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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논자시를 준비하며 – 0

나도 대학원생인지라 논문제출자격시험도 봐야하고, 이를 위해 준비도 하고 있다. ENTP와 ADHD는 궁합(?)이 잘 맞는 덕분에, 나는 평생, 해야 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은 할 수 없는 딜레마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지만,(불세출의 영웅 오디세우스도 뚫지 못할 스킬라와 카르브디스 사이의 딜레마일 것이다), 외부적 압력으로 약간의 노력이 가미되어 읽지 않던 책을 읽게 되는 기염을 토해내었다.

 

사실 이런 얘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게 민망하기도 한데, 어디 가서 항상 칸트 전공자라고 말했던 나고, 좀 더 진지하게는 칸트 이전부터 칸트까지의 독일 철학사를 전공한다는 나고, 더욱 더 진지하게는 독일의 학문론 논쟁의 전개를 연구함으로써 학문론의 이념을 확인한다는 나이지만, 정작 <순수이성비판>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뭐 어떤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내용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좀 뻔뻔해 보이지만, 이것은 진리이고, 이걸 무시하면 바보 된다가 나의 주의라 괜찮은 핑계도 있었고, 읽기 귀찮아서 미룬 것도 있었다. 암튼 뭐가 되었든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논자시 준비를 위해 헤겔의 <정신현상학>과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부랴부랴 읽고 있는데, 읽으면서 든 생각을 좀 적어보려고 한다.

 

화두1: <순수이성비판>과 <정신현상학>은 어렵지 않다.

 

두 책 모두 역자 서문인가 뭐시기에 “이 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어려운 책 중 하나로...”가 적혀 있는 거 같은데, 굳이 이런 얘기를 할 이유가 뭔가 싶다. 뭐 무턱대고 읽는 독자가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와 함께 “나는 병신인가?”란 생각이 들까 걱정이 되어 이런 말을 적는 거면 뭐라 말하기 좀 어렵긴 하지만, 이런 독자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이런 독자가 이 책을 잘 이해할 수 있게 좋은 역자 서문을 붙여야지(누누이 말하지만 고전에는 헤켓 플라톤 전집처럼 검증된 연구자의 개설이 붙을 필요가 있다), 원래 어렵다고 말하는 게 뭔 소용인가 싶다. 뭐 그럼에도 “그 역자 서문조차 어려우면 어쩔건데?”라고 묻는다면, 그런 사람은 안 읽어도 되는데 굳이 읽게 만들 이유가 뭐냐고 되물을 것이다.(이런 점에서 쉬운 우리말로 칸트 전집을 내겠다는 모 판본에 대해서 바로 ???다. 여기가 독일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굳이 쉬운 말로 일반 독자들도 칸트를 읽을 이유가 뭐 있느냔 소리다)

 

잡소리는 이쯤하고, 뭐가 되었든 두 책은 어렵지 않다. 일단 뭔 소리하는지 분명하고, 나름 기획을 뚜렷하게 밝혀서(제발 책은 서론부터 읽자), 그다지 어렵지 않다. 요상한 용어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철학사적 맥락에 익숙한 독자라면 칸트와 헤겔이 과거 철학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자신의 용어를 어느 맥락에 위치하고 문제를 재배치하는지 정말 명확히 알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책을 전문가가 어렵다고 말하고 다니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실제로 어렵다고 느끼면 그런 븅신이 전문가 행세를 해서 문제고, 어렵지 않은데 어렵다고 말하고 다니면 세상 바뀐 걸 모르고 이상한 방식으로 책을 팔고 있어서 문제다. 용어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도 아니고, 전문가면 대충 다 뻔한 얘기들인데 어려울 게 뭐 있겠냐만은...

 

그런데 내 경험상 학자들이 이 책을 쉽게 보지 못하는 것도 사실인 것 같다. 예전에 라깡 읽다가 든 생각이 여기서도 반복된다. 라깡이 어렵다길래 브루스 핑크의 라깡 개설서를 먼저 보았는데 그 개설자에서 뭔소리하는지 아리까리해서 덮었었다. 대충 이런 건가 싶어서 그때 담당 선생한테도 물었었는데 말도 안 되는 답변이나 해서 “라깡이 븅신인 걸까 아님 라깡 연구자들이 븅신인걸까?”하는 생각만 하고 넘겼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어 라깡의 책을 직접 읽어보니 하나도 어렵지 않아 놀랐었다. “이런 멀쩡한 얘기를 요상하게 요약해서 읽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란 말인가!”하고 울분을 토했었는데, 헤겔 <정신현상학>에 대한 소개서도 딱 이래서 당황했다. 라깡이야 연구자가 적어서 그렇다 쳐도 근본 있는 연구 필드인 헤겔 연구자가 이런 실수를 하는 건납득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 답은 항상 예상보다 가까운 데 있는 법인데, 브루스 핑크가 실수한 것과 같은 실수를 한 게 뻔해서 결국 다 비슷하단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답은 단순하다. 이 새끼들은 지들이 빠는 놈들이 뭔 생각으로 이런 걸 연구했는지 별로 고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뭔 소리냐면 이런 얘기다. 라깡의 <세미나 10>의 서문 비슷한 곳에서 라깡은 자기가 정신분석학계에서 퇴출되고 여기 온 이유들에 대해 나름의 답변을 내놓는다. 결국 답은 자신은 진정한 정신분석학, 정신에 대한 분석학적 방법으로 정신과학을 정초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다른 놈들은 이런 걸 무서워해서 자기를 쫓아낸 것이란 소리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보통 이런 소리를 하는 놈을 의심하게 되는 법이지만, 이런 자기변명적 장광설에도 진리가 있는 법이다. 뭔 소린가하면 라깡의 작업은 정신과학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심 속에서 꽃핀 것이고, 정신분석학의 ‘분석학’이란 언어는 그냥 멋져서 붙어있는 게 아니라 진지한 의미에서 붙어있다는 소리가 되겠다. 지금 정신분석학 연구자들 입장에서야 정신분석학의 존재는 당연한 거겠지만 당장 옆 사람도 “정신과학 그거 븅신아님?”이란 반응을 하고, 이런 상황에서 “아니거든요? 우리 과학이거든요?”를 말만으로 해서는 안 되는 법이다.(물론 말뿐인 것으로 치부되지 않는 “멋진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 말 이상의 것이지만) 그러니 라깡이 하는 소리 속에는 뼈가 있고, 정신과학의 현주소가 있고, 그 속에서 라깡이 정확히 어떤 부분을 어떻게 재배치하는지 드러나 있다. 정신과학은 가능하며, 자신이 바로 그것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던 선구자(?)들을 좀만 알고 있어도, 라깡이 어떤 문제가 역사적으로 중요시 되었고 어떤 문제가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인지를 말하면서 자기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맥락을 잘 파악하고, 라깡이 왜 이딴 소리를 씨부리는지를 이해하면 딱히 어려운 게 없단 얘기다.(추가로 좀 교양이 있어서 이 새끼가 멋지게 보이려고 읊는 소리가 어디서 나왔고 맥락을 어떻게 재배치하는지를 이해하면 정말 어려울 거 하나 없다. 우리나라 학자들은 교양이 참 없다. 인문학 박사란 새끼가 ‘passion of jesus’를 ‘예수의 열정’ 따위로 번역하고 있는 꼴을 보면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다-정말 줘패버리고 싶다)

 

칸트 헤겔 얘기하다가 라깡 얘기에서 말이 길어졌는데, 뭐 칸트 헤겔도 비슷하단 소리 되겠다. 칸트랑 헤겔은 내가 참으로도 관심 있고 내적 문제 의식이 충만한 학문론 문제에 골똘하고 있다. 이 맥락으로 근대철학사를 재배치하면 대충 선험적인 것과 존재술어가 왜 문제되는지 바로 감이 오고, 이전까지 철학자들이 어케 문제를 해결하려 했는지가 대충 그려진다. 칸트는 대체로 나랑 비슷하게 보고 있고, 헤겔은 몇몇 구석에서 좀 특이하게 보는데(이 새끼는 독학파라 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 뭐가 되었든 이 새끼가 어케 보는지를 좀 이해해주면 “아~ 얘는 요 문제를 이렇게 이해하고, 이전 요 놈이 이 문제를 요렇게 다뤘다고 보는구나!”가 감이 온다. 그러면 뭐 대충 일사천리다. 테크니컬한 문제에 대해 요놈 쉐리가 어떤 술수를 쓰는지만 잘 기억하면 되고, 세세한 논증은 눈으로 읽으면서 구도가 유지되는지만 확인하면 책이 읽히니까 말이다. 그런데 뭐가 문제냐고? 학자들이 대체로 그렇게 안 봐서 문제란 소리다.

 

여기서 좀 개인사적인 얘기를 할 필요가 있다. 내가 어떤 븅신같은 이유에서 철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그것 때문에 이렇게 빌어 먹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둘째치고, 건전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가끔은 “나는 물론 철학을 좋아하지만, 이게 정말 세상에 쓸모 있는 게 맞을까?”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뭐 이런 고민은 대충 무쓸모의 쓸모니 하는 미취학아동들도 읊을 수 있는 븅신 같은 수준에서 멈춰선 안 되는 법이다. 나름 철학한다는 사람이면 성찰이 중요하고, 성찰은 자기성찰이 중요한 법이니, 당근 철학을 왜 하는지에 대해 복합적인, 즉 주관적인 이해와 객관적인 이해를 겸비할 필요가 있단 소리다. 내가 처음 대학원에 들어왔을 때, 이 사람 저 사람을 붙잡고 물어보면 대체로 뻔한 답을 해서 실망하곤 했었는데, 그때 나는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그런 답변을 제가 몰라서 물어봤나요? 저는 지금 장학금 줄지 결정하는 면접관이 아니에요. 뻔히 아는 소리를 반복하지 말고, 정말 말이 되는 얘기를 해보세요.” 뭐 결국 좋은 답은 못 들었고, 나는 계속 학문론을 하면서 학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과 답 속에서 철학 같은 게 하는 역할이 무엇인지를 따져보는 걸 업으로 삼게 되었다. 예상 외로 이게 철학사 해석에서도 큰 도움이 된다. 왜 그런가 하면 과거 철학자들도 비슷한 고민을 했기 때문이다. 뭐 지금은 그래도 학자다 하고 나오는 사람을 대놓고 조롱하지 않지만, 근대 이전에 학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이 아니었고, 공부한다고 책 읽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좋게 보지도 않았다. 빙켈만의 인생 여정을 보면 알겠지만, 독일 같은 곳에서 공부를 하겠단 소리는 빌어먹고 살겠단 소리고, 빌어먹으면 결혼도 못한다. 결혼하지 않고 일하지 않는 것은 당대 그 곳에서 그린캠프 갖다온 노란 딱지 이등병 같은 존재가 되겠단 소리와 같다. “저 새끼 변태 아님?”이, “쟤는 집에서 백날 노네~ 븅신~”이 따라다니 게 되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부하겠다고 설치는 것은 나 븅신이요가 되는 거고, 철학자면 이런 상황에서 딴 놈들이 븅신이라 그렇지 내가 틀린 것은 아니다라고 정신승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빙켈만은 이탈리아로 넘어가서 “무수한 악수의 요청”을 받고 기분 좋은 상황이 연출되었지만, 철학자들은 자신의 영혼의 언어인 모국어를 버릴 수 없고, 무수한 악수의 요청은 국내에서 받아야 만족할 수 있는 법인데, 어찌 본인이 설득을 안 하겠나. 그러니 열심히 설득하는 거고 고민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뭐 나는 대충 공부한다고 깝치는 놈들이 겪었을 비애에도 공감이 가고(한국에서 공부하는 것도 마찬가지니까), 이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타계해나갈 “방법”에도 많은 고민을 하고 있으니 그들이 이해되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가 되었든 결국 철학자라면 철학적 문제의식을 영혼 속에 품고 있어야하고, 그 문제의식을 통해 다른 철학자의 영혼과 공명을 이뤄야하는데(이런 표현은 내가 사랑하는 비평가 풀레에게 빌려왔다. 그에게 감사를!) 그런 것을 못하는 “직업” 철학자가 많고, 그런 양반들이 나같은 후학들을 밀어줄 생각은 안 하고 골프 치러다닐 시간 많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그게 자랑인가?), 갑질이나 하고 그걸 또 자랑하고(그게 자랑인가?), 어디 높으신 분들 만나서 비굴하게 굴거나 개븅신같은 조언을 늘어놔서 “철학자들은 븅신이니 굳이 조언을 구할 필요가 없구나!”라는 가르침을 하사하질 않나, 인문학은 무쓸모의 쓸모를 가졌나느니, 코로나 시대에 인문학은 인강으로 다 대체가능하니 대학에 필요 없다는 븅신 같은 학자의 주장에 동조하고 앉아 있어서 문제가 많단 소리다. 뭐 대부분은 한국 같은 변방에서 일어나는 왜소화의 결과지만, 본토에서도 직업 철학자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는 꽤나 크다.

 

뭐 사실 이러한 몰이해의 귀결 중 하나가 번역에 대한 밑도 끝도 없는 불만들이 되겠다. 이번에 읽어보면서 알게된 거지만, 시중에 나와 있는 임석진의 <정신현상학> 번역이나, 백종현의 <순수이성비판>은 그렇게 나쁜 번역이 아니다. 완벽한 번역은 없는 법이고, 둘 모두 연구주석이 좀 아쉽단 생각이 들고(내용이 별로다), 의미심장한 단어들을 병기하지 않아서 원어 확인이 어려워 연구자로서 좀 불편하고, 문장들의 양상 관계가 잘못 된 경우가 있어서 이런 점에서는 좀 문제적이지만(사실 문장들의 양상 관계를 번역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우리 문법상 표현하기 어렵기도 해서 비난하고 싶지 않다), 그렇다고 못 볼 번역이라던가, 나쁜 번역은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또 가독성 차원에서 생각해보자면, 임석진 번역은 매우 좋은 편이고, 백종현 번역은 대체로 딱딱하지만 그렇다고 못 읽을 정도는 아니다.(칸트 문장도 원래 그래서 딱히 큰 불만도 없다) 좀 짜증나는 건 이런 번역에 대한 말도 안 되는 비판이다. 번역이 아니꼬우면 자기가 더 좋은 번역을 내면 되는 거고, 좀 생산적인 코멘트로 발전하게 하고, 역자가 감을 못 잡은 부분이나, 잘 몰라서 의미심장함을 놓친 대목에 대해 조언해서 좋은 주석을 달게 해주면 될 것이지, 뜬금없이 해석 싸움으로 넘어가서 내가 맞고 넌 틀려를 반복하는 건 뭔 짓거리냔 말이다. 그런 번역어 싸움은 걍 원어 병기하면 끝날 문제고, 적당히 역주 달아서 다른 번역어들 소개하고 그 해석 차이를 간략히 첨가하면 될 일인데, 문제의 경중을 파악하지 못하니 세상 무너진 것마냥 달려들어서 서로 욕하고 싸우니 웃길 노릇이다. 칸트 본인 또한 철학책에 완벽은 없고, 섬세한 독자들은 여기서 모순을 발견할 수 있겠지만, 내 책의 이념을 따르는 독자들은 그러한 모순이 큰 문제가 아니라고 믿을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의 믿음으로 해당 문제들이 극복가능하다고 말하는데, 칸트 철학의 이념은 안 보고 곁다리만 보면서 왈가왈부하는 꼴을 보면 정말 이게 뭔 개 븅신이지란 생각이 든다.

 

안타까운 건 이런 사태가 거의 한국의 디폴트라 연구 좀 한다는 학자들도 비슷한 행태를 패시프 스킬로 장착하고 있다는 게 되겠다. 학부 수업을 들을 때, “이 책 번역 좋다.”는 거의 못 듣고 맨날 번역 구려서 원서 봐야한다는 소리만 들었는데, 내가 봤을 때, 정말 개븅신 같은 역본은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물론 븅신 같은 역본도 많긴 하다) 뭐 일단 문제 있는 역본이 보이면 이 새끼가 어디서 어떻게 틀렸는지를 보면서 “아오~ 새끼 교양이 없으니 이런 데서 틀리네~”, “이거 안 봐도 원래 문장은 이거겠네, 역자 새끼는 뇌가 없나?” 정도로 문제를 해결하며 분노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건데, 굳이 애들한테 보지 말라고 할 것은 또 뭐란 소린가. 애들도 대충 방향만 잘 잡아주면 그렇게 읽을 수 있는데 말이다. 뭐 왜 이런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지에 대해 나의 답은 준비되어있지만, 이건 다음 기회로 넘기고(얘기하자면 너무 길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런 것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뭐 일단 성실한 독자면, 내가 본 두 책 번역은 걍 믿고 보고, 뭔 소린지를 머릿속에 계속 그리면서 역자가 어디서 실수 했는지를 생각해볼 것을 권한다.

 

화두2: 논자시 예상답변 만들기

 

논자시를 준비하면서 석사논문이 좀 더 구체화되고 곁다리 논문들을 쓸 만한 아이디어들이 떠올라 기분 좋긴 한데, 나의 목표는 논자시 준비니, 이를 위해 예상 답변을 적어보려고 한다. 아마 될 수 있는 한 이것저것 적고 이를 블로그에 올릴 생각인데, 나름 기대 중이다. 과거 논자시 문제를 보니 기본적으로 물에 물탄 문제가 나오더라. 뭐 요즘은 좀 출제양상이 바뀌어서 좀 더 세부적이고 준비하기 까다로운 지엽적인 문제도 나오지만, 뭐가 되었든 난 물에 물탄 문제들을 중심으로 예상 답변을 써볼 생각이다. 원래 이런 문제에 대해서 글을 쓰는 걸 매우 싫어하지만, 나름 생각이 많아져서 쓰고 싶은 것들이 많아졌다. 물에 물탄 문제들은 학부 <서양근대철학> 기말고사랑 비슷한 문제들이고, 나름 연구자로서 학부생 수준의 답변이 아니라, 연구자의 답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뭐 말이 물에 물탄 문제지 꽤나 중대한 문제들이고, 해당 문제로 다양한 맥락과 해당 철학자의 다양한 철학적 답변들을 종합하여 진술하면 매우 재미난 글들이 될 것이다. 뭐 내가 글솜씨가 좋지 않아서, 나의 답변이 모범답변이라고도 할 수 없고, 어디가서 자랑할 수준의 글도 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지만, 일단 내용상으로는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연구성과들을 반영하고, 단순 병렬이 아니라 이런 연구성과들을 종합하여 하나의 답변을 만들려고 한다. 철학사 문제에 대해서 논변 분석하는 헛짓거리는 난 하고 싶지 않고(뭐 생각의 차이긴 하지만 도대체 저런 방법의 연구에서 얻는 이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없는 것 같다) 해당 철학자의 문제의식들을 그것과 달라 보이지만 실제로 그 문제의식 아래에서 이뤄진 다른 문제와 답변을 통해 설명하는 “테마비평”적인 텍스트를 쓰는 게 목표이다. 뭐 내가 사랑하는 테마비평은 개인과 개인이 공명할 수 있는, 전기적이면서, 삶 속에서 같은 테마를 취하고, 서로 다른 모티프들이 교차하며 만들어지는 스펙터클을 그려내는 스타로뱅스키풍의 글이지만, 좀 낮은 차원의 테마비평을 철학적 에세이로 쓰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워낙 기간이 촉박해서 몇 개나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사실상 논자시 준비는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을 준비하는 데 있으므로, 많이 쓰고 시험장에 들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물론 여러 의미에서...) 뭐 논자시 끝나고의 목표는 <개선비의 왈가왈부 철학사전> 연재가 될 것이라 이 후속 프로젝트를 위해서라도 이런 글쓰기 연습은 필요하다. 뭐 <철학사전>이 개인적으로는 더욱 중요한 프로젝트라고 생각하지만, 논자시 통과는 인생에서 중요하니 부디 잘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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