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

자본주의와 철학

내가 이렇게 멍청했나. 내 자신이 참 실망스럽다.
뭐 항상 부족하고 헛짓거리를 하는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존재지만 그래도 멍청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멍청한 놈이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면접을 완전히 망쳐버렸다.
굴러들어온 기회를 제대로 못 잡은 것 같아 아쉽다.
설혹 이 일이 잘 풀리더라도, 내 자신에게 실망스러운 것은 어쩔 수가 없다.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요즘 계속 멍했지만, 그런 걸로 변명이 되지 않는다.
컨디션이 항상 좋을 수는 없고, 항상 영혼이 충만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여간 아쉬움이 남는다.

돌아오는 길에 한참을 생각했다. 어떻게 말했어야 되었을까하고.
원래 이런 뒷북은 루소와 니체가 전문이었는데, 이제 나도 그런 인간이 되었는가 싶다.
사람들 앞에서는 어버버거리고 편지로 자신을 대신하는 일 말이다.
예전에는 내가 꽤나 논쟁을 즐기고 대화를 즐기는 사람이라 그런 게 잘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 내가 그런 사람이 된 것일까. 재능도 없는데 문필가로 살아야하는 것일까.


하여간 돌아오면서 아쉬웠던 포인트들을 복기했다.

일단 요점을 전달할 중심 테마를 선정하지 못했고, 이야기를 집중해서 이끌어갈 모티프를 제시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특정한 단어, 특정한 아이디어, 특정한 주제로 문제를 집중시켜야했다. 그리고 그 문제를 다룰 때 이 얘기 저 얘기를 해야하는 것이다.

예컨대 이렇다.

철학 전공자가 금융 문제에 관심을 갖는다는 것은 분명 이상하다.
반자본주의의 보루 같은 이미지가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이미지는 위선과 기만일 뿐이다.
먹고 사는 일은 언제나 중요하고, 돈 싫어하는 철학자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먹고 사는 게 중요하고 돈을 좋아한다는 얘기가 곧 자본주의를 긍정한다는 얘기는 되지 않는다. 문제는 자본주의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규정해야 긍정이든 부정이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문제는 자본주의가 무엇인지를 말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가 어떤 것이라고 단언하는 사람은 멍청한 사람이다.
그런 얘기를 하면 모든 사회과학자들이 물어 뜯는다.
현대 사회는 복잡하고, 쉽게 얘기할 수 없다고 말해야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자본주의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학자들도 자본주의에 대한 단 하나의 정의는 불가능하다고들 말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본주의 어쩌구 하면서 잘만 떠든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자본주의는 처음부터 학술용어가 아니었다.
노동자들이 불평불만하면 “더러운 자본주의 세상” 운운하며 등장한 게 ‘자본주의’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단순히 자본주의가 실제로 무엇이냐가 아니다.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정말로 중요하다.
사람들이 어떤 것을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하는지는 정말로 중요하다.
바로 그 믿음이 그 사람들의 삶을 조정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조정하기 때문이다.
어떤 주장이 설득력 있는지 없는지는 그 자체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평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이런 판단들이 실제의 효력 여부를 결정하기도 한다.
미래의 가능성을 기획하는 일이 그런 경우 중 하나이다.
사람들이 그 가능성을 믿을 때에만 그것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사람들이 가능성을 믿지 않고 동참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기획도 성공할 수 없다.
따라서 기획의 심층, 근본, 토대에는 사람들의 공통 믿음이 있어야만 한다.

철학도 하나의 기획이다. 때문에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지가 중요하다.
오늘날 세상의 이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에는 자본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검토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철학을 기획한다고 말할 자격이 없다.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을 어떻게 아냐는 것이다.
설문조사나 인터뷰로 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을 조사할 수 없다는 문제를 둘째치고서라도, 그런 믿음이 의식화된 상태로 고정되어 있지 않기에 그런 방식으로 알 수가 없다.
이를 알려면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을 분석해야한다.
사람들이 어디에 돈을 쓰는지, 어떤 사건에 주목하는지, 그 사건에 어떤 반응을 하는지를 관찰해야한다.

사람들의 생각은 제각각이겠지만, 비슷한 행동 패턴을 설명할 수 있는 믿음 체계를 포착해낼 수 있다.
바로 저 믿음 체계를 ‘환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환상은 허구라는 뜻이 아니다. 어떤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만약 누군가가 진지하게 철학을 생각하고, 자신의 철학을 기획한다면, 그 또한 하나의 환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환상을 그저 강요한다면 그것은 철학자일 수 없다.
합리적으로 자신의 환상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들의 환상을 이해하고, 왜 그런 환상이 유통되고 있는지, 어떤 환상들이 가능한 환상으로 여겨지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런 진단 속에서 자신의 환상을 재평가하고, 재구성하고, 경쟁전략을 기획해야한다.
그래야만 제대로 철학한다고 말할 수가 있다.

오늘날 철학자는 당연히도 자본주의에 친화적이어야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반쪽짜리 작업을 하는 것이고, 자신의 환상을 현실이라고 착각하는 멍청이가 되기 때문이다.
“친구를 가까이 하라. 하지만 적은 더욱 가까이 하라”라는 말처럼 철학자는 자본주의와 가까워야한다. 자본주의가 친구든 적이든 가까이 해야하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이걸로 모든 것이 답변되진 않는다.
철학자가 자본주의에 친화적일지라도 그것이 금융을 다루는 친자본주의 기업에 적합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
하지만 철학이 분석에서 갖는 장점이 있다.
철학자는 환상을 다루는 전문가이다.
그 자신이 환상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객관적으로 다루는 전문가이다.
기업 활동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의 정말로 중요한 일들은 환상을 통해 실현된다.
기업 또한 사업을 기획하고, 그 속에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갖고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환상은 기업에도 중요하다.
그들은 그것이 이론이고, 현실이라고 믿고 있지만, 그것은 실현되기 이전까지 모두 환상일 뿐이다.
바로 그것을 다루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히 이론과 현실로 포장해서, 지식과 무지로 볼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이다.
기업의 실천을 환상으로 보아야하고, 기업에 대한 투자, 기업에 대한 평가, 기업에 대한 이해를 환상으로 보아야한다.
어떤 금융적 실천이든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필요하다.
때문에 실천을 매개하는 환상은 모든 금융 현상에 중요하다.
이 점에서 환상들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다양한 환상들을 손에 쥐고 비교 분석을 수행하는 철학자는 기업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자신의 환상과 자신이 경쟁하든 협력하든 아니면 그저 공존하든 함께하는 기업들의 환상을 이해하는 데 철학자가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충 이런 얘기를 해야했다.
아마 여기서 왜 철학자가 저런 환상 분석에 탁월할 수 있는지를 실례를 통해서 보여주는 게 필요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믿음들을 매개하는 유비들을 분석하는 일이나, 복잡성과 단순성을 교묘하게 결합하는 기교를 얼마나 철학을 통해서 잘 수행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어야한다.
지금 그렇게 생각하면 뭐하나… 하여간 뒷북이다.
결국 내가 강조해야할 것은 환상이란 모티프였고, 이를 중심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여러 차원에서 분석하는 기법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환상이란 단어를 매개로 철학이 무엇이고 어떤 분석법을 갖고 있고 어떤 실천전략(경쟁우위 전략)을 갖고 있는지를 쭉쭉 뽑아냈어야했다.
평소에 나름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문제의식이었고, 항상 연구해볼 주제로 삼고 있었는데... 이런 기회를 놓쳤다니 진짜 어처구니가 없다.
이건 정말 나를 위한 문제 아니었던가! 생각할수록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 왜 이걸 평소 생각한 대로 얘기하지 못했는가 말이다.
구조화를 그 자리에서 못한 게 한이다.


물론 뒷북을 치는 것이라도 그나마 다행이다.
이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오늘 저녁도 멍때리며 보냈을 것이다.
그러니 발전의 기회라고 할 수 있겠다.
결과와 상관 없이 오늘의 한심함을 곱씹어야할 듯하다.
학자들이 아니라 실무자들을 설득하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무심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