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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단상들

얼마전 통근시간 버스 안에서 갖은 소란을 떠는 아이들을 보며 문득 든 생각이 있다.

"정말 악령들린 원숭이들 같군!"

순간 나의 생각에 내가 놀라 고민에 빠졌다. 왜 "악령들린" 원숭이였을까하고. 물론 아이들은 원숭이가 아니다. 하지만 그 이유는 무엇일까? 

원숭이는 원숭이 나름의 원숭이다움이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원숭이다움을 갖추지 않았기에 원숭이일 수 없다. 아이들은 어떤 "다움"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절제와 방종에 의해서만 정의될 수 있다.

그렇기에 아이들은 어떤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아이들은 사람도 아니고 원숭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것들"은 어떤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에 그것들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것, 그 속에는 사실 이러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여기서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 영화의 제목은 사실 정반대의 의미를 가리킨다.(번역된 제목은 오역이다.) 이 영화가 가리키는 진짜 의미는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지 못했다."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것만이 아무것도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예술의 근원성을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찾는다. 그렇기에 영화는 죽음을, 그리고 죽음의 극복을, 오직 죽음 속에서만 구하고 있다. 에우리디케의 이야기, 오르페우스가 예술로서 죽음을 극복할 뻔했던 이야기 속에서 예술가는 죽음의 극복을 묻는다. 시간의 넘어섬, 죽음의 넘어섬, 예술적 가상이 보여주는 공간으로부터 이탈을! 배우들은 자신들이 보는 젊은 예술가들의 영화 속에서 자신의 과거를 볼 뿐만 아니라, 바로 과거 그 자체가 된다. 그들은 영화에 몰입함과 동시에 자신이 분扮했던 배우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현재의 자신이면서 과거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이면서도, 바로 그 배역으로, 바로 그 배역에서 현재의 젊은 예술가들이 된다. 그들은 시간을 극복하고, 마치 죽음을 극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영화 속 감독은 죽음을 극복하고 모두 앞에 다시 등장할 수 있다. 하지만 결국 예술은 죽음을 극복하지 못하고, 영화 속 감독은 죽음의 길로, 에우리디케를 구해내지 못하고 죽음의 길로 걸어들어가는 오르페우스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왜냐하면 예술이 시간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즉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됨으로써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바꿈으로써, 예술은 시간을, 죽음을 극복해낸다. 그런데 자신을 바꾸는 것은, 즉,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죽음을 극복할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예술을 통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의 결과물은 항상 죽음뿐이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은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지 못했다"가 된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봄으로써 죽음을 극복할 수도 없고, 죽지 않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의 극복도, 죽음도 보지 못했다.

근대 이후의 예술가들은 모두 이 문제에 천착했다. 자아의 문제, 정립과 반정립의 문제 속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아님과 그것의 극복, 그리고 죽음을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들은 예술을 통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기를, 그리고 그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어느 예술가가 말한, 예술가가 되는 일은 어린 아이가 되는 일과 같다는 말은 이 맥락에서만 읽을 수 있다. 예술가들은 예술을 통해 어린 아이가 되려고 한다. 그들은 어린 아이, 즉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됨으로써, 이미 지난(어른은 아이들의 미래니까!) 과거의 존재가 되려고 한다. 그들은 시간을 극복하고, 그럼으로써 죽음을 극복하려고 한다.


예술로써 시간을 극복하고, 죽음을 극복한다는 이러한 황당한 이야기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다. 헤겔은 철학이 회색을 회색으로 칠하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철학이 회색인 것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오직 해가 질 무렵이 되어서야 날개를 펼치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철학은 오직의 밤에만 가능한 학문이고, 밤에 모든 빛은 그 색깔을 잃기 때문에, 철학은 회색의 학문이자, 회색을 회색으로 칠하는 학문이 된다.

그렇다. 철학은 회색이다. 그런데 철학이 빛깔없는 것이라면, 도대체 철학의 가치는 어디서 나올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빛깔없는 삼삼한 것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철학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것일까? 헤겔은 철학을 교양의 영역에서 최고의 학문의 영역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그는 꼴찌를 수석으로 만든 마술사였다. 그런데 그가 꼴찌를 수석으로 만들면서 그것을 모양빠진 것으로 만든다면 그것은 역설 아닌가! 이러한 역설의 답은 철학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헤겔은 철학은 지나간 것을 위한 학문이다. 그것은 세계와 자신을 화해시키는 것이며, 자기자신에게 건내는 위로의 말들이다. 그것은 모든 지나간 것들에 역할을 부여한다. 모든 것을 필연의 과정으로. 모든 것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모든 것은 가치가 있다.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칸트의 인간학에서 나오는 유희, 빌헬름 마이스터의 끝없는 대화들, 오직 그것들만이 그를 성안 사람이 되게 만든다. 그것은 그를 직업적으로, 성적으로 완성시키며, 진정한 직업인으로, 진정한 남자(남편)로 만들어준다. 칸트와 괴테는 그러한 일들을 대화 수준에서밖에 찾지 못했다. 그것들은 오직 결과적으로 필연성을 얻는다. 하지만 헤겔은 과정 속에서까지 그러한 필연성을 끌어올린다. 그것이 변증법이 추구하는 바이며, 지양이 뜻하는 바이다. 그것의 필연성은 이미 있었고, 과정속에서 실현되며, 결과적으로 달성된다는 것이다. 철학이 지나간 것을 위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다. 그렇기에 철학은 화해이자, 위로이며, 최고의 학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자리를 알게해주고, 그 속에서 가치있음을 확인시켜주며, 그것을 필연성의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철학은 회색이자 학문의 여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그러한 마술이 통할 수 있을까? 만약 철학이 지나간 것을 위한 것이라면, 미네르바의 올빼미가 항상 지각(遲刻)한다면, 철학이 앞을 보는 학문이 아니라 뒤를 보는 학문이라면, 도대체 철학이 하는 역할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이 위로를 건낼지라도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짓거리다. 눈이 뒤통수에 달려 있다면, 눈의 힘은 어처구니 없는 곳에만 쓰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눈에 뒤통수에 달린 괴물, 철학이 만약 그러한 것이라면, 그것은 학문의 여왕이 아니라, 한갓 자기기만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진실함을 잃고 혼자하는 가장극이 되어버리고 만다.

가장 큰 문제는 지각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이다.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그것이 지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항상 이미 지각한 상태로서만 척도를 매길 수 있는 것 아닌가? 헤겔의 기준에서 도대체 지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지각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건 정신에 나타나난다. 그리고 지각하지 않는 것은 오직 지각(知覺)뿐이다. 지각은 앎이라는 오랜 주장은 여기서 다시 돌아온다. 그것은 우리를 테아이테토스의 답과 소크라테스의 물음 속으로 이끌고 들어간다. 역설적이게도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에서 앎(episteme)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계속 빙빙도는 생각(doxa)들만을 보여준다. 정말 그렇다면, 도대체 플라톤의 기획은 가능한 것일까? 우리가 정말로 생각을 통해서만 앎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도대체 우리에게 앎이 무엇일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역설적이게도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지각(知覺)은 어떤 것도 아니고, 생각은 어떤 것이며, 앎은 "무엇"이다. 플라톤은 생각을 통해서 앎으로 나아가려고 했지만, 길은 반대로도 나있다. 생각에서 지각으로, 어떤 것에서 어떤 것도 아닌 것으로... 그리고 그것이 색깔을 바라게 하여 회색으로 만드는 일이 아니라, 색을 색 자체로, 총천연색들로 만드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의 눈은 앞으로 나있고, 우리가 보는 세상은 만화경을 통해 들여다본 것과 같다. 우리는 화해를 하기 위해서 먼저 불화를 겪어야만 한다.


예술은 이렇게 시작되고, 이렇게 시작되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모더니즘이 남긴 흔적은 만화경을 통해서 본 그것이 아니라 거대한 단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볼 수 있는 예술의 색은 무엇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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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렇다고 난 니체의 편을 들 수도 없다. 나는 계속해서 극단적인 관점만을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는 지각만을, 그 사람과 나 사이에 남은 무엇이 없음을 말할 수 없다.

나는 그 사람과 나 사이에 이미 지나간 과거 속에 분명 구체적이며 보편적인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내가 그것을 알지 못했고 그래서 모든 게 흐드러졌을지라도.

나는 다시 플라톤의 편에 서서 니체를 보고 니체의 편에서서 플라톤을 볼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가치일뿐만 아니라, 가장 즐겁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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