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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의 이율배반과 이성의 한계에 대한 단상

이 얘기가 왜 생각났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아침에 읽었던 에코의 책 때문일 수도 있을 겁니다. 거기서 에코는 paradoxa라는 단어 자체는 불가능성을 함축하고 있지 않았다고, 그렇기에 역설은 불가능성을 함축하는 이율배반과 구별될 수 있을 거라고 얘기하더군요. 아마도 이 언급 때문에 이율배반에 생각이 다다랗고 제가 아는 이율배반은 칸트의 이율배반 뿐이기에 칸트의 이율배반에 대해서 생각 하게 된 것 같습니다.

 

고백하자면, 전 <순수이성비판>의 후반부를 읽지 않았고, 그래서 칸트가 이율배반을 <순수이성비판>에서 논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칸트가 제3 이율배반을 말했을 것만 같다고요. <순수이성비판>은 인식을 정초하는 작업입니다. 칸트가 인식을 다루는 방식은 특별합니다. 그는 인식이란 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인식이란 것이 어떻게 생각해야 형이상학적으로 가능할 수 있는지를 따집니다. 그러니 그의 작업은 인식이란 활동의 형이상학적인 가능 조건을 따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다루면 제3 이율배반을 다루어야만 합니다. 이율배반을 일으키는 각 테제가 인식의 가능 조건에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세계는 필연적이어야만 합니다. 만약 세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면, 세계는 가지적intelligible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필연적이지 않다면, 이성적으로 따져도 파악할 수 없는 [우연한] 것이 세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고, 그것들에 의해 세계의 일부분은 이해될 수 있을지라도, 전체로서의 세계는 이해될 수 없을 것입니다. 때문에 세계가 이해될 수 있는 무엇인가이기 위해서는, 세계가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 담보되기 위해서는, 세계는 필연적이어야만 하고, 그렇기에 결정론이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문제는 반대의 진리도 성립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인식은 필연적인 운동일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인식이 아니라 운동일 겁니다. 참과 거짓은 순전히 운동 상의 문제, 정확히 말하자면, 참과 거짓은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고, 몇몇 운동 유형에 불과하며, 무엇이 진정으로 옳은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적어도 인식 주체에 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A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B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둘 다 필연성에 따라 운동한 것일 뿐, 진정한 의미에서 “판단”하고 있지 않고, 그렇기에 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세계는 필연적이어야만 하지만, 인식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인식 자체는 필연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두 가능 조건의 충돌이 이율배반을 만들어냅니다. 아마도 이런 진단을 받아들이면 인식이란 게 원래 불가능한 거 아니냐고 결론 내릴 수 있겠는데 꼭 그럴 필요는 없을 겁니다. 헤겔처럼 자유와 필연성을 종합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죠.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칸트의 기획 자체를 무너뜨릴 것만 같은 해당 이율배반을 칸트가 보전시킬 수 있었는지는 꽤나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지금은 이 문제를 다루지 않고,(저는 이게 칸트가 “물자체”를 말하는 것과 관련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위가 지적하듯이, 물자체는 사유=존재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개념입니다. 흥미로울 물음은 사유=존재가 아니라는 주장을 함축하고 있는 물자체가 말해질 수 있는 철학적 계기가 무엇이냐는 것이죠. 제가 보기에는 이율배반이 그런 계기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약간은 다른 문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바로 기하학의 문제입니다.(그래서 여기에 공유하는...)

 

이율배반을 주장하려면, 뭐가 되었든 칸트는 세계가 필연적이라고 진단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바로 그 진단 근거입니다. 가지성/이해가능성은 칸트에게 있어 이성보다 낮은 지위를 갖습니다. 이성적임이 이해가능함을 함축한다는 겁니다. 이성적이라는 능력은 이해가능하다는 능력을 보장해주는, 원리적으로 앞서는, 우월한 능력일 테고 말이죠.(편의상 능력이라고 말하겠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점은 중세 철학에서는 반대가 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중세 철학에서는 이성이 가지성에 해당되는 지성보다 낮은 지위를 갖고 있습니다. 중세 철학자들이 이런 식으로 이성과 지성의 관계를 편성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지성이 이성보다 우월해야만 계시가 들어설 자리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이성은 신의 인도 아래에서만 지성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신의 인도는 이성을 넘어서고, 그렇기에 지성이 이성보다 우월한 게 됩니다.(쉽게 이해가 되죠?ㅋㅋ) 중세 철학의 구도를 고려해보면 이성을 지성 위에 둔 칸트의 선택은 절대 사소한 것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신의 인도가 없이도 이성에 따라 지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바로 그래서 이성에 의해 가지성이 확보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를 담보해줄 “이성적인 것”은 무엇일까요? 앞서 예고했듯이 그것은 기하학이었습니다. 카시러가 진단한 것처럼 근대의 정신은 특별합니다. 무한을 순전히 부정적인 것으로밖에 취급하지 못했던 고대인들과 달리 근대인들은 무한을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이런 진단이 수학사적으로 합당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지만요ㅋㅋ) 제한된 도구들을 가지고 정교하게 작업한다면, 날것의 무한이 아닌 구체적인 무한들을 다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근대인들은 부정신학에서 벗어나, (제한적으로나마) 긍정신학을 향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전환의 상징이 바로 기하학이었고 말이죠. 재미난 것은 근대적 정신의 출발과 함께 이런 기하학의 정신에 한계를 그은 근대인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기하학자였고, 오히려 그덕분에 한계를 그을 수 있었습니다. 바로 파스칼이 그랬었죠. 파스칼이 기하학의 정신과 섬세의 정신을 구별할 때, 그는 기하학의 정신이 전체를 다룰 수 없다는 이유에서 기하학의 정신에도 한계가 있다는 식으로 진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기하학의 정신으로 파악된 우주가 공간적으나 시간적으로 무한하겠지만, 의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습니다.(바로 그 유명한, “무한한 우주의 영원한 침묵에 나는 전율한다.”라는 구절의 맥락이 이것입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기하학적 정신으로 포착할 수 없는 다양성/변화무쌍함이 있어야만 의미라는 게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진단하였고, 그래서 저러한 불규칙성이 세계에 존재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세계에 존재하는 불규칙성은 무엇일까요? 바로 인간, 혹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파스칼은 전통적인 토포스, 인간의 본성은 무null라는 토포스에 자신이 발견한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기입합니다. 이로써 기하학의 정신으로는 환원될 수 없는, 섬세함/미묘함의 정신이란 것이 의미를 갖습니다. 무한의 무한을 고려하며 의미를 결정하는 인간의 실천이란 것이 세계에 들어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죠. 바로 이게 파스칼의 제한이었습니다.

 

이런 파스칼의 “비판”이 꽤나 칸트와 닮아 있는 것만 같단 생각이 듭니다. 다만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을 작성하던 시기에 그에게 그러한 기획의 가능성을 비춘 빛이 기하학의 정신이라 그에게 이율배반이 생긴 게 아닐까요? 시공간의 직관형식을 다루는 칸트의 방식이 너무나도 기하학적이라고, 기하학은 공간에는 적합하지만 시간에는 적합하지 않기에 칸트의 선택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베르그송의 “비판”이 오늘은 평소보다 더 무겁게 울리는 것 같습니다.

 

 

하여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