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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소외를 말했는가?

루소 말마따나 루소는 어디에나 있는 것 같습니다. 소외 개념을 말할 때도, 루소는 그것의 개념적 기원을 제공한 사상가로 말해지기 때문이죠. 하지만, (또 다시 루소 말마따나) 루소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루소는 ‘소외alienation’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루소는 ‘소외’라는 단어와 동음이의 관계에 놓여 있는 다른 단어를 말한 적 있습니다. 양도alienation가 그것입니다. 루소는 ‘양도’라는 단어를 “자기 자신을 양도한다”는 말과 함께 사용합니다. 자기 자신을 양도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소외에 해당될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의 양도를 비판함으로써 루소는 소외 개념의 창시자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 또한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사회계약의 조건으로 자기 자신을 양도하는 일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루소는 사회계약이 성립하기 위해선 사회계약을 맺는 당사자들이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양도해야만 한다고 진단합니다.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양도해야만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는 차치하고서도(루소는 이를 주권이 성립할 수 있는 가능 조건이 전적인 양도에 달려 있다고 진단합니다), 루소가 자기 자신을 양도하는 일을 비난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회계약론>이 희망의 저작이든 절망의 저작이든(민철 샘은 <사회계약론>이 절망의 책이었다는 주장을 내놓은 바 있으시죠), 루소는 자기 자신을 양도하는 일을,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일”로부터 끄집어내어,(전통적으로 자기 자신을 양도하는 일은 노예가 되는 일을 의미했고, 루소는 <불평등 기원론>에서 노예제를 자연법으로 정당화하는 법률가들을 고발함으로써 이를 비판한 바 있습니다) 진정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조건으로 전환시키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루소는, 자기 자신을 양도하는 일에서 나쁜 것들을 털어내고, 적극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가 처방하는 약은, 언제나 그렇듯 독으로부터 뽑아낸 것Le remède dans le mal이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루소가 소외 이론의 기원과 무관한 것일까요? 전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단어 사용이 아니라 의미이고, 단어적인 차이를 넘어서서 그의 전체 철학에서 소외에 해당되는 사태가 목격된다면 그는 소외 개념을 사용한 것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루소 사상에서 소외에 해당되는 사태는 무엇일까요? “타락”이 바로 그것입니다. 타락 자체는 고대 때부터, 혹은 태초부터 사용된 언어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만약 루소가 소외 개념의 기원을 제공했다면, 그의 타락론은 이전의 타락론과는 달라야만 할 겁니다. 루소는 인간의 타락은 이전 시대의 저자들과 다르게 진단하였습니다. 인간의 타락은 신의 징벌 따위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의 업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이 그 자신의 소행이란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합니다. 하나는 그것이 외적인 문제가 아니기에 초자연적인 방법에 호소하지 않고서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타락의 원인이 개인에게 귀속되지 않고 역사에 귀속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태어난 인간들이 어디에나 사슬로 묶여 있게 된 것, 죄 없이 태어난 인간이 타락의 업보를 짊어지게 된 것은 현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개개인들의 잘못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전 시대의 인간들의 초인적인 업적도 아니고요. 타락은 인간들이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역사 속에서 석화된 (행위/사고 모두를 포괄할) 활동 양식인 습속을 매개로 진행됩니다. 때문에, 한편으로는 인간적인 사태라 신에게 호소하지 않고서도 해결되어야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 축을 거꾸로 돌리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가 없는, 단순히 몇몇 사람들이 생각을 바꾼다고 해결될 수 없는 사태입니다. 이는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사회의 병이고, 19세기의 표현을 따른다면 시대의 병에 해당될 무엇입니다.

 

루소가 타락을 역사의 문제, 사회의 문제, 시대의 문제로 진단한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루소가 사회학의 선조로 꼽힐 수 있는 것이며, 철학자였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루소는 바로 그점에서 철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외의 발생을 진단할 때, 호네트는 하이데거 등을 원용하며 인정이 인식에 앞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인식에 앞서는 것은 인정이 아니라 염려Sorge입니다. 호네트는 은근슬쩍 염려가 가진 실존적인 색채를 동감 등의 감정으로 치환하지만, <존재와 시간>에서나 <해석학적 상황의 게시>에서나 염려는 궁극적으로 시간의 문제, 역사의 문제입니다. 때문에 루소는 소외 이론의 가장 깊은 측면을, 단순히 인간들 사이에서의 관계가 중요하다거나, 그러한 관계 맺기가 생존이나 행복에 필수적이다는 것 때문에 사회가 중요하다는 얄팍한 주장을 넘어서서, 역사 속에서 드러나는 사회의 상태가 존재의 양식을 결정한다는 고찰 속에서 “타락”을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루소는 소외 이론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는 소외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고, 그저 많은 사람들이 문제를 겪기에 사회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라는 조건을 바꿀 때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고 옳게 진단했기에, 바로 그러한 사회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근거를 그 특유의 현상학적 접근을 통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진행을 역사 속에 옳게 위치 시켰기에, [진정한 사회라는] 좋은 것도 [우리가 겪는 타락한 사회라는] 나쁜 것도 결국은 우리 인간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각각을 만든 것이 서로 다른 기원을 갖는 것이 아니라 타인 속에서 자신이고자 하는 우리의 실존적인 욕망 때문에 발생했다고 올바르게 진단하였다는 점에서 루소는 분명 소외 이론의 선구자입니다. 다만 루소가 소외 이론의 선구자라는 말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덧붙여져야할 것입니다. 그는 오늘날 과학자들이 과거의 자연철학자들을 바라 보면서 말하는 의미에서 선구자가 아니라, 오늘날 사상가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고찰을 했다는 점에서 선구자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