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자시를 준비하며>를 겨우 두 편 내놓고 벌써 <끝마치고>를 내놓는다.
논자시가 지난 화요일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나는 지난 일주일간 무엇을 하였는가!
뭐가 되었든 논자시는 끝났고, 이에 대한 후일담이라도 적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그나저나 “직성이 풀린다”는 표현은 참 재밌다. 내가 좋아하는 성좌 비유이지 않은가!)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예상한 것을 넘어서는 문제는 나오지 않았다.
내가 다니는 대학 철학과 논자시는 데카르트의 <성찰>, 흄의 <인간 이해력에 대한 논고>, 칸트 <순수이성비판>, 헤겔 <정신현상학> 안에서 나오고, 각 텍스트에서 한 문제가 나온다. 이 중 세 개를 선택해서 문제를 풀면 되어서 이번에 나는 흄을 포기하고 나머지를 준비했다.
데카르트
데카르트 문제는 준비했던 그대로 나왔다. 6성찰의 “외부세계 존재 증명”을 설명하라는 문제였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내가 블로그에 올린 데카르트 준비답안(?)은 저 문제를 향해 있다. 데카르트 6성찰은 데카르트 성찰의 그림을 완성하는 마지막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외부세계 존재는 3가지를 증명해야한다. 1) 단순히 정신 일반이 아니라 나의 정신, 즉 유한한 정신이 그 자체의 유한성을 고유성으로 가지면서 실재한다는 것 2) “연장적인 것”으로서 정의되는 물질계가 아니라, 그러한 물질계가 특정한 양태(?)로 놓인, 특정한 물질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3) 나의 유한한 정신과 바로 이 유한한 물질계가 서로 상호작용해야한다는 것. 말이 세 개이지, 정확히 두 개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인간 영혼의 존재 증명과 심신인과 증명. 이게 왜 외부세계 존재 증명이냐고 묻는다면, 외부세계란 것은 바로 특정한 자아를 경유해야만 외부세계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자아가 정신 내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상호작용해야 진짜 외부세계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때문에 세부적으로 두 가지가 증명되어야하는데, 물질 일반과 정신 일반이 아니라, 바로 여기 지금에 놓여 있는 정신이 실재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게 뭔 소린가하면, 스피노자의 체계에서처럼 신=자연의 속성으로서의 정신 구도에서 탈피해서, 물질계의 부분으로서의 사물과 달리, 정신계의 부분인 우리의 영혼이 그 고유성이 보장된 상태로 존재해야한다는 소리다. 좀 야시꾸리한 표현이라 이해하기 좀 그런데, 조금 더 상술하자면 이렇다. 내가 뭔가를 생각한다고 했을 때, 그 생각이 나의 것일 이유는 없다. 정신 일반의 부분들이 그러한 유형에 속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생각한다”라고 생각하는 무엇이, 비인칭 주어 비슷한 것일 수 있단 소리다. 즉, 정신이 “나”로서 생각한다와, 바로 그 정신을 실행하는 무엇인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소리고, 그러니 “나는 생각한다”고 생각하는 무엇이 그냥 정신일반의 부분이 아니라, 바로 여기 지금 있는 “나”라는 존재의 정신이란 게 증명될 필요가 있단 소리다.(데카르트가 유아론에 빠졌다니, 주체 중심주의가 근대철학의 문제라니 어쩌고저쩌고 떠들면서 주체의 죽음과 근대철학의 종말을 선언하는 놈들은 걍 독해 능력이 없는 낙하하는 돌멩이들이라고 말해도 된다는 소리다. 그런 사람들은 “It thinks”가 가능하니 “코기토 에르고 숨!”-이것도 웃기다. “생각하는 (한) 나는 존재한다.”를 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마음대로 변경해서 지랄염병을 하냐는 말이다-을 외치는 데카르트가 틀렸다고 말하지만, 데카르트는 그 문제를 이미 고려하고 있다) 뭐 아무튼 데카르트는 저런 문제들을 염두에 두고 6성찰을 전개하고 있고, 그래서 저 세 문제를 동시에 해결한다는 게 나의 설명이 되었다. 충분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뭐 써야할 만한 서술은 다 써서 제출했다고 자부한다. 굳이 아쉬운 것이라면, 현대 인식론에서도 데카르트랑 비슷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을 언급하지 못한 것인데, 뭐 그거야 사실 너무 큰 이야기니까.
칸트
칸트 또한 예상한 그대로, 아니 나왔으면 하는 문제가 나왔다. 내가 ‘to be continued...’로 끝낸, <논자시를 준비하며 – 2>에서 쓰려다가 못 쓴 바로 그 부분이 나왔기 때문. 내가 지난 글에서 쓸까 하다가 귀찮아서 안 쓴 내용은 칸트의 서술이 “현상학적”이며, “변증법적”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는 일이었다. “연역” 부분에서 연역이, 화학자들의 “Reduction”이라는 “실험방법”을 모방하는 것이라고 칸트는 주장하며, 칸트가 학문은 한 손에는 이론을, 다른 한 손에는 이론으로부터 고안된 “실험”을 손에 쥐고 학문을 수행한다고 단언(?)하는데, 이러한 두 입장이 어떻게 비판철학, 그 중에서도 “연역” 부분에서 드러나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뭐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감각의 종합 - “포착”, 상상력의 종합 - “재생”, 통각의 종합 - “인지”라는 세 겹의 종합(그렇다! 들뢰즈의 시간의 세 겹의 종합이 바로 이것이다!)이 어떻게 진행되고, “소급” 입법을 통해 “법리화”되는지를 밝히면, 그의 “현상학적”이면서 “변증법적”이기도 한 “실험방법”의 정체가 밝혀진다는 소리가 되겠다. 이는 꽤나 큰 주제여서 여기까지 주장하진 않았고, 구체적인 논증 구도가 어떻게 성립하는지, 발생적 순서와 정당화의 순서를 어떻게 배치/재배치되는지를 보여주었다. 나름 논자시 답변 중 가장 뿌듯한 답변이 되겠다.
헤겔
헤겔은 예상 밖인지, 예상 안인지 애매모호하게 나왔다. 정확한 요구사항은 기억이 안 나는데, “지성” 개념의 역할과, “자기의식”으로의 이행을 설명하라는 그런 문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뭐 이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칸트 문제에서 통각 문제를 재구성하면 나오는 문제라 그렇게 답하였다. 즉 헤겔이 칸트가 통각의 종합에서 요구한 “자기의식”이라는 초월적 표상/대상의 사용에 대해 딴지를 걸며, 왜 칸트 식으로는 자기의식에 이른 것이 아니며, 어떻게 되어야 자기의식에 이른 것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어떤 식으로 논증하는지를 밝히는 답변을 작성하였다. 뭐 이런 답변 중에 필요해서 곁다리로 논증한 것 중에 “지양”의 정체도 있다. 칸트의 “Reduction”이라는 변증법적인 “방법”에 대응하는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이 지양인데,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아 이행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게 되겠다. 뭐 그때 답변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헤겔적인 이행은 논리적인 이행이지만, 내적이기만 하진 않다는 것이 되겠다. 헤겔에 따르면 칸트의 방법에서는 구별불가능자의 동일성이 전제되고 있다. 선언판단이 가능하기 위해서 무한정자를 경유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배중률을 이용해 한쪽이든 양쪽이든 부정하고, 자신의 실험을 검증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구별불가능자의 동일성이 전제되는데, 칸트가 무한정자를 경유할 때 규정된 무한 이상의 것으로서 무한정자가 다뤄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등장한 헤겔의 지양은 순수논리적인 것만은 아니다. “타자”의 고유함이 개입하여, 우연성(물론 일반적인, 통속적인 우연성은 아니다)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허나 그렇다고 헤겔의 논증이 논리적인 게 아니라고 할 수 없는데, 헤겔의 논리학이 바로 이러한 타자의 고유함을 반영하는 논리학이기 때문이다. 여튼 그런 이유로 지양을 설명해야만 했고, 이러한 설명에 입각해서 이행 또한 설명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생사의 투쟁이, 주인-노예 사이의 투쟁이 아니란 것도 밝혀내고, 주인과 노예가 바로 이러한 “타자성”을 받아들이는 형식-태도의 차이를 보여준다는 것도 밝혀내었다. 뭐 갠적으로는 이러한 것들은 너무 당연한 것이라(이걸 이렇게 안 보는 건 개븅신 같단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게다가 외국의 헤겔 학계에서도 퇴출된지 오래된 관점이다) 별로 안 재밌었고, 생사투쟁에서 생사 개념이 이러한 타자성을 통해서만, 지양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해석을 해야만 했던 것이 재밌었다. 역시 답지를 쓰는 과정에서야 깨닫는 것도 있는 법이다.
역시 답지를 쓰는 과정에서야 깨닫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글쓰기는 참 좋지만.... 시험지는 남지 않는다는 점에서 좀 안타깝다. 3시간동안 12페이지를 적어 냈는데 내 손안에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니! 이 통탄에서 나의 후일담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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