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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비-스트로스: 인류학의 아버지, 잃어버린 자연인을 (되)찾아서

0.

우리는 여기저기서 자연을 보호해야한다는 말을 듣는다. 자연을 사랑해야하고 자연을 보호해야한다는 얘기는 정언명령처럼 그 자체로 정당화되는 것처럼 얘기된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저기서 자연을 보호해야한다는 말을 듣는 것만큼이나 자주 자연의 파괴를 목격하게 된다. 이상야릇한 현실이 목격된다. 한편으로는 의무가 범람하고, 모두가 이 의무를 알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의무는 말만으로 전달되지 아무런 효과도 낳지 못하는 것 같다. 맨드빌의 작업을 흉내내어 세상을 바라본다면,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자연보호라는 말과 의무는 위선에 불과한 것임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자연보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연구하고 성토하며 자연을 보호하자고 말한다. 많은 사실들이 범람한다. 위기에 빠진 자연과 인간에게 초래하는 재앙을 밝혀낸다. 우리는 이들 덕분에 자연을 보존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원하던 결과에 도달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처음에 우리가 말했던 것과 너무나도 다르게 된 진실일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보호해야하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이미 받아들이고 있지 않았던가. 단 하나 필요한 것은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결과적으로 자연을 보호하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해를 피하기 위해 자연을 보호해야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과 자연을 사랑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그것은 테르툴리아누스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아는 것이 믿는 것과 다른 것처럼, 아는 것은 사랑하는 것과 다르다. 재앙을 목도하고 자연을 보호하는 일은, 자연을 보호하는 일을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자연의 가치에 감화하여 그것의 가치를 보존하는 것을 의무로써 스스로에게 부과한 것이 아니라, 이득을 위해 기계를 돌리듯이 작동시키는 일과 같다. 그것은 세계를 공장으로 만드는 일이다.

 

1.

레비-스트로스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에 입회하게 된 신규 회원이 이미 죽은 위대한 선배를 위해 찬가éloge를 바치며 자신의 포부를 밝히듯이 루소에게 찬가를 바치고 있다. 내가 이토록 길게 사랑으로써 자연을 보호하는 일과 앎으로써 자연을 보호하는 일을 구별한 것은, 레비-스트로스가 발견한 루소의 천재성이 바로 사랑으로써 자연을 보호하는 일로 향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푸코의 표현에 따르자면 인간 없는 인간학을 창안한 레비-스트로스는 루소의 이름 속에서 인류학의 일을 인간 이상이 되면서, 인간 이하가 되는 일이라고 말한다. 형용모순과도 같은 이 말 속에 있는 진리는 바로 다름의 논리가 아니라 같음의 논리며, 같음의 논리의 유일한 추론규칙이 사랑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레비-스트로스가 사랑을 인류학의 작업에 사랑을 주입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푸코의 말마따나 인간 없는 인간학으로 나아갔다면, 그것은 인간을 혐오해서도 아니고,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도 아니고,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들을 모두 하나의 범주로 다루기 위해서였음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레비-스트로스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의 한 주석을 길게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한다. 그 속에서 루소는 지리상의 발견의 은유를 다시 사용하여, 새로운 지리상의 발견을 촉구하고 있다. 루소는 지리상의 발견 이후 새로운 땅과 새로운 사물들은 많이 획득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그 속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를 새롭게 접하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표시한다. 새로운 땅에서 발견해야할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는 새로운 지리상의 발견을 위하여, 새로운 헤라클레스 기둥을 가리키고 있다. 그 너머에 있을 신대륙을 염두에 두고 말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주석을 통해 루소가 새로운 곳을 가리켰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것을 실제로도 발견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새로운 것은 무엇일까?

 

레비-스트로스 루소의 많은 글들을 언급한다. 그의 직전 시대를 괴롭힌 물음, 루소와 그의 모순 문제를 아는지 모르는지 루소의 거의 모든 글들의 일관성을 말하고 있다. 그의 직전 시대의 위대한 문학자 장 스타로뱅스키가 수백페이지에 걸쳐 밝혀준 루소의 일관성을 그는 단박에 밝히려고 한다. 그는 <2논고><고백>에 은유하고, 다시 <몽상>으로, <대화>로 사부아 신부의 이름으로 <에밀>, 음악과 식물학의 이름으로 <언어 기원론>과 다시 <몽상>으로 나아간다. 마지막의 결론에서는 <사회계약론>이 등장한다. 하지만 등장하는 것은 루소의 글만이 아니다. 그는 루소가 무엇을 연구한다는 것, 글을 쓴다는 것 자체를 하나로 수렴시키고 있다. 그의 열쇠는 <불평등 기원론>이다.

 

2.

<불평등 기원론>의 수수께끼는 모순이다. 자연에서 문화로, 감정에서 인식으로, 동물에서 인간으로의 이행이 바로 이 글이 증명해야할 사실이다. 분명히 이행은 존재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이 이행이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은 모순이다. 이행은 한쪽을 사라지게 만들지 않는다. 이행의 결과는 인간은 자연에 속하면서도 문화에 속한다는 것을, 감정을 가졌으면서도 인식한다는 것을, 동물이면서도 인간이라는 것을 뜻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모순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모순을 만드는 능력이 바로 인간의 능력임을 받아들이면 된다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능력이 연민임을 상기시킨다. 그는 자기편애는 한번 언급하지만, “자기애는 언급하지 않는다. 루소가 자기애연민을 같이 말했고 자기애로 이행을 설명했음에도 레비-스트로스는 연민이 진정한 열쇠라고 말한다. 그가 이것을 열쇠라고 주장하는 것은 진정으로 합당할 수 있다. “연민이 수수께끼를 낳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불평등 기원론>의 한 귀퉁이에 연민에 대한 구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갓 짐승도 동족의 시체는 밟지 않는다고.

 

연민은 감정이지 인식이 아니다. 하지만 이 인식 이전의 감정은 이미 닮은 것을 알아본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레비-스트로스는 바로 이 어떻게의 물음에서 존재감정을 찾는다. 자아는 나로 이루어져있음과 동시에 타자로 이루어져 있다. 깨끗이 비어진 마음이란 것은 없고, 마음은 세계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 이 세계는 한편으로는 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라는 것이다. 여기서 세계와 나는 구별되면서도 구별되지 않는다. 이 이상야릇한 사태를 레비-스트로스는 루소의 이름으로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느낀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내가 느끼는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느껴지는 것이라는 아주 단순한 진실을 통해서 말이다.

 

레비-스트로스는 루소가 이 진실을 깨달았기에 구별의 논리들을 철폐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언어는 차이를 만드는 도구이기에 말로써는 모든 것이 달라지지만, 그럼에도 루소가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진실 덕분이었다고 말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이것이 루소의 천재성의 근원이며, 그가 식물과 음악을 탐구한 이유였다고 말한다. 식물과 음악은 대상이면서도 자기 자신이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거쳐 온 삶의 한 단계이거나, 우리의 감정의 보편적 형식이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여기서 인간을 넘어선다는 것의 의미를 밝힌다. 인간을 넘어서는 것은 강한 인간이 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인간 이하의 것이 되는 것을, 식물과 하나되고, 그것들이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 너머의 것이 된다. 하지만 이 또한 강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 자유로운 형식에 자신을 맡기고, 그는 자유롭게 다른 것이 된다. 음악 속에서 자신을 발견해내듯이. 레비-스트로스가 발견해낸 루소는 수많은 것들이지만 하나이다. 레비-스트로스가 발견한 루소의 얼굴은 바로 다른 것과의 동일시이며, 그것은 다른 것을 만날 때마다 다른 것과 닮게 되는 종류의 것이다. 그렇기에 루소의 다양한 텍스트들은 하나가 된다. 그것은 다른 것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무엇이라는 점에서 같다.

 

3.

하지만 이렇게 같은 것은 그저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동일시 속에서 다른 것도 등장하지만 같은 것도 등장한다. , 동일시 되는 가 등장한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존재를 <고백>의 이름으로 밝히며, 인류학자들의 작업이 고백과도 같다고 말한다. <고백>에서 루소는 자신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내놓는 것은 그저 자기자랑을 위한 것도 아니고, 자기비하를 위한 것도 아니다. 그는 진실을 다해 말할 것을 약속하지만 그렇게 진실만 가득한 것도 아니다. 루소가 자신을 내놓는 유일한 동기는 바로 자기자신을 내놓는 것 자체에 있었다. 그는 자신을 비교항으로 내놓기 위해 내놓는 것일 뿐이다.(뇌샤텔 원고) 그는 자신을 비교항으로 내놓는다. 그것은 타인들에게 타인으로서 내놓아진 자신이다. 하지만 그것은 타인에게 내놓아진 자신이기에 타인일 뿐만 아니라 자신일 수도 있다. 그것은 자신이면서도 타인인 내놓아진 타인으로서의 자신인 것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 진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 “나는 나 자신에게 타인이다.” 하지만 레비-스트로스는 이 문구에서 끝내지 않는다. 그는 인류학의 진실을 추가한다. “타인은 타인으로서의 나 자신이다.”

 

인류학자들은 현지에서 외부인이다. 하지만 인류학자는 현지에서만 외부인인 것이 아니다. 인류학자는 본국에서도 외부인이다. 그는 본국인이길 거부함으로써 인류학자가 된다. 그는 다른 곳에 가는 외부인이다. 본국에서도 외부인, 현지에서도 외부인, 인류학자는 어디에서나 외부인이다. 하지만 그는 모두에게 외부인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는 본국의 국민이기도 하고, 현지에서의 친구이기도 하다.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지만 모두에게 속하기도 한다. 이러한 속성은 루소의 <고백>과 닮았다. 인류학자는 자기자신을 매개로 이곳과 저곳을 연결한다. 하지만 이 연결은 동일시만 있는 것도 아니고 차이만 있는 것도 아니다. 동일시되면서도 차이를 만드는 것으로서 자신이 등장한다. <고백>의 루소라는 비교항처럼. 그것은 장 자크와 루소의 분열처럼 한편으로는 자신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인 무엇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양쪽에게 이해될 수 있는 무엇이다. 인류학자가 레비스트로스의 말마따나 고백한다면, 그는 자신을 비교항으로 내놓고 있는 것이다. 정확히는 자신의 글로써 자신을 내놓음으로써 사람들에게 비교항이 되는 것이다. 그는 타인인 자신과 자신인 타인을 발견하여 그것들을 내놓는다. 모두에게 타인이되면서도 자신이되는 것으로서.

 

스타로뱅스키는 루소의 자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루소에게 자아는 안과 밖 사이의 얇은 막과 같다고. 얇은 막은 이중적이다. 그것은 안과 밖을 통하게 만들면서도 단절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견고한 성문이 아니라 얇은 막이고, 흔들리고, 색이 변하고, 진동한다. 샤르댕의 그림에서처럼. 레비-스트로스는 루소의 이 자아를, 루소가 실험실로 사용한 자아를 재발견한다. 그는 루소 혼자서 기압계로 사용했던 이 자아를 기록과 유통을 위해 사용된다. 기압계가 혼자만을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많은 이들을 위해 기록을 남기는 데 쓰일 수 있듯이, 그는 루소의 자아에서 학적인 일들을 찾아낸다. 이 일들을 연결의 작업이다. 그것은 타인을 자신으로 받아들이는 일을 가르쳐준다. 하지만 연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타인으로서 자신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동일시만이 아니라 이질성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이것이 남는 귀결이 친숙한 낯섦만은 아니다. 그는 비록 현대 사회가 복잡해져서 이러한 작업들이 즉각적으로 효과를 낳을 수야 없겠지만, 우리에게 나아갈 한 방향을 가르쳐준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순히 타인과 자신 사이에서의 왕복이 아니라 그것들을 품는 감정이며, 연민의 확대이며, 존재 감각을 느끼는 일이다. 그는 이것이 불교의 가르침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고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무엇과 닮았는지가 아니다. 바로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문장을 알게 되고, 귀결을 알게 되는 것과 다른 가르침이다. 자연을 보호해야하는 이유를 가르쳐주는 것과 다른 가르침이다. 그것은 그저 자연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고, 자신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고, 타인과 자신의 사이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다. 레비-스트로스에게 인류학의 임무는 비교항을 내놓는 일이지만, 그것은 단지 비교항을 내놓는 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연민을(하지만 이 연민은 우리의 일상어법 속 연민과 다르다. 여기서의 연민은 강렬한 감정적 반응으로서의 연민이 아니라 루소가 여섯 번째 감각이라고 말하는 존재 감각으로서의 연민이다) 느끼는 통로를 제공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