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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일기

꾸준히 글을 쓰지 않으니, 글 실력이 늘지를 않는다. 며칠 연속으로 쓰다보면 잠시 실력이 오르지만, 한동안 쓰지 않으면, 금세 떨어진다. 이러한 실력 저하가 드러나는 부분이 바로 주술 호흥과 쓸모없는 수식어들의 위치이다. 굳이 안 해도 되는 것들을 채울 때, 그것이 적재적소에 들어가야 맛깔이 나는데, 이상하게 멍한 시점에는 그런 것들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위에 내가 적어둔 르쿠르 연구서에 대한 코멘트에서도 이상한 문장들이 계속 등장한다. 몇몇 문장은 수식어(?) 접속사(?)의 위치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꽤나 괜찮아지지만, 몇 개의 문장은 아예 새로 써야 의미가 통할 것 같다. 이런 글을 블로그에 올린다면 수치플이 될 것이다. 생각해보니 블레이드 러너에 대한 나의 코멘트 또한 매우 구린 문장들로 채워져 있다... 조만간 고쳐야지 하면서 고치는 것을 미뤘더니 결국 고치지 않게 되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조만간 고쳐야지

 

일본 저작들을 좀 더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예전에 비해 일본 저작에 대한 기대는 많이 낮아진 상태이긴 하다. 옛날에는 일본에서 히트 친 작품이라고 하면 굉장한 통찰이 있는 것으로 기대하곤 했었는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다. 일본의 학계는 잘 모르겠지만, 출판계는 돌아가는 꼴이 그려지는 것 같다. 일본 학계는 우리 학계처럼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상태는 아니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매우 미미하다. 독서 계층이 두텁긴 하지만, 그들이 그렇다고 지성인이라던가, 교양인인 것은 아니다.(물론 그들 스스로는 자신들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는 최근 본 <중국화하는 일본> 저자가 포착하고 있는 면모이기도 하다. 그는 일본의 특징 중 하나가, 지위의 비일관성이라고 주장한다. 지위의 비일관성이란, 상징 권력을 갖는 자와 실질적인 권력을 갖는 자가 동일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즉 지식인들은 존경 받지만, 정치적으로는 아무런 권한도 갖지 못하고, 정치인들은 존경과는 거리가 멀지만 실질적인 통치는 모두 이들이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보통 민의-상식은 매우 후진 수준을 계속 유지하고 있고, 학계는 상식과 동떨어진 상태가 된다. <중국화하는 일본>의 저자는 이러한 상황을 타계하려고 글을 쓴 것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는 꽤나 의식적으로(계속해서) 자신의 책의 고객이 될 역사 덕후들을 힐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그들의 심기를 자극한다. “역사 덕후들이 왜 이 시대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이 시대를 좋아하는 것은 무식 때문이다”, “역사 연구의 성과물도 안 보고 헛소리를 한다”, “아직도 그 수준이니 나라가 이런 꼴이다따위의 말을 계속해서 내뱉는다. 이러한 그의 화법(?)은 독서계층의 존재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우리나라야 존재하지 않으니 상황이 다르다...) 그들을 실질적인 교양인으로 발전시키려는 기획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이고, 이는 장기적으로 학계-실천의 간극을 좁히려는 데 있다. 그는 일본의 근대화속에서 형성된 환상이 오늘날에는 부적합하며(사실 이는 내가 좋게 좋게 말을 굴린 것이다. 그는 그러한 환상은 다 쓰레기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이제 현대적 연구들을 참고해서 세계 돌아가는 꼴을 이해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이 병크를 저지른 것도, 역사를 통해서 이해해야하고, 나아갈 길도 역사를 통해서 생각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연구들 속에서 과거를 단순히 객관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서, 병신처럼 잘못 이해하고 지랄염병하는 것을 좀 고치자는 게 저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러한 주장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일본 독서계층은 두텁지만 질이 좋지 않고, “근대화시절부터 문화에 대한 관심도 크고, 이에 입각해서 자신들을 이해하려고, 혹은 이해했지만, 그것이 최신 연구를 반영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돈은 많이 투입됐고, 사주는 사람도 있으니 나름 사상가입네 하고 주장할 만한 치들이 꽤나 많이 나왔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들의 내적 맥락을 형성했다는 것은 칭찬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내적맥락은 서양의 맥락과는 확실히 다르고, 이들의 종합은 좀 탈맥락적이고 뜬구름 잡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밀도가 떨어지는 게 흠이란 소리다. 뭐 이런 문제는 사실 문제만은 아닌게, 일본에서는 나름 교양인 형성에 신경쓰고 있고, 사상들이 단순히 지들끼리 북치고 장구치고 하는 것보다 뭔가 생산성이 있는, 대중을 설득할 만한 포인트가 있는 것에 신경을 쓰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종합적 시도를 중요시하고, 종합적 시도는 많지만 그것이 남발하는 경향이 생겨서 그 꼴이 된 거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사상이 약간 얇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한국 사상이 뭐 있냐하면 아예 답할 게 없으므로 이걸 욕하는 것은 무의미하고(얄팍하고 수준이 낮다고 주장하는 놈들은 얼마나 깊이 있는 통찰을 내놓을 수 있을까?), 일본의 맥락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상대적으로 접근하면 일본 사상서에서 얻을 것은 매우 많을 수도 있다. 오늘만 해도 나카무라 유지로의 저작에서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매우 중요한 인물, 라이문도스 룰루스의 방법”, 실바노 아리에티(Silvano Arieti)의 고-논리학(paleo-logic) 따위를 들을 수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조류들인데, 내가 여기서 듣지 않았으면 평생 듣지 못했을테니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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