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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칸트 철학 체계 속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칸트의 이율배반이 <순수이성비판>이라는 기획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지난 번에 다뤘는데, 이 문제를 계속 생각해보니 최근의 논의랑도 이어지는 것 같아 한 자 적어봅니다...

 

일단 원래 주제를 상기해보죠.

<순수이성비판>이라는 기획은 이율배반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기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가지적이어야만 하는데, 세계를 가지적일 수 있게 만드는 결정론이 이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의 존재를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이율배반의 해결입니다.(여기서의 “해결”이 꼭 저 모순을 해소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저러한 모순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제시하는 방식으로도 문제는 해결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지난 글에서 은근슬쩍 헤겔을 언급했습니다.

저 문제를 인식했을 때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헤겔의 생 개념 도입이었거든요.

쿠라나가 훌륭하게 보였듯이, 헤겔의 생개념은 자유를 위한 것입니다.

생이 자유를 가능케 하는 것이죠.

그런데 생을 도입한 것은 헤겔만이 아닙니다. 칸트도 이를 <판단력 비판>에서 도입합니다.

그리고 칸트 이후 시대의 사람들, 특히 자신이 칸트를 계승한다고 생각했던 실러와 같은 사람들은 칸트를 경유해서 자유의 가능성을 “미”에서 찾습니다.

미적 체험이 자유의 체험이라고 진단하면서 말이죠.

생에서 찾는 시도와 미에서 찾는 시도가 따로 국밥 같지만, 사실은 하나의 국밥입니다.

왜냐하면 저 둘 모두가 <판단력 비판>에 등장하니 말이죠.

도대체 왜 생과 미가 자유의 담지자로 등장했던 것인지, 이 두 주인공 모두가 <판단력 비판>에 등장한 이유는 무엇인지를 얘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를 얘기하면, 자유의 다른 면이 드러날 수 있을 테고 말이죠.

 

자세한 설명은 어려우니 간단히 말해보겠습니다.

미는 칸트에게 있어서도 자유와 연결됩니다.

그 유명한 “상상력과 지성의 자유로운 일치”라는 구절이 미적 판단을 논하면서 등장하니 말이죠.

그런데 저 구절에서의 “자유”가 실천이성비판의 “자유”와는 구별됩니다.

그러니 <판단력 비판>에서 말해지는 “자유”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 연구자들이 논쟁하고 있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이죠.

<판단력 비판>의 자유가 정확히 무엇인지를 밝힐 수는 없지만, 이것이 자유와 어떻게 연관을 맺을 수 있는지는 쉽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대상의 속성이 아닙니다.

때문에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일은 대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상을 인식하는 주관-자아에 의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사소해보이지만 자유의 가능성을 내포합니다.

지난 글에서 보였듯이, 결정론이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이 이해가능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정론이 인식 주체를 배제하게 되는 것은, 결정론이 성립하는 세계에서는 주체라고 할 것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게 인과필연성에 의해 성립된다면, 주체란 건 의미를 잃습니다.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능동적이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주체의 능동성은 원인은 능동적이고 결과는 수동적이라는 식의 서술에서 등장하는 의미의 능동성이 아닙니다.

“외부”란 게 성립하고, “내부”가 “외부”를 향해 무엇인가를 행한다고 말할 수 있을 때에야 말해질 수 있는 게 주체의 능동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방금 말한 능동성에 기시감이 들지 않나요?

아름다움이란 건 사물의 특성이 아니라라는, 주체가 대상에 투영한 속성이란 익숙한 주장은 바로 저 능동성과 정확히 동일한 구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판단은, 외부와 내부를 구별케 함으로써, 외부에 대항하는 무엇인가를 행하는 것으로서 (사물들 사이에 성립하는) 결정론에 반할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적어도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주체는, 외부 세계와 무관하진 않지만, 외부 세계의 질서와 구별될 수 있는 고유한 내적 질서를 가진 무엇인가일 수밖에 없습니다.(여기에도 기시감을 느끼셔야합니다. 목적성이 바로 이것이니 말이죠)

그러니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주체는 자유의 담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는 어떻게 규정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소극적으로 규정하자면) 결정론에 반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에 가까운 그런 자유를 담지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일이 자유의 체험일 수 있는 것이고요.

 

모든 게 잘 해결된 것 같지만, 사실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 주체가 뭔데?”라고 물었을 때 답할 게 아직은 없거든요.

물론 쉬운 답이 있습니다.

저런 판단의 주체를 단순히 관념연합의 원리 따위에 종속되지 않은, 관념을 특별한 방식으로 조직하는 무엇이가로 저 주체를 볼 수 있을 겁니다.(왜 마음대로 자연법칙에서 관념연합의 원리로 이동하냐고 지적할 수 있을 텐데...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으나 이 둘을 등치할 수 있다는 게 객관주의적인 법칙론의 핵심 전제였고, 둘을 등치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과 그러한 시도가 “실증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린 주의로 19세기 말까지 계속해서 존속했다는 것 정도만 언급하겠습니다—사실 이런 주장은 현대에도 있습니다ㅋㅋ)

그런데 이렇게 보겠다고 하면, 바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 주체를 니가 보기라도 했냐? 왜 니 마음대로 주체가 그런거라고 전제하는데?”라고 말이죠.

애초에 저런 역할을 담지하는 주체는 그냥 저냥 어떻게인지 저런 기능을 수행하는 무엇인가로 상정된 것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니 사실 저러한 기능은 주체에 의한 게 아니라 우리가 모르는 무엇인가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는 거죠.

예상 외로 이런 문제를 지적한, 정확히 말하자면 이걸 문제가 아니라 철학적인 진리로 받아들인 사람이 바로 로크였습니다.

 

로크에 따르면 자아는 정체 불명입니다.

우리 자신은 결국 우리의 사고 배후에 존재하는데, 그것이 딱 꼬집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억 같은 것은 우리 자신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본질을 이룰 수 없다는 지적을 하며, 우리 자신의 자리, 즉 주체의 자리가 텅비어있는 무엇인가라는 진단은 로크가 최초로 철학적으로 정식화한 거였죠.

그런데 로크에 따르면 이게 해결되어야만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저 텅빈 자리를 통해 중요한 무엇인가가 이 세계로 들어올 수 있거든요.

신이든 인류든 뭐든 간에, 개인을 넘어서는 무엇인가가 바로 저 텅빈 주체의 자리를 통해 세상에 임하는 겁니다.

로크가 텅빈 주체론을 주창한 것과, 언어를 매개로 인간 사회 속에 개인을 위치시킨 것, 그리고 역사를 매개로 신의 섭리 속에 인간을 위치시킨 것은 독립적인 게 아니었다는 얘기입니다.

로크에게 있어서는 텅빈 주체는 우리가 (선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질서를 작동케 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이죠.

하여간 로크는 이런 식으로 보았다는 거고,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입장이 우리의 논의 맥락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입니다.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주체는 말은 그럴듯하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 존재하는지가 문제될 수 있습니다.

저런 것이 실질적으로 존재하려면 저러한 활동을 담지하는 무엇인가가 존재해야합니다.

그게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렇게 쉽게 주장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부분전체론을 다루는 철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존재하는 것은 물리적인 기초 원자들이지 “인간” 같은 게 아니거든요.

게다가 인간이 존재한다는 건 걍 특정한 인간 개체가 떡하니 존재한다는 걸 의미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주 속에 칸트만 존재한다면, 칸트가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이 존재하는 게 아닌 거거든요.

인간이 존재한다는 건 저러한 종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러한 종의 존재를, 물리적인 기초 원자들만 존재하는 세상 속에 기입하는 일이 중요한 겁니다.

우리가 통념상 존재한다고 말하니 존재한다고 주장할 게 아니라, 물리적인 기초 원자들로 이루어진 세상 속에서, 저러한 (유적) 존재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근거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당연히도 저러한 근거는 인간 개체들의 존재가 아니라, “인간임”을 이루는 무엇과, 그 “인간임”이 세계 속에 존재하는 지위 같은 걸로 확보되어야만 하는 것이죠.

부분들을 전체로 통일시키는 것은 전통적으로 목적이었고,(사실 다른 후보가 없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목적을 말할 수 있는 근거를 밝힘으로써 이에 답한 거였습니다.

 

흥미로운 것들은, 목적을 말한다고 해도 칸트의 답만이 가능한 유일한 답이 아니라는 진실에서 비롯됩니다.

칸트는 저러한 목적이 일종의 자기 목적을 가진 존재들과 세계의 조화 속에서 판단된다고 진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러한 목적을 가진 존재들이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방식은 “조화”만이 아닙니다.

바로 저 조화의 자리가 다른 것일 때, 자신의 자리를 느끼는 판단은 아름다움이 아니라 공포일 수 있게 됩니다.

 

여태까지 별로 생각해본적 없었는데, 바이저가 자신의 초기 낭만주의 연구서 제목으로 “romantic imperative”을 고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낭만주의자들은 세계 속에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인식하는 일이 바로 세계를 낭만화하라는 명령이 하달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러한 명령을 하달 받았습니다.

근데 이를 하달하는 것은 명령을 따르는 자신이 아닙니다.

자신은 명령에 복종할 뿐이죠.

명령은 초월적인 것으로부터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이를 “것”이라고 말하기도 좀 뭐하지만요)

당연히도 그들이 복종하게 되는 명령은 지고한 것으로, 존엄한 것으로, 무시무시한 것으로 느껴집니다.

바로 그래서 명령을 따르게 되는 겁니다.

머리로 저 명령이 합당하다고 생각해서 따르는 게 아니라, 그것이 너무나도 무시무시한 명령이라 두려운 마음 속에서 이에 복종하는 거란 얘기입니다.

그러니 낭만주의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적당히 감수성이 있는 사람들이 헛소리한 것들을 말하는 게 아니라, 세계-자아를 인식하는 일이 무시무시한 명령을 느끼게 하는 일이었던 이들이,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그 명령에 따라 말과 글을 창안해낸 것을 메타적으로 말하는 게 된다는 겁니다.

놀랍게도, 창작은 기쁨이 아니라 공포일 수도 있다는 것이고, “공포”가 낭만주의적 감수성을 이룬 것은, 그들이 고딕 소설에 심취해서만은 아니란 얘기입니다.

공포가 아름다움으로 느껴져서가 아니라, 공포 자체가 아름다움과 대등한 감성 형식으로 느껴져서 그들은 낭만주의자가 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는 거죠.

 

대충 할 말은 끝난 거 같네요ㅋㅋ

중간에 밥 먹고 와서 써서인지 흐름이 매끄럽진 않군요.

그래도 뭐 해야할 말은 대충 다 적은 것 같습니다.

 

 

하여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