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건축학과 도시계획

이 또한 잡설, 언제나 그렇듯 미독과의 대화


어제 핸드폰으로 친 거라 내용이 좀 별로네요ㅋㅋ
약간 자세히 설명하자면 이러합니다.

사람마다 키가 다르고 몸의 비율이 다르니 편할 수 있는 의자 높이가 달라지죠?
그런데 키나 몸의 비율만으로 의자의 높이가 확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어떤 활동을 하고 싶은지에 따라서 편할 수 있는 높이가 달라지거든요.
공부를 할 때, 영화를 볼 때, 가벼운 책을 읽을 때, 밥을 먹을 때, 커피를 마실 때, 편하게 늘어지고 싶을 때 필요한 의자의 높이와 형태는 모두 다르거든요.(공적 공간에 의자를 다양하게 구비하는 게 의미 있는 것이죠...) 때문에 의자를 디자인하는 일 또한, 삶의 형식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건축이 하는 일이 삶의 형식을 탐구하고 기획하는 일이라는 얘기를 하고 싶어서입니다.
건축학은 건물을 세우는 일을 하는 게 아닙니다. 건물 세우는 일 자체는 건축공학적 문제이고, 건축가가 없어도 잘 돌아갈 수 있는 일이거든요.
건축가는 특정한 공간을 기획합니다. 그 공간은 가능성은 있지만 현실화되지 않은 삶의 형식을 위한 것이고, 오직 그 공간을 매개로 잠재력이 발휘될 삶의 한 형식을 위한 것이죠.
건축학은 삶의 형식을 탐구하고 기획하고 이상적인 삶의 형식을 실현하는 학문입니다. 그래서 건축학이 가구 디자인이나 도시계획과 분리되기 어려운 것이죠. 건축가가 설계를 의뢰받은 공간, 그가 시공을 통해 제공하게 된 공간은 언제나 가구 디자인과 도시계획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내부에 가구가 구비되지 않는 공간은 없고, 외부에 다른 공간들과 관계 맺지 않는 공간은 없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근대 건축학 자체가 저런 문제랑 분리되지 않았고요.

어제 오스만의 파리 개발을 예로 들었는데, 다른 예들도 있습니다. 17세기의 런던 대화재와 런던 재개발 계획 또한 좋은 예입니다. 런던을 다시 세워야할 때, 사람들은 이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계획적인 개발을 추구했습니다. 그 당시 하비의 순환론에 기초한 정치체 담론이 유행했는데, 그에 기반한 도시계획도 그래서 등장합니다. 당대 문제는 교통체증이었습니다. 모든 산업체가 하나의 장소에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고, 가능하더라도 그 안에서의 혼잡이 심각해질 겁니다. 때문에 산업체들을 공간적으로 분류하여 배치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어떻게 계획할지가 문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제안된, 제가 언급한 하비의 순환론에 기초한 도시 계획은 “일방통행로”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일방통행로 설치 주장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근거가 중요합니다. 이를 제안한 인물(기억이 안 납니다... 심지어 이 얘기를 어디서 읽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네요;; 과학사 연구서일 텐데...ㅠㅠ)은 산업 활동을 유형화하고 그 관계를 분석하여 저런 주장을 하였습니다. 즉 산업 활동들의 분화/분업을 포착하고, 그것들의 작업 순서 및 작업 관계를 고려하여, 그것들 사이에서의 방향성에 입각한 일방통행로 및 순환차선제를 고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죠. 이런 계획 자체에서 중요한 것은 건물을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도시를 채울 삶의 형식들을 포착하고, 그 관계들을 포착하고, 그 관계들에 잘 부합하는 공간 배치를 고안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죠.

이걸 염두에 두면 어제 제가 한 지하철 얘기가 합당한 투정이 될 수 있습니다. 5호선을 계획한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었습니다. 해당 기획에 참여한 전문가들은 제가 지적한 문제들을 완벽히, 저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들은 앞으로 서울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있었고, 바로 그 가능성에 기초해서 5호선의 위치를 정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왜 지금처럼 되었는지가 중요합니다. 당연히 정책기획자와 정책결정자가 다르기 때문에 생긴 문제죠. 3호선을 생각하면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3호선은 1기 신도시들과 서울의 도심, 그리고 서울의 교통편(고속터미널 및 남부터미널)을 연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그런데 압구정 및 청담의 거주민들의 떼쓰기 때문에 뜬금없이 그 지역을 관통하게 되었고, 철덕들에게 악명 높은 ㄹ자 구간이 탄생하게 되었고, 덕분에 3호선이 수행해야만 했던 남북 연결의 기능이 훼손되었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정책결정자들은 현재의 유권자에게 표를 받지 미래의 유권자, 혹은 도시계획 전문가들에게 표를 받는 것이 아니거든요.

이 문제를 생각해보면 악명 높은 “장식은 범죄”라는 주장이나, 얼마 전 서울대 정문을 포토존으로 만든 일에 제가 극딜을 박은 것이 쉽게 이해될 수 있습니다. 링슈트라세 기획은 빈이라는 중세적 도시를 근대적인 대도시로 탈바꿈하는 작업이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해당 기획은 “도시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는 적당히 멋진, 높으신 분들의 허영심을 채우는 데에 더욱 집중한 방식으로 현실화되었습니다. 그걸 보고 빡이 안 칠 근대인은 없었을 겁니다. 기능적으로 요구되는 문제가 있는데 그런 문제들을 직시하지 않고 허영심을 채우는 일이 어떻게 좋을 수가 있겠습니까? 심지어 그로 인해 도시를 계획하는 기회를 영원히 잃게 되는데 말이죠. 그건 범죄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니 엄격한 기능주의가 주창된 것이죠. 그들이 직면하고 문제의 크기만큼 그들은 엄격한 기능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모든 자원을 기능적인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하니까요. 우리가 가진 것이 그 문제를 해결할 만큼 충분할지 확신하기 어려우니 매우 경제적으로 접근해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죠. 그러니 장식은 범죄인 것이고, 기능적 쓸모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암튼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왜 근대 건축가들이 가구 디자인과 도시계획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지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사람의 보폭 및 움직임까지 의식하며 건물을 설계했거든요. 그런 움직임 속에서 경험적으로 풍성한 공간을 계획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계획 속에서 특정한 삶의 형식들이 좀 더 주목되고, 그런 삶의 형식들이 더욱 잘 조우하고, 증식할 수 있게 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거기 사는 사람들이 외부로 나간다면 당연히도 그런 삶의 형식들도 고민해야합니다. 출퇴근의 거리가 거주공간의 사용에 영향을 끼칠 테니까요. 당연히도 건축가들은 현대의 대도시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현대적 삶을 고민하였고, 그 삶들이 가진 잠재성을 실현할 매체들을 고민했습니다. 그 단위체가 가구, 건물, 도시로 다양한 것일 뿐이죠.

하여간 도시계획은 매우 근본 있는 지적 영역입니다. 전 근대 건축이 저런 고민에서 태동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이 철근 콘크리트에 주목한 것은 단순히 건축공학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현대의 도시에 요구되는 필요를 채울 소재라고 생각해서고(베를라헤가 직접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들이 근대 건축 양식을 제안한 것은 현대의 도시에 적합한 기능적 필요를 충족시키면서도 도시에 통일성을 부여할 수 있는 형식이어서입니다. 하여간 그렇습니다. 단지 저런 앎이 앞서 얘기했듯이 정책에 잘 반영되지 않는 게 문제인 것이죠.


흥미로운 접근이라고 생각합니다ㅋㅋ
제가 예전에 미스 건축이 "텅 빈" 것의 그 장점을 얘기한 걸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다시 말하자면 이런 것이었습니다.

현대 삶을 계획하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물론 의미가 있지만, 그걸 구체적으로 계획할 수 있다고 믿게 되면 엄청나게 통제적이게 됩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전형적인 예입니다. 그는 건물을 설계할 때 가구와 내부 장식까지 모두 설계하고, 그것을 변형시킬 수 없게 통제했습니다. 그니까 자신이 설계한 집에서 사는 사람을 라이트의 꼭두각시로 만들려고 했단 얘기입니다. 실제로 그래서 그가 설계한 집이 답답해서 못 살겠다고 나온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고요. 반면 미스는 그런 통제를 거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건축가의 임무는 효율적 공간을 제공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 안에서 공간을 분할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그 공간을 활용할 사람들인 것이고요. 하지만 경제성을 생각할 때, 내부에서 버리는 공간을 만들면서 의미 있는 공간을 재분할할 가능성은 0입니다.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려고 한 게, 크리스토퍼 알렉산더였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공간을 채울 사람들과의 대화를 엄청나게 강조합니다. 그가 병원을 설계한 일화가 대표적인 예인데, 알렉산더는 의사들과 오랜 시간동안 얘기하며, 어떻게 공간을 배치하면 좋을지에 대한 답을 의사들이 내놓을 수 있게 돕는 일을 했습니다. 설계에도 참여시켰고요. 알렉산더는 듣는 일, 그리고 그것을 반영하는 일로 건축가의 소명을 말합니다. 어차피 짓는 거야 시공업체가 잘하니까요.(다만 이것도 항상 정답일 수는 없습니다. 건물이 특수목적인 경우에만 가능하죠. 미스식의 건물이 많은 것은 그것이 다목적적인 덕분이고, 애초에 미스가 추구한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광주를 다루는 저 책들의 강조 지점도 전 좀 이해가 갑니다. 애초에 저런 수준 높은 칼럼, 수준 높은 비전 제공이 가능한 것은 저분들이 광주란 도시를 정말 사랑하는 덕분입니다. 그런데 저분들의 사랑의 원천은 광주의 “정치”일 테니까요. 다만 현대적으로 보았을 때, 좀 더 다수적인 정치를 고안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에 저 또한 동의합니다. 인프라 연구들에서 주목한 저런 상징성은 그래서 매우 흥미 있는 주제라 생각합니다. 제가 지난 만남에서 마틴 루터 킹의 사례로 얘기한 주제, 즉 자부심 있는 사람들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만족할 수 있고, 오히려 그런 태도 덕분에 문제가 해결된다는 그런 진실과 연결될 거 같단 생각이 듭니다. 하여간 저런 상징성은 아직 건축가들이 많이 고려하지 않는 문제이고, 상징적으로도 “인류학적” 문제에 해당되고(ㅋㅋ), 인류학이 잘 도울 수 있는 문제 같네요. 건축학이 아니라 도시계획학을 참조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요. 도시계획학 전문가들은 할렘가 문제 다룰 때, 내부로 진입해서 그 현장에 맞는 계획을 추구해야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그냥 개발하면 결국 원거주민들은 쫓겨나게 된다고 지적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 쪽 사례 연구를 참고해도 좋을 거 같습니다. 제가 본 책이 기억이 안 나는데, 제가 본 책의 저자는 매우 자신만만하게 정치가들이 정확한 비전만 제공해주고, 그것을 고수해준다면, 도시계획가들은 어떤 문제든 해결할 수 있다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야 없겠지만, 우리가 가진 한계 속에서 최고의 답을 내놓을 수 있다고 자부하더군요. 그 양반들의 연구들은 참고할 게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공언같아 보이지 않았거든요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