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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김경만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 재고

김경만의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에 대한 코멘트를 올린 적 있다. 그때 나의 핵심적인 코멘트는 국내 문제에 대한 김경만의 대립각에는 동의한다는 것이었고, 국외에서 국내로의 이행이란 차원에 대한 김경만의 침묵에 대해서는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좀 더 상술하자면 다음과 같다. 김경만은 국내의 자생적 이론을 꿈꾸는 지난 세대의 학자들에 대해 비판한다. 그들은 자생적 이론을 설립하겠다고 주장하면서 서양의 언어를 배척하고, 이미 사라진 과거의 언어, 그것도 별 근거 없이 조선-유학의 언어가 진정한 우리 언어라는 전제 아래에서 꿈꾸듯 그려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김경만은 이에 대해 한국적인 언어, 한국적인 이론이라는 것은, 단순히 어휘적으로 특성화되는 것도 아닐뿐더러, 서양의 것으로 치부되는 언어 속에서 차이를 얻는 것일 때에서야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납득시키기 위해, 한편으로는 서양의 것이라고 치부되는 언어도 우리 사회에 의미 있는 분석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부르디외 사회학을 토대로 자신의 실천을 분석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디외의 본인의 실천을 근거로 자생적 이론이 (부르디외의 사회학으로 분석되는) 상징권력 투쟁 속에서 형성된 것임을 보인다. 내가 김경만에 대해 비판한 지점은 김경만의 주장과 분석이라기보다는 여기서 드러나지 않는 한 가지 맹점이었다. 김경만의 상징적 지위가 국외에서 어떤 투쟁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는 명확하게 분석되지만, 도대체 국내에서 그의 지위는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나의 물음은 일차적으로 김경만의 그러한 실천들이 국내에 자리잡는 데에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고, 그것이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요소의 것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짐작 아래에서 이러한 물음을 제기한 것이었다. 이러한 물음에 대한 답은 김종영이 <지배받는 지배자>를 통해서 제시하였다. 그의 대답은 바로 나의 짐작, 즉 국내적 지위가 김경만이 선택한 부르디외 사회학을 통해서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을 거라는 짐작이 올바른 의심이었음을 확인해주었다. <지배받는 지배자>는 국내의 상징권력은 언어적 실천을 통한 상징적 투쟁이라기보다는 국내와 국외의 격차에 기생하여 자신의 지위를 권위를 통해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글로벌 지식장과 상징폭력>에 대한 나의 코멘트가, 문장이 구릴 수는 있어도 내용적으로는 구리지 않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를 심화하기 위해서는 해당 구도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들 필요를 느껴 <재고>의 글을 쓴다.

 

먼저 김경만이 비판한 과거 시대의 학자들이 김경만의 지적처럼 (물론 그는 점잖게 표현했고, 절대로 평가절하하는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사실로서 기술될 수 있는 문제니) 븅신들이라는 것을 비틀 필요가 있다. 물론 사실로서 구시대의 학자들은 븅신이 맞고, 그들이 조선의 언어를 가지고 우리 이론이니 뭐니 떠든 것은 성찰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경 조직이 일으킨 반복 행위라는 것이 분명하지만, 논의를 위해 약간의 왜곡은 필요하다. 그들이 서양의 언어로 규정한 국외의 언어를 배제하려고 한 시도가 담고 있는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김경만을 비판한 김종영의 <지배받는 지배자>의 구도를 가져올 필요가 있다. 국내의 학자들은 어떻게 상징권력을 갖는가? 이에 대한 답은 상징권력은 갖지 않고, 특수한 영역에서 갑질을 통해서 잘난 척 할 수 있는 기회만 주어진다가 되겠지만, 뭐가 되었든 그들이 권위를 갖는 부분이 있으므로 이를 상징권력이라고 불러보자. 그들의 상징권력의 원천은 미개한 국내와 선진의 국외(보통은 미국)라는 구도 속에서, 국외의 고등 문물(물론 이들은 그들의 하이컬쳐에는 들어가본 적이 없으니 이는 공상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을 흡수한 자들이 문명의 담지자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상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상식이라고 함은, 엘리트라고 여겨지는 놈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안 배운 사람들도 그렇게 여기기 때문이고, 그것을 통해 학술적 제도가 운행되고 있으니 상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핵심적인 것은 학자들이 본인이 유학한 곳에서 배운 무엇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라는 본인들의 착각과 그들이 잘 알 것이라는 우리의 순진한(하지만 어쩔 수 없는) 믿음에 의해, 국내와 국외의 격차에서 비롯되는 알 수 없음” 속에서 그들이 뭔가를 떠들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이 대단한 것은 그들의 말과 글의 내용이 아니라(보통 이를 포장하기 위해 거창한 단어들이 난무하곤 한다) 그들의 학위이고, 그들의 학위의 급은 유학한 곳의 유명세에 의해 결정된다 할 수 있다. 뭔지 모르겠지만 뭔가를 떠드는 그들은, 그들이 배운 그곳이 여기보다는 뭔가 나을 것이라는 우리의 믿음 아래에서, 배웠다는 징표인 학위를 통해 군림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교수직은 대체로 국내 학계에서의 기여에 의해 결정된다기보다는 개인적 역량에 의해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국내 학계라는 것은 드라마 세트장처럼 허울은 있지만 안은 없는 곳이니 어쩔 수가 없다) 보통은 그들만의 사정에 의해서 제도적인 권위를 담보하는 직업에 진입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러한 상황이 그 자체로 븅신 같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김종영이 보여준 것처럼, 국내에서 잘난 척 하는 양반들이 해외에서 열등생에 히키찐따처럼 살았다는 것도 꽤나 코미디지만, 거기서 배워왔다는 것만으로 상징권력을 얻는다는 사실이 진짜 코미디이다.(앞의 사실은 양념 정도?) 뭐 일단 영어를 원어민처럼 발음할 수 있다는 것으로 상징권력이 좌우되면서 멀쩡한 지식인을 조롱하곤 하는 븅신 같은 대한민국이지만, 우리랑 다르다는 차원에서 얻은 차별성이, 가치의 차이로 전환된다는 것은 많은 고찰 없이도 우스꽝스럽다. 보통 이런 폐해에서 비롯된 또 다른 폐해는, 배울 만큼 배운 학자들이 미국은 이러이러한데 한국은 이러이러하니 미국식으로 바꿔야한다는 븅신 같은 주장을 하게 만든다는 것이고, 이런 븅신 같은 주장들이 진짜로 먹혀서 대학 제도들을 바꿨다는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은 일단 주어진 것이므로 그대로 전제하고, 이러한 현실을 바꾸려고 할 때 생기는 난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난점은 자체의 질서를 확립할 언어가 결국 해외의 것이고, 해외의 것은 원조 맛집처럼, 해당 지역에서 배운 사람에게 그 권위가 부여된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권위의 원천이 여긴 븅신이고 좋은 것은 다른 데에 있다는 구도라면, 변화 자체도 다른 곳으로부터 수입될 수밖에 없기에 난점이 생긴다고 말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구도는 국뽕을 그대로 받아들여 한반도의 역사를 5천년이라고 잡을 경우, 븅신 같은 여기와 대비되는 숭상될 만한 여기와는 다른 어떤 곳이 달라졌을 뿐 5천년 동안 계속 지속된 것처럼 보인다. 좀 더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국내에서 사회학을 전개한다고 했을 때, 이론적 용어가 투입되는 상황 속에서 국외의 용어를 사용할 경우 언젠가 국내에 들어와서 반복 행위를 할 바로 그 용어의 전문가가 날뛰는 꼴을 봐야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 뭔가 여기서 생산적인 논의를 위해 열심히 떠들고 있는데, 갑자기 귀국한 멍청이가 산통을 깨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이 멍청이가 해당 논의의 대상이 되는 현장을 잘 아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걍 그 언어 전문가라는 것만으로도 그의 승리가 확실시 되기에 그렇다. 그 개념을 잘못 썼다는데 할 말이 뭐가 있겠는가? 여기에 더불어 국내에서는(사실 이건 미국에서도 자주 목격된다) 보통 사용되는 개념의 원천을 중요시하여, 경전을 숭배하며 떠들게 되는데, 그 경전이 그렇지 않다 하면 그 경전을 토대로 한 모든 상징권력이 붕괴하는 것은 꽤나 당연하다. 물론 이론을 신통치 않게 생각하는 몇몇 분야에서는 이런 일이 생길일 없겠지만, 적어도 사회학, 특히 좀 일반론적 사회학에 기초해서 한국은 어떻니 하는 사변을 일삼는 사회학이라면 당연히 문제가 될 만한 얘기다. 바우만의 사회가 시공간 어디에도 없는 것이듯, 보통 한국은 어떻고 일본은 어떻고 하는 얘기는 시공간 어디에도 위치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떠들 수밖에 없다.(난 이러한 사변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바우만은 븅신이지만) 그런데 해당 사변의 토대가 되는 용어가 외부의, 그것도 갓 박사를 받은 사람들에 의해 흔들릴 수 있다는 위험은 꽤나 큰 것이며, 이는 국외에 가치의 준거가 있는 이상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는 위험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자생적 이론은, 외국에서 뭔가 배운 사람이 와서 산통 깰 때 할 말 없게 되는 상황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술수라고 할 수 있겠다.

 

선해라고 말해놓고 너무 냉소적으로 진술한 것 같지만, 저런 문제의식은 충분히 중대한 통찰을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가치의 개념틀이 해외 의존적일 경우 생기는 문제는 명확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옆동네에서 자주 언급되는 나무위키 이퀄리즘항목 날조 사건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퀄리즘에 대해서 그냥 씨부린 글만 있었으면 문제가 없었을 텐데, 거기에 해외에서는 어떠하다는 소리를 하면서 날조가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틀 자체이다. 해외에는 이렇다는데?라는 게 먹히는 수사인 한 생기는 문제이다. 북유럽은 우리랑 다르다! 미국의 페미니즘은 우리랑 다르다!라는 소리로 남들을 설득하려 하고, 그게 진짜로 설득되는 한 생기는 문제이다. 그게 먹히는 한 저런 소리를 하고 싶어할 수밖에 없기에 착한 날조 나쁜 날조를 구별하며 열심히 날조를 일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 해결은 준거틀 자체를 국내의 것으로 만들 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준거틀 자체를 국내의 것으로 한다는 게 갖는 애매모호함을 해소해보자. 외국물 먹은 인간들에게 뚝배기 깨지기 싫다고 우리랑 전혀 상관없는 조선-유교의 언어를 쓸 것인가? 일단 우리의 “민주공화국이 이씨 왕조로부터 탈피하려는 노력으로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을 난 지적하고 싶고, 유교는 중국의 언어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에서 중국으로 갈아타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도 되지 않을뿐더러 미개와 야만의 상징이 된 유교라는 타이틀을 고집하는 것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준치매 노친네들이나 선택할 짓이라고 지적하고 싶다.(젊은 사라들의 수사를 들여다보면 유교는 모든 악의 원천으로 언급되지만, 노친네들은 어릴 때 공자왈 맹자왈 하면서 얻은 감수성에서 벗어나지 않아 뭔가 있다는 본인도 알 수 없는 마음에 기대어 유교를 읊곤 한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결국 오늘날 한국을 이루는 언어는 분명 근대로 표상될 언어이기에 완벽히 서양 언어와 단절될 수는 없다. 합리성, 과학, 국가, 정의 따위를 우리가 서양의 언어를 경유하지 않고 이해할 수는 없고 이러한 용어를 버릴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상대화와 자기 맥락화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언어들에 대한 논의들은 단순히 사실 관계를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규범을 창출해낸다. 그런데 이러한 규범창출에 있어서는 그들 자신의 맥락은 항상 중요한 역할은 한다. 미국의 헌법이 미국의 맥락을 만들어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지만(여기서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은 그게 개븅신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그들에게는 분명한 바운더리가 되는 어떤 맥락 속에서 미국의 지식인들의 미국의 문제를 펼쳐가듯, 우리도 가치의 바운더리를 제공하는 맥락을 구성할 필요가 있단 얘기다. 가끔 한국 학문사를 살펴보면 학술적 맥락은 없고, 친분과 븅신성에 기초한 맥락만 드러나서 좀 암담할 때가 있는데, 이제는 방에서 히키찐따 생활하며 공부한 노인네들이 은퇴하고, 비판적 감수성을 가진 신진 학자들이 연구계의 주류가 되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내부적 맥락, 특정한 언어를 가져와서 어떤 논의를 이끌고 싶은 것인지를 명시하고, 그 의도와 그가 상정한 맥락 안에서 논의를 진행하려는 관습이 덧붙여지면 상황은 분명 나아질 것이다. 물론 지금처럼 학자들이 외국어 문법 가지고 서로를 물어뜯고 별 생산성도 없는 대화를 나누며 학술적 토의를 진행했다고 의기양양해하거나 인신공격을 당했다고 울분을 토하는 븅신성도 사라져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뭐가 되었든, 이제 김경만의 논의를 두 번 비틀 필요가 있다는 소리다. 글로벌 지식장에서 상징권력을 얻기 위한 투쟁도 좋지만, 이를 위해서는 내생적인 논의의 장도 필요하다. 현장감을 부여할 공간이 없다면, 김경만이 신적 계시를 받아 세계에서 놀랄 만한 이론적 성과를 내도 바뀔 것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한국의 자생적 이론이 아니라 오롯이 김경만의 이론일 것이기 때문이다. 김경만이 해당 이론을 만드는 데 있어 한국 학자를 단 한명도 참고하지 않는다면 그게 한국 이론일 수는 없다. 따라서 김경만이 옳기 위해서는 바로 국내의 상징권력 장이 자생적 이론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산출할 수 있을 만한 규제적 이념을 생산할 필요가 있다. 그 책에서 빠진 것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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