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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와 영구평화라는 꿈

  생-피에르의 <영구평화안> 발췌를 읽다보니 한 일화가 떠올랐다. 예전 연구실을 쓸 때의 일이다. 연구실을 같이 쓰지만 거의 오지 않기에 딱히 얘기를 나누어 본 적이 없는 한 대학원생이 방학인데도 자리에 있었다. 그가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걸 보고서 궁금해서 무엇을 쓰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자신이 현상공모에 낼 원고를 쓰고 있다고 답하였다. 현상공모? 당시 나는 언어의 기원에 대한 18세기의 현상논문들을 읽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현상논문을 쓰고 있다는 말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어떤 주제로 논문을 쓰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대답했다. (팬더믹 시기에 백신을 공동구매하는) 코빅스가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임을 밝히는 논문을 쓰고 있다고.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주제라서도, 그것이 철학과 무관해보여서도 아니었다. 나는 그가 주장하고 싶어하는 주장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의 주장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의 얘기를 듣자마자 그가 무슨 주장을 하는지 이해했고, 그의 주장은 아마도 참일 것이며, 그것이 참임이 증명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그러한 주장을 굳이 현상논문을 통해 제안하는 동기였다. 기껏해야 학부 수준의 경제학밖에 모르는, 지금은 철학을 전공하는 대학원생 한 명이 알 수 있는 것을, 경제학을 오랫동안 연구한 수석 연구원이 즐비한 수많은 선진국들의 정부가 모를 것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것이 합리적인 것임을 몰라서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으리라. 나는 우리가 궁금해야할 것은 코빅스의 합리성이 아니라 코빅스가 합리적임에도 왜 수많은 선진국 정부가 코빅스를 선택하지 않았는지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의 논문이, 심지어 그가 현상공모에서 3등 상을 받았을지라도, 그 어떤 의미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일화를 떠올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생-피에르의 <영구평화안>이 그때 날 당황시킨 현상논문과 다르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루소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구절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모든 이유를 이성이 아니라 결과에 의해서만 판단하고 지금까지 그런 구상이 실행된 적이 없다는 점 외에는 이 안에 대해 아무런 반대 이유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이 제기하는 난제를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요컨대 그들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이런 장점이 그토록 실질적이라면 왜 유럽의 주권자들은 이 평화안을 채택하지 않았는가? 주권자의 이익이 그토록 잘 논증되었다면 왜 주권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무시하는가? 주권자가 자기 수입과 권력을 증대하는 수단을 거절하는 것을 다른 데서 본 적이 있는가? 만약 이 평화안이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의 말처럼 훌륭하다면, 그토록 오랫동안 주권자를 방황하게 만든 모든 구상보다 그 안에 대해 주권자들이 열의가 적다는 것과 명백한 이득보다 수많은 기만적 방책을 선호하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나는 이 구절을 보고 처음에는 루소가 나와 같은 비판을 전개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해당 구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루소가 나와 같은 곳에 서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루소는 지금 자신과 다른 반대자들을, 생-피에르의 제안을 공상으로 치부하는 이들의 목소리로 제시하고 있다. 루소에 따르면 이러한 반대자들은 이성에 따라 생-피에르의 제안을 반대하고 있지도 않다. 그들은 이성이 아니라 결과에 의해서 판단하고 있다. 생-피에르의 제안이 틀렸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것은 이성에 따른 판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그런 구상이 실현된 바가 없다는 결과에 의해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루소의 입장은 이러한 반대자들과 다른 것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루소는 생-피에르에 대해 반대를 하는 것이기나 할까? 그가 만약 반대하고 있다면, 어떻게 반대할 수 있는 것일까?
  먼저 저러한 의문에 대한 루소의 답변을 살펴보자. 루소에 따르면 생-피에르의 진단은 틀렸다. 하지만 그가 이익을 잘못 계산해서 틀린 것은 아니다. 그는 옳게 계산했다. 틀린 것은 왕국의 지배자들이다. 왕국의 지배자들은 이익이 아니라 권력을 쫓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이익이 아니다. 그들은 안팍으로 그들의 권력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전쟁을 벌인다. 때문에 그들이 이익을 위해 전쟁을 포기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그들이 생-피에르의 제안을 따른다면, 그러한 제안을 따르게 한 것은 이익이 아니라 공포이다. 그들은 설득될 수 없고 강제될 수밖에 없다. 그들을 평화로 이끄는 것은 책이 아니라 군대이다. 생-피에르는 틀렸다. 루소가 <고백>에서 밝혔듯이 그는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사람들의 변치 않는 속성을 보지 않고, 그들을 열정(passion)이 아니라 이성(raison)을 따르는 자신처럼 바꾸고자 하면서 자신의 모든 이론에 오류를 더했다”. 이렇게 루소의 생 피에르 비판은 끝이 나는가? 내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루소는 생-피에르를 비판한다. 그의 제안은 터무니 없다. 그의 <영구평화안>은 잘못된 수단을 골랐다. 그렇다면 그를 비난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루소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니 생 피에르 신부의 체제가 채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훌륭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말라. 반대로, 그것이 너무나 훌륭해서 채택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라. 왜냐하면 악과 폐해는 그것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 많은 탓에 저절로 도래하지만, 대중에게 유익한 것은 거의 언제나 개별이익과 상충하는 탓에 강제를 통해서만 도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생-피에르를 변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생-피에르가 틀렸음에도 그것을 무시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어지는 구절을 살펴보자: “물론 영구평화는 현재 대단히 터무니 없는 구상이지만, 앙리 4세나 쉴리 같은 인물이 우리에게 다시 나타난다면 다시 합리적인 구상이 될 것이다. 아니면 오히려, 그토록 멋진 구상을 칭송하자. 그리하되 그것이 실행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를 위로하자. 왜냐하면 영구평화는 인류에게 가공스럽고 폭력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연합 동맹은 혁명 말고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수립될 수 없으니, 이 원칙에 의거하면 이런 유럽 연맹이 바람직한 것인지 두려워해야 하는 것인지 우리 가운데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을까? 유럽 연맹은 아마 미래의 수세기 동안 그것이 예방할지 모르는 해악보다 더 큰 해악을 단번에 초래할 것이다”. 루소는 영구평화가 터무니 없지만, 세태가 바뀌면 그것이 그렇게 기이한 제안은 아니게 될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는 것 같다. 이건 이상하지 않다. 이상한 것은 그 다음의 얘기이다. 루소는 영구평화가 실행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를 위로하라고 말한다. 영구평화는 좋은 것인데 그러한 좋은 것을 갖지 못한 것에 대해 스스로를 위로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에 따르면 영구평화를 달성하는 일이 우리가 영구평화를 달성하지 않음으로써 겪을 모든 참상에 준하는 끔찍한 참상을 대가로 달성될지도 모른다고 진단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영구평화의 달성은 무덤 위의 평화와 다르지 않고, 그러한 대가 위에서 행복을 누리는 일은 그리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처럼 들린다. 그래야만, 영구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그리 괴롭기만 한 일은 아니고, 그렇기에 위로가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루소의 처방은 꽤나 기이해보인다. 그의 진단이 정말로 위로가 될 수 있는지는 차치하고서, 그렇다면 도대체 왜 생-피에르의 영구평화와 같은 것을 우리가 상상해야만 하는가? 차라리 그의 제안을 기각하는 게 낫지 않은가? 그랬다면 애초에 위로조차도 필요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루소는 왜 생-피에르의 제안을 기각하지 않는가? 나는 그 단서가 루소의 발췌문의 서두에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거기서 생-피에르이자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럽의 모든 인민 사이에 영구적이고 보편적인 평화안보다 마음을 사로잡는 더 크고 더 훌륭하며 더 유익한 계획은 없었으므로, 지금까지 이런 계획을 실천에 옮길 수단을 제시한 저자보다 대중의 주목을 더 많이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은 없었다. 지각 있고 덕스러운 사람이라면 그런 문제에 조금도 열광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나는 이 문제에서 순수하게 인간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환상이 저 격렬하고 불쾌한 이성보다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전자의 열정이 모든 일을 쉽게 만드는 반면, 후자는 언제나 공공선에 대한 무관심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첫 번째 장애물을 발견한다. 나는 많은 독자가 확신의 즐거움에 저항하려고 미리 의구심을 품은 채 스스로를 방어하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나는 대단히 슬프게도 독자가 고집을 지혜로 잘못 알고 있음을 동정한다. 그러나 일부 정직한 사람은 인류에게 그토록 흥미로운 주제에 관해 집필하려고 펜을 잡는 나와 즐거움 감정을 공유했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나는 적어도 마음 속으로 사람들이 서로 단합하고 사랑하는 것을 볼 것이며, 모든 사람이 영원한 화합 속에서 살고 같은 원칙으로 인도되고 공동의 행복으로 행복한, 감미롭고 평화스러운 형제 사회에 관해 상상할 것이다. 그처럼 감동적인 정경을 내 마음 속에 그리면 현실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 행복의 이미지가 나에게 잠시 동안이나마 진짜로 존재하는 그림처럼 느껴질 것이다.

 
생-피에르는 이성에 호소하고 있지 않다. 그는 다음 문단에서야 “냉정하게”, “논리적으로” 따져묻기 시작한다. 그가 설혹 이성에 호소할지라도, 그가 터무니 없어 보이는 제안을 공들여 주장하는 것은 그의 “충만한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제안은 분명 이성적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성적이지 않다. 그의 제안은 논리적으로 주장되지만 “순수하게 인간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환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에 대한 부정 또한 이성적이다. 단지 그것은 “격렬하고 불쾌한 이성”이라고 일컬을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어떤 이성을 따를지는 우리에게 열려 있다. 인간에게서 희망하는 능력을 제거하고서 절망으로 인도하는 이성을 따를 수도 있고, 인간에게 희망의 능력을 부여하고서 즐거운 환상을 향유할 수도 있다. 전자의 이성을 따를 수도 있다. 그를 설득시킬 방법은 없다. 그는 그의 이성을 따르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이성을 따르고 있다고 해서 반대편이 틀린 것은 아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낫냐고 묻는다면, 적어도 환상을 누리는 이쪽의 인간들은 즐거울 테지만, 반대쪽은 불행하다. 그는 동정받을 만한다. 그는 마음 속으로도 사람들이 서로 단합하고 사랑하는 것을 그릴 수 없는 인간일 테니까. 영구평화안이란 것은 그러니 희망이다. 현실에는 절대 존재하지 않겠지만, 그것을 희망하는 동안은 진짜로 존재하는 것과 같은.
  영구평화안이 하나의 꿈이라는 것이 어떻게 단서가 될까? 우리는 여기서 루소의 좌우명과 그의 좌우명과 얽힌 일화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루소는 리스본 대지진을 두고서 종교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볼테르에게 다음과 같이 분개의 편지를 보냈다. 그에 따르면 리스본 대지진 같은 끔찍한 사태를 두고서 그의 신학을 설파하는 기회로 삼는 것은 혐오스러운 일이다. 물론 그것이 혐오스럽다고 해서 거짓이라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아마도 볼테르는 올바른 주장을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소는 볼테르가 잘못을 범했다고 고발한다. 자신의 좌우명이 “진리에 삶을 바치리vitam impendere vero”라는 것을 상기시키면서도 루소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설혹 저 좌우명을 따를지라도,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게 하는 진리보다는 모두에게 위안이 되는 거짓을 택하겠다고. 진리는 중요하고, 삶을 바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 진실이 진리가 삶을 부정할 근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루소는 그렇게 말한다. 루소의 생각이 이러했다면 그에게 있어 생-피에르의 환상적인 제안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는 분명 터무니 없다. 혹은 위험하다. 하지만 그것은 허용될 가치가 있다. 우리의 슬픈 삶을 절대화하는 불쾌한 이성에 복종하기보다는 마음 속에서라도 누리는 행복하고 감미로운 사회를 그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것이 이성에 반하는 것도 아니다. 루소가 진단하듯이 생-피에르의 오류는 이성에 있지 않다. 그가 오류를 범한 것은 수단에 국한된 것이지 그의 제안 자체에 놓여 있지 않다. 그를 반박하는 이들은 이성이 아니라 결과에 호소할 뿐이다. 혹은 그가 틀렸다면, 그것은 인간이 충분히 이성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생-피에르의 꿈에 함께 한다고 해서 진리를 배신하는 것도 아니다. 감수해야할 위험한 하나 뿐이다. 우리가 그 꿈을 현실로서 누리지 못한다는 것. 루소는 바로 이 사소한 비극을 위해 위로를 건낸다. 그것을 누리는 이들이 감수해야할 그들은 겪지 않을 비극을 겪어야만 했던 이들의 희생을 기림으로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