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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최근 읽은 책들, 그 책들 속에서 고민한 생각들

 

이제 서둘러 논문을 써야하지만 읽던 책들을 계속 읽는 걸 그만둘 수가 없다… 확실히 책은 억지로 읽을 게 못 되는 것 같다…

 

취미 생활 마냥 이 책 저 책 읽다보면 세상에 좋은 책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된다. 세상에는 좋은 책이 참 많다. 모두 읽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최근 읽은, 혹은 읽고 있는 책들은 모두 좋은 책들이다. 목록은 다음과 같다.

 

레비 R. 브라이언트의 <존재의 지도>

윌리엄 바이어스의 <수학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임스 프랭클린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실재론적 수학철학>

제임스 엘킨스의 <과연 그것이 미술사일까?>

멀린 셸드레이크의 <작은 것들이 만든 거대한 세계>

폴 발레리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법 입문>

오퍼 갤의 <과학혁명의 기원>

 

누군가는 중구난방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에게는 전부 통하는 것이 있는 책들이다.

 

일단 다 읽은, 그리고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이 갤의 <과학혁명의 기원>이니 이걸로 얘기하면서 다른 것들을 섞어 볼까 싶다.

 

이 책을 읽기 전, 이 책의 목차를 보고선 이 책이 “과학혁명” 개념을 거부하는 책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번역된 책의 제목은 “과학혁명의 기원”이지만, 원래 “근대 과학의 기원”이란 제목이기도 했고, 근대 과학의 기원을 설명하는 책이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한다면, 당연히도 근대 과학의 보편성 등을 부정하고, 근대 과학의 특유성을 역사적 경로로 환원해서 설명하는 책일 가능성이 높은 게 당연하다. 과학사에 대한 저런 식의 해석, 과학을 기술과 구별하지 않고 역사적으로 환원해서 설명하는 해석 조류가 유행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고 말이다.물론 (내가 보기엔) 요즘 나오는 대작들은 모두 저런 테제에 반대하고, 근대 과학의 특유성을 옹호하고, “과학혁명” 개념을 옹호하는 책들이지만, 하여간 교과서적으로는 근대 과학을 깎아 내리고 과학혁명이란 개념을 부정하는 것이 현 학계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뭐 근데 현대 인문 학계에 교과서적인 것 따위는 없고, 합의를 할 생각이 전혀 없는 광인들 뿐이라 교과서적 상식 운운하는 게 합리적인 것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례로 얘를 들자면, 오늘날 대학에서 제공하는 “교과서적인” 교양 윤리학은 정말 쓰레기 그 자체로 당장 폐기해 마땅한 게 상식적이지고 합리적이지만, 별 생각 없이 대충 떼우는 교수들에 의해 반복 재생산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퍼 갤은 근대 과학을 역사적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고, 근대 과학의 보편성을 내적인 특성으로 평가하지 않고 있지만, 근대 과학이 가진 특성과 그것이 가진 놀라운 면모를 강조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한 대놓고 얘기하진 않지만, “과학혁명”이란 개념도 유용하게 쓸 수 있음을 언급하는데, 어떤 의미에서의 “과학혁명”을 말할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고 일단 부정하는 짓거리에 동의하지 않는 입장임을 소극적으로나마 밝히고 있다.

 

뭐 근데 입장 자체는 상식적인 입장이라 난 생각하고(외려 반대로 생각하고 있는 치들이 설명이 필요하다.) 나에게 흥미로웠던 점은 그런 입장을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구축한 점이었다. 만약 내가 근대 과학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고, “과학혁명”을 유의미한 역사적 사건으로 재구성한다면, 당연히도(당연한 것까진 아닌데 하여간) 15세기에서 시작할 것이다. 고대를 얘기해서 뭐하나. 물론 근세 시기에 고대의 문헌들과 그 문헌들에서 비롯된 언어들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나는 그것이 엄청나게 중요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럼에도 난 고대를 경유해서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고대인들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를 구축할 때 동원된 언어가 고대의 것이었다고 해도, 당연히도 그 사실이 그 시대를 고대로 만들지는 않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되돌아오는 것보다 되돌아오는 것을 다르게 만든 무엇이란 얘기다. 다만 이것들을 정확히 기술하기 위해서는 외려 고대를 정확하게 기술할 필요가 있긴 하다. 대체로 이걸 제대로 안 해서 멍청한 소리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특히 중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무엇이 새로운지 제대로 얘기 못하고 헛소리를 늘어놓는 경우가 많다.) 오퍼 갤은 이런 문제를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앞에 내가 얘기한 되돌아오는 것과 그것을 다르게 만든 조건을 정확히 기술하기 위해서 고대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이런 서술이 단순히 고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는 취지의 것은 아니다. 갤이 고대를 다루는 것은 단순히 고대에서 근대인들이 자신의 언어를 빌려와서도 아니고, 고대의 활동이 과학의 본질이어서도 아니다.(뭔가 표현이 딱 생각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본질”이라고 표현했는데… 19-20세기에 유행한 서양 문명의 근원으로서의 그리스 문명과 그들의 정신이 과학정신이었다는 식의 서술과 다르다는 얘기다.) 다만 그것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는 무엇이 있어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앎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게 생각보다 별 거다. 철학 짬밥을 그래도 꽤나 오래 먹은 내가 경험한 바로는, 대부분의 경우 (심지어 학자들도) 전혀 의식 못하는 것이기 때문. 존재와 생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게 신비하고 오묘하고 심오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앎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바탕이 되어서이다. 앎은 결국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기에, 보이지 않는 것을 확정하기 위해 보이지 않는 무엇을 확정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바로 이를 확정할 때 존재와 생성 사이의 긴장이 문제가 된다. 결국 해결책은 극단이 아니라 중도일 수밖에 없는데, 중요한 것은 중도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어떤 중도인지다. 나라면 이걸 그냥 이론적인 조건으로 제시했을 거 같은데, 오퍼 갤은 역사적으로 풀어냈다고 할 수 있겠다. 고대 그리스는 기본 구도를 제공해주는 것이고, 중세와 근세 등의 상황 속에서 해당 구도가 어떤 방식으로 구조적으로 표현되었는지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런 접근은 고급접근이고(우월전략은 어려워서 못하는 것이지 할 수 있음 당연히 이렇게 해야한다.), 여기서만 얻어지는 지식론적 포인트들이 있다. 예컨대 종교개혁의 인식론적인 특성을 서술하는 부분이 그것이다. 종교개혁은 당연히도 인식론적인 운동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특유의 인식론적 전제를 갖는 것은 사실이며, 종교개혁의 인식론적 전제에 대한 태도로부터 종교개혁에 대한 입장이 결정된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물론 무지성 지지자/반대자도 있겠지만 하여간) 일단 종교개혁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 자체도 인식론적인 전제와 관련이 있다. 갤이 지적하듯이 인쇄혁명이 그것이다.(관련해서 설명하는 건 좀 귀찮다… 이미 많이 우려먹은 주제라 다시 떠드는 게 재미가 없기 때문… 엘리자베스 아이젠슈타인의 <근대 유럽의 인쇄 미디어 혁명>을 참고하시길… 생각해보니 <과학혁명의 기원> 이 책에 아이젠슈타인이 ‘아인슈타인’으로 오기되어 있었던 것 같다. 별의 별 게 다 기억이 나는…) 뿐만 아니라 루터의 태도 자체가 매우 독특하다. 루터는 자신의 주장이 이단적임을 지적하는 교화청의 비판에 대해서 매우 기괴한 태도를 취했다. 신학 박사가 아닌 교황 따위가 신학논쟁에 왈가왈부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마도 정상적인 종교인이라면 루터와 반대로 생각할 게 분명하다. 교황이 결정할 문제지, 흔해빠진 신학 박사 따위가 뭐라고 왈가왈부할 수 있겠는가. 재미난 것은 루터는 정반대로 생각했다는 것이고, 그게 이상한 생각만은 아니었단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과학의 권위를 인정한다. (국내에는 이런 전제를 거부하는 치들이 꽤 많고, 미국의 반지성주의도 이걸 거부하지만) 어떤 문제는 과학자들이 판단할 문제이지 우리가 투표할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2+2가 4인 것은 투표로 결정될 문제가 아니니 당연하다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당연한 것은 아니다. 앎은 대부분의 경우 모호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합의보다 갈등이 더 흔하다. 학자들 사이에서도 합의는 거의 없는데, 학문이 제도화된 현대에도 이런데 과거에는 더 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그래도 권력자가 나서서 탄압하지는 않는데 옛날에는 그런 게 당연했다.(실제로 그런 지식 탄압이 어떤 의미에서는 올바르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하여간 루터는 반대로 생각했고, 그 속에서만 가능한 “개혁”이 있었다는 게 중요하다.

 

루터는 무지성 계시 옹호자가 아니다. 당연히도 계시 옹호는 위험한 입장이다. 자기가 사실 예수라는 식의 정신병자는 언제나 있었고, 그런 치들의 뚝배기를 깨기 위해서는 올바른 지식의 기준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루터 또한 당연히도 앎을 존중했다. 단지 그게 과학이 아니었을 뿐. 어떤 의미에서는 과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은 “문자 그대로 참”을 존중하는 해석적 입장이 무지성 근본주의로 인식되고 있지만, 당대에는 당연히도 역사적비평적 문헌비판적 해석을 의미했다. 루터는 계시에 대한 특권적 이해를 부정하고, 모두가 계시를 이해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라고 주장했지만, 바로 그 이유에서 계시에 호소하는 주장들을 모두 경멸했고, 신학적으로 합당한 기준을 옹호했다. 교리 중심, 교회법 중심의 신앙에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앎을 경멸해야하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루터는 성서학과 교회론을 발전시켰고, 그에 기반한 신앙활동을 장려하였으며, 괴상한 해석, 자의적 해석은 당연히도 뚝배기가 깨져야한다고 생각했다. 본인의 임무 또한 그런 것이었고. 루터가 가톨릭을 부정한 것은 당연한 게 아니다. 비판과 부정은 아예 다르다.  루터가 비판을 넘어서 부정의 입장을 취하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고유한 인식론적 전제 덕분이었고, 루터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인식론적 전제가 당대에 통용가능했던 덕분이었다는 얘기다.

 

오퍼 갤은 이런 문제들을 잘 인식하고 있고, 어떤 인식론적 전제가 통용될 수 있는 조건과 특정한 인식론적 전제가 사회적으로 통용되어 하나의 조건으로 작동하는 현실을 그려낸다. <과학혁명의 기원> 자체가 이를 위한 책이고 말이다. 중요한 것은 문장적인 인식론적 전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성립하고 사회적으로 작동하는 인식론적인 조건이란 소리가 되겠다. 물론 이런 조건 속에서 특별한 기획을 수행하는 행위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고, 그 생각들이 우리가 현재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의식화된 인식론적인 전제도 분석한다. 갤이 “과학혁명”이란 개념을 쓰레기통으로 넣을 이유는 없디고 말하는 곳은 저러한 분석이 수행된 곳이다. 그럴 수밖에. 갤도 지적하지만, 그들의 믿음과 행위는 특별하다. 그것이 보편타당한 지식이라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매우 특수한 믿음이고, 역사적으로 관찰하기 어려운 실천이라서 그렇다. 그들 스스로가 과거와 투쟁한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의 망상이 한갓 망상이지 않을 수 있도록 정교화하려고 노력했다. 때문에 근대 과학과 과학혁명은 특별하다. 내적인 특별함 때문이 아니라, 그 특유함에 우리가 주목할 인식론적 의의 덕분에 그렇다.

 

중세도 그렇고, 근대도 그렇고 갤은 저런 인식론적 조건과 인식론적 전제를 정교하게 분석하며 유의미한 지점들을 쏙쏙 골라낸다. 당연히도 내가 동의하지 않는 해석, 심지어는 틀린 게 분명한 해석도 있지만(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갤도 내가 생각하는 것들 중 틀린 것을 찝어낼 수 있을 것이고, 책이란 것이 완전무결할 이유는 없고, 연구서는 애초부터 그럴 수가 없다.), 전반적으로 새로운 의미에서, 그리고 좋은 의미에서 “교과서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통용될 가치가 있는 새로운 기준을 제공해준다는 소리다. 그런 기준들이 합의될 수 있을 정도로 온건하면서도, 새롭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인지적 유의미성을 창출할 정도로 중요한 문제를 다룬다는 소리고 말이다.

 

이런 성취를 갤은 유비로 설명한다. 갤은 과학 활동을 대성당 건축으로 유비한다. 과학의 역사가 왜 중요한지, 왜 우리가 지금과 같은 고민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최고의 설명 중 하나를 제공하면서 말이다. 갤의 작업 또한 그런 것이다. 과학 활동만 대성당 건축 같은 것이 아니다. 학문이 그런 것이다. 때문에 갤이 제공하는 과학을 위한 변명(뭐 과학이 변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 이건 좀 그런 표현이긴 하다. 그럼에도 굳이 변명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과학에 대한 광신 뿐만 아니라 혐오에 대항할 때 갤의 설명이 요긴할 것이라서다.) 그 자신을 위한 변론이기도 하다.

 

다만 열심히 갤의 서술들을 따라가다보면 나는 확실히 역사학자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이건 내가 반대하는 흄주의와의 대립을 통해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이래저래 읽고 고민하면서 결론 내리게 된 생각이 있다.

꽤나 많은 연구자들이 어린 아이들과 어른의 차이가 사고 방식에 있다고 생각하곤 하는데(내가 생각하기로는 비고츠키의 피아제 비판도 이런 맥락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비고츠키파인 루리아가 피아제적인 사고를 더 강하게 밀어붙였다는 것…)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어린 아이들은 훌륭하게 추론하고, 어른들은 제대로 추론하지 않는다.

어른이 어린 아이들보다 더 올바른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그게 올바른 믿음이어서이지, 훌륭하게 추론해서가 아니다.

어른들은 추론하지 않고, 주입받은 대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어린 아이들은 추론하곤 하지만, 잘 모르는 게 많기 때문에 틀리고 있는 것일 뿐이고…

실제로 내가 실력을 인정하는 모 선생은 어린 아이들이 수행하는 논리 추론들을 분류했는데 그분에 따르면 그것들은 꽤나 고급논리다.(논리학적으로 꽤나 까다로운 발전된 추론규칙을 사용한다는 것)

어른들은 그렇게 추론하는가? 내가 아는 한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믿음을 내놓지 추론하지 않는다.

 

뜬금없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는데, 원래 얘기로 돌아가자면 이렇다.

우리는 문명과 야만을 사고방식의 차이로 생각하곤 하고, 근대 과학 이후 우리가 근대 과학의 성과를 활용하고 있으니 그것의 계승자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론 그렇지 않다.

현대 과학은 근대 과학적이지 않고, 그래서 문제라는 얘기다.(당연히 훌륭한 과학자들은 문제가 없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잘못 생각한다고 여기지만, 결과가 아닌 활동으로서는 아이들이 더 잘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문명 안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근대 과학과 과학혁명이 실로 특별한 것일지라도, 그 특별함은 당연하게 계승되는 것이 아니다.

그 특별함을 가능케 한 특별한 무엇을 계승해야만 계승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것이 단순히 주입된 것들의 올바름일 수도 있다.

이게 흄적인 사고고 말이다.

내가 예전에 올린 글에서 나는 린네가 성공적이었던 것은 성공하였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갤도 비슷한 얘기를 여러 번 한다. 그게 오히려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다면 흄처럼 결론을 내려야한다.

철학적 사유 같은 것은 때려 치고 성공적인 것만 잘 계승하면 될 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난 여기에 반대하고 있다. 문제는 그 근거다.

 

난 당연히도 저걸 반대할 근거들을 갖고 있다.

다만 내가 갤의 책을 보다가 고민에 빠진 것은, 내가 지향하는 그런 삶의 양식이 정말로 좋은 것인지, 현대에도 유의미할 수 있는지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난 일종의 광신을 옹호하는 것이고, 루터나 갈릴레오 같은 식의 사고를 옹호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계의 질서정연함을 믿었고, 그것을 포착해낼 방법을 고안하고, 그 방법에 따라 포착한 관점을 위해 투쟁했다.

이것은 당연히도 멋진 일이다. 이런 이들의 광신을 분석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고, 교훈을 준다.

하지만 현대에 그런 일이 정말로 필요한가이다.

가끔 날 놀라게 하는 것 중 하나는 현대인들이 맥락적 다양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현실이다.

상식적으로 모든 것은 다를 수밖에 없고, 공통 맥락이 특이한 일이지, 국소 현상이 특이한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걸 거꾸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고, 거꾸로 생각하는 걸 옹호해야만 한다는 현실이다.

내가 읽는 책들은 대체로 저런 다수성을 옹호하는 것들인데 매우 상식적이면서도 인지적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그러니까 내가 읽는 것이고.)

그런데 이런 책들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면, 결국 내가 존중하는 광신은 설 곳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뭐 현대의 일반화 경향성을 고려해도, 그 안에서 필요한 종합적 관점이 있고, 그걸 위한 광신은 옹호되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학문적 기획으로서는 성립하기 어려운 거 아닌가하는 고민이다.

 

결국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규칙들이 아니라, 특정한 상이다.

환상이라고 말하든, 비전이라고 말하든, 관점이라고 말하든 결국 광신적인 이미지이고, 특정한 구상체라고 할 수 있겠다.

나 스스로 예술적 재능이 없다고 생각한 것은 나 스스로가 특별함을 느끼는 가상적 구상체를 구축하는 능력이 부족해서였는데, 어쩌다보니 그런 능력이 나에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뭐 이게 예술에 국한되는 것은 당연히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예술과 과학의 경계가 그래서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는 것이라 예술로 얘기해도 이상하지 않다. 이건 발레리가 맨날 하는 얘기이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법 입문>에서 열심히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갠적으로 발레리는 나랑 생각이 너무 비슷해서 읽는 맛이 떨어지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법 입문>은 그래도 얻을 것들이 많은 책이었다. 번역은 구데기 같지만...)

하여간 작품을 만드는 심정으로 특정한 구상체를 고안해야한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조건 분석으로는 결국 나 스스로를 정당화하지 못한다, 내가 갈 길은 갤의 길이 아니다 따위의 깨달음을 얻었다.

뭐 그래도 나 또한 역사적 서술을 자주 활용할 것인데,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 “역사적 서술”을 취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그렇다.(아렌트 본인이 그렇게 얘기하지만, 아마 역사학자들은 저게 왜 역사적 서술인지 갸우뚱할 그런 서술이다. 한 가지 재미난 것은 갤이 추천하는 2차 문헌에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넣었다는 것…)

아마 난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기념비적인 것으로서 그려내는 일을 할 것 같고, 그 점에서 발레리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방법 입문>이나,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 같은 것을 쓰게 되지 않을까 싶다.

스타로뱅스키의 <루소, 투명성과 장애물> 같은 책, 카시러의 <칸트의 삶과 사유> 같은 책을 박사논문으로 쓰고 싶다고 생각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인데, 그 시절과 비교하자면 지금은 좀 더 가상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고, “기념비” 구축 자체를 목표로 삼고 있다.

아마도 니체나 발레리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내가 쓰는 전기는 역사학적 전기가 아니다.

발레리의 초상은 역사적 인물의 초상이 아니다.(역자는 진짜 구제가 불가능한 븅신 새끼라 구데기 같이 번역했고, 그러니 핵심도 이해 못하고 좆같은 해설을 달았지만, 내가 말하는 게 핵심이다.) 니체 또한 마찬가지.

예전에 난 그것들이 퇴폐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그런 인상을 받지만, 다른 방법이 있나 싶은 심정이다.

역사학적이면서도 유의미한 환상이라면 좋겠지만…. 하여간 다른 방법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건 이제 학문일 수 없는 것 같기 때문…

 

 

 

학문적 체험과 환상을 잘 버무려서 하나의 환상으로 구상하는 일이 현재로서 나 스스로에게 부과할 수 있는 과제란 생각이 들었단 얘기다.

 

하여간 그렇다.


 

이미지를 탐구하는 것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요즘 고민하는 주제이고, 그래서 설명이 어려울 것 같은데, 고민을 공유하면 좋을 듯하여 정리해봅니다.

 

학문과 예술은 원래는 달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절 고민하게 만드는 둘아 달라져야만 하는 차이소가 있습니다.

학문적 결과물과 예술적 결과물 모두 그 자체로는 하나의 작업물이고 가상입니다.

문제는 저 가상을 의미 있게 만드는 근거가 무엇이냐이고, 그것이 호소하는 근거에서 비롯되는 차이있니다.

 

학문은 대체로 일반적인 무엇을 가리키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설혹 그것이 특정 인물에 대한 것일지라도, 그 인물을 하나의 어떠어떠한 인물로서 기술하고, 기술된 내용의 일반적 유의미성이 가치의 원천입니다.

하지만 이것과 반대로 다룰 수도 있는데, “어떠어떠한”이 중요한 게 아니라, 바로 누구냐가 중요한 물음이 있고 그 답이 있다는 것이죠.

 

사회 담론은 당연히도 이미지, 관념, 사고, 심지어는 망상과 무의식도 다뤄야합니다.(베버와 뒤르켐 모두 이런 것들을 중요시했고, 이런 것들을 다룰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죠.)

문제는 그렇게 다뤄진 무엇이 왜 의미 있는가죠.

사회연구를 위한 것이라면, 어떤 사고의 내용보다는 그것이 특정한 조건 속에서 의미를 갖게 되는 맥락과, 그때 의미 창출의 원천이 되는 사고의 형태가 중요할 것입니다.

일반적인 규칙성이 추구 대상이든, 저런 연구를 통해 구체적인 실천 지침을 뽑아 내려고 하는 것이든 말이죠.

 

전 저런 작업들을 당연히도 흠모하지만, 철학이 저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 듯합니다.

전 짐멜 같은 사람이 어떤 의미에서는 마지막 철학자라고 생각합니다.

철학을 고대에 수행된 망상이 아니라 근대적 정신의 원천으로서의 기획 작업이라고 생각할 경우, 짐멜은 진정한 철학자이고 마지막 철학자입니다.

짐멜은 베버랑 다르게 자신을 철학자라고 생각했거든요. 근데 그 사람이 철학자가 아니라 사회학자로 보이게 되었고, 자신을 철학자라고 생각한 적 없는 베버와 구별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그렇다는 거죠.

짐멜은 의미 있는 철학을 하기 위해서 당연히 사회적 조건을 분석해야한다고 생각했고, 그 분석들은 일반적인 교훈을 위한 게 아니라, 시대적 변혁을 위한 자신의 기획의 자료로 탐구된 거였거든요.

근데 이렇게 보았을 때, 짐멜은 근대 철학적이면서도 더 이상 근대 철학적이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짐멜의 철학이 시대에 대한 분석 속에서 유의미한 것으로 판별되는 유의미할 수 있는 어떤 사상을 제작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죠.

꿈이 먼저 있는 게 아니라, 의미 있는 방향이 먼저 있고, 그것을 자신이 따르는 것이 되어 버린다는 얘기입니다.

 

갈릴레이, 데카르트 등등이 중요한 것, 그리고 제가 그들을 근대 철학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들의 사상의 내용과 표현 방식이 근대 철학의 모범이라 평가되고 있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갖고 있는 요상한 꿈과 그것을 구체화하고 실현하려는 그들의 삶의 방식이 비슷해서거든요.

꿈이 먼저란 얘기이고, 그게 사회에 도움 될지에 대해서 그들은 아무 생각이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전 포스트모더니즘이 문제라고 떠들곤 하고, 그들은 근대가 뭔지 모른다고 얘기하지만, 사실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은 매우매우매우 비슷합니다.

무지성 실천, 무지성 비전이야말로 근대의 특성이기도 하거든요…

데카르트는 자신의 꿈이 사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지만(노동으로부터의 해방,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죄로부터의 해방은 당연히 사회적인 유토피아죠.), 자신이 살아 가고 있고, 실천하던 맥락 속에서 자신의 실천이 어떤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데카르트는 고민은 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갈릴레이는 고민을 안 했고, 그래서 논쟁의 중심이 되었죠. 제가 생각하기로는 갈릴레이가 고민을 안 한 것은 문제가 안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갈릴레이가 근대 철학의 모범형에 가깝습니다.

즉, 무지성 이상주의자였다는 얘기입니다.(포스트모더니즘의 뻘짓이 더 심각해 보이는 것은 대결하는 시대의 차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근대 철학자들은 자신의 작업물을 일반적인 것에 대한 포착과 교훈 정도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말로는 임시적이라고 떠들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제공하는 가상을 어떠어떠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무엇으로 제공한 것이고, 그러길 바랬습니다.

 

학문도 예술도 (예전에 말씀하신 표현처럼) 일종의 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학문의 덫은 상식이라고 할 수 있겠고, 자신이 제공한 무엇이 상식으로 기능하길 꿈꾸는 것이고, 잘못되었을 경우 편견이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술의 덫은 상식의 덫이 아닙니다.

예술은 상식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추구합니다. 이게 잘못될 경우 생기는 문제도 집착이지 편견이 아닙니다.

예술이 기획하는 것은 강한 동일시입니다.

어떤 믿음을 자신과 동일시하진 않지만 그냥 자연스러운 것으로 사용하는 것과, 자신과 그것을 동일시하는 것은 매우 다른 것이죠.

제가 생각하기로 예술이나 철학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짐멜이 원래 기획하고 싶었던 것도 후자인데, 하다보니 그런 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해져서 전자 비슷한 게 자꾸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고요.

 

이미지로서의 학문은 끝났다는 제 주장은, 탐구 대상의 문제라기보다는 탐구 자체의 성격에 대한 것 같습니다.

 

암튼 저도 잘 정리가 안 되고 있고… 제가 진짜 철학 활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탐구 방식과 내용을 고민하고 있어서 이게 설명이 잘 안 되네요;;;

뭔가 조건 분석과는 다른 무엇이고… 거기서 바라보려고 하는 것도 단순히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보편적인 무엇인 것 같고… 그렇게 바라보게 되는 보편적인 무엇이 삶의 형식인지(누구인지의 물음에 대한 답), 아니면 이념인지(무엇인지의 물음에 대한 답)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듭니다. 제가 철학 탐구를 철학자의 전기를 기획하는 일로 비유하지만, 궁극적으로 저에게 철학자는 모두 한 인물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제가 기획해낸 한 명의 철학자의 꿈이 제가 구상해내고 싶은 무엇일 수도 있습니다.

 

 

하여간 저도 잘 모르겠단 얘기입니다.

게다가  과학 활동 점점 이런 종류의 활동으로 이해하게 되었고(제가 보는 수학함 속에서 얻어지는 체험  과학함 속에서 얻어지는 체험을 다루는 책들에서  비슷한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일반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의 구별 도식을 거부하고픈 욕망이 커지고 있기때문에(정신과학의 기본 전제가 문제라 망한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단 얘기입니다. 자연학과 역사학이 정말로 원리적으로 구별되나? 결국 같은 활동에서 비롯되지만 대상의 차이에서 결과물의 특성만 달라지는  아니야?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고, 이걸 도식적으로 자꾸 대립시켜서 망한  아니냐는 것이죠.) 제가 방금 얘기를 꺼내기 시작한 장소부터가 의심스럽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