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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최근 읽은 책들, 그 책들 속에서 고민한 생각들 보유 (1)

지난 글에 이어서


 

살아 있는 철학자들의 모든 활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마르쿠스 가브리엘이나, 레비 브라이언트, 그레이엄 하만에 대해서는 어떤 면에서는 공감을 하고 있습니다.(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얘기입니다.) 저들처럼 거창한 기획을 하고 있진 않지만 유의미한 연구를 하고 있는 철학자들은 정말 많이 꼽을 수 있고요. 그럼에도 가브리엘, 브라이언트, 하만 등에 대해서 제가 불만을 갖도록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양가적인 태도를 강요한다는 것을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요.

 

최근 읽은 브라이언트의 <존재와 지도>를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이러합니다. 브라이언트는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에서 언어만 쏟아내는 것을 비판하고 현실을 탐구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브라이언트가 현실을 정말로 잘 탐구하고 있는지 누가 묻는다면 전 당연히도 전혀 탐구하고 있지 않고, 텍스트와 텍스트 사이, 철학자의 이름들 사이에서 말만 떠들고 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만은 브라이언트의 독서가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고 떠드는데, 기껏해야 루만 같은 것을 좀 읽었다고 “다양한 분야” 운운하는 건 저에게는 우습기만 합니다. 하만이 브라이언트의 독서 목록에 저런 반응을 했다면, 제 독서 목록에 하만이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지는 가늠조차 되지 않습니다. 현실을 보자고 소리치는 것도 중요하고, 현실을 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조차 하고 있지 않는 철학자들에게 철학의 언어로 이를 호소하는 일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 하만이나 브라이언트에 제가 딱히 악감정을 갖지 않는 것이고요. 기획 자체에는 동의하고, 글도 잘 쓴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들이 말하는 현실의 얄팍함에 냉소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죠. 실제로 얄팍하기 때문에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거든요.

 

현실을 얄팍하게 다루지 않으려면 열심히 연구해야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연구하면 짐멜처럼 됩니다. 물론 짐멜은 잘못이 없습니다. 저는 외려 짐멜이 부러울 때가 많거든요. 공자왈 맹자왈 하듯이 철학자들의 단어들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철학을 하려고 했고, 자신의 철학 기획을 위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학문을 설립하였는데, 이걸 어떻게 비난할 수 있겠어요. 심지어 짐멜은 여러 사람 중 한 명에 불과했습니다. 짐멜이 스스로를 철학자로 생각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어요. 당대의 많은 학자들도 짐멜처럼 연구해야한다고 생각했고,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철학 기획을 수행했습니다. 저런 철학자들이 많았다는 것이고, 저런 철학 실천은 비난의 대상도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용인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마땅히 모범적인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는 것이죠. 전 저렇게 철학을 하고 싶은 사람이고, 제가 처한 현실에서는 저 정도의 수준과 저 정도의 잠재적 다양성만으로도 감지덕지할 것이기에 짐멜이 부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짐멜이 저런 류의 철학자로서 “마지막”이었다는 것 또한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짐멜은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생각했고, 그 당시 사람들도 그렇게들 생각했겠지만,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스스로를 단 한번도 철학자라 생각한 적 없는 베버와 스스로를 언제나 철학자로 생각한 짐멜이 구별되지 않게 되었거든요. 지금도 짐멜의 작업을 철학으로 이해하는 연구자는 없습니다. 애초에 철학과에서는 철학자로 기억하고 있지 않고요.(장담컨대 서울대 철학과에서 짐멜을 철학자로서 읽어본 적 있는 이는 저 한 명뿐일 겁니다.) 짐멜처럼 하다보면 결국 철학이 아니게 됩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철학이기 위한 한 수가 부족하게 되기 십상이거든요. 현실을 얄팍하게 다루지 않기 위해 현실을 연구하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현실의 복잡함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제가 하버마스랑 롤즈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던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전 하버마스가 더 위대한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전, 철학적 분석으로서는 롤즈가 더 정교한 작업을 수행했다는 주장에 반대하지 않을 겁니다. 롤즈는 전형적인 철학 활동을 수행했습니다. 맥락이나 역사, 사회 같은 것은 소거하고 추상적인 구조물로서 기능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검토했거든요. 일종의 “절단”, “감축”을 수행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물론 이런 수행이 의미 있는 것은 그가 올바른 맥락을 전제한 덕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하버마스가 롤즈를 좆밥 취급하는 거고요. 현실에 대한 이해가 얄팍하니 틀렸어도 이상할 게 없고, 그런 우연한 일치에 기대는 답변이 어떻게 현실적인 타당성을 지닐 수 있냐고 지적합니다. 철학자라면 마땅히 자신이 몸을 일으킬 장소를 성찰해야하고, 그런 성찰이 규범이란 것을 받아들인다면 당연히도 롤즈처럼 하면 안 된다는 거죠. 하지만 맥락이 틀리지만 않았다면, 그리고 그 속에서 롤즈가 전개하는 선험적 구조물들이 사람들의 사고에 작동가능한 기계를 제공한다면, 문제 없이 고유한 장점을 지닌 것일 수도 있죠. 외려 하버마스의 철학은 전달이 어렵고, 롤즈의 철학은 전달이 쉽습니다. 그러니 하버마스의 철학이 정말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고요.(쉽게 말해 철학함의 모범으로서 반복재생산이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또한 하버마스처럼 작업하는 것은 짐멜처럼 되기 쉽습니다. 어디서부터 철학인지가 모호하고, 자신이 제안하는 기획이 상황논리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초역사적인 이념을 향해 나아가는 것인지가 불분명해지거든요. 전 당연히도 하버마스를 철학자라 생각하지만, 바로 저 이유로, 하버마스가 사회학자로 분류되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문제인 것이죠. 현대의 학문들은 자신이 속한 복잡한 현실 전체를 포착하는 것을 의무로 여기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철학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철학은 다른 학문과 다릅니다. 철학에는 현장이 없거든요. 현장이 있는 학문들에도 전 규범과 종합적 비전을 요구하긴 합니다. 하지만 전 그런 요구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예전에 얘기한 적이 있지만, 결국 역사학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저 지리멸렬한 연구들 덕이고, 그러한 지리멸렬한 연구를 수행하는 이름 없는 역사학자들 덕분이거든요. 그런 역사 연구가 어디에 쓰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런 연구들 속에서 빛나는 연구가 가능해지는 것이고, 그러한 연구자들의 (학문적) 덕성 덕분에 “역사학계”는 부패하지 않는 것입니다. 위대한 연구를 수행하길 기대하고, 독려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죠. 그래도 됩니다. 그 자체로 의미 있거든요. 인류학도 마찬가지라 생각하고, 다른 학문들도(사실 모든 학문이 그런 것은 아니라 생각하고, 철학급의 븅신짓이라고 생각되는 학문들의 목록을 전 가지고 있지만)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건 위대함을 그 어느 분야보다 추구하는 수학에서도 성립하는 진실이고요.(필즈상을 받아 유명해진 허준이 선생이 비슷한 발언을 했다고 어디서 주어들었는데, 저 또한 동의하는 주장입니다.)

 

철학이 예외인 것은 특별해서라기보다는 모호해서입니다. 경계가 불분명하거든요. 그러니 자신이 위치하고 있는 현실을 탐색할 필요가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필요”의 윤곽 또한 모호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거고요. 현실과 무관하게 떠들면 광신 그 자체입니다. 정신병원에 쳐넣거나, 연구사례로 수집하고 전시할 존재죠. 그런데 현실을 반영하기 시작하고, 그것을 제대로, 철저하게 해내려고 하다보면 어느샌가 철학이 아니게 됩니다. 저도 비슷한 경향성(?)을(이걸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모르겠군요. 압박은 아니고... 표현하기 어렵네요.) 느낀 적 있습니다. 하다보면 이게 분명 철학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함에도, 연구할 필요를 느끼게 되고, 그게 정체성을 불분명하게 만들지만 그걸 외면하기 어려운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는 거죠.(역사 연구가 저에게 이런 상황으로 이끌어 갑니다.) 사실 그것들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철학자들은 애초에 저런 역사 연구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그 이상의 상세함은 불필요하거든요. 정말 필요한 것은 이런 역사학적 문제 상황에 주목해야할 철학적 이유고요. 그런데도 연구의 “필요”를 느끼죠. 제가 다루는 문제가 역사학적으로 아예 오류인 것이면 안 된다고 느끼고, 적어도 제가 주장하는 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연구들에 응답할 수 있어야한다고 느끼니까요.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자신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려면 치러야할 대가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 분명하지만 불분명한 경계가 현대의 철학적 작업들에 양가적인 태도를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것이고요.

 

당연히도 답은 없습니다. 전 요즘 광신이 답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고요. 제가 예전에 니체의 “역사서술”이 역사학적이지 않고, 거기에 불만족을 느낀다고 얘기한 적이 있을 겁니다. 실제로 니체 본인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자기가 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삶은 거짓이었다고요. 니체는 그럼에도 그것이 무의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 역사를 통해 옹호한 “정직함”을 배신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전 그건 말장난이라고 생각했어요. 부족한 것은 니체 본인의 역량이었고, 그 기준을 고무줄처럼 늘렸다 줄였다 해서는 안 되는 거니까요. 그런데 이게 유일한 길 아닌가하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발레리나 아렌트의 작업을 보면 더욱 그렇게 느끼게 되고요. 발레리는 대놓고 자신의 다빈치에 대한 서술은 다빈치라는 이름 아래에서 그려내고 싶은(!) 하나의 이상형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려내고 싶은 이상형에 다빈치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은 이유까지 직접 언급합니다. 도대체 이 인물에 ‘다빈치’라는 이름보다 어울릴 수 있는 게 무엇이냐고 되물으면서요. 아렌트도 비슷합니다. 아렌트의 역사는 역사면서 역사가 아니죠. 아렌트의 역사서술이 이상하고 문제적이라고 역사학자들이 지적하는 건 당연한 것이죠.(최근 윤비 샘이 아렌트의 역사서술을 비판하는 칼럼을 쓰셨는데, 철학적으로는 정말 말도 안 되고 의미도 없는 헛짓거리라고 생각하지만, 역사학적으로는 모두 동의할 수 있는 지적이긴 합니다.) 외려 아렌트의 역사가 어떤 의미에서 역사일 수 있는가가 저에겐 흥미를 유발합니다. 하여간 니체, 발레리, 아렌트 모두 역사는 역사학과는 구별되지만, 그럼에도 가상이 아닌 무엇이고, 그 선택이 올바른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는 얘기입니다. 다만 제가 가진 역사학적 감수성과 역사학에 대한 존경에 어긋나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기획을 추구해야겠죠. 저것들을 배신하면 저는 저 자신이 아니게 될 테니까요.

 

고민을 제대로 안 하고 대충 “철학”을 얘기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경멸해도 된다 생각합니다. 고민 없이 할 수 있는 철학이 가진 유의미성을 전 모두 검토해봤고, 그런 유의미성은 세상에 없어도 문제적이지 않을뿐더러, 걍 과거의 철학 책들의 존재만으로도 그 소임을 다할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하여간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