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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욕망에 대해서

지난 주 수업 때 강성훈 샘께서 꽤나 중요한 문제를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건 대중들에게 국한된 오류가 아니라 꽤나 많은 전공자들도 범하는 오류”라고 말씀하시면서 주의를 기울어야한다고 말씀하셨죠.

이성이 진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보통은 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것은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고, 그러다보니 이성적으로 사고하면 그 결과가 참되거나 좋을 거라고 기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는 플라톤의 주장이 아니며 그 자체로도 문제적인 주장입니다.

탁월한(?) 범죄자가 되기 위해서도 이성은 필요합니다.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도 이성이 필요한 것처럼 말이죠.(니체말마따나 거짓말은 진실을 고하는 것보다 어려운, 기술이 필요한 과업입니다)

이처럼 이성적인 능력을 요하는 악행이, 그 자체로 이성에 반한다고 볼 이유는 없습니다.

루소말마따나 악행은 이성을 통해 계발되는 능력일 수도 있고 말이죠.

또한 이성을 따른다고 할 때에도 어떤 이성이냐가 중요할 수 있죠.

우리의 불완전한 이성은 딱히 참이나 선에 향해 있지 않거든요.

수학 문제를 풀 때 저는 이성에 의존해서 답을 고르겠지만, 그것이 항상 참되지는 않은 것처럼 말이죠.(만약 참을 보장했다면 우리 모두가 100점을 받을 겁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이성에 의존하지 않는 경우는 없으니 말이죠)

뜬금 없이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 이게 중요한 문제랑 연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문제라고 하면 뜬구름 잡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테니, 상징을 활용하겠습니다.

저는 이 문제가 칸트 철학과, 이성의 욕구를 말하면서도 여기서 느낌을 배제하는 칸트의 철학적 선택과 직결된다고 생각합니다.

 

칸트가 이성의 욕구를 말하면서도 그것의 느낌은 배제하는 것이 문제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사실 칸트에게는 문제될 게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전 이것이 칸트의 비판 철학 체계로부터 체계적으로 도출되는 귀결이라고 생각합니다.

해당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 칸트의 구도를 일반화해서 다뤄보겠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스피노자의 철학은 밥맛 떨어진다고 비난해왔는데, 그 이유는 명확합니다.

스피노자 철학은 (스피노자가 옳다면) 그 자체로 옳을 뿐, 옳은 이유가 따로 없습니다.

그니까 도대체 저런 걸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서 답하지 않습니다.

스피노자의 기본 진단이 다 옳다고 받아들이면서도, 스피노자식의 철학책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실제로 홉스가 바로 그런 저작을 썼기 때문이죠.

홉스는 충족이유율을 받아들였지만, 형이상학적인 목적론은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의 철학 또한 말그대로 인과적인 결과물로 여깁니다.

홉스가 자신의 철학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그 결과를 야기한 인과의 차이 덕분이지 그 자체로 권위를 갖고 있는 게 아닙니다.

필연에 호소하기 시작하면 제가 스피노자에게 제기한 난점은 당연히도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도대체 거기에 참과 거짓과 옳고 그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냐는 것이며, 설혹 그것을 현실주의적으로 받아들일지라도 그러한 진단은 언제나 절대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뭐 굳이 변명하자면, 스피노자는 이미 주어진 개념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것으로서 자기 자신의 철학을 정당화하고 있는 건데, 전 이런 방식으로는 그의 거들먹거림이 충분히 양해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얘기가 원래 얘기랑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 있겠는데,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칸트와 똑같은 선택을 한 철학자가 있어서 저 문제를 언급한 겁니다.

바로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인물입죠.

아우구스티누스는 저런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서 칸트와 유사한 구도를 제시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의 문제를 개별자들의 의지로 귀속시킵니다.

우리의 존재가 완전한지 못하기 때문에 무를 향해 있고, 그래서 악을 행하게 된다는 게 그것입니다.

당연히도,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의지는 형이상학적인 의지입니다.

우리가 어떨 때 악한 마음을 품고 악행을 하기도 하고, 선한 마음을 품고 선행을 하기도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의지가 불완전하다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가 그 자체로 완전한지 않기에 타자(타인뿐만 아니라)에 의존적인데, 이러한 의존은 규정적이지 않고 비규정적이기 때문에, 무를 향해있다는 진단입니다.

그니까 이건 인간만의 문제가 아니라 창조주를 제외한 모든 존재에게 해당되는 문제이고(뭐 원래 존재=선=진리 구도는 꽤나 일반적인 법이라) 모든 존재가 그 자신임에 따라 발생하는 불완전성에 의해 무로 향한 의지가 내포되어 우리의 행위 자체가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그런 진단입니다.

말이 좀 어려우니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와의 논쟁에서 정말 기이한 주장을 합니다.(이게 워낙 기이해서 정치적인 주장으로 해석되곤 하는데 전 이게 그의 신학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도출되는 귀결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는 악행을 저지른 사제에 대해서 우리가 그의 사제직이 부당하다는 판결할 권리가 없다는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합니다.

그는 심판은 예수께서 하시는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라고 변론하는데, 심판은 예수께서 하시더라도 똥인지 된장인지도 우리가 분간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데 이딴 소리를 하나 싶은 마음이 들죠.

그런데 아우구스티누스가 저런 주장을 한 건 우연이 아닙니다.

그의 의지론에 따르면 우리의 의지는 때때로 무로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무로 향해 있습니다.

그러니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것은 알고 어떤 것은 모른다는 의미에서 불완전한 앎을 가지거나, 어떤 것은 올바르게 행하고 어떤 것은 부당하게 행한다는 의미에서 불완전한 의지를 가진 게 아닙니다.

그에 따르면 애초에 우리가 진단하는 불완전성 자체도 불완전합니다.

우리가 올바르게 판단했다고 생각한 일이 사실은 올바르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한 판단 자체가 무로 향한 우리의 불완전함 때문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명확함은 올바른 기준일 수가 없었다는 얘깁니다.

역사가 이를 “명백히” 증명합니다.

어떤 시기에는 노예제가 “명백히” 자연에 부합하고, 남녀차별이 “명백히” 이성에 부합한다고 여겨졌지만, 그것의 명백함 자체가 오류였으니 말이죠.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이 문제에 의거하여 펠라기우스에 반대한 겁니다.

우리가 느끼는 명백함 자체가 오류일 수 있는데, 그러한 명백함에 근거하여 세상사를 주물럭 거리는 것은 위험하며, 그리스도교적이지 않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걸 어떻게 안다고 보았을까요? 이게 중요하죠.

아우구스티누스는 부정성에 근거하여 진리로 나아갑니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진 못하지만,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을 잊었는지도 모른 채 무엇인가를 잊었다는 것은 기억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무로 향해 있음만큼은 알 수 있습니다.(사실 이런 건 아우구스티누스 특유의 실존철학적인 서술로 증명됩니다. 그가 고백하듯이, 우리의 삶은 무엇을 향한지도 모른 채 부단히 애를 쓰는, 무를 향한 존재의 일련의 버둥거림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여기에 열쇠가 있다는 것이죠.

자신에 대한 부정 속에만 답이 있다는 것이죠.

물론 부정만으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 중에서 아무 것도 행하지 않기 위해 낮에는 바구니를 짜고, 밤에는 낮에 짠 바구니를 다시 풀었던 이들이 있었지만, 이들마저도 무엇인가는 했던 것처럼, 당연히 뭔가는 주어져야죠.

아우구스티누스는 여기서 그리스도교를 말합니다.

우리가 무로 향해 있다는 것을 진단하는 유일한 종교는 그리스도교라고, 모순적이고, 불합리하고, 자연과 상식을 넘어선 유일한 종교이기에 그리스도교만이 바로 이 부정에 대한 답을 말하고 있다고 호교하죠.(키에르케고어가 아우구스티누스와 비슷한 건 우연이 아닙니다. 아우구스티누스야말로 그리스도교의 불합리함에 합리성을 부여한 교부니 말이죠. 그는 불합리함을 합리적인 것으로 교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리스도교에 이치를 부여하였습니다)

즉, 절대적인 부정을 보충하는, 초월적인 계시로 그리스도교를 말한 겁니다.

실제로 초자연적이고, 이 세계를 초월하는, 기이하고 불합리한 종교니 이것만이 “계시”를 말한다고 말할 수 있을 테고 말이죠.(다른 종교는 정상적인 약속이라면, 그리스도교는 약속 아닌 약속을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애초에 약속을 지키지 않은 신을 어떻게든 모시고 있었던 유대교에서 나온 거라 이상하지 않을...)

하여간 중요한 것은, 자연에 반해야만, 진리에 부합할 수 있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진단이었다는 얘깁니다.

우리가 앎을 가졌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우리가 선의지를 가졌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너무나도 당연히, 앎과 선의지는 우리에 반하는 것으로서만 말해질 수 있다는 것이죠.

앎과 선의지를 아예 부정하지 않는다면, 바로 이러한 불완전성에 근거하여 말할 수 있는 확실함은, 초월뿐이니까요.

당연히 이런 기교는 칸트 또한 그대로 사용합니다.

중요한 것은 칸트가 어떤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와 다른지입니다.(유사성을 말하는 거야 쉬운데, 그건 칸트 철학을 설명해주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구도를 따른 사람은 수천수만인반면, 칸트는 단 한 명이니까요)

 

단서가 되는 것은 “자연의 빛”입니다.

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초월적인 것이 우리에게 들어오는 사태를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한 표현이었죠.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연의 빛”은 비록 우리가 유한하고, 신의 지성과 의지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우리의 한계를 깨닫게 하는 것과 관련하여 사용한 표현인데, 이 통로를 확장하여 적극적인 얘기를 펼치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데카르트는 그 중 하나였고 말이죠.(사실 전통 있는 표현이라... 데카르트는 이 조류의 끝에 자리한 인물이긴 합니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여러 합리성을 경험하거나, 이해할 수 없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을 경험합니다.(후자는 초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해할 수 없기에 합리성이 결여된 것처럼 보이지만, 하여간 거기에도 합리성이 있다고 받아들여야하는 그런 사태니까요)

저런 문제를 처리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거죠.

아우구스티누스라면, 마치 홉스처럼, 그를 위한 유일한 기준은 우리에게는 없다는 답을 내놓았을 겁니다.

비록 몇몇 경우에는 개입해야만 하겠지만(사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속의 일에 개입하는 것을 금한 적이 없습니다, 단지 영역 구별과 위험성 진단을 한 것이고, 이것이 교회의 일과 관련되기 시작하면 심각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죠), 그것의 절대적인 올바름 따위를 말한다면 오만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라고 진단했겠죠.

오만의 죄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는 사후에 심판 받을 죄였겠지만,( 홉스에게 있어서는 현세에서도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죄가 된 것일 테고요.(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현세에서는 심판 받을 수도 있고, 받지 않을 수도 있는 게 됩니다. 애초에 현세는 불완전해서 여기서 정의가 실현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실제로 실현되지 않으니—이를 기대하는 것만큼 헛된 것도 없고 말이죠)

그런데 여기에 딴지를 걸 수 있다는 걸 데카르트 및 근대 철학자들은 보이려고 합니다.

신에게 호소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것이 있다거나(그로티우스의 “설사 신이 없더라도 진리에 부합하는 것”), 신과 맞닿아 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자연의 빛을 통해 알려진다는 거죠(데카르트의 “자연에 빛에 따른 증명”).

뭐가 되었든 확실한 게 알려진다는 게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게 왜 필요한지가 되고요.(이유는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실 없으니까요ㅋㅋㅋ 애초에 그들이 실용주의적이었던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론적으로만 고찰한다면, 이는 부당한 주장이 되거든요)

당연히도 다양한 합리성들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걸 고려한다면, 칸트의 선택도 이해가 될 수 있죠.

칸트 또한, 적어도 확실히 정할 수 있는 합리성의 한계를 확정하려고 시도한 것일 테니 말이죠.

이것이 성립하려면,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아는지가 문제가 됩니다.

칸트는 여기서 아우구스티누스적인 계시에 호소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칸트에게 있어서 이 영역은 꽤나 추측적인, 인간의 경험적으로 확인 가능한, 그래서 사실은 그가 말하는 절대적인 이성에는 부합하지 않는, 이성 능력을 전제하고서 그것이 희망 가능한 종류의 계발을 통해 그 자신이 제안하는 절대적인 이성과 부합할 수 있음을 보여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증명에서 절대로 활용해서는 안 되는 자원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자연적 경향성입니다.

이는 애초에 문제가 되었던 불완전성을 반영하기에 절대적인 것과는 합치가 될 수 없습니다.

만약 여기에 기대기 시작하면, 그가 주장하려는 절대성은 절대로 확보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경향성을 충족시키는 답은 여럿이고, 그들 중 어떤 것이 절대적인지는 결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혹 인간의 경향성에 도움을 받더라도, 그것에 도움을 받기 때문에, 그것이 올바른 답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애초에 그가 고안한 답은 그러한 자연적인 것으로 말해지는 순간 절대성을 잃게 되는 구도니까요.(아우구스티누스가 불완전한 의지에 답이 있다고 보면 모순인 것처럼, 칸트 또한 그 경우 모순을 범한 게 되죠)

실제로 자연적인 경향성을 섞은 헤겔은 그래서 답은 여럿일 수 있음을 인정했던 것이고요.

칸트는 애초에 절대적인 답을 제안하려고 했기 때문에 섞으면 안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의 답은, 놀랍게도, 절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이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죠.

그가 제안한 답의 확실성은 그 자체로 주어지지만,(그것의 내적 성격에 의해 명백하다는 그런 의미에서) 그것의 절대성은 오직 희망 가능성에만 호소될 수 있으니까요.

 

뭐 대충 할 얘기는 다 한 거 같습니다만, 여기서 시작할 수 있는, 혹은 시작해야만 하는 이야기가 좀 남아 있으니 그걸 좀 말하고 마무리하죠.

요즘 제가 수업에서 보는 논문들은 죄다 “탈형이상학”을 지지합니다.

그런데 사실 형이상학 없이는 아무 것도 증명되지 않아요.

레비-브륄 말마따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인 동물입니다.

원시인이든 문명인이든 세계를 형이상학적으로 구축하기 때문이죠.

애초에 범주화부터가 형이상학적인 활동입니다.

그러한 범주들에 존재를 부여하는 것이니 말이죠.(그러한 범주에 귀속되는 것들이 같은 존재에 속한다고 본다는 그런 의미에서 존재를 부여한다는 얘깁니다. 범주 자체에 존재를 부여한다는 게 아니라. 범주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죠)

형이상학은 그 자체로 악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저 많은 학자들이 탈형이상학을 떠들고 있을까요?

그들에 따르면 형이상학이 교조적이어서입니다.

그런데 형이상학이 그 자체로 교조적인가요?

여러 형이상학적인 체계들의 병존을 말할 수는 없나요?

교조적인 것과 교조적이지 않은 것의 차이는 여럿을 받아들이냐의 차이이지, 형이상학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아닙니다.

형이상학적이진 않더라도, 채식을 강요하거나 채식을 그만 둘 것을 강요한다면 교조적일 수 있는 것처럼, 형이상학적이지 않더라도 교조적일 수 있고, 형이상학을 말하더라도 교조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조적이지 않은 형이상학은 무엇일 수 있냐고 할 수 있겠죠.

전 형이상학이면 내적으로는 다수적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다수적이라도, 이는 궁극적으로 해소될 다수성으로 여겨질 겁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그 체계를 선택할 이유가 무엇이냐가 될 겁니다.

결국 답은 합리성은 무엇이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합리성을 선택할까에 달려 있다는 그런 얘기죠.

제가 예전부터, 제가 철학사를 하는 이유는 “이성적”이라고 여겨진 여러 활동들을 비교 검토하기 위해서라고 떠들고 다녔는데, 바로 이게 이 문제에 직결됩니다.

플라톤은 자신이 주장한 철인통치제가 유일한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귀족적인 금권정체도 합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도 이성은 필요하고, 나아가 감정을 통제하고 이성에 따라서만 판단해야만 하니까요.

플라톤은 이런 여러 합리성들을 비교하면서 철인통치가 낫다는 걸 보이려고 합니다.

당연히도 그 기준은 공약적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플라톤은 이런 공약적이지 않은 것들 사이에서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금권정체 속의 이성혼과 명예혼과 욕망혼의 모습과, 철인정체 속의 이성혼과 명예혼과 욕망혼의 모습을 비교합니다.

전자도 조화롭고, 후자도 조화롭죠.

하지만 우리는 전자 속에서 조화 속 불화를 생각합니다.

저 체제 속에서 이성혼은 노예가 아니면 무엇인지 모르겠거든요.

그(이성혼)는 지배하지만 종속적이기만 합니다. 그가 추구하는 앎의 욕망이 이 따위 것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 않거든요.

플라톤은 이런 방식으로 비교를 합니다.

그 속에서 달성할 수 있는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고의 모습들을 보았을 때, 무엇이 더 낫다고 할 수 있는지를 가지고서 말이죠.(저는 플라톤의 이러한 가치 평가가 가치는 인간의 육성을 통해서 비교해야만 한다는 니체의 진단과 너무나도 흡사해보입니다. 가치의 가치를 따진 사람이 니체 말처럼 이전의 철학자들이 방치한 과업이었다면, 적어도 플라톤은 그가 말한 “이전의 철학자”가 아닐 겁니다)

전 이것이 올바른 해결책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다수의 합리성 사이에서 우리가 판단을 내릴 때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문제에 적합한 합리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일 테니 말이죠.

결국 답은 여러 합리성들을 이해하고, 그 속에서 비교하고, 선택함으로써만 올바를 수 있을 겁니다.

우리의 불완전한 이성이 언제나 참을 내놓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우리의 이성이 그렇다는) 이 진실에 부합하면서도 합리적일 수 있는 답변일 테니 말이죠.

하여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