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쪽글

<영원한 평화>를 위한 준비: 칸트는 사회계약론자인가?

<영원한 평화>에 대해서는 어디서 시작해야할지 모르겠군요.
일단은 지난 수업 때 @@ 샘께서 언급한 특징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 샘께서는 <보편사의 이념>이나 <추측된 기원>과 <영원한 평화>가 꽤나 다른 인상을 준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평화>가 좀 더 “우리에게 친숙한” 칸트의 논의 방식과 비슷한 방식으로 쓰여 있는 반면, <보편사의 이념>이나 <영원한 평화>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요.
저는 처음에 저 얘기를 들을 때, 어떤 이유에서 @@ 샘께서 저렇게 말씀하시는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영원한 평화>를 다시 읽으며 @@ 샘께서 어떤 측면을 염두에 두고 저렇게 말씀하셨는지가 이해되기 시작하더군요.
바로 이러한 이해에서 시작해보겠습니다.
 
일단 오해(?)가 생긴 이유부터 얘기할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저는 이전에 <영원한 평화>를 읽을 때, <추가>부터 주목했던 것 같습니다.
그니까 저는 <영원한 평화>를, 영원한 평화 체제가 어떻게 희망 가능한지를 논하는 책으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영원한 평화 체제가 어떻게 희망 가능한지를 논의하는 방식은 <보편사의 이념>이나 <추측된 기원>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 샘의 진단에 좀 의문이 들었던 것이지요.
근데 이번에 다시 읽어보니 <추가> 이전의 논의는 확실히 <추가>부터의 논의랑 다르더라고요.
이것은 분명 “우리에게 친숙한” 칸트적인 논의라고 할 법 합니다.
일단은 이것을, 그러니까 “우리에게 친숙한 칸트적인 논의 방식”이 무엇인지를 규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친숙한 칸트적인 논의 방식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선험적인 필연성에 근거한 분석입니다.
<영원한 평화>를 시작하면서 칸트는 국가는 공화정체여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시작은 아닌데 하여간)
그런데 이런 주장은 경험적인 근거에서 추측된 게 아닙니다.
애초에 칸트 본인 또한 이것을 선험적인 필연성에 호소하고 있고 말이죠.
칸트는 그것이 마치 초월론적 연역처럼, 마치 그것이 보편타당한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방식으로 논의하는 것이 그가 <윤리 형이상학> 같은 저작에서 논의하는 방식일 테고 말이죠.(사실 전 <윤리형이상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한 적이 없어서 잘 모릅니다... 제가 알기론 <윤리형이상학>이 그 자체로 집필된 게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윤리형이상학”으로 칸트가 말해야만 했던 것과 실제로 <윤리형이상학>에 수록된 것 사이에 간극이 있을 수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건 뭐 이상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역으로, 칸트가 정치체는 어떤 형태를 띄어야하는가 따위와 같은 구체적인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 선험적 필연성에 호소할 수 있는 주장을 할 수 있었다면, 왜 그는 그러한 방식으로 단행본을 서술하지 않았는가를 말하고 싶습니다.
 
칸트는 사실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논의할 때, 선험적 필연성에 호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칸트가 그런 식으로 호소하지 않고, 희망 가능성에 호소하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제가 여러번 지적했지만, 칸트의 “초월론적 논증”은 선결문제 요구에 빠지기 쉽습니다.
제가 “선결문제 요구의 오류”를 지적했다고 해서 칸트가 단순한 논리적 오류를 범했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애초에 저런 식의 내용적인 오류는 관점에 따라 달라지거든요.(저는 수업 조교로 들어갈 때, 학생들에 순환논법 같은 걸로 비판하는 것에 조심하라고 가르칩니다. 모든 논리적으로 타당한 논증은 기본적으로 동어반복이기에 순환논법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말이죠. 순환논법인지 아닌지는 그것의 형식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내용, 심지어 맥락에서 비롯되는 거라 해당 논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아야 진단 가능합니다 원래)
또한 칸트의 논증에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제 접근은, 칸트 본인의 입장이기도 합니다.
칸트 본인도 저런 논증을 쉽게 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보편사의 이념> 같은 걸로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칸트는 어떤 규범적 이성을 전제로 둡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전제로 둔 규범적 이성 자체가 애초부터 문제의 원인이라는 데 있습니다.
칸트가 주장하는 이성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는 이성과는 구별됩니다.
우리는 조야한, 그리고 도구적인 이성들 또한 ‘이성’으로 부릅니다.
그리고 칸트가 말하는 이성또한 ‘이성’으로 부를 수 있겠지만, 일상적으로는 경험하지 않고, 애초에 칸트 또한 그것이 일상적으로 경험되는 걸로 말하지 않습니다.(제가 자주 지적하지만, 선의지는 불투명한, 매우 형이상학적인 개념입니다. 선한 의도로 어떤 일을 한다고 해서 선의지에 의거해 행위했다고 말할 수 없단 얘기입니다. 그러니 일상적으로 경험할 일이 없는 거죠)
그렇다면 칸트가 말하는, 매우 특이한 용례의, 평소에는 경험할 일 없는, 칸트가 창안해낸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이성을 우리가 규범적인 이성으로서 받아들일 이유가 있을까요?
당연히도 없습니다.
그래서 칸트는 이것을 당연시하지 않는 겁니다.
칸트가 말하는 특수한 의미에서의 이성을 받아들이면, 그런 것들을 희망될 수 있음을 논증하지 않더라도 기대될 수 있을 겁니다.(애초에 이쪽에서는 어떻게서든 실천이성을 따르려고 할 테니, 구체적인 희망의 문제는 좀 다른 차원에서 쓸모가 있을 겁니다. 주어진 어떤 정치 사안에 대해 어떻게 행위할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서 말이죠)
그런데 칸트가 말한는 특수한 의미에서의 이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에게는, 그것이 희망될 수 있음을 논증하지 않으면, 그냥 공허한 말장난으로 보일 겁니다.
이론적으로는 타당하겠지만 사실 현실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죠.(제가 자주 얘기하지만 <속설에 대하여>는 꽤나 중요한 책입니다ㅋㅋ 괜히 연구사적으로 중요한 게 아닌...)
그냥 불가능한 전제를 가지고서 타당한 논증을 한 것과 다름 없는 게 된단 얘기입니다.
고대의 기하학에서처럼, 이러한 성질의 곡선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어떤 문제가 풀린다는 그런 것과 다를 게 없어지는 거죠.
근데 문제가 되는 건 도대체 그런 곡선이 있을 수 있냐는 거거든요.
그건 작도가 일단 안 되는데, 실제로 그런 성격을 가진 곡선이란 게 정말로 있다고 할 이유가 뭐가 있냐는 것이죠.
우리야 무리수들까지도 다 구체적으로 있다는 걸 당연시해서 잘 공감할 수 없지만, 데카르트가 괜히 파이의 존재를 부정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원과 구체적인 선(지름)의 비율을 통해 추상된 것에 불과하지,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말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원의 둘레와 동일한 길이의 선”도 마찬가지죠.
이는 추상이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릴 수도 없고, 기하학적으로 주어진 원에 의존하여 추론되기 때문이죠.(존재론적으로 열등하게 됩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굉장히 기이한 성격을 가진 곡선도 당대로서는 존재를 전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에 근거한 논증이 의심되는 거야 당연한 것이죠.
그래도 기하학에서야 그런 논증 또한 매우 의미가 있었지만, 정치 문제로 넘어오면 심각해집니다.
제가 자주 말하듯이, 정치의 문제는 경험과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경험과 분리되는 순간부터 “도대체 네가 말하는 게 뭔데?”라고 되물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정치는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정의를 내려도 소용 없습니다.
그런 정의야 수백수천가지도 가능할 것이고, 그게 다른 정치체가 아니라 우리 정치체에 적용될 근거가 뭐가 있는지, 그리고 그런 근거가 없다면 네가 말한 게 ‘정치’라는 단어랑 무슨 상관이 있는지, 사실 그건 ‘정치’와 동음이의어인, 심지어 당신밖에 말한 사람이 없으니 사실 ‘정치’라고 부를 이유도 없는, 차라리 ‘깐따삐아’로 말하는 게 나을 그런 것이 아닌지 물을 수 있기 때문이죠.(당연히도 대답은 못하고요)
그러니 이론적으로는 쓸모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쓸모조차 불명확한!), 현실에서는 명백히 쓸모가 없는 논의라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죠.
이러한 어려움에 반하여 어떻게 선험적 필연성을 호소할 수 있냐는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칸트의 정치체 정의로 돌아가보죠.
칸트는 마치 국가라면 공화정체여야만 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국가 중에 그가 말하는 공화정체에 해당되는 국가는 실제로는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런 정의를 받아들여야만 하나요?
애초에, 도대체 이런 말도 안 되는 선언을 앞부분에 변명 없이 박아둔 건 왜 그런 걸까요?
후자는 쉬운 문제니 금방 답할 수 있습니다.
이걸 전제해야지 영원한 평화 체제의 가능성이 희망 가능한지가 논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자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전제될 수 있는지가 말이죠.
전 그래서 이게 좀 다른 전략으로 수행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가 염두에 둔 전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제가 칸트를 사회계약론자로 보지 않는 이유가 좀 설명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왜 제가 칸트를 사회계약론자로 보지 않는지와 함께 전략을 설명하겠습니다.
 
일단, 제가 칸트를 사회계약론자로 보지 않는 것은 감에서 비롯된 겁니다.
그러니 엄청 탄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
또한 전 사회계약론을 꽤나 복잡하게 이해합니다.
전 홉스와 로크가 루소가 매우 다른 의미에서 사회계약론을 말한 거라고 생각하고, 구체적으로 사회계약론을 말하지 않았던 푸펜도르프나 (심지어) 그로티우스까지도 여기에 넣어서 생각합니다.(그래서 제가 박논 주제로 “자연상태론의 계보학”을 설정한 거죠 “사회계약론”이 아니라)
도대체 저 인물들의 논의에서 어떤 공통된 주장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도 없죠.
그럼에도 전 어떤 공통의 사고 방식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회계약론”이나 “자연상태론”으로 부르는 거죠.
제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통설과는 달리 역사적 사실로 생각된 적 없습니다.
제가 언급한 저 사상가들 중 저것을 역사적 사실인냥 말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저런 얘기는 어떻게 가능한 것이고 왜 얘기한 걸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저런 식의 논의는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라는 대립 구도를 토대로 사회의 본질을 밝히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유의미성을 갖습니다.
애초에 진지하게 사회계약이 있어서 사회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어떤 조건이 충족되어야 사회라고 할 수 있겠는지를 밝힘으로써, 정치체의 조건을 논의하는 거란 겁니다.
그리고 이를 염두에 두면 홉스가 정말 사회계약론을 주장한 건지 잘 모르겠다는 제 얘기도 이해가 되죠.
홉스는 정치체의 성립 조건이 합리적으로는 성립될 수 없을 증명한 것이니 말이죠.(사회계약의 성립 조건은 역설 혹은 도약이라는 진단을 내리니까요)
뭐가 되었든, 제가 보기에, 사회계약론은 사회상태와 자연상태라는 대립 구도를 토대로 추정된 사회의 본질, 혹은 간극(홉스뿐만 아니라 모두가 여기에 간극을 진단하니)이 중요하고, 이 간극을 어떻게 처리할지 따위가 중요한 문제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칸트는 저런 식으로 사회계약, 혹은 본원적 계약을 말하지 않습니다.
칸트는 어떻게 말하나요?
다른 저작에서는 좀 다르지만 <영원한 평화>에서는 그냥 전제가 됩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그냥 전제될 수 있는 주장인가요?
현실 속 정치체는 사회계약 혹은 본원적 계약에 기초하지 않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거의 없는데?
칸트가 이런 전제를 <영원한 평화>에서 당연시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칸트는 정치체가 저런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게 해당 글의 목적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저 전제는, 특수 맥락적으로 정당한 겁니다.
칸트가 애초에 이 주장을 가져오는 이유를 좀 밝혀보죠.
칸트에 따르면 “영원한 평화”를 주장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평화 조약이 잠정적인 게 아니라 확정적인 것으로 볼 근거가 없다는 게 그것입니다.
평화를 추구하는 조약을 모든 국가가 맺었고, 이게 설사 수백 수천, 심지어 수만년이 갈지라도, 그러한 평화가 깨질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도대체 어떻게 영원한 평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논리적으로 영원한 평화는, 전쟁과 평화 사이에서 평화에 존재론적인/형이상학적인 우선성을 부여해야만 가능한 주장입니다.
평화 조약이라는 게 잠정적인 것이고 전쟁이 우선한다면, 애초에 영원한 평화 체제 같은 것은 문자적으로 무의미할 테니 말이죠.
눈치 채셨겠지만, 칸트는 바로 여기서 총알을 씹어버립니다.
칸트는 평화 체제에 우선성을 부여할 생각으로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개념적 우선성을 전제하고서, 그 전제 속에서 (국제적인) 영원한 평화체제가 희망 가능한지를 검토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칸트의 작업이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동어반복에 불과한 거라고 말하려고 하다가, 동어반복의 위대함을 알기에 도저히 그렇게 표현하진 못했습니다... 아... 논리학이란...!)
애초에 이런 개념적 우선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영원한 평화라는 건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영원한 평화를 유의미하게 하는 전제에서, 영원한 평화가 현실적으로 희망 가능한지도 당연하지 않죠.
그러니 칸트는 개념적 우선성을 전제하고서, 그러한 우선성에 호소해서 확정할 만한 것을 통제한 후, 그것의 희망 가능성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굉장히 제한된, 그 자체로 당연한 것은 아니지만, 꽤나 주장될 법한 약한 전제를 토대로,(공화정체론 같은) 주장되기 어려운 강한 주장으로 확장하여 나아가는 것이죠.
이것만으로도 꽤나 많은 것을 설명해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죠.
그러니 칸트의 전략에 따르면 <영원한 평화> 초반부의 논의는 그 자체로 보편타당하다는 주장을 강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이는 꽤나 맥락적으로 국소적인, 적어도 영원한 평화라는 말을 모순어법으로 만들지 않을 의미론 체제를 전제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그 논의를 바탕으로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는 것이고 말이죠.(그러니 사회계약론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기도... 칸트는 간극이라던가 본질이 아니라, 어떤 것을 본질로 삼았을 때 기대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니 말이죠)
 
찬찬히 잘 설명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그렇습니다...
칸트가 이웃과 잘 지내는 평화 상태를 일종의 사회상태로, 그러면서도 정상상태로 “전제”하고, 자연상태를 예외로 두고 있는 것에 주목하여 논의를 확장한... 말이 되는지는 님께서 검토해주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