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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니체를 읽으면서

프로이트의 삶은 프로이트의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실천은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성공하였다.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삶과 실천과 정신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치지는 못했고, 결국 그것을 배신한 것도 사실이다.


한 인간의 삶을, 한 인간의 실천을, 한 인간의 정신이 그 자신의 말과 글로, 그 자신의 이론과 그 자신의 사상과 그 자신의 철학으로 살아 숨쉴 수 있다면!


이것은 어려운 요구이다.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말과 글을, 이론을, 사살을, 철학을 하도록 요구하는 진실은 이 불가능성을 요구한다. 이를 배신하는 것은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 된다.


니체는 이를 성공하였는가? 나는 부정의 답을 말할 수밖에 없다. 니체 또한 실패했다. 하지만 그의 실패는 프로이트의 실패, 마르크스의 실패, 아리스토텔레스의 실패 만큼이나 성공적이다. 실패는 당연한 것이다. 성공은 기이한 것, 믿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실패를 비난하기보다는 실패를 음미할 수 있어야한다. 누군가의 실패를 넘어서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이 끌어안아야할 실패를 선택할 수 있기 위해서.


니체는 어디서 실패하였는가? 자기 확신의 요구에서.
니체의 자기 확신의 요구란 무엇인가? 철학자의 태도.


니체는 끊임 없이 확신을 소리친다.
그는 현명하다.
그는 영리하다.
그는 좋은 책을 쓴다.
하지만 그의 확신들에서 쓰디 쓴 비애가 느껴진다.


철학자에게는 확신이 필요하다.
자신조차 확신하지 못하는 것을 남에게 요구하는 것은 기만이다.
진정성을 위해 철학자는 확신할 필요가 있다.
이는 철학의 조건이다.
과학은 확신하지 않아도, 심지어 확신이 불가능하기에 가능하다.
과학에는 사례가 있고, 현장이 있고, 공고한 이정표가 있다.
하지만 철학자에겐 그것들이 없다.
철학자는 과학자가 아니다. 철학자는 언제나 구경만 할 뿐이다.
과학에 대해 말하며, 과학을 찬양하고, 과학을 비판할지라도, 이는 철학자가 문외한이기에, 당사자가 아니기에, 가능한 것이다.
구경꾼, 관광객, 산책자. 철학의 조건이 철학자가 과학에 대해 떠들 수 있게 만든다.
하지만 그렇기에 철학자는 과학자처럼 살 수 없다.
확신이 없는 곳에서 철학자는 살 수가 없다.
확신이 없을지라도 과학자는 살 수 있다. 그 자신의 과학은 설혹 그 불확실성에서도 진실하며, 의미 있으며, 빛을 낸다.
하지만 철학자는 달처럼 그 빛을 반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확실성을 잃는 순간, 그의 빛은 바란다.


니체는 끊임 없이 자신을 확신시키려 노력했다.
그의 자기 비판, 그의 지적 자서전은 그 노력의 산물이다.
그는 자신의 발전을, 자신의 전개를, 자신의 진보를 말한다.
“그래야만 한다.”
그것이 자신을 거짓말쟁이가 아니게 만들며, 자신의 삶의 조건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게 하니까.
젊은날 그는 루소를 비난했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따위는 철학이 아니다. 그는 결국 진리를 배신했다. 진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겠다고 선언한 그가, 그 누구보다 진리를 쫓았던 그가, 그 누구보다 진실하게 살고 말하며 투쟁했던 그가 진리를 배신했다.
니체는 루소의 배신을 끊임없이 상기한다.
그 자신은 배신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하지만 그의 노력이 오히려 그를 배신하게 만든 것 같다.
니체의 자기 확신에서는 거짓말의 냄새가 난다.
그의 노력이 부질없어 보이며, 안쓰럽게 느껴지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그를 비난하게 만들진 않는다.
루소처럼 되고 싶었던 이가, 루소처럼 되고 싶지 않다고 결심했을 때, 도대체 다른 길이 무엇일 수 있겠는가?
니체에게서 막다른 길을 발견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다른 길을 선택했으면 달라졌을까, 다른 길이 있긴 했을까….
우리는 고민하게 된다.


철학자는 확신에 빌붙어 사는 기생충이다.
하지만 철학의 삶의 조건이 확신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불확실성 속에서의 유희, 단순히 불확실성 속에서 성실한 삶을 쫓는 과학자가 되지 않고서도, 확신과 불확실성 사이에서 즐거움을 쫓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 또한 철학자이다.
우리는 이 진실을 플라톤에게서 발견한다.
그의 대화편, 그의 소크라테스 전기, 그의 철학에서 불확실성과 모호함에서 유출하는 진리와 아름다움을 목격하게 된다.
초기에서 후기까지, 그는 도대체 무엇을 그려냈단 말인가?
그것은 얼핏보면 발전인 것 같다.
아니 다시 보니 처음부터 같은 말을 다르게 말하는 것 같다.
아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는 결국 대화를 포기하고 자기 탐닉에 빠진 것 같다.
아니,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는 계속해서 노력했던 것 같다. 성공과 실패의 모호함 속에서.
대화편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누구인가? 플라톤의 철학은 무엇인가?
우습게도 철학의 기원, 철학의 자궁, 철학의 시작은 확신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의 유희였다.


니체는 이것을 말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그는 그것을 말했다.
니체가 말하는 즐거운 학문, 춤추는 삶, 노래하는 철학자가 저것이었다.
그는 기원의 신화를 경계하며 기원을 믿지 말라고 말했지만, 그가 쫓던 신화는 결국 기원에 있었던 것만 같다.
니체가 쫓던 진실은 플라톤이 쫓던 진실 아니었던가.


니체는 이것을 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는 그것을 말하면서도 그것을 충분히 말하지 못했다.
그가 자신의 삶을 그러한 우연들로, 우발적인 것들이 창출하는 놀라움으로, 유희로 그려냈더라면!
하지만 그것이 정말 가능한 것일 수 있었을까?
19세기의 어두움, 19세기의 절망, 19세기의 고독을 마주하면서.
19세기를 잘 아는 이는 니체가 함구한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즐거움을 말하기 전에 위대함을 말해야만 했던 그의 역설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즐거움을 말했더라면, 그는 그가 그토록 거부하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을 말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인류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에게 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삶아 있는 인간들에게, 자신의 독자 한 명 한 명에게 말을 한다.
그렇기에 그는 즐거움을 말할 수 없다.
그의 독자 한 명 한 명이 짊어지는 삶의 무게를 알기에.


니체는 틀렸던 것일까?
니체는 실패했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어떤 의미에서 성공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오류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진실인지가 중요하다.
그의 말과 글이 지금 우리에게 닿는 것은 그것이 가진 진실함 덕분일 것이다.
그의 실패는 그렇기에 성공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성공이 우리의 성공일 수는 없다.
그의 성공이 그의 실패를 껴안을 이유가 되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선택이다.


한 인간의 삶을, 한 인간의 실천을, 한 인간의 철학을 그리기 위해서는 그래서 전기가 필요하다.
전기는 당연히도 파편적 사실들의 창고가 아니다.
그것은 심층 구조의 변주, 즉 체계여야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심층이 아니다.
변주는 “불과한 것”이 아니다.
심층은 중요치 않다.
그것은 선의 이데아, 혹은 자유, 진리, 사랑이란 유령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중요치 않다. 그것은 보편이며 모두에게 똑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표층, 변주이다.
한 사람의 삶, 한 사람의 실천, 한 인간의 철학이 깃드는 곳은 바로 여기이다.
심층이 심층으로 남지 않는 곳.
변형되고, 왜곡되며, 일그러지는 바로 이곳.
왜상이 진정으로 진실할 수 있고, 진정으로 아름다울 수 있고, 진정으로 우리를 감동시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일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결여와 이질, 고집 덕분이기에.


누군가의 철학을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전기를 기획하는 일과 같다.
니체를 읽는다는 것은 그의 전기를 기획하는 일이다.
그의 이야기를 어떻게 써야할까, 아니, 내가 읽고 있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 물음, 이 불확실성, 확신과 의심의 교차 지점. 이곳이 우리가 철학하는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