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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블로그를 거의 안 했는데 오랜만에 들어오니 갑자기 조회수가 높아져 있다. 통계를 보니 뜬금없이 트위터에서 유입한 거던데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뭐 조회수가 늘었다고 하지만 이틀 뿐이고, 딱히 반응이 있는 것도 아니니 별 일은 아닌 듯하다. 그래도 내가 쓰다가 만 글의 조회수가 늘은 거라 찝찝하긴 하다. 좀 제대로 써둘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다시 쓰려니 별 생각이 들지 않는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고, 그때 쓰고 싶었던 썰풀이가 지금은 그다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땐 좀 놀랐던 거 같은데, 역시 돌이켜보면 거기서 거기다.

 

문학이론

뜬금 없이 문학이론을 공부하고 있다. 뜬금없는 것은 아니고, 역사의식을 분석하다보니 다시 문학이론으로 넘어온 것이다. 뭐 애초에 나에게 역사의식의 중요성을 가르쳐준 것도 문학이론이었으니 이상할 것은 아니란 얘기다.(풀레의 <인간의 시간>에 감사를…) 다만 반복이 단순 반복은 아니라 설명이 좀 필요하긴 하다. 니체의 계보학을 연구하다보니 역사의식을 연구하게 되었고, 역사의식에서 어째서 종적인 것, 유형적인 것, 장르적인 것, 유적인 것이 중요한지를 따지다보니 자연스레 여기로 돌아오게 되었다. 원래는 역사이론을 보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여기로… 내가 참고한 역사이론가들이 바흐친을 자꾸 언급해서 바흐친을 보다가 이렇게 되었다…

 

뭐 장르적 글쓰기, 장르적 시학, 장르적 생성, 유적 제작학 등등 바꿔 쓸 말이 너무 많은 주제는 과거에도 한번 다룬 적 있는 주제다. 오랜만에 문학이론으로 돌아와보니 모레티가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는 게 보였고, 그래서 <멀리서 읽기>를 집었는데… 이뭐병… 모레티는 본인의 장점을 잃고 단점만으로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물학 책 몇권 읽고 감명을 받아서 그걸 모범으로 삼고 있던데… 그런 시도는 19세기에 등장했다가 철저히 망했다는 걸 모르는 듯하다.(미술사에서는 모렐리가 시도하다가 아 이거 개븅신 같은 소리가 되는구나 싶어서 발을 뺐다) 생물학에서야 유전 관계가 꽤나 명확해서 통계적인 툴을 어느 정도 쓸 수 있는 것인데, 정신적인 문제는 계보로 여기면 계보가 되는지라 그런 접근이 아예 안 먹힌다. 게다가 계통분류학을 통계적으로 이해하는 꼴 자체가 우스울 수밖에 없다. 표형론은 멍청한 조류였단 걸 현대에 모를 계통분류학자도 없고, 애초에 표형론에 매력을 느끼는 것은 빡대가리들 뿐이니까 말이다. 모레티는 멍청한 놈은 아니었는데 왜 이모양이 된지 모르겠다. 굴드 책은 그렇게 분석 안 하고 있는데 도대체 뭘 보고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일까?

 

뭐 애초에 생물학을 제대로 모르니까 저런 소리를 하게 된 건데, 이게 참 골치가 아프다. 그럼 생물학은 뭐란 말인가? 설명하자면 어렵다.

 

이게 대부분 최전선에 있는 책들이 갖고 있는 한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전선에 가면 결국 이론은 모두 쓸모 없어진다. 거기서는 한발 한발 내딪는 것 모두가 위험천만하며, 모든 게 도박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언제나 반이론의 책이 나온다.

그런데 그 치들이 말하지 않는 게 있다. 최전선에 가기 위해서는 이론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최전선을 가기 위해서는 이론이 필요하다. 하지만 최전선에 가서는 모든 것은 가설로 전락한다.

하지만 이 가설들이 있기에 최전선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중요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 과정을 고정하는 게 어렵다는 것이다.

최전선까지 가는 길, 가고 나서 얻게 되는 무엇까지를 고정하는 게 어렵다.

하다보면 되는 거란 소리밖에 말이 없다.

 

모레티야 뭐 최전선에 가본적 없고, 아직 가설을 숭상하는 단계에 있으니 저런 헛소리를 하게 된 것인데… 뭐라 말하기는 좀 그렇다. 마이어와 굴드는 같은 전선에 서 있지 않고, 마이어를 존경함에도 마이어의 이론은 모두 틀렸다고 말해야하는 현실을 고백하는 것은 꽤나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사실 지금 읽어야할 책은 21세기에 나온 책들이다)

 

하여간 저런 헛소리를 하는 꼴을 보면 제도 학문을 없애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도대체 왜 문학 연구 따위에 나랏돈을 써야하는지에 대해서 그 어떤 변명도 불가능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으니 저런 헛소리가 나오는 것이니 말이다.

뭐 그걸 거부한 놈들이 해체주의를 주창한 것이고, 해체주의 덕분에 인문학은 더욱 박살이 났고, 그래서 문학에서는 역사주의가 활개를 치게 된 것이지만,(내가 예전에 쓴 적 있지만, 철학 쪽도 덕분에 보수적으로 변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건 저런 주장을 했던 소위 “해체주의자”들이 똘빡들이어서 그런 것이지 접근법 자체가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여간 사는 것은 어렵다.

 

철학

이제 철학책을 거의 안 읽게 되었다. 논문 때문에 읽는 것을 제외하곤 읽지 않는다. 읽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잘나서라기보다는 철학이 원래 그런 것이란 생각이 든다. 이론의 영역은 원래 뻔하니 말이다. 루즈가 Articulating the World을 쓴 게 그래서 좀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루즈가 말하듯 그 책에 담긴 것은 본인의 철학이 전혀 아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말이 될 수 있는 철학의 영역을 규정하기 위해 과학적 성취들을 모아둔 것에 불과하다. 적어도 과학을 무시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말이 되는 참된 주장이 가능하려면 받아들여야할 전제들을, 과학적 성취에 맞춰서 모아둔 거란 얘기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런 건 너무 당연한 것이고, 그래서 난 저 책을 다 읽을 수가 없다. 지루해 뒤질 것 같으니 말이다. 루즈는 저걸 참고 쓴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루즈의 작업이 매우 중요하단 사실이다. 뻔하고 당연한 얘기이고, 본인 얘기는 전혀 없는 그런 상식적인 소리가 입증이 필요한 현실이고, 그래서 저런 책이 나와야만 하는 것이다.(나와도 제대로들 안 읽고, 읽어도 자신의 생각을 바꿀 생각은 못하는 돌맹이 같은 놈들이 천지인 것도 문제이지만 그 문제는 차치하고)

 

생각해보면 내가 전제로 깔고 있는 감각이 당연히 언어화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언어화가 아예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어화에 있어 이는 중첩체, 다중체, 다층체, 미결정체 하여간 그런 것으로 불러야할 종류의 것인 상태이기도 하다. 중심 유비를  무엇으로 할지, 근본 테마를 무엇으로 할지, 입증에서 가장 중요한 받침을 뭐로 할지에 따라 다른 얘기가 나올 그런 무엇이다. 뭐 딱히 말할 이유가 없고, 그래서 말 안 하는 것도 있지만, 막상 말하라고 해도 할 말이 애매하긴 하단 얘기다. 입구와 출구가 많은 다공성의 무엇이라 어디로 들어갔다 어디로 나올지는 꽤나 고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장 말해보라면 할 말이 없는 게 그러니 당연하다.

 

적어도 이와 관련해서 내가 지도 제작을 해야할 상황이 있다면야 그래도 입구와 출구를 고민하겠는데, 그런 상황을 마주한 적이 없어서 고민하지 않게 된다. 내가 비록 몸치고 춤춰본적은 한번도 없지만, 그럼에도 춤의 은유로 말해야할 정신적 성향을 가진지라 상황은 매우 중요하다말할 상황이 없다면 결국 침묵할 놈이란 소리다. 하여간 그래서 열심히 바깥으로 돌아다녀보고 있는데 아직은 어떤 곳도 찾지 못했다. 장소와 사람이 나의 화두고 괜찮은 곳을 찾고 괜찮은 사람들을 만나는 시급하다.(니체는 100 어쩌구 하는 소리를 해서 빵터졌었는데, 5 정도를 꿈꾼다. 이상은 욕심일 같다)

 

영화

요즘 영화를 거의 안 보게 되었다.

카버랑 긴즈부르그가 영화를 안 보게 되었다고 말했을 때 늙으면 저러나 싶었는데, 그게 나의 현실이 된 듯하다.

단순 재미를 위한 영화는 아마 나이 들어도 가끔씩 볼 것 같다. 가족이나 친구랑 보러 갈 일이 있을 테니 말이다.(과연 그런 미래가 당연할지는 의심스럽지만 하여간)

다만 진심으로 보는 영화는 앞으로 점점 줄 것 같다.

딱히 그런 것들에 주의가 집중되지 않는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해야하나. 그런 느낌이다.

뭐 내 인생 자체도 현실감이 안 느껴지지만, 더 안 느껴진다는 얘기다.

사실 대부분의 작품은 별 고민도 없이 나온 것이고, 그런 것들에 그렇게 몰입하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내가 정당화해줄 이유도 없고, 깊게 고민할 이유도 없단 얘기다.

외려 내가 그런 것을 느끼는 것은 비문학적 산문들이다.

사람들이 살아간 흔적들, 단편들에서 진심을 찾는 게 더욱 진정성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더 감동을 느낀다.

 

문학가들은 대체로 무릎반사 수준으로 시를 찬양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정말 무릎반사 그 자체이다.(솔직히 그 치들은 시가 뭔지도 모르니 저런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논쟁할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떨어지는 돌맹이와는 논쟁이 되지 않는 법... 침묵이 답이다)

시의 시대는 진작에 갔고, 진실을 찾을 곳은 산문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거기서 파편들을 꿰어 맞추면서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이게 소설 같은 산문에 적합하다는 소리도 난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아예 예술성을 포기한 장르에서 나 자신의 종별화를 기획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난 더듬거리는 말들에서 힘을 느낀다.

 

뭐 근데 더듬거리는 말도 종류를 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요즘 돌아다닌 날선 멍청한 말들은 정말 들어줄 수가 없다.

정체성 담론이나 젠더 담론이 시대적으로 꽤나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단 생각이 들고, 관련해서 꽤나 좋은 전략을 구상해낸 적이 있지만, 그걸 발전시킬 생각은 도통 들지 않는다.

모든 것과 대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대화는 내가 견딜 수가 없다.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을 것 같다.

 

결국 내가 좋아하는 더듬거리는 말들을 세심히 수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나도 모르겠고, 비물질 수집은 내가 못하는 일이라 기대가 되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