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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의 국제관계론과 역사의 종말

§272-§274, §321-§360

이번 발제도 지난 발제 못지 않게 어려웠을 거 같더군요.
재미난 점은 두 발제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어렵다는 점일 겁니다.
지난 발제는 <논리학>이나 <정신현상학>, <법철학>의 앞 부분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해서 어려웠다면, 이번 발제는 논의되고 있는 내용들의 유의미성을 어떻게 포착해야하는지가 매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발제 부분에서 담긴 내용들의 유의미성을 이해하는 게 어려운 이유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겁니다.
겉보기에[ 헤겔의 내치 및 국제 관계에 대한 논의는 조악해보입니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고등학생 정도가 배울 교과서적 내용보다 더 심도 깊진 않으면서도, 뭔가 좀 꼬여 있는 인상을 받을 겁니다.
상세함은 없고, 그러다보니 이거 참 통찰력 있네 싶은 내용은 딱히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뻔한 얘기를 꽤나 뜬그룸잡는 철학적 사변과 함게 얘기하고 있고, 갑자기 이 얘기는 왜 나오는 건지 싶은 그런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상비군에 대한 논의와 바로 그 논의와 함께 자연스럽게 논의되는 덕의 문제 따위가 그렇겠죠.
사실 저런 논의가 나오는 맥락이 다 있습니다.
17-18세기 공화주의 담론에서 상비군만큼 큰 문제는 없었고, 상비군이 문제가 되는 것은 시민의 덕이 군복무랑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거든요.
다른 것들도 이와 비슷합니다.
삼권 분립에 대한 논의라던가, 국제 관계에서 전쟁에도 법이 있다는 저런 논의는 다 이전 시대의 논의를 계승한 겁니다.
그래서 심도 깊게 다루자면 저런 논의들이 어떤 맥락에서 등장한 것이고, 어떻게 이해되었으며, 이를 헤겔이 어떻게 자신의 방식에 따라 변용하였는가 따위가 자세히 논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이렇게 논의한다면 당장 이 부분만으로도 한 학기를 다 쓰고도 남을 수도 있고 말이죠.
예컨대 삼권 분립 같은 경우, 헤겔은 우리의 상식과 동일한 방식으로, 삼권 분립을 몽테스키외에 소급하며 논의를 진행합니다. 근데 당장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읽어보면 도대체 <법의 정신>이 삼권 분립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정말 내공이 크면 다시 연관 지을 수 있겠지만, <법의 정신>을 읽으면서 삼권 분립에 대해서 읽고 있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읽기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겁니다... <법의 정신>은 제가 자주 얘기하지만, 습속과 풍토에 따른 국가 구성의 원리를 다루는 책이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19세기에 서구에서는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 되었고, 근대화를 시도하는 비서구 문명에서는 성서처럼 읽혔던 겁니다—슬프게도 조선에서는 아무도 저 책을 번역하여 읽지 않았지만요)
그런데 헤겔이 저렇게 읽는다고 해서 헤겔이 자의적으로 저 책을 오독한 것은 아닙니다.
헤겔은 칸트의 독해 등 이전 시대의 맥락 속에서 저 책을 읽어온 방식을 변용하여 서술하고 있거든요.
이런 문제 하나 하나가 꽤나 연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런 걸 다루자면 너무 논의가 상세해지고, 자세한 사정은 저도 모르니 대충 넘어가겠습니다.

아마도, 혹은 게다가, 이번 부분에서 철학적으로 중요한 논의는 저런 것들, 즉, 이전 시대의 (정치학적, 국제관계론적) 논의들을 헤겔이 어떤 식으로 흡수하여 철학화하는가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지금 논의 자체가 철학적으로 매우 어려울 수 있는 전제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민족 국가가 행위주로서 매우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는 것과 이러한 국가들로 이루어진 세계적 질서는 별도의 제도를 통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게 그것입니다.
사실 저러한 주장 자체는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고, 저걸 부정하는 게 더 이상한 겁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민족은 정치학적으로나 국제관계론적으로나 중요한 단위체고, 그것에 제한을 가하는 상위 질서는 부재하거든요.
철학자들은 좀 허영vanity을 쫓는 경향이 있어서 세계시민주의 따위가 당연히도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세계정부 같은 건 진짜 공상적이며, “나는 인간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 나는 영국인도 만났고, 프랑스인도 만났고, 독일인도 만났지만, 그 어떤 민족에도 속하지 않는, 그저 인간이기만 한 그런 존재는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경구는 분명 진실을 담고 있거든요.
인류란 건 생물학적으로는 타당해도, 정치학적으로나 국제관계론적으로는 타당하지 않습니다.
애초에, 국제관계를 결정하는 일반이론, 정확히는 보편법칙 따위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요.(법칙을 부정하는 이론은 가능합니다... 물론 그걸 “이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불분명하지만요)
뭐 그러니 헤겔이 민족국가를 중요 단위체로 삼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개인이 아니라 민족국가를 “개체”의 단위로 삼고 있다는 것 자체는 그리 이상하지 않고, 이러한 개체가 하나의 [제도적] 질서를 이루는 것에 대해 회의적은 것은 경험적으로는, 혹은 현실적으로는 합당합니다.
다만 저게 어떻게 철학적으로 정당할 수 있는지, 헤겔 철학적으로 정당할 수 있는지가 매우 어려운 문제인 거죠.

일단 민족국가가 개체의 단위인 건 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고 전 진단합니다.
일단 헤겔이 개인을 개체의 단위로 보지 않는 것은 헤겔 철학적으로 매우 당연한 진단입니다.
(호네트의 <인정투쟁>이 비록 헤겔의 전기 철학에 근거하여 서술되었고, 후기 철학과는 무관하거나 긴장적일 수는 있긴 하지만 하여간) 호네트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헤겔의 객관성, 보편성, 정당성은 매우 타자 지향적입니다.
상호인정의 형식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은 바뀌지만, 헤겔은 개인이 계시든, 직관이든 뭐든 간에 진리와 맞닿아 있는 그런 건 웃기는 일이라고 진단하고 있고(이건 너무나도 합리적인 진단이라... 입증책임은 반대편이 져야합니다), 부정적인 진단에 그치는 게 아니라 헤겔 본인이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객관성, 보편정, 정당성 같은 것들이 실재로서 현실화될 수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으니 문제에 대한 답변까지 재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죠.
헤겔은 저런 상호인정이 민족 단위를 가져야한다고 진단하는데 이것도 그렇게 자의적인 판단이나, 현실영합적인 술수가 아닙니다.
헤겔은 임의적인 집단으로는, 본인이 논의하는, 실재를 담지하는 상호인정의 단위체가 될 수 없다고 진단했기 때문입니다.
대충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동아리나 이익단체 같은 건 만들 수 있어도, 운명 공동체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뜻이 맞는 사람들”이 자신의 세대를 넘어서 하나의 단위를 이루게 할 의지를 갖진 못하기 때문이죠.
헤겔은 민족 단위가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분명하진 않지만,(이후 민족주의 열풍 때문에 오해 받곤 하는데... 이전 사람들은 민족이 그렇게 분명한 실체를 이루지 않는다는 것도 다 알았고, 민족주의 열풍 시기에도 이는 다 알고 있었습니다. 이게 실체가 아니니까 오히려 더 순혈주의적인 극단주의가 기승을 부린 겁니다) 역사 속에서 어느 정도 실질적인 단위체를 이루고 있으며, 이들 사이의 관계가 영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꽤나 중요하단 것을 인식하고 있는 거죠.
그리고 이런 인식을 대충 뭉갠게 아니라, 바로 저것들이 서로 상호인정을 요구할 수 있는 중요한 단위로서, 심지어 그러한 상호인정의 요구가 이미 과정 속에 놓여 있음을 지적하며 이를 철학화한 겁니다.
호네트가 <인정투쟁>에서는 그렇게 강조하지 않지만, 이후의 저작들에서 강조하듯이, 헤겔은 습속이란 게 (상호인정이든 사회적 상호작용이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매체란 것을 인식하였고, 바로 이러한 매체 없이는 공동체의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점과, 바로 저러한 매체에 근거할 때에만 정신의 실재성을 현실 속에서 진단할 수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이를 철학화합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습속에 근거하여 민족이란 단위체의 실제성을 철학적으로 승인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민족이 단순히 민족으로 남아 있지 않고, 하나의 국가를 이룸으로써 그것이 담지하는 정신을 실정적인 제도를 통해서 드러내게 될 때 그것은 하나의 고유한 단위체를 이룰 수 있다고 진단했다는 겁니다.
국가는 그러니까 개인의 수준에서 보자면, 신적인, 객관성, 보편성, 정당성 따위를 담지하는, 자신의 존재를 담지하는 고유한 개체일 수 있는 겁니다.

문제는 이러한 국가라는 개체에게는 개인과도 같은 상호인정의 요구 속에서 현실화되는 더욱 일반적인 질서가 왜 강제되지 않는가 따위의 질문일 겁니다.
전 이게 좀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국가들 사이에서 이미 통용되는 질서가 애매모호할 수는 있겠지만, 유럽 안에서 보자면, 사실 그렇게 허황된 건 아니거든요?
정치와 국제관계가 “궁정의 신비”에서 벗어나서 지식의 대상이 된 게 그리 먼 과거의 일은 아니더라도(이는 푸펜도르프가 성취해낸 거라고 전 생각합니다. 실제로 푸펜도르프는 저술 이상으로, 유럽의 주변 국가에 외교관의 양성하는 기관을 세우고 외교관을 양성하였고 본인의 저술을 통해 지배층을 설득해내어 현실의 국제질서를 이룩해낸 인물이기도 합니다... 제가 괜히 푸펜도르프를 천재 취급하는 게 아닙니다. 시대의 정신을 이룩해낸 인물이라 그런 겁니다), 헤겔 시대 정도에는 어느 정도 질서가 있었거든요.
뭐... 문외한들이야 아예 모르겠지만, 당대의 세력균형에 대한 이해와 전쟁의 원인 등에 대한 이해는 매우 수준 높았고, (본문에서 신성동맹이 까이긴 하지만) 빈체제는 전쟁을 막고 19세기의, 여러 다른 요인 때문에 불안정했지만, 꽤나 오랫동안 지속된 평화체제를 이룩하는 데 꽤나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사실 전쟁 책임이 있는 프랑스를 반갈죽 안 한 것만 해도 빈체제는 매우 혁신적인 선택을 한 겁니다. 1차 대전 전후 처리할 때 프랑스 놈들은 이것도 못 해서 2차 대전을 쏘아올렸으니 말이죠—물론 지들이 이래놓고 준비도 제대로 안 해서 6주만에 엘랑했지만!)
근데 헤겔은 왜 이런 질서를 무시하는가... 할 수 있겠죠.
일단 국제질서를 담지할 기관이 설립되어도 이것은 민족국가와 달리 하나의 실질적인 공동체를 이루진 못할 겁니다.
민주제적인 요소가 결여되거든요.
민족국가에서는 모든 시민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하나의 시민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국제질서에서는 그냥 민족국가 단위의 수뇌부들만이 역할을 가지거든요,
이런 문제를 차리하고도 좀 더 심원한 이유가 있는 것 같단 생각도 했습니다.
국제질서에 해당되는 것은 사실 세계사인데... 세계사가 제도화를 통해 완성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 같거든요.
세계사가 완성되면 세계사는 세계사가 아니게 됩니다.
지양의 운동이 없으며 역사일 수 없거든요.(중국사처럼 공간만 남은 건 역사가 아니라고 헤겔은 선을 긋습니다)
뭐 그렇다면 세계사는 제도적으로 완성되는 그런 역사를 가지면 안 될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제도적으로 완성되지 않는 그런 게 어떤 의미에서 “지양”하는 역사라는 거겠죠.
대충 근대까지는 설명이 될 수 있습니다.
인류의 자유의 진보의 역사라고 할 수 있겠죠.
근데 남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진보는 완성 불가능한, 결국 인류는 영원히 자유에 도달 못하는가?(모든 민족들이 고유한 민족국가를 이룩하여 자신들의 역사를 완성하는 건 불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그 이후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전 후자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뭘 해야 자유로운 걸지 모르겠어요.
맑스에게도 그렇지만, 필요/필연을 넘어서서 개인이 하나의 고유한 개체로서의 활동을 수행한다는데... 도대체 그런 게 뭔지가 불분명합니다.
아렌트나 고전주의자들은 고대적인 “정치”를 통해서 저런 문제를 해결합니다.
모두가 하나의 주인공으로서 동등한 자격을 가진 동료들 사이에 서며 자신을 드러내보이는 활동의 영역이 정치가 되니 문제가 없습니다.
근데 헤겔은 어떤 걸 염두에 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익으로 환원되진 않을 거 같은데, 그럼 뭔지...? 세계가 자유를 실현해낸 민족국가들로 가득 찼을 때, 도대체 세계사로서 전개될 수 있는 사건이란 게 있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뭐 이건 제가 진보 같은 걸 염두에 두지 않은, 사건들을 일으키며 시간을 떼우는, (총체적) 여가사회에 주목하고 있어서 그런 것일 수도 있는데(제가 바타이유 같은 애를 본 것은 이런 맥락 때문입니다… 또 제가 남미 식인 연구에 꽂힌 것도, 그들이 총체적 여가사회를 이룩하고 있어서였고요) 전 철학적으로도 꽤나 문제되는 주제라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