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장 내일모레가 논자시인데 아직 읽어야할 텍스트들도 다 읽지 못해 큰일이다. 게다가 최근 논자시 경향은 세부적인 문제를 내는 것이라, 대충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은 데카르트뿐일 거 같다. 흄이나 헤겔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인데, 헤겔은 읽긴 했지만, 관련해서 답변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없는지라, 결국 흄도 읽어야할 것 같다. 헤겔로 쓸 수 있는 답이 나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아닐 가능성이 크니 위험을 너무 감수해서는 안 된다. 논자시 제도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지만, 힘없는 일개 학생으로서 그냥 따라야지 별 수가 없다. 첫 번째 예상답변은, 예상답변이라기보다는 그냥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첫 번째는 데카르트인데, 데카르트 성찰에서 가장 중요한 두 문제, 심신이원론 문제와 데카르트의 악순환을 검토해보려고 한다.
1.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 문제를 파악하기 전에, 우리는 일반적인 심신이원론과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의 차이를 인지해야한다. 일반적인 심신이원론은 일상생활 속에서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입장으로, 몸과 마음이 다르다는 것 그 이상을 뜻하지 않는다. 몸과 마음이 다르다는 것 이상으로, 영혼을 언급할 경우에도, 영혼의 불멸을 가정할 경우에만 몸과 마음이 그저 다르다는 것 이상을 뜻할 수 있다. 불멸하는 영혼을 매개로 마음이 존재할 수 있기에, 영혼 불멸은 몸과 마음이 다르다는 것을 넘어서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할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몸과 마음이 분리 가능성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반드시 영혼이 불멸일 필요는 없긴 하다) 몸과 마음은 다르고 영혼이 불멸이라는 입장이 오늘날에도 상식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것이 데카르트 시대에 상식이었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이다. 영혼불멸에 대한 좀 더 적극적인 의심은 18세기에 등장하였으며, 프랑스에서는 이신론, 독일에서는 자연신학으로 불린 신학적 입장에서,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3가지 테제로 영혼불멸, 인과응보, 신의 존재를 꼽은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영혼불멸이 자타 구별의 기준으로 제시될 수 있었던 상황이었음을 암시한다. 이신론과 자연신학의 맹아가 17세기에도 있었지만, 이것이 가능한 하나의 입장으로서 구체화된 것은 데카르트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우리는 이를 쉽게 배제할 수 있다. 비록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이 신체와 마음을 하나로 보며, 영혼 따위를 논하는 것을 비그리도교적인 헬라스적인 것으로 치부한 일파도 존재했지만, 중세를 거치며 그리스도교가 가진 신체 지향적 색채는 많이 흐려졌으며, 17세기에는 영혼 불멸은 도덕의 원천으로서 여겨졌다는 점에서 이를 거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렇기에 데카르트가 심신이원을 말한다 했을 때, 그의 주장을 단순히 몸과 마음이 다르고, 몸과 마음이 분리 가능하다는 주장으로 파악할 경우 데카르트가 가진 고유성과 독창성을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데카르트의 심시이원론에서 그 이상의 것을 보아야만 한다.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 가진 특유함은 몸과 마음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물질과 정신이 독립된 실체이며, 실체는 오직 물질과 정신뿐이라는 데카르트의 고유한 실체이원론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러한 주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실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실체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좀 더 상술하자면, 해당 존재가 바로 그 존재의 고유함에 입각해 존재하는 것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말은 너무나 추상적이어서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이를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 필요가 있다. 4원소설을 생각해보자. 지수화풍을 주장하는 4원소설은 하나의 실체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4원소설의 핵심은 단순히 세상에 지수화풍이 있다는 주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이 실제로는 지수화풍이라는 주장에 있기 때문이다. 원소는 아리스토텔르스의 표현을 따르자면, 아르케로 제시된 존재를 의미하며, 아르케로 제시된 존재란 것은,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존재를 뜻한다. 아르케로 제시된 바로 그 존재들이 가진 고유함과 그것들의 관계를 통해 세계의 다양함이 설명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실체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실체 이론이 이러한 것이라고 할 때, 실체는 바로 그러한 실체 이론에서, 세계의 요소로서 제시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물질과 정신이 실체이며, 이것만이 실체라고 주장했을 때, 그 이전의 실체는 무엇인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데카르트가 비판한 실체이론은 그가 ‘스콜라 철학’이라고 부르는 입장,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자연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고 할 수 있다. 자연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실체는 다양한 자연종들과 이들의 운동을 가능케 하는 범주들이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입장들이 가진 자연주의적 성향이 반그리스도교적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그들의 “자연학”이 물리학적으로나 형이상학적으로나 불합리하다고 생각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 및 <성찰> 집필의 동기는 논쟁적이지만, 그래도 안전하게 주장할 수 있는 바는, 데카르트의 실체이원론이 그가 못마땅하게 생각한 자연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역사적 맥락을 확인해보자.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 및, 당대에 자연주의 및 개혁주의자들의 시도들에 대해 비판하는 세력은 회의주의를 무기로 삼아 자신들의 입장을 설파하였다. 회의주의는 단지 파괴적인 입장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독단적 개혁주의를 비판하는 칼날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방법에 입각한 새로운 주장의 통로가 되었다. 회의주의는 한편으로는 몽테뉴의 저작을 모범으로 “모랄리스트”로 불리는 세력을,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회 속의 “개연주의”을 낳은 모태였다. 이러한 전략적 회의주의 세력들은, 자연주의 및 개혁주의자들의 가톨릭 비판에 대항해, 그들은 가톨릭의 독단을 비판한다고 주장하지만, 그들 스스로가 독단에 빠지고 있다고 비판하고, 독단들을 거부함과 동시에 그 와중에 가능한 입장을 제공함으로써 다툼을 봉합하려고 시도하였다. 데카르트 또한 이러한 조류에 합류하여, 자연주의를 공격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 경우 자연종 따위를 실체를 상정하는 자연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실체론은 그들의 편견에 의해서만 담보되는 것이며,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는 설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이렇게 기존의 실체 이론을 무너뜨리고 데카르트는 자신의 실체 이론을 주장하기 시작한다.
데카르트의 전략은 이미 성공한 사례를 모범으로 삼는 것이었다. 그는 물질을 “연장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정신을 “사유하는/되는(사유적인) 것”으로 규정하지만, 그가 명확하게 실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 분야는 물질이었다. 물질은 연장적인 것으로 정의될 때, 연장적인 것들로만 모든 물질이 규정된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은, 당시의 기하학을 모범으로 무한한 공간과 기하학적 원리들에 입각하여 형태를 갖는 도형들과 이들의 변용 가능성을 모델로 물질계를 설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물질론이 기하학을 모델로 하고 있는 것은 데카르트와 동시대의 사람들에게서도 일반적으로 통용되었으며,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아르노 모두 이를 받아들이는 해석 방식이다. 데카르트의 물질론을 이렇게 이해할 경우, 데카르트는 기하학이라는 내적으로 완전한 체계를 모범이자, 모델이자, 은유로 물질이라는 것을 내적으로 완전한 것으로 보이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데카르트는 실체의 정의, 즉 다른 것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존재라는 기준을 의도적으로 강하게 해석하고, 그가 높인 기준에서도 성립하는 특정한 방식의 실체, 물질, 연장적인 것, 기하학적으로 규정된 무한공간을 보임으로써 그의 기준강화를 옹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바로 정신이다. 정신은 물질과 달리 내적으로 완전한 체계를 갖고 있는 모범적 사례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데카르트는 한편으로는 <정신지도를 위한 규칙들>에서처럼 제한된 정신의 상황에서 학문을 탐구하기 위한 최소한의 규준이 되는 방법론을 설립하려고 시도했었고, 이러한 시도를 <방법서설>을 통해 경험칙들로 확장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에서 전개된 입장은 내재적 완전성을 함축하지 않았으며, “신앙의 자리” 또한 확보하지 못하는 입장이었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상황, 정신의 작동을 설명할 수 있는 내적으로 완전한 체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문제적 상황을 오히려 기회로 삼아 신앙의 자리와 정신의 내적인 완전성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그의 이러한 시도가 집약된 것이 바로 신 존재 증명과 심신이원론 증명(세계와 자신의 영혼의 독립성 증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신 존재 증명과 심신이원론 증명을 간단히 요약함으로써 이 글을 마치도록 하자.
신 존재 증명의 기본적인 구조는 다음과 같다. “나”는 유한하다; 이는 경험적으로, 현상적으로 명석판명하게 확인 가능한 사실이다. 완전함이라는 개념이 내게 있다; 이 또한 경험적으로, 현상적으로 확인 가능한 사실이다. 데카르트는 이처럼 자신의 서술에 따라 독자들이 이를 현상적으로, 경험적으로 확인하도록 유도한다. 이후 그는 원리를 제시함으로써 이러한 현상들을 해석하게 만든다. 그가 제시하는 원리는 인과에 있어 원인은 결과보다 실재성에 있어 작을 수 없다는 원리로 이는 이전의 스콜라 철학(이 “스콜라 철학자”들은 그가 비판하는 자연주의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다른 이들이다)에서 통용되던 원리 중 하나이다. 데카르트는 이 원리는 (당대에는 매우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관념에 적용함으로써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완전함이라는 나의 관념이 가지는 실재성은, 그 관념의 정의상 완전한데, 앞서 나는 유한하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나는 그 관념의 원인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관념은 나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다. 완전함이라는 관념은 단순히 유한하지 않은 것을 넘어서 무한하다. 때문에 이 관념이 비롯된 원인은 무한히 완전해야한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논증을 통해서 신의 완전성과 동시에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러한 논증은 매우 억지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면 데카르트의 논증이 조금 더 납득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지금의 논증은 정신 안에서 정신들로만 이해된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이 나로부터 비롯되었는지, 내가 아닌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는 다른 물질적인 대상들을 모두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나의 의식이라는 제한적인 정신만을 기준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구도에서 소위 “경험적인 관념”이라고 불릴 만한 관념 또한 적어도 나의 자의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란 점에서 외부적이라고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구도를 염두에 두고 완전함이라는 관념을 살펴보자. 우리는 분명 제한적으로 완전함의 관념을 경험할 수 있다. 하지만 전적으로 완전하다는 것은 경험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이것이 외부와 단절된 채 의식 안에서 발견될 수도 없는데, 완전함은 적어도 자신의 의식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완전함 그 자체라고 할 경우 우리는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의 의미는 명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경우 이것은 나-의식도, 외부-물질도 아닌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까지는 설득력 있다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이러한 영역을 선험적인, 혹은 초월적인 것으로 규정하였지만, 데카르트는 이를 신으로 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실체이원론, 세계와 나의 영혼을 증명하는 것을 확인해보자.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에서 신에게는 완전함이 부여된다. 그리고 이러한 완전함은 선함과 합리성을 포함하며, 이에 따라 신의 정체는 파악하지 못하여도, 우리의 제한적인 판단들의 원천으로서 신이 상정된다. 데카르트는 이러한 신의 역할을 이용하여 그가 원하는 증명들을 도출해낸다. 한편으로는 신의 합리성을 근거로 세계의 단순성, 최소주의 원리를 옹호하고, 신의 선함을 근거로 우리의 일상적인 믿음이 그릇되지 않았음을 옹호한다. 이러한 해결책을 통해 그는 꽤나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그 중 하나가 영혼의 존재이다. 영혼의 존재가 문제적인 것은, 그의 정신 실체론을 받아들일 경우, 영혼이 여럿일 수 있는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정신 또한 물질처럼 실체이며, 이는 총체를 이룬다. 따라서 물질 안에서 사물들이 물질이라는 실체의 단순한 부분인 것처럼, 영혼 또한 무한한 정신(신)의 단순한 부분일 수 있다.(우리는 이러한 입장을 스피노자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신의 선함을 근거로, 우리가 이미 일상적으로 믿고 있고 있는 관념들이 그 자체로 거짓일 수는 없다는 논증을 가지고 세계의 실재와 나의 영혼의 실재를 옹호한다. 세계와 영혼이 맺는 관계에서 세계 자체는 정신 안에서 포착되는 한 정신에 불과한데, 그것이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될 수 있다는 가능성뿐만 아니라, 독립적으로 실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있고, 이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는 한, 신이 우리를 의도적으로 속이지 않을 것이기에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가진 고유성 또한 우리가 이미 그렇게 믿고 있는데, 이를 거부한 이유가 없는 한, 신이 우리를 의도적으로 속이지 않을 것이기에 참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증에서 알 수 있듯이 데카르트는 한편으로는 그가 <방법서설>에서 보인 것과 같은 전통을 존중하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옹호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부할 이유”에 근거하여 사회를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옹호하고 있다. 데카르트는 회의와 신 존재 증명을 매개로 한편으로는 전통을 존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 이를 개선하는 것을 허락하는 형이상학적인 실천철학을 <성찰>을 통해 제시한 것이다.
2. 데카르트의 악순환
데카르트의 신 존재 증명이 순환적이라는 것은 당대에도 제기된 문제 중 하나였다. 데카르트의 순환은 그가 “자연의 빛으로”라고 부르는 것이든, “명석판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든, 그것이 같든 다르든 바로 이것이 가진 난점 때문에 비롯된다. 데카르트의 논쟁에서 그가 원인이 결과보다 실재성을 많이 갖는다는 원리를 받아들이는 것, 완전함의 관념을 “내”가 갖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완점함이라는 관념은 (실재성의 차원에서까지) 완전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또한 문제적일 수 있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증명 자체를 증명하는 것이 가진 순환성으로 인해 제기된다.
데카르트는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참으로 여겨지는 모든 것들을 그 가능성의 차원에서 모두 배제하였다. 때문에 데카르트는 참으로 여겨진다거나 참인 것처럼 보인다거나 참이라고 생각된다는 것은 모두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것들은 모두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그것이 거짓일 수 있는 가능성만으로도 배제된다. 그런데 이러한 강한 회의를 받아들일 경우 논증이라는 것 자체에서 문제가 생긴다. 즉, 그의 논증을 왜 받아들여야하는가? 지금 그가 논박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전제를 받아들일지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그러한 전제들을 가지고서 논증하는 것 자체를 논박하고 있다. 논증을 통해 참이라고 생각될지라도, 바로 그러한 생각 자체 또한 방법론적 회의를 통해 논박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회의로 전제들뿐만 아니라 바로 추론규칙 그 자체들도 의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악순환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그의 논증 자체를 받아들일지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추론을, 그의 논증을 받아들이면 그의 결론도 받아들일 수 있고, 그의 논증은 합당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논증을 받아들여야만 할 이유는 제공되지 않았다. 특히 방법론적인 회의를 경험한 독자가 데카르트의 시도에 대해서 방법론적 회의를 적용하여, 그의 논증을 지금 여기서 받아들일지 판단중지할 경우 이를 설득할 방법이 없다.
데카르트의 악순환은 단순히 독자를 설득하는 차원에서의 문제를 가리키지 않는다. 데카르트의 악순환은 추론의 정당성을 다루는 메타 학문에서 제기되는 일반적인 문제이다. 이는 단순히 정합론의 주장에서처럼 명제들이 정당성을 상호적으로 부여해주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바로 그러한 정당성 부여 자체를 공격하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어떤 추론 규칙이 정당성을 부여해줄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는 메타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메타 차원에서 올바른 정당성을 규정하는 체계를 확립할 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하지만 메타 차원에서 올바른 정당성을 규정하는 체계를 확립하더라도 문제가 발생한다. 바로 그러한 확립의 정당성을 의문시할 수 있고, 이는 또 다시 메타 차원의 논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구들은 소급될 수 있으며, 이는 순환적인 구조를 이룰 수 없고 메타 차원을 요청한다는 점에서 정합론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 이 문제는 단순히 전제들이 순환해서 생긴 문제가 아니라, 악순환을 유발해서 생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한편으로는 독자들을 설득하는 차원에서 데카르트가 어떤 해법을 보이고 있는지를, 다른 한편으로는 데카르트가 제시할 수 있는 원리적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보이는지 보여야할 것이다. 첫 번째는 물음은 쉽게 해결할 수 있다. 방법론적 회의는 지금 논의와 무관하기 때문이다. <성찰>은 공리와 증명으로 구성된 내적인 체계가 아니다. 이는 현상학적 방법으로 서술된 에세이며, 선형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앞에서 나오는 문제의식이 반드시 뒤에 적용될 이유가 없다. 우리는 데카르트를 따라 방법론적 회의를 하였고, 모든 지식을 지우고, 코기토에서 시작하고 있다. 지금부터는 데카르트가 어떤 원리를 제공함으로써,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를 “이해가능하게 만드는지”를 지켜보면 되는 것이지, 여기에 다시 방법론적 회의를 적용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손쉬운 문학적 해결책이 원리적으로도 적용될 수 있다. 인식에 있어 진리는 단순히 사물과 같은 것이 아니라 가치적인 것, 즉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무조건 의심하는 것은 인식론적으로 현명한 태도가 아니며, 우리는 필요한만큼 의심하면 된다. 데카르트가 방법론적 회의로 강한 회의를 불러일으킨 것은 기존의 통설을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고, 그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체계를 믿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의 체계의 실천철학적 귀결은 실용주의에 가깝다. 의심할 이유가 있지 않다면, 신의 선함에 의거해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을 만하다는 그가 제공한 가장 중요한 논증 중 하나이다. 그의 입장은 실용주의적이며, 이에 따라 그의 체계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만큼의 “방법”을 효율적으로 제공하고 있는지가 그의 철학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어야할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았을 때, 그의 신 존재 증명을 비롯한 논증은, 우리가 그것보다 더 좋은 방식으로 세계의 실재와 개선 가능성을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닌 한 합당한 논증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정당성에 대해서 소급을 거부하고, 덕이론적인 접근을 하는 현대 인식론자들도 받아들이는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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