성립하였는데, 이 경우 철수는 새로운 의미를 추가했을 뿐, 다른 의미들을 제거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철수처럼 킹왕짱 고귀한 인물이 등장하면, 언어 사용에서 있어서부터 역전이 발생한다. 즉 고귀한 사람을 가리킬 때, “고귀하다는 말보다, “철수 같다”, “거의 철수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창렬혜자의 용법을 생각하면 되겠다. 그런데 이런 사태쯤 일어나면, 이제 의미 역전까지 일어나곤 한다. 즉 다른 결합을 막는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다. , 철수가 고귀함의 표준이 되면서, 이전까지 고귀하다고 생각되었던 이들이 배제되기 시작한다. 그렇다 결혼은 다른 이들과의 교접을 금지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 의미 확장을 넘어서, 다른 의미들을 막아서고, 명확히 그 경계를 긋게 만드는 작업이 바로 결혼이 되겠다.

 

이쯤 하면 대충 감이 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게 상징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은유나 상징은 뭐 다 비슷한 말이긴 한데, 이 경우는 상징을 상징화하여, 특정한 용법만을 가리킬 필요가 있다. 은유나 상징, 알레고리 해석 따위는 일종의 의미 창출들을 가리킨다. , 그냥 보기에는, 보통은 별 의미 없는 를 가리키는 무엇인가를,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는 를 가리키는 것으로 변환시키는 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꼭 의미 없는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것만은 아닌데, 기존의 언어에서 딱 들어맞게 말할 수 없을 때, 이런 방식으로 말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신화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 같은 게, 원래 사람들이 안 하고, 합리적인 사고가 등장해서 시작된 게 아니라, 애초에 그들의 사고법 자체가 알레고리적으로 그러한 언어와 붙었다는 소리를 하려는 것이다. 뭐 자세한 것은 넘어가고, 일단 이것들의 한 사용에 주목해보자.

 

중세인이 되어 고딕 성당에 들어가는 것을 상상해보라. 창을 제외한 모든 벽에 알 수 없는 조각들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을 찾아보아라. 당연히 그 의미를 모르겠는 그런 것으로. 그것을 고른 다음에 본당 사제에게 물어보자. 그는 그것이 성서 어디에 나오는 일화를 표현하는지를 가르쳐줄 것이다. 여기서부터 저기까지고 순서가 정해져 있다. 이쯤 되면 들어본 적 있는 스토리인 것 같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그런데 위아래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반응을 보이면, 본당 사제는 웃으면서 각각을 설명해줄 것이다. 고개는 끄덕거리는 기계가 된다. 이제 쓸데없이 묻지 않아도, 벽을 가득 채운 조각들이 의미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나는 모르지만, 물어보면 아는 사람이 나온다. 그리고 왜 하필 거기에 그걸 새겼는지도 알려줄 것이다. 그러니 믿을 수가 있다. 다 알지 않아도, 각 부분은 전체를 위해 있으면서도, 그 자체로 전체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자신의 자리에 당당히 서 있는 것이다. 아주 작은 위치를, 남들이 보기 힘든 구석 자리를 차지할지라도 말이다.

 

이런 감동적인 체험은 세계와 자신의 관계를 표현하기도 해 더욱 감동적이겠지만, 나는 다른 걸 위해 이 얘길 꺼냈다. 성경 해석에서 있어 알레고리의 역할을 위해서 말이다. 지금의 성서에는 주석이 적지만, 중세에는 주석이 빼곡이 있다. 오늘날은 주석이 있어도, 김빠지는 주석 뿐이지만, 이 때 주석은 다르다. 중요한 구절에는 표식이 되어 있고, 잘못 읽으면 큰 일 날 부구절에도 표식이 되어 있다. 특정한 의미를 담긴 구절에는 표식뿐만 아니라 그 의미도 주석에 담겨 있다. 주석은 성서가 굉장히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것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사회 속에서 어떤 위치를 담고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 성서의 특정 구절이 그냥 무슨 뜻인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해서는 이런 뜻이고, 한 명의 신도를 위해서는 이런 뜻이고, 국가를 위해서는 이런 뜻이라는 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즉 문자 그대로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를 가리키지만, 이것은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이 아니라, 오랜 역사를 통해 누적되어 있는 의미를 가리키고, 그것의 기능과 역할이 정확하게 배분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내가 말하려는 상징의 직전 단계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정성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 무엇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자의와 임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규칙이 있고, 그뿐만 아니라 특정한 체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의미 고정이 되어 있다는 것이 되겠다. 그리고 모든 이들이 이것을 인정하고 있고 말이다.(물론 인간이 가진 체계는 제한적이지만, 그것이 바로 그 섭리의 체계의 모사물이라는 것은 모두 인정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런 체계, 은유들이 반영하는 고정된 체계, 그 체계가 법칙적일 때,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법칙적이라는 것의 의미가 중요하다. 철수와 고귀함 사이에서의 법칙성이 아니라, 바로 그 철수가 창출한 의미의 고귀함이, 정의, 지혜, 용기, 경건 등과 맺는 법칙성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체계가 있다. 거기에는 정의, 지혜, 용기, 경건, 고귀 등이 자리 잡고 있고, 서로가 서로와 관련을 맺고 있다. 이때, 이들 사이에서, 이들이 갖고 있는 의미와 힘이 균형을 이루면서 하나의 질서를 이룰 때, 그것은 법칙을 이룬다. 의미 변동은 그들 사이에서의 균형을 깨는 부당한 것, 과도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때 한편으로는 철수=고귀함이 의미의 중심을 차지하고, 다른 것들을 배제하는 사태를(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뿐이고, 진정한 철학자는 소크라테스뿐이라는 그런 사태), 다른 한편으로는 고귀함을 비롯한 여러 덕목들이 서로 균형을 이루는 하나의 질서가 창출됨에 따라, 다른 의미로의 확장이 불화를 야기시키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바로 이 사태들의 정당성의 원천이 되는 것이 결혼이라는 결합이고, 이는 두 명의, 서로 다른 성별이 결합하는 것이자, 집안들이 결합하여 균형을 이루는 결합을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 헤시오도스가 신들의 계보를 읊은 것은, 바로 그 다양한 덕목들을 하나의 질서로 포섭하는 결혼/출산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고, 각 덕목을 위한 위계와 기능이 서로의 영역을 권리()로서 보장시킬 수 있도록 분배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 마무리

이쯤에서 마무리하면 될 것 같다. 다만 마지막으로 왜 성적 은유를 썼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게 좋을 거 같다. 결혼과 출산은 인간들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관계 창출의 예이다. 게다가 이 관계는 재귀적이기까지 하다. 여기서 재귀적이라는 것은 관계 맺기로 나온 결과물을 또 다시 이 관계 맺기로 포섭하고, 새로운 결과물을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 아들을 낳고, 그 아들도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소리가 되겠다.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것과, 아들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냐고 물을 수 있겠는데, 이것을 통해 매우매우 복잡한 체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결혼, 그리고 출산으로 맺는 관계는 반복 재생산을 통해 그 세부적인 차이들을 드러내면서도 연결해주는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즉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내의 딸의 아들 따위로, 복잡한 관계들을 일정하게 구조화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되겠다. 게다가 이러한 구조화는 위계와 분화가 명확하다. , 서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는 소리가 되겠다. 현대인 입장에서야 복잡한 친족 언어들이 어렵겠지만, 이것이 입자물리학의 근본입자들이나, 유기화학의 결합 공식보다 쉽고 간편하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뭐 그러니까 문자 없는 사회에서 정교한 구조적 사고를 친족 언어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 이걸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사회인류학의 친족 구조 연구서를 참고하라.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복잡한 구조가 단순한 친족 범주를 토대로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을테니.(포르테스의 전설적인 저작을 참고하는 것을 추천한다. 물론 나도 안 봤지만)

 

뭐 다른 건 됐고, 철학하는 사람에게 조금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부족하나마 단순하게 정리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한다. 분석철학 쪽에서는 이런 얘기들을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 합리적 구조를 너무 현대적 버전으로만 생각하고, 다른 구조를 생각 못하는 경향이 있다. 1차술어 논리는 아주아주 현대적 성과물인데, 그 이전시대를 모두 그런 현대 논리학으로만 제단하려는 게 뭔 의미가 있나 싶다. 이런 친족 구조 또한 논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문제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런 언어로는 발생이라는 사태를 매우 잘 포섭할 수 있고, 새로운 사고를 많은 이에게 전할 수도 있다. 대륙철학 쪽에서는 이런 얘기를 원래 굉장히 잘 하고 있었는데, 그 원동력을 좀 잃은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왜 이 얘기가 시작되었고, 이게 얼마나 합리적인 사고 형식인지를 생각 안 하고, 현실의 사태와 자신의 추상물 사이만을 왕복하는 경향이 있단 소리다. 실증연구도 좀 참고했으면 한다. 자신의 부족한 경험과 아주 극소수의 책 속에서 세계 전체를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 않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