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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아렌트의 강의계획서

어쩌다가 얘기하게 된 것



상상력을 발휘해서 의미 있을 수 있는 관계를 뽑아내는 거라 학문적인 추측이라고 하긴 어렵습니다만, 저 강의계획서를 토대로 아렌트가 하고 싶었던 수업이 무엇인지를 설명하자면 이러합니다.(저 참고문헌 목록이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을 읽기 위해 읽어야할 저작들의 목록 같단 생각이 듭니다.)

일단 강의명이 ‘정치철학’ 강의 따위가 아니라, “정치(학)” 입문인 것 또한 아렌트적이라 할 수 있을 듯합니다. 아렌트는 정치는 부의 분배 따위가 아니라 특유의 활동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logos적인 동물”이라는 규정에서 logos가 이성, 사유 같은 것이 아니라 말하는 능력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이건 하이데거가 먼저 제시한 해석이고, 꽤나 설득력 있는 해석입니다.) 인간이 말하는 존재이고, 그 말하는 능력에 기초한 공동체 형성이 인간의 특유성을 나타낸다고 주장하고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도 언급되듯이 동물들도, 심지어 꿀벌처럼 매우 작고 하등해보이는 동물들도 복잡하고 정교한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그런 공동체와 인간의 공동체가 다르다면 그 차이의 근거는, 인간은 말을 통해서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의식이 아렌트가 그리스 철학에서 발견한 “정치”입니다. 아무 말이나 공동체 형성을 가능케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말로 할 수 있는 활동은 여럿이기 때문이죠.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적 탐구를 위한 말(분석론), 오류 검토를 위한 말(토피카 및 소피스트 논박), 예술을 위한 말(시학)과 구별되는 것으로서 “레토리카”를 다루었고, 레토리카는 단순히 말을 듣기 좋게 혹은 설득력 있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의 공통 토대를 통해 서로를 이해함으로써 설득이 달성되는 기술로 여겨졌습니다.(이는 현대적으로 통용되는 <수사학> 해석입니다.) 아렌트는 그래서 정치체의 종류 등을 다루는 <정치학>이 아니라, 정치를 가능케 하는 언어를 다루는 <레토리카>를 정치 입문의 교재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아렌트 답죠ㅋㅋ 아렌트는 정치란 게 이미 시작되고 나서, 그것들이 다수의 유형으로 분회되는 원리를 다루는 책이 아니라, 애초에 정치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다루는 책을 선정한 것이고, 정치란 것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학생들에게 강의하려고 한 걸 겁니다. 때문에 관습적으로 정치로 여겨지는 것들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정치란 것을 특유의 것으로 구별할 기준을 다룰 때 필요할 만한 책들을 선정했을 거고요.

아렌트가 포콕을 읽었다는 것은 몰랐지만, 아렌트가 포콕을 읽었다면 금방 그 진가를 알아봤을 거라 생각합니다. 포콕은 공화주의 정치사상을 말하면서, 정치가 단순히 제도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어떠한 역량을 계발하고, 그 역량을 상호적인 인정 속에서 의식하여야 정치체가 구성되고 작동할 수 있다고 진단하는데 이게 아렌트의 정치사상과 통하거든요. 포콕은 저런 상호인식을 가능케 하는 것, 그리스적인 “레토리카”로서 “역사”를 주장했고, 아렌트는 포콕의 논문을 자신과 동류의 입장을 역사학작으로 주장하는 문헌으로 인식하고 교재로 쓴 것일 겁니다. 그리스 도시 국가가 아니고서야 결국 가능한 레토리카는 역사뿐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요.(제가 보기에 이게 현실적인 진단이라 그랬을 거라 생각합니다.)

불딩도 당대에 날린 양반인데, 요즘은 좀 묻히고 있죠. 불딩은 사회구조의 작동에서 의식적인 활동이 수행하는 역할 및, 그것의 내용에 의한 구조변동을 다룬 양반이니 아렌트가 쓰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다. 불딩의 저 책은 제가 안 읽어봐서 모르겠는데, 불딩은 개개인들의 사회에 대한 인식 및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다루고, 그것들이 모두에게 동일한 것이 아님에도 상호작용 속에서 어떻게 공통성을 확보하면서 거시적인 규모의 활동을 수행할 수 있게 하는지를 연구했습니다. 아렌트가 언급한 저 책은 저도 읽어보고 싶군요. 사회적 갈등의 작동을 다루는 듯하고, 그때 정치란 게 어떻게 유의미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얘기하는 데 유의미할 듯합니다.

예거랑 스넬은 여러모로 의미 있는데... 일단 예거는 딱히 동의해서 사용하는 게 아닐 겁니다. 예거의 저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서는 고전학에서 전설적인 저작이고, 아마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윤리적으로 좋은 삶을 다루는 부분을 잘 보여주어서 사용하는 것일 겁니다.(<인간의 조건>에서 아렌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으로 설명한 것들은 예거의 저 연구서에 근거한 것 같네요. 저도 이렇게 배워갑니다.) 다만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를 통제 가능한 것으로서, 관조에 복속시키는 것으로서 변형시키려고 했다고 주장하고, 그러한 주장의 이면에 그가 극복하려는 “다른” “정치”가 자신이 말하려는 “정치”라고 주장하는 입장이긴 합니다. 스넬 책도 전설적인 책인데, “자기의식” 및 그것을 통해 수행할 수 있는 활동이 여럿이고, 그것들 사이에서의 투쟁이 그리스에서 중요했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해 읽어보라고 한 걸 거에요. 뭐 예거의 <파이데이아>도 그런 책이긴 한데, 저라도 스넬 책을 추천했을 것 같습니다.(예거 책은 통시적인 서사가 강조되는 책이고, 스넬 책은 다양한 조류들 사이에서의 긴장이 강조되는 책입니다. 사실 예거란 인물 자체가 저 쪽 업계의 “발전론”의 거두라...ㅋㅋ)

튀키디데스의 저 부분은 아마도 “정치”의 올바른 의미를 놓고 갈등하는 부분인 것 같고(아마도 아테네인들이 퓌지스는 강자의 이익을 대변한다고 연설하고 이에 반발하는 전통적인 정치 옹호 연설 부분일 겁니다), 컨퍼드는 당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고대 철학자인데 그의 플라톤 해석이 이데아론과 정치를 연결하는 입장이고 이를 상식적으로 설명하는 입장이니 관조와 실천을 결합을 얘기할 때 쓰려고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을 비교 분석하는 컨퍼드의 책을 쓴 것일 겁니다.

나머지 책들은 제가 잘 모르기도하고...(벌린이야 알지만 뭐 딱히 벌린이 의미 있어 쓴 것일지는 모르겠네요.) 스넬, 예거, 컨퍼드 모두 일종의 “기본서”로 참고시키려고 한 것일 거라 나머지도 특별한 의미는 없을 거에요.(물론 요즘은 저런 기본들을 전제하지 않고 저런 주제를 다뤄서 문제적인 경우가 많지만요.) 저 계획서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특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이 아니라 <수사학>을 정치 입문을 위한 교재로 삼는다는 점일 겁니다. 정치는 특수한 언어활동에 기초하고, 그 속에서 형성될 수 있는 공통의식에 기초한다는 것을,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하고, 동시에 서로 달라질 수 있는 다양성이 있어야한다는 것을 얘기하려고 저런 강의를 계획하는 거겠죠. 뭐 아렌트는 저것들은 기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저 기본에서 다른 얘기로 넘어가고 싶었겠지만, “입문”으로 저 기본만을 소개하고 설득시키려고 했을 거란 얘기입죠ㅋㅋ

하여간 아렌트다운 계획서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거의 비슷한 목록을 사용할 것 같고, 현대 사회학 연구서들을 좀 더 첨가하는 식으로 업데이트만 할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