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자시를 준비하며> 시리즈는 7개 정도 쓰려고 했었는데, 2에서 끝나게 되었다. 뭐 그래도 데카르트만 덩그러니 내놓고 끝내지 않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또다시 구체적인 답변이 아니라 일반론적인 진술로 잡설을 풀어내게 된 것은 참 아쉬운 상황이다. 그래도 안 쓰는 것보다야 낫겠지 하는 마음으로 적어본다.
추가된 논자시 대비 전략이 있으니 이를 먼저 언급해보려고 한다. <논자시를 준비하며 1>에서 헤겔에 대한 문제가 나올 경우 어떻게 적어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했었는데, 이 문제를 해결할 전략이 떠올랐다. 헤겔에 대해서 떠들기 어려웠던 것은, 헤겔어들이 체화되지 않아서였다. 헤겔은 철학을 현상학적으로 서술하는데, 이러한 현상학적인 서술은 그 순서를 그대로 따라야만 할 것 같은 부채감을 선사한다. 즉, 헤겔에 대해서 뭐를 얘기하려면 헤겔이 얘기한 것을 그대로 따라가야만 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을 준다는 얘기다. 그리고 난 당연히도 이런 상황을 별로 반기지 않는데, 만약 헤겔에 대해서 떠들 때 헤겔의 방법을 그대로 지켜 떠들면, 결국 헤겔의 말을 반복하는 것 이상으로 나아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블랑쇼도 그렇고 헤겔도 그렇고,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생산성이 떨어지는 문제를 갖는 다면, 연구 대상이 가진 고유성에 연구자의 고유성이 종속되어 생겨서 그런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연구자가 연구 대상과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연구자는 연구물을 넘어설 수 없다. 똑같이 말하는 것이 아니라면 항상 부족하다는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뭐 이런 난점을 가지고 헤겔에 대해 뭔가 서술하려고 하면 진짜 골빠개진다. 헤겔이 말하는 것을 반복 재생산 하는 것은 지루한 일인데다가 일종의 반복 재생산 훈련을 통해 헤겔스러운 말을 체득(말 그대로 체득인데 이것은 체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해야 하는데, 난 지루한 일을 체득하는 것에는 젬병인데다가, 철학을 반복재생산으로 만드는 것을 극혐하기 때문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철학은 반복재생산이면 안 된다. 뭐 내가 천재론의 현대화(근대의 천재론은 가톨릭 천재론이라 문제며, 프로테스탄티즘적 천재론은 현대에도 문제없으며 매우 유용하다는 게 내 지론이다)를 주창하는 이론가여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학문은 법칙과 활용이 중첩되고, 생산과 활용의 차원에서는 항상 천재성이 요구된다.(심지어 이 소리는 칸트도 한다) 철학은 특히 생산의 학문이기에, 항상 처재성이 요구될 수밖에 없고, 반복재생산으로 추락하는 순간부터는 철학이 아니라 독단에 불과하다는 게 내 지론이다.(나름 칸트 철학을 활용한 결론이다) 뭐 말이 길어졌는데, 암튼 헤겔을 헤겔어로 풀어 쓰는 것은 재미도 없고, 좋지도 않은 일인데, 이걸 어찌할지 고민하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이럴 때 해결책은 도식을 활용해 재단하고 논의를 진행하는 것인데, 헤겔 연구사를 잘 몰라 이걸 어케할지 모르겠던 상황이었단 소리가 되겠다. 그러던 차, 헤겔과 칸트 모두 열심히 학문론을 떠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이는 논자시를 준비하며 0의 핵심 주장이었다), 둘을 비교하면서 읽다보니 헤겔이 칸트를 매우 의식하며 글을 쓰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뜬금없이 헤겔의 철학으로 시작하기 보다는 칸트의 기본 도식을 소개하고, 이에 대한 헤겔의 평가와 문제 재배치를 서술하면 대충 헤겔어를 쓰지 않고 헤겔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요런 식으로 헤겔을 재서술하면, 헤겔이 말하는 요상한 것들이 도대체 학문이랑 뭔 상관인지를 좀 더 적극적/실정적으로 밝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다른 말로는 걍 헤겔을 칸트 해석에 입각해서 분석하겠단 소리를 길게 한 것이다.
일단 지금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당장 내일이 시험ㅠ) 칸트와 헤겔을 엮는 단 한편의 글을 써보려고 한다. 하지만 삼천포를 좀 추가할 필요를 느꼈다. 칸트와 헤겔을 읽으면서 이 둘의 텍스트가 단순히 철학사적인 맥락만 반영하고 있는 게 아니라, 지성사적 맥락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나름 지성사적 맥락을 반영하여 철학사의 수준을 높인다고 주장하는 내가 이런 걸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었고, 뭐 내 블로그에 오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나의 독자들에게 양질의 정보를 제공해주기 위해서는 이러한 맥락들을 언급할 필요가 있으므로 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일관된 텍스트가 아니라, 중간중간에 잡설을 끼워 넣는 텍스트가 되게 생겼는데, 아쉽진 않다. 일단 게으른 나 자신 때문인 걸 알고 있고, 나의 게으름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전제이기에 이걸 바꾸려고 하는 것은 무용한 일이고, 뭐 중간중간 잡설을 넣는 게 내가 좋아하는 화법이라 딱히 문제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얼른 논자시가 끝나고 편한 마음으로 공부하며 글을 올릴 수 있었으면 한다.
p.s. 원래 세 개의 장을 쓰려고 하였는데, 게으름으로 결국 첫 번째 것도 완성하지 못했다. 뭐 그래도 일단 되는 대로 올린다. 나중에 덧붙이면 이 추신은 지우는 걸로.
1. 학문론으로서의 형이상학
칸트의 <순수이성비판>과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머리말에서 공통으로 주창되고 있는 것은 학문으로서의 철학(형이상학) 정초이다. 여기서 그들의 주장은 규범적인 것으로서, 즉, 학문으로서의 형이상학을 정초해야만 한다는 것으로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칸트의 표현을 따르자면, 자연소질로서의 형이상학은 이미 존재하고 있다. 자연소질로서의 형이상학의 존재는 형이상학이 실제의 필요에 의해 욕구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고, 형이상학이 인류사에서 그 줄기는 쳐낼 수 있어도, 뿌리는 뽑아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란 것을 뜻한다. 때문에 형이상학을 그저 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으로서 수행하는 일은 인류사적으로도 중요하단 것이 칸트의 주장이 되겠다.
그렇다면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칸트는 형이상학이 다루는 것을 말함으로써 이에 대답한다. 신의 존재, 의지의 자유, 영혼의 불멸을 다루는 학문. 여기서 이 세 가지를 다룬다는 것은 바로 그 대상을 다룬다는 의미라기보다는 바로 그 문제를 다룬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정확할 것이다. 저 세 가지의 것(?)은 그 자체로 문제들이다. 신은 존재하는가? 의지는 자유로운가? 영혼은 불멸하는가?로 대표될 수 있는 문제를 집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저 세 문제에 대해 모두 긍정의 답을 내리는 것, 즉 신은 존재하고, 의지는 자유롭고, 영혼은 불멸한다고 대답하는 것이 독일에서 자연신학이라고 불렸다는 사실이다. 물론 여기에는 추가로 한정을 가해야하는데, 바로 저 세 문제에 대해서만 긍정의 답을 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자연신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뭐 다른 종파는 저 세 개에 +a를 첨가하는 것이니 말이다. 이는 꽤나 흥미로운 지점인데, 칸트와 자연신학의 친연성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여기서 좀 삼천포로 빠져보자. 칸트와 자연신학의 친연성을 보여주는 다른 사례는 다음과 같다. 칸트는 시간과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주장하는 이들을 둘로 구별한다. 한 입장은 시간과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실체로서의 시간과 공간을 통해 주장하는 수학적 자연과학파이고, 다른 한 입장은 그 실재성을 속성으로서의 시간과 공간을 통해 주장하는 라이프니츠-볼프주의이다. 우리는 전자를 뉴튼과 그 일당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칸트가 이러한 구별을 라이프니츠와 클라크가 서한을 통해 대립된 입장들 속에서 구체화했을 것을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칸트는 이러한 입장들과 구별되는 입장을, 시간과 공간의 절대적 실재성을 부정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지를 “신중하게” 고려한 이들이라고 소개하며, 이들을 자연신학자라고 부른다. 칸트는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그것의 실재성을 부정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들이 설명할 수 없다고 비판하는데, 바로 그 가능성을, 바로 그 가능한 선택지가 필연적인 유일한 선택지임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 칸트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형이상학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때문에 이러한 점에서 칸트는 자연신학자들과 거리두기를 하지만, 그 테제에 있어서는 그들을 비판하지 않고, 방법에 있어서만 그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친연성으로부터 고려할 수 있는 흥미로운 맥락이 있다. 칸트와 헤겔이 스스로를 다른 입장들과 구별하는 구도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칸트는 독단주의와 회의주의라는 두 극단 사이에 자신을 위치한다. 그의 이러한 구도는 한편으로는 신학적인 구도로,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인 구도로 변주되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그는 독단주의에 대한 신학적 변주를 광신주의(enthusiasm), 회의주의에 대한 신학적 변주로 신학적 회의주의를 제시하고 이 둘을 비판한다. 이는 정치적으로는, 전제정체와 이들로 이한 유목민들로 또 다시 변주되며, 전제정체에 의해 생긴 혼란으로 모든 농사(생산)를 거부하는 유목민들이 등장했지만, 이들은 소극적이기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바로 이 “혼란”이, 바로 이 “밤”이 계몽이라는 빛의 등장의 서곡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우리는 여기서 밤의 찬가로 이어질, 칠흑같은 밤과 빛의 탄생으로 은유되는 낭만주의의 언어가 선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계몽=빛이기에 이러한 구도가 계몽주의 안에도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뭐 계몽철학과 낭만주의가 연속성을 강조하는 나에게는 당연하면서도 좀 강조해야할 지점이긴 하다) 다시 여기서 우리는 형이상학이라는 철학을 신학적 구도로 해석하고, 정체순환론에 입각해서 문제 상황을 예측하는 칸트를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이전의 정체순환론과 달라지는 것은, 민주정->전제정->처음부터 다시 시작이라는 정체순환론을 거부하고, 전제정의 폐해로부터 계몽이 출현함을, 정체론적으로 따지자면 이상적인 정체인 공화정체으로의 이행이 가능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 되겠다. 그렇다면 헤겔은 어떻게 다른가? 칸트의 구별 구도를 보면 이것이 영국의 계몽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영국의 계몽에서 구별 구도는 이항 대립 구조가 아니라 삼항 대립 구조(삼국지의 솥발 구도...)이다. 광신주의, 회의주의에 더해 이신론이 추가된다. 헤겔은 이 구도를 그대로 들고 와서 철학과 신학의 구도를 재편성하는데, 바로 이러한 삼항 구도를 통해 칸트는 마지막 세 번째 항, 즉 이신론으로 분류된다. 이는 철학적으로는 형식주의로 변주되며, 헤겔은 바로 이 세 극단으로부터 자신을 구별하면서 논의를 진행해나간다. 대체로 유럽 안에서 이신론과 자연신학이 유사한 것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고려하면 헤겔의 구별 구조는 칸트=자연신학=이신론=반계몽이란 구도를 따르므로, 당대인들에게 꽤나 설득력 있게 들렸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뭐 내가 보기에 칸트를 이신론, 형식주의로 두는 것은 꽤나 불쾌한 일이고, 헤겔 또한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말 나온 김에 칸트의 반론도 들어보자. 칸트 또한 계몽의 솥발 구도를 알았다. 그래서 당연히도 자연신학과 이신론이 동일하다는 주장에 대해 반대한다. 칸트는 이신론과 자연신학을 구별하는데, 이신론은 특수한 종류의 열광주의로 분류한다. (사실 헤겔 또한 이 문제를 정체순환론 버전으로 변주하고 역사적 변천을 설명하는데, 이는 따라가자면 너무 길기도 하고 아직 정확한 세부 사항은 모르니 생략하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말이 쓸데없이 길어졌는데, 다시 칸트와 형이상학으로 돌아와 보자. 칸트는 저런 것이 형이상학의 문제라고 말하는데, 이를 어케 해결하는가? 칸트의 전략은 이러하다. 첫 번째 칸트는 저런 문제를 바로 다루지 않고, 저러한 문제를 왜 우리가 제기할 수밖에 없는지를 묻는다. 즉 인간 인식 구조를 밝히고, 그 능력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한편으로는 저런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른 한편으로는 저런 문제가 적극적으로 답변될 수 없는 종류의 물음이라는 것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때문에 그가 자신의 작업의 효용이, 한편으로는 소극적이지만, 국가가 잘 운용되어서 경찰이 할 일이 없다 해서 경찰이 적극적 효용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비유를 들며, 자신의 작업이 효용 차원에서 적극적인 효과를 가져 온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전략의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뭐 일단 이런 귀결을 염두에 두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의 작업은, 바로 저런 형이상학적 물음에 대해서 자신과 같이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간의 인식구조와 그 원천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인간이 저런 형이상학적 문제들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보여줄 수 있는 근거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칸트는 틈만 나면, 자신의 작업은 일종의 방법론적 규준이고, 이후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다루겠다고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뭐 그런데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게 아닐 것이다. 칸트가 <비판>을 통해 수행하고 있다고 주장되는 바로 저 작업이 어떻게 가능한 지가 궁금해야한다. 칸트의 전략은 저런 수행 작업이 대상 자체를 다룬다고 할 경우 무한 탐구여야하기에 이것이 불가능하지만, 탐구함에 대한 탐구일 경우 충분히 전체가 파악될 수 있기에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뭐 인간 정신의 정체를 밝힐 수 있다는 것인데, 이게 엄청나게 오만한 주장이라고 보면 안 되는 게(칸트도 이를 강조한다), 그전의 형이상학자들이 신을 포함해서 세계 전체, 우주 전체를 다루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문제 범위를 획기적으로 줄였기에 그러하다. 또한 정신의 모든 활용 가능성을 탐구하는 게 아니라, 정신이 정신이게 하는 정신 내적 원리만을 탐구하겠다는 것이니 문제는 또 줄어든다. 게다가 칸트의 비판 작업은 저 내적 원리 전체를 다루는 것도 아니다. 바로 저 내적 원리를 포착할 수 있는 내적 원리만으로 국한되고 있으니 문제가 더욱 줄어든다. 뭐 이런 식으로 문제를 좁히고 좁히고 좁혔으니, 칸트는 다른 학문과 달리 형이상학은 금방 배울 수 있다는 말도 지껄인다.(뭐 칸트의 전략을 받아들이자면 그렇게 틀린 소리 같지도 않다... 다른 학문이 더 어렵다) 이런 좁은 영역에 대해서 그 내적 원리를 밝혀낸 것이 바로 <비판>의 성과고, 그 성과에 의해 뭐 저런 형이상학 문제에 대해서 소극적인 답변이 가능해지고, 그 귀결은 또 적극적이란 게 밝혀진다는 게 칸트가 자신의 철학의 이념으로 밝히는 바이다.
이제 질리도록 칸트를 들었으니 헤겔로 넘어가 보자. 헤겔은 칸트의 학문론에 굉장히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문체에 있어서 헤겔은 칸트와 매우 다르지만, <정신현상학>의 전개에 있어서는 칸트의 구도를 받아들이되 이를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신현상학> 초반부의 목차를 확인하자. 감각->지각->힘과 지성(의식)->자기의식으로 진행되는 헤겔의 여정은, 칸트의 구도를 그대로 이어 받고 있다. 칸트는 이를 감각->상상력->지성 순으로 다루고, 순서대로 포착의 종합, 재생의 종합, 인지의 종합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감각, 지각, 자기의식이 등장한다. 쉽게 말해 헤겔이 표현을 달리 하고 있지만, 칸트가 전개한 발생적 과정을 웬만하면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소리이고, 칸트가 강조했던 것처럼 이러한 전개에서 전성설보다는 후성설의 입장을 통해 발생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둘은 같은 진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헤겔은 칸트의 학문론적 입장, 즉, 시간과 공간의 실재성을 그 자체로 긍정하는 진영을 비판하고, (칸트와 같이) 주관과 사물 그 자체의 관계맺음이라는 본질로서 받아들여야 학문을 근거 지을 수 있다는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 칸트 시대에 이러한 학문론적 입장을 명시적으로 주창한 것은 칸트 한 명뿐인 것을 생각해볼 때(사실 이를 암묵적으로 주장한 이들은 많다), 헤겔은 “칸트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칸트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헤겔이 칸트와 같으냐고 물으면 당연히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서 칸트와 같은지의 기준은, 칸트가 후학들에게 넘긴 작업, 자신의 이념을 따라 발전시킬 학문 세계 내부에 헤겔이 속하느냐 여부일 것이다. 물론 헤겔은 칸트의 이념을 따르고 있지만, 그 이념을 실행하는 방법을 실제적으로 다르게 만들었으므로, 칸트의 학문 세계 내부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칸트주의긴 한데, 이는 칸트 이후의 독일 철학이, 철학이 학문으로서 성립 가능하다는 주장을 받아들인 모든 이가 일종의 “칸트주의”라는 점에서 칸트주의인 것이라 무의미하다. 니체처럼 특이해 보이는 캐릭터도 칸트주의의 한 계파에 속하는 인물이란 것을 생각하면 뭐...)
이제 구체적으로 헤겔이 칸트와 어디에서 달라지는지를 생각해보자.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에 대한 이해 또한 바꾸어야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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