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유희열 표절 사건에 대해서

앞서 말했듯 유희열 논란과 관련한 대중 절대다수의 태도는 하나로 수렴된다. 비난이다. 하지만 그 비난의 면면을 들여다보면 꽤 다양한 결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유희열을 비난하는 건 똑같지만 저마다 집중하는 포인트도 다르고 강조하는 부분도 다르다. 그중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순수창작론 및 근본주의에 기반한 입장, 혹은 그에 준하는 태도다. 창작은 엄숙하고 신성한 것이며 스스로의 힘으로 온전히 모두 해내야 한다는 식의 태도 말이다.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이런 생각을 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있다. 유희열의 ‘아주 사적인 밤’에 최초로 표절을 제기한 도희서 씨다. 그의 브런치에는 ‘나는 제보자A씨다’라는 글이 있는데, 이 글에는 놀랍고 당황스러운 내용이 곳곳에 있다.

실제로 그는 이 글에서 ‘DAW(시퀀싱 스프트웨어)와 플러그인, 샘플링 소스 등이 창작자를 망쳐놓았다고 생각한다’라는 자신의 견해를 밝혀놓았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DAW와 플러그인, 샘플링 소스는 창작자를 망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순수창작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영역으로까지 음악을 확장시켰고, 리얼세션의 강박과 핸디캡에서 많은 창작자를 해방시켰으며, 과거의 전통과는 또 다른 정체성의 새로운 시대를 열 수 있게 해주었다.

글 중 ‘작금의 작곡 행위가 과연 작곡일까? 편집 같지 않은가?’라는 부분도 충격적이다. 그는 이 문장에서 작곡과 편집 사이에 위계를 부여하고 지금 시대의 창작을 폄하하는 의도로 편집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나는 ‘나의 시대가 정답이며, 모든 변해온 것은 나빠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시대는 정답도 아니고 진리도 아니다. 그저 당신의 시대일 뿐이다. 그리고 당신보다 앞선 시대의 기준으로 보면 당신의 시대도 가짜다. 이 당연하고도 유일한 진리를 모르는 건지 외면하고 싶은 건지 궁금하다. 만약 지금 시대의 창작을 편집이라고 느꼈다면 그것은 편집이 바로 이 시대의 작곡방식을 관통하는 본질 (중 하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조사와 참고는 절대로 관찰과 사색보다 위대할 수 없다’는 문장이나 ‘패러디, 오마쥬, 영감, 샘플링, 인용, 참고, 레퍼런스 등의 단어들은 모두 결국엔 네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그의 말 역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편협하지만 이쯤하기로 하자. 어쨌든 그의 글을 다 읽고 나면 그가 왜 표절제기를 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도희서 씨는, 자기 나름의 ‘정의’를 구현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태원은 마치 도희서의 분신 같은 존재다. 둘은 서로 많이 닮았다. 그리고 인터넷의 수많은 댓글이 이들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실제로 김태원은 혹시 창작에 영향을 받을까봐 다른 음악을 듣지 않는다고 오래 전부터 말해왔다. 이러한 그의 태도를 나는 극단적이고 시대에 역행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진정한 창작자의 자세쯤으로 생각한다. 또 사람들은 한 곡을 700번 수정했다는 김태원의 일화를 마치 영웅담처럼 받아들인다. 수정 횟수와 창작의 훌륭함이 정비례하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은 김태원에게 ‘진정성’을 덧씌운 후 추켜세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엔 유희열이 있다. 2022년이라고 믿기 힘든 광경이다.

이번 사태를 지켜보며 느낀 것이 있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다. 미국은 표절에 쿨한데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표절시비는 미국에서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문제는 미국의 표절시비가 저작권 분쟁에 가깝다면 한국의 표절시비는 ‘도덕쟁탈전’ 양상을 띤다는 점이다. 이번 표절시비와 관련해 사람들이 유희열에게 가한 공격은 사실 음악적인 것이라고 보기 힘들다. 대신에 그것은 사람들이 유희열에게서 도덕을 빼앗은 후, ‘도덕이 부재한 인간은 당해도 싼’ 응징을 가하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기꾼, 파렴치범, 뻔뻔한 놈 같은 단어들이 이 방증이다.

도덕 따위는 필요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최소한의 도덕은 필요하고, 누군가는 음악가에게 창작윤리를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정도가 너무 지나치다. 일단 나는 ‘유희열이 지난 30년 간 사람들을 속이며 남의 음악을 베껴온 파렴치한 사기꾼’이라는 주장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설령 유희열이 그런 사람이라 치더라도 지금의 인터넷 괴롭힘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다. 이번 사태는 한국사회의 잔인성과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낸 사태로 훗날 기록돼야 마땅하다.

유희열을 파렴치한 사기꾼으로 몰 것이라면 음악적 근거가 확실해야 한다. 사실 음악적 근거가 확실해도 문제는 남지만 어쨌든 음악적 근거라도 확실해야 한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내가 듣기에 비슷하거나 똑같기 때문’에 표절을 확신한다. 이런 맥락에서 ‘막귀인 제가 들어도 똑같아요’라는 댓글은 그래서 더 상징적이다. 아마 이 사람은 그만큼 두 곡이 똑같게 들린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이 댓글은 ‘나는 최소한의 전문성도 없지만 거리낌이 없고, 이 음악을 지금 바로 표절로 낙인찍을 것’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이것은 대중의 권리가 아니라 폭력이다.

한 사람을 매장시키면서도 사람들은 끝까지 성찰하지 않는다. 두 곡을 5초씩 잘라 연달아 듣는 형식이 판단의 정확성을 흐릴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도, 매쉬업이란 무엇이며 매쉬업을 통해 두 곡이 설령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더라도 그것이 곧 표절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도, 표절시비가 일어난 부분이 오리지널리티를 논쟁할 수 있는 부분인지 아니면 수없이 많은 노래에서 활용돼온 관습적 패턴이나 클리셰인지 구분하는 일에 관해서도, 사람들은 생각해보지 않는다. 그리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부정한 것’으로 싸잡는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음악학적으로 반론을 제기해도 그건 잘난 척에 불과한, 자칭 전문가들의 대중과 괴리된 논의로 싸잡힌다. 자신이 모르는 부분이나 다른 가능성의 여지를 직시하고 살펴보며 자신의 판단에 균형을 더하려고 하는 대신, 자신의 상상력 밖에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자신의 시야를 스스로 차단한다. 그렇게 안정적이지만 틀린 세계가 완성된다.

자신만의 공고한 세계는 사실마저 제대로 보지 못하게 만든다. 유희열의 음악을 오랫동안 들어온 사람들은 그가 자신이 영향 받은 음악과 음악가를 숨기지 않아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아니, 오히려 그는 민망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자신이 누구에게 영향 받았는지 매순간 밝혀온 사람에 가깝다. 그의 라디오를 듣거나 그가 직접 작성한 앨범 소개 글을 본다면 유희열이야말로 한국에서 가장 정직하게 자신의 음악이 선대와 동시대 아티스트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음을 드러내온 아티스트임을 알 수 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유희열이 그동안 국민을 속여 왔다거나, 몰래 남의 음악을 베껴온 파렴치범이라는 프레임은 무너지는 게 맞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달랐다. ‘공개된 자리에서도 이렇게 대놓고 말해왔을 정도니 대단한 후안무치’라는 것이 그들의 반응이었다. 인터넷에 떠돌고 있는 김장훈과 유희열의 대화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대화는 당신의 정황과 그들의 어법에 익숙하지 못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유희열이 공개적으로 이런 대화를 김장훈과 나눌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그의 창작론에 떳떳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화는 서로 다른 창작론이 부딪히는 논쟁으로 이어져야 맞다. 하지만 그 대신 돌아온 건 유희열의 뻔뻔함에 소름이 끼친다는 반응이었다.

물론 나 역시 유희열에게 아쉬운 점이 있다. 그의 2007년작 [Thank You]는 창작력이 절정에 달한 작품이었다. 반편 2014년작 [Da Capo]는 나로 하여금 그의 창작력이 하락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했다. ‘아주 사적인 밤’과 ‘Aqua’의 표절 시비에 관해 유희열은 “긴 시간 가장 영향 받고 존경하는 뮤지션이기에 무의식중에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유사한 진행 방식으로 곡을 쓰게 됐다”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유희열의 창작법을 아는 팬들은 무의식이라는 단어 선택에 배신감을 느꼈다. 하지만 나는 그 배신감을 이해하면서도 동시에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내가 볼 때 무의식이라는 단어는 뻔뻔함의 발로라기보다는 그의 창작력이 떨어졌다는 증거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Da Capo] 즈음에서부터 시작된.

더 근본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유희열의 창작법에 늘 잠재돼 있는 리스크라고 할 수 있다.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찾아듣고 영향 받고 수용하고 자기 것으로 만드는 그의 창작법은 어찌 보면 매순간이 줄타기다. 균형을 지켜내면 문제가 없지만 한쪽으로 기울면 ‘노골적인 레퍼런스’, 혹은 모방 더 나아가 표절시비가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창작법을 가진 창작자가 창작력이 떨어질 때 줄타기의 균형이 깨진다. ‘아주 사적인 밤’은 어쩌면 이런 경우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누군가는 유희열을 뻔뻔한 사기꾼으로 몰아가며 앉은 자리에서 5분 만에 그의 인생 30년을 통째로 낙인찍을 것이다. 다른 누군가는 유희열이 예술가로서 실격이라며 그에게 자성을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개별의 일로 총체를 규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줄타기에 실패했다고 판단되는 노래가 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판단하되 그렇지 않은 많은 노래가 존재함을 함께 인지할 것이다. 또한 예술은 특별하고 신성하다는 전제를 하지도 않을 것이고 일반인보다 예술가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야 한다는 말에도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유희열을 음악인이자 직업인, 그리고 한 명의 불완전한 인간으로 동시에 인식하고 대할 것이다.

무엇보다 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이 세상 모든 곳에서, 또 우리 각자의 직업전선과 각종 분야에서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반복과 모방과 영감과 영향받음과 재생산과 재창조를, 우리는 이번 사태와 함께 고민하며 균형을 잡고 있는지 말이다. 왜 우리는 우리의 삶이 유희열의 창작법(의 원리)와 완전히 무관하다는 듯 행동하는 걸까. 왜 우리는 예술가와 유명인에게는 이토록 가혹할까. 왜 당신은 외국영화를 스킨만 바꿔 끼운 한국영화를 즐겁게 관람하고 집에 들어와서 유희열의 창작법을 비난하는가. 그리고 창작법이 시대마다 바뀌고 모든 것이 갈수록 고도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표절을 어떻게 재정의하고 우리의 태도를 어떻게 업데이트할 것인가. 당신의 결론이 나와 달라도 괜찮다. 하지만 이 고민의 과정을 거부한다면 나는 당신의 결론을 존중할 수 없다.

덧붙여, 창작과 표절에 관해 진짜로 의미 있는 토론을 원한다면 김태원 만으론 안 된다. 김태원과 함께 윤종신도 나와야 하고 이현도도 나와야 한다. 또한 스플라이스로 모든 비트를 다 만드는 프로듀서도 나와야 하고 엘피를 샘플링하는 힙합 프로듀서도 나와야 한다. 더불어 송캠프에서 여럿이 작업하는 케이팝 최전선의 프로듀서들 역시 나와야 한다. 이 사람들이 다 같이 이야기해야 의미가 있다. 의미를 부르짖기엔 이미 너무 잔인한 몇 주였지만.
김봉현 평론가의 인스타 게시글을 타이핑한 것
중간에 오기가 있을 수도 있음
저작권 문제가 있을 수도 있음


인터넷에 좋은 글이 있어 관련된 나의 생각을 적게 되었다.

나는 해당 평론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인지, 여태까지 어떤 평론을 해왔는지도 모르고, 그런 것들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관심도 없다. 또한 나는 음악계의 표절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나에게 있어서 저런 문제는 산업적인 문제고, 지적 재산권 일반에 대해서는 여러 모로 관심이 있지만, 지적 재산권 문제를 음악에 적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진 적이 없다. 때문에 나의 이 글에 대한 관심은 음악에서의 지적 재산권 문제가 아닐 수밖에 없다.

저 글에 동의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 글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하나는 사람들이 그 어떤 고민도 하지 않고 판단을 한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판단을 통해 누군가를 비난하는 것 자체를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막귀인 제가 들어도’라는 식의 말을 당당하게 하는 것과, 어떤 잘못을 도덕적 결함으로 인식하고, 도덕적 결함에 대해서는 무제한의 비난을 해도 된다는 사고,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현실들이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음악적인 표절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아니다. 이에 대해서 고찰하는 것은 당연히도 의미가 있고, 합당한 합의 방향에 기초해 제도를 설계하는 것은 뜻깊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음악에서 표절이 무엇이냐는 본질에 대한 물음이 아니다. 표절 여부가 확정되지 않고서도, 혹은 표절이 아니란 것이 확정되었어도 사람들은 똑같은 반응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표절인지 아닌지를 떠드는 것은 애초에 문제를 잘못 인식한 것이 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 속에서 발현되는 패턴들이다.

누군가는 유희열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 ‘천재 작곡가’, ‘순수한 창작자’ 등의 이미지에 대중들이 배신감을 느껴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추측이다. 지금 열심히 유희열을 비난하는 사람들(나는 관련 현상에 관심이 없어 확실히 알고 있지 못하지만, 유튜브를 토대로 비난이 확산되고 있는 것 같다. 시청하진 않았지만, 최근 표절을 주장하는 영상들이 나에게도 추천 영상으로 뜬 적이 있다.)은 유희열에게 배신감을 느껴서 비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다수는 애초에 유희열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 그저 이름만 들어본 사람들, 혹은 이름도 들어본 적은 없지만 유튜브 알고리즘의 인도 아래에서 비난 영상을 보고 ‘막귀인 제가 들어도 똑같게 들린다’고 외치는 사람들이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표절인지 아닌지도 아니고, 대중적으로 유포된 이미지와 이에 기반한 반응인지도 아닌 것이다.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화젯거리에 의해 들끓어 오르는 대중적 정념들이다.

이는 일시적 현상이다. 예컨대 유희열이 표절을 하지 않은 것으로 확정되고, 비난이 부당했음을 모두가 인식하게 되었다고 쳐보자. 그때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반성할 사람이 많은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이미 이런 사건들이 많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죽은 사람은 말이 없고, 죽음으로 몰아갔던 사람들은 반성보다는 다른 이들을 비난하기에 바빴으며, 자신들은 단 한번도 비난한 적 없고 잘못한 것은 다른 이들이라고 우겨댔다.(내가 여기서 자신들/다른 이들로 말하는 것은 인터넷 커뮤니티가 이러한 들끎음의 장소이며 그 공간에서 적과 아군이 구별된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싶어서이다.) 유희열에 대한 비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신이 비난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조차 결국 자신이 비난한 일은 잘못이 아니며, 비난하게 만든 유희열 및 유희열의 비난을 몰고 간 주동자라고 말할 것이 뻔하다.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때문에 지금의 사태가 유명인이라서, 혹은 “예술가”라서 생기는 일은 아니다. 물론 이런 들끓음에서 이목을 끌기 위해서는 자신들에게 친숙한 인물일 필요가 있고, 이것이 “유명인”일 가능성이 높긴 하다. 하지만 당장 회사에서 진행되는 어처구니 없는 루머와 이에 의한 들끓음을 보면 결국 유명한 것조차도 중요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블라인드에서 화제가 되는 불륜사건들은 해당 인물들이 유명해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오히려 화젯거리가 되고 이목을 끌면 누군인지를 색출해낸다. 유명도가 유명인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악명일지라도. 그러니 중요한 것은 유명인인지가 아니라 화제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술가”(난 도대체 왜 여기에 “예술가”란 표현을 쓰는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일상언어적으로 허용될 용례니 비난하고 싶진 않다.)가 좀 더 이목을 끄는 것은 사람들이 그런 것들에만 흥미를 느끼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나처럼 책만 보는 사람들은 어떤 연예인이 불륜을 저질렀다느니, 누가 동성애자라느니, 누구의 사생활이 더럽다느니 하는 얘기들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고, 그것에 주목할 이유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사람들이 저런 것들에만 반응한다는 것도 당연히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진짜 문제는 그것을 매개로 무엇을 하는지다. 한국 사회의 잔인성과 야만성이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는 세계적인 추세이며, 정동사회니 뭐니 하며 떠드는 치들의 학문적 수준이 낮다고 생각하지만, 저런 담론들이 근거로 하고 있는 오늘날 더욱 명료하게 드러나는 저런 현상들의 현존은 부정할 수가 없다. 도덕을 잣대로 폭력을 일삼지만, 저건 도덕도 뭐도 아니다. 누군가를 린치할 기회가 있다면 린치를 행하는 것이 권리이자 의무라고 생각하는 것일 뿐 이를 담보할 객관적 도덕관/세계관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란 이름으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생명에 대한 존중”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공공의 질서”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것일 뿐, 그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 누군가가 비판할 때에도 반박할 생각은 하지 않기 때문이며,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믿고 어떤 사회를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를 객관적으로 구체화할 시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실제로 객관적으로 구체화하면 그들이 꿈꾸는 이상세계는 동화 속 세상이거나 지옥이기에 이러한 노력을 하고 있다면 저런 짓을 하고 다니지 못할 것이다.) 사회적으로 화제가 된 모든 문제의 배후에는 이런 현실이 깔려 있다. “캣맘”은 동물의 권리를 신경 쓰지 않고, “맘충”은 교육환경을 신경 쓰지 않으며, “환경운동가”는 지구적 생태계를 신경 쓰지 않는다. 자신들의 행동이 맥락적으로 어떤 효과를 산출하는지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누군가가 피해를 보아도 그것은 당연히 그들이 감수해야할 일이고, 나라에서는 자신들을 지원해줘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자원들이 어디서부터 올 수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약탈의 방법이 떼쓰기로 변했을 뿐 약탈이라는 것은 다르지 않다. 심지어 이는 당연한 권리이며, 약탈 당해야하는 이들의 존재와 그들의 고통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짐에도 선함의 얼굴을 하고 있기에 위선적이다.(고대적 약탈은 고통의 당연함은 받아들였지만, 이를 선함으로 포장하진 않았다.)

저런 짓거리들 배후에는 결국 폭력성이 함축되어 있다. 예전에 채식주의자들의 활동을 관찰하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이지만, 그들은 체계적으로 감정적인 격동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일을 노력한다. 반복적으로 자신들의 분노를 충전하며 적개심을 고양시킨다는 얘기다.(채식주의 카페에서 주기적으로 “끔찍한 영상”을 시청하도록 하며, 사람들은 이를 통해 자신의 정념을 “충전”한다는 것을 목격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 후로 해당 연구를 접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런 것들을 연구하는 것에 동기가 부여되지 않는다. 결국 행태 연구에서 내가 추구하는 것은 조화이지 저런 병신짓이 아니다.) 당연히 적개심을 통해 다른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이다.(1984의 "2분간의 증오"와 너무나도 닮았다.) 그들은 비채식주의자들의 소멸이 유토피아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비채식주의자가 없는 세상이 현실화되길 바라지 않는 이들이다. 하여간 이번 사건도 별로 다르지 않다. 도덕과 윤리를 통해 승화되어 올바른 공격성으로서 사회의 안정을 가능케 하는 역량들이 방향을 잃고 유령처럼 사람들을 사이를 배회하며 희생자를 만들고 있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지라르는 이런 현상을 목격하고선 결국 기독교가 올바랐다는 결론을 내렸다.적어도 무고한 피해자를 산출하지 않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편 종교가 불가능해진 현실에서 희생자를 만들어 내는 인간의 심리는, 과거와 같은 카타르시스 효과도 결여한 채(과거에는 그래도 희생자를 낸 이후 바로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내려고 하지 않았다. 폭력성이 체험적으로 극화되었고, 이에 의한 카타르시스도 강렬하였기에 한동은 괜찮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저 평론가의 생각과 달리 오늘날은 잔인하지도 야만적이지도 않다. 애초에 그랬더라면 이를 행하고 다니는 이들이 죄책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오직 희생자 산출을 목적으로 자신을 증식하며 배회하고 있을 뿐이다. 문제라면 이게 문제이다.

이 글의 목적과는 상관 없지만, 말 나온 김에 표절에 대한 나의 생각을 밝히자면 이렇다. 애초에 지적 재산권은 18세기 말 천재담론과 그 당시에 등장한 새로운 시장(출판)에 기초해서 형성된 개념이었다. 현대에는 둘 다 통용되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비록 나는 븅신 취급을 하지만 그래도) 미국식 법경제학자들은 현대의 지적 재산권이 오늘날 경제적으로 불합리하다는 것을 이미 증명한 바가 있다. 현대의 창조성 개념 또한 대중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조직 이론 및 체계 이론 쪽에서 나온 담론으로 적절하게 개념화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말하지만 이론은 충분하다. 로런스 레식의 책들은 이미 꽤나 번역이 되었고, 사태의 본질을 다루지는 못하고 있지만 국내에도 관련 연구자들이 꽤나 있다. 이것이 법제화가 되지 않는 것은 정치가 몰락해서이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물론 정치의 몰락은 국민이 개돼지여서도 아니고, 정치인들이 쓰레기여서도 아니다. 책임이 있다면 모두에게 있고, 책임이 없다면 모두가 무고하다.(관련하여 마이클 포터의 팜플릿 <권력의 배신>을 언급하고 싶다.) 나 또한 그 물결 사이에 있으며, 결국 제대로 해낸 것은 없으니 누굴 비난하고 싶지도 않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직시하고 관련된 자원(이론과 사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자고 권유하고 싶을 뿐이다.

다만 유희열 표절 사건에 대한 반응들에 의문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나 또한 잘은 모르지만,(잘 모르고 애기하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다. 단지 합당한 반박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할 의지가 없는 사람들이 잘 모르고 얘기하는 것이 나쁠 뿐이다. 누구나 처음에는 잘 모를 수밖에 없고, 그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장과 반박을 통한 깨달음이 필요하다. 문제가 되는 것은 정말 기본적인 노력도 하지 않고, 고민할 의향, 발전할 의지도 없이 떠들고 있는 이들 때문에 발생한다. 내가 지난 글에서도 언급한 적 있지만,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고, 이게 맞다는 식의 꼴통 같은 주장을 하는 치들이 어마무시하다. 그들을 열심히 반박해도 “고민해볼게요~” 따위로 넘어갈 뿐만 아니라, 결국 그 주제에 대해 평생토록 그들은 다시 고민하지 않는다. 그런 치들을 인간으로 생각하고 설득하려는 게 바보 짓이고, 그래서 현대 민주주의가 몰락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들은 모두 민주주의를 떠들지만, 민주주의를 가능케 하는 조건을 형성하는 일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납득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래도 몇몇 곡의 유사성은 심각해보이며,(Happy Birthday To You 같은 곡. 도덕성은 차치하고 저작권에 문제가 없을지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 유희열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만약 정말로 본인의 창작론이 올바르다고 생각했다면, 표절제기 때부터 적극적으로 항변했어야 했고(무의식 운운한 것에 대해서 저런 해석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겠지만, 그것이 사태의 진면목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평론가의 해석이 원인 중 하나를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결국 그 용어사용이 비겁했다는 것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몇몇 곡들에 대해서는 본인이 적극적으로 책임을 졌어야한다. 사과든 변론이든 말이다. 결국 창작론이 객관적으로 합당하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비판에 대답하는 것 또한 객관적으로 효력이 있어야 한다. 여기서 객관적으로 효력이 있어야한다는 것은 그러한 근거들이 현실적으로 유통되며 사람들에게 납득될 수 있는 것으로서, 입증 책임이 불필요한 것으로서 여겨지고 있어야한다는 뜻이다. 유희열은 그런 책임을 감수하지 않고 있다. 또한 그에 대한 비난이 실제로 과도한지와 무관하게 그것에 대해 그토록 안타까워하는 것은 개인적인 친분 이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로 그런 공격이 과도하다고 느꼈다면, 다른 이들에 대한 비난에도 반응했어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정치인들에게서 자주 목격 가능한 위선 중 하나이다. 정말로 어떤 이상을 따른다면 적과 아군에 상관 없이 부당한 것은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어야한다. 누군가에게만 이를 베푸는 것은 결국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이상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자 이상을 배신하는 것이다.)

뭐 그래도 “예술이란 무엇일까?” 따위를 운운하며 헛소리를 하던 표절 문제 박사 소지자의 글과 비교하면, 훨씬 솔직하고 의미 있는 글이었다.(인문학이란 것을 그저 저딴 븅신 같은 변죽 울림으로 쓰는 치들 때문에 결국 인문학이 몰락한 것이다. 저런 치들의 뚝빼기를 박살내줘야 인문학은 부활할 수 있다.)


책 얘기를 제외하고는 오랜만에 다른 주제를 다루게 된 듯... 괜히 남들 눈에 띄게 되어 비난 받게 될까 걱정이 들지만, 뭐 그래도 그정도는 감수하며 살 것이다. 만약 내가 틀렸다면 틀린 것을 인정하고 그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싶고, 정말로 올바랐다면 그로 인한 고통은 감수하면서 올바름을 지켜내고 싶다. 루소 말마따나 상처 받지 않은 진리는 의미가 없는 법이니 말이다. 뭐 근데 애초에 내 글은 옳고 그름 같은 것이 없어서 토의가 불가능한 글이란 생각이 들고, 합당한 논의가 가능할지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