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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모든 변사또를 위해(우리 모두 변사또다)

이야기 할머니 사업이란 게 있다.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할머니들이 손주들에게 옛이야기를 들려줬다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이 시대에 반복하고자하는 사업으로, 정부 입장에서는 할머니들이 취업자가 되어 취업률도 오르고, 노인복지도 하고, 아이들 교육(?)도 하는 일석삼조의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나의 엄마도 이야기 할머니(우리엄마가 할머니라니 세월이 야속하다)가 되어 이야기 할머니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하고 있는데, 엄마가 외우는 이야기들을 보다가 어이가 없어서 이 생각 저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외우는 이야기들은 일관성이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냥 옛이야기 정도로 생각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시간대는 매우 다르다. 내가 굉장히 불쾌감을 느낀 이야기는 조선말 배경의 민담이었는데(아무도 이 이야기가 조선말 배경인지는 생각 안했을 거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못된 부자놈이 엄한 사람에게 생돈을 뜯어내려고 하자, 생돈 뜯기게 된 엄한 사람의 똘똘한 자식이 “현명한 방법”으로 부자를 엿먹인다는 이야기다. 뭐 기분 좋은 민담이라고 칠 수 있겠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어린 애들한테 들려주는 것의 의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우리가 아는 민담들 중 다수의 것이 조선 후기에 형성된 민담이다. 이 민담들은 비슷비슷하다. 있는 놈들이 못 사는 놈들을 괴롭힌다는 서사가 기본으로 깔려 있고, 못 사는 놈들 중 있는 놈들보다 잘나진 사람들이 있는 놈들을 엿먹이거나, 못사는 놈이 그냥 못사는 상태로 있는 놈을 엿먹이는 게 이야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는 한 편으로는 민중들의 욕망을 드러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속에 있는 적개심을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다. 왜 이런가? 우리가 한의 민족이라? 뭐 당연히도 그때 먹고 살기 힘들어서라고 할 수 있다.(이 문제는 다음 절에서 다루겠다) 뭐 사실관계는 다음절부터 따지고 난 이런 이야기를 이야기 할머니 사업에 끼운 관료에게 단적으로 이렇게 묻고 싶다: 그런 이야기들의 교훈은 도대체 무엇인가? 부자를 엿먹이면 기분이 좋다? 재치를 통해 갚아야할 돈을 안 갚으면 기분이 좋다? 아이들에게 옛이야기를 가르치고 싶으면 좀 그것의 의의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안 그래도 “요즘 것들”의 장래희망이 유튜버 "따위"가 되고, 사회적인 부를 생산하는 것도, 사회적인 질서를 발전시키는 것도 아닌, 그냥 돈 잘 버는 게 최고가 된 상황인데, 이런 이야기를 왜 돈 써가며 애들에게 들려주는 것인지 모르겠단 소리다. 이런 이야기는 그냥 유튜버들의 성공신화를 통해 잘 학습할 건데 돈들여 무엇하겠나. 이런 말을 하면 나를 꼰대로 몰면서 유튜버를 폄훼하고 유튜버들의 노력을 제대로 쳐주지 않는다고 버럭버럭 화낼 치들도 있겠지만, 그들에게 도대체 유튜버들이 사회에 뭔 기여를 하길래 그렇게 많은 돈을 쓸어담는 거냐고 물으면, 그래서 네가 OOO보다 더 노력함?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좋아서 돈 주는데 왜 ㅈㄹ이냐 너 빨갱이임? 따위의 반응만 하고 제대로 된 답변은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무시해도 좋다. 뭐 유튜버들의 노력이 내가 공부에 들인 노력에 비하면 새발의 피고, 나란 븅신이 비교대상인 게 좆같으면 의사들의 노력에 비교할 때 그들의 노력이 새발의 피가 된다는 것은 정말로 조족지혈의 문제인 것은 차치하고 말이다. 뭐가 되었든 이런 걸 왜 정부에서 돈 퍼주면서 애들에게 가르치는지 의문인데, 난 (나의 종특 때문에) 여기에서 조선후기 민담의 괴상함을 좀 더 얘기하고 싶다.

 

이영훈도 어느 곳에서인가 흥부놀부전을 들먹거리면서 조선 후기의 끔찍함을 얘기한 적이 있다.(아주 불쾌하다) 이영훈의 요지는 조선은 너무 미개한 나라여서 민중들이 강남 제비라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들이 겪는 삶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아귀지옥이니 탈조선하고 친일로 갈아타란 소리 되겠다.(이영훈답다!) 하지만 (이중적으로) 흥미로운 점은 조선이 아귀지옥이란 게 아니라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등장한 강남 제비란 것을 이영훈은 지적하고 있지 않다는 게 되겠다. 뭐 이영훈의 머릿속에서는, 조선=미개국=상업 불가능이 있으니 이영훈의 눈에는 안 보이거나, 보여도 무시해야만 했던 거겠지만, 이영훈의 흥부놀부전 요약본에도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정체가 드러나고 있다. 흥부가 박을 켜니 쌀과 금이 나온다.(뭐 이건 이해가 된다) 그런데 다른 박들에서는 외국산 비단들이, 외국산 사치품들이 나온다! 그 유명한 화초장가에서 놀부가 화초장 세글자를 외우지 못해서 우스꽝스러운 상황이 연출되는 것은 다분히 이상하다. 화초장의 자리에 외국에서 들어온 요상한 물건이, 예컨대 읽기 어려운 외래어가 있었다면 이는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된다.(‘오뜨꾸뛰르’ 같은 용어라고 생각하면 평생 농사 짓고 산 사람들이 못 외우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놀부가 박을 켜니 고리대금업자가 나와 놀부가 몰락했다는 것까지 생각하면 이제 강남 제비의 정체는 명백해진다. 강남 제비의 강남은 중국의 강남이고, 강남 제비가 물어다 준 박은 배를 상징하고(사실 박과 배의 비유는 흔하니 놀라울 것도 없다), 흥부는 해외 무역 사업에 투자하여 (말그대로) 대박을 친 것이고, 놀부는 해외 무역 사업에 투자하여 (말그대로) 쪽박을 찬 것이란 소리가 되겠다. 민중들이 놀부대신 흥부를 선한 역에 둔 것은 흥부가 정력왕이어서가 아니라, 장자상속제가 도입됨에 따라 고통 받는 차남들이 등장했고, 민중은 이 차남들에게 공감을 한 것이고, 이런 차남들이 한탕을 통해 성공하는 것을 그들 자신도(우리 모두는 차남이었다?) 열망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차남들의 역습"이 정말로 좋은 것일까?

 

동아시아의 진정한 규범은 바로 노력이었다. 벼는, 특히 동아시아에서 벼는 풍부한 수확물을 안겨주는 작물임과 동시에 노력의 가치를 알려주는 가장 좋은 배움터였다. 벼농사는 농부가 얼마나 신경 쓰냐에 따라서, 얼마나 잡초를 잘 뽑고, 메뚜기와 새로부터 쌀들을 지켜내냐에 따라 수확량이 크게 차이 나게 된다. 미국의 좌파들이 동아시아 국가들의 야만적인 교육 방식을 찬양하는 것은 이 야만적인 교육 방식(이하 ‘헬조센 교육’이라고 하자)이 갖는 미덕 때문이었다. 적어도 이 동아시아 국가의 사람들은 노력의 가치를 설파하며, 자신의 한계 안에서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하였고, 그들은 “공부”라는 통로로 “신분상승”을 이룩하려 “노력”하였다고 할 수 있다. 니스벳 같은 심리학자는 이러한 노력 중시 문화가 벼농사가 가진 체험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는데, 뭐가 되었든 동아시아-유교 문화에서 노력은 중요한 덕목이었고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근본 원리 중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노력의 가치, 노력이라는 미덕의 붕괴를 보여주는 것이 조선 후기의 민담이다. 이 민담들에서 돈벌이는 새로운 질서, 상업을 통해 이루어지고, 그것이 무엇을 가져오는지에 대해서 양반들은 양면성을 고찰하지만(허생전이 대표적이다. 여기 등장하는 클리셰들도 참 흥미롭다), 민중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때까지 양반들에게 억눌려 있다가 이제 좀 한탕 쳐서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게 되었는데 세상의 이치니 뭐니 하면서 떠드는 놈들은 모두가 재수 없는 놈들이란 반응이다. 이러한 반응은 때로는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리충족되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내가 말하고 싶은 변사또전이 되겠다.

 

변사또의 스토리를 듣기 전에 춘향전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성춘향과 이몽룡의 러브스토리와 “암행어사 출두요~”와 함께 변사또의 뚝배기가 박살나는 것은 우리 모두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서 변사또의 그 유명한 대사 “네 이년! 수청을 들라!”의 기원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변사또가 춘향이에게 수청을 들라고 명령한 것은 그게 춘향이의 일이기 때문이었다. 춘향이의 일? 그렇다 춘향이는 관기인 것이다. 월매가 은퇴한 기생인 것은 에브리바디가 아는 얘기고, 춘향이도 조선법도에 따라 기생이었고, 월매가 관기라 춘향이도 관기인 것은 조선 시대의 불변의 자연법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월매-춘향이는 면천을 하지 않았지만, 어떤 방법으로인지 떵떵거릴 수 있는 재산을 모았고(당근 부정한 방법임을 눈치 깔 수 있을 것이다), 이 재산을 바탕으로 로비를 벌여 성춘향과 이몽룡의 러브스토리가 탄생한 것이고, 그들의 탁월한 로비 능력으로 지역에서 이제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비공식적으로) 오른 것이 되겠다.(한국식 범죄물의 진정한 모델은 역시 "범죄와의 전쟁"이다.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마! 내가 임마!”면 게임이 끝나는 범죄물...) 우리의 가여운 변사또는 이런 타락한 상황에 놓인 고을을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고자, 비공식적인 알력이 아니라 조선의 법도에 따라 일을 처리한 것이 되겠다. "관기는 관기의 일을 할 것이고, 재산 놀음으로 이곳저곳에 실력을 행사하는 부정한 짓거리를 하지 말지어다!" 허나 변사또는 세상의 타락의 심원함을 직시하지 못하였고, 타락한 상류계급에서 난(生) 부패한 관료에 의해 물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린치를 당하며 우리의 비극은 끝이 난다. 도대체 관기에게 관기 업무를 하라고 명한 것이 마패로 뚝배기 깨질 만한 죄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 그것이 조선 후기 민중들의 욕망이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한탕 쳐서 떵떵 거리고 살고 싶은데, 세상의 법도를 외치고 법도에 맞는 절제된 삶을 살자고 가르치려드는 씹선비들은 좀 쳐맞아야한다는 게 조선 민중의 열망이었던 것이다.

 

민중들이 떵떵거리며 살고 싶어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방법이 정말로 옳고 그게 사회를 발전시킬 때 진정한 사회가 이룩할 수 있다. 세상 질서가 바뀌었고, 그래서 농사로 안 될 사회가 왔다 쳐도, 농사일을 열심히 하여 땅을 늘려가며 부농이 되는 것에 비견할 만한 당대에 가능한 "합법적"이고 "사회에 모범이 되는" 축재의 방법이 있었을 터인데, 강남 제비를 통해 한탕 쳐서 종을 삼백명이나 부리는 사회가 뭐가 그렇게 좋겠냐는 얘기다. 이런 사회야말로 진짜 아귀지옥인데, 이영훈의 주장처럼 못살아서 아귀지옥이 아니라, 결국 한탕 쳐서 남들을 노예로 부리는 것이 온 국민의 삶의 목표라는 점에서 아귀지옥이다. 한 명이 그렇게 사는 것은 괜찮지만, 그게 사회적 모범이고 사회적 덕목이면 문제는 심각해진다는 소리다. 노력이 중시되는 사회가 건강한 것은, 노력을 통해 개인이 쌀 한 톨을 더 만들어서, 노력을 통해서 개인이 “사짜직업”을 얻어서가 아니다. 모두가 노력하는 사회는 더욱 발전적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단 소리다.

 

그런 점에서 변사또의 방법은 비난할지언정 그가 목숨을 건 가치는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노력으로 관료가 된 것도 변사또고 빽이 없어서 이몽룡한테 털리고 쪽박 찬 것도 변사또다. 변사또의 고리타분함은 그의 노력 지향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고, 그 속에서 사회적 법도에 맞게 모두가 열심히 살자는 아주 단순한 이상을 따라서인데, 그 고리타분함이 정말로 잘못된 것이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비유를, 우리 사회의 한 현상을 끌어 설명해보자. 변사또의 모습은 근래에 사회적 논란이 된 인천공항 정규직 전환 사태에 반응하는 인공 정규직원과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의 눈에는 그들이 욕심 많은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비정규직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자는 게 뭐가 그렇게 나쁜 것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틀린 소리를 한 것만은 아니다. 복잡한 사회적 합리성 문제들을 차치하고 그들의 감정을 들여다보면 이해 안 될 구석이 많다. 쩨쩨하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들의 외침은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의 삶의 붕괴를 목격한 자에게서만 들리는 비명 소리에 가까운데, 그들이 “부러진 펜”을 말하며 공부의 배신을 얘기하는 점에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뭐 그들이 떵떵거리고 살고 싶어 하는 욕망은 적어도 노력을 통한 것이었는데, 어느새 노력이 아니라 복불복으로 떵떵거림이(정규직이 떵떵거림의 목표란 게 사실 진짜 비극이지만... "혁명마렵다"란 소리가 왜 안 나오는지 모르겠다) 결정되는 것에 대한 회의감과 분노가 그들의 본원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변사또는 이런 점에서 훨씬 더 선량한 사람이다) 뭐가 되었든 그들은 노력을 통해 성공하는 사회가 건전하고 공정한 것이 아니겠냐고 묻는 것이고, 적어도 원리원칙적으로 해당 사태 문제를 넘어서 사회 자체는 그렇게 될 때 건전하고 공정한 것이 맞는 것도 현실이다. 적어도 인공 사태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 전체에 대해서는 노력을 통한 성공이 가능하고, 노력이 배신하지 않는다는 도시전설이 유통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한다는 소리다. 물론 이러한 도시전설이 구라기만 하면 안 된다. 그런 전설이 노오오오오력이 부족하다는 꼰대들의 외침이 아니라 스스로 체험하면서 느껴지는 세상의 이치일 때 건강한 사회일테니 말이다. 그러니 결국 변사또는 틀린 것이 아니다. 문제는 변사또가 아니라 로비를 저지르는 성춘향이고, 뒷돈에 넘어가 세상의 질서를 훼손시키는 이몽룡이다. 러브스토리로 포장된 이야기 뒤에는 돈의 움직임이 있고, 그들의 사랑은 돈으로 엮겨 있었다. 우리는 이제 성춘향-이몽룡이 아니라 변사또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이름도 참 가엾은 우리 변학도가 우리의 모습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떵떵거리지 못하는 것은 성춘향이 아니라 변학도였고, 우리의 실패한 삶은 결국 변학도란 인물의 실패와 같다. 우리의 노력은 배신당했다. 변학도의 노력이 배신당했듯이.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변학도를 바라보아야하고 그의 가치를 바라보아야한다. 변사또를 위한다는 것은 결국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다. 우리 모두가 변사또이기에, 우리 모두가 변사또가 되어야만 하기에.

 

덕분에 변사또의 스토리에, 이를 현대적인 상황과 겹치는 이중구조를 가진 이야기에 마음이 가기 시작했다. 뭐 나야 전문 글쟁이도 아니고, 글에 살고 글에 죽는 네츄럴 본 글쟁이도 아니니 이게 언제 쓰여질지 모르겠지만, 모티프들을 수집해 내러티브를 구축해보고 싶단 마음이 생겼다. 뭐 일단 변사또 스토리는 클리셰들로 구성하면 되니 기본 골조는 다 짰는데, 이 이야기를 현대의 어떤 맥락에, 어떤 인물들에 올려놓고 이중구조를 보여줘야 효과적일지는 좀 더 생각이 필요하다. 뭐 일단 좀 더 모티프들을 수집해야겠단 생각이 든다. 뭐 잘되든 못되든 블로그에 연재하긴 할 거지만 읽어줄 사람이 없을까 더 걱정이다.(제발 욕이라도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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