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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니체를 읽으면서 프로이트의 삶은 프로이트의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의 실천은 마르크스의 사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성공하였다.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삶과 실천과 정신에 자기 자신을 온전히 바치지는 못했고, 결국 그것을 배신한 것도 사실이다. 한 인간의 삶을, 한 인간의 실천을, 한 인간의 정신이 그 자신의 말과 글로, 그 자신의 이론과 그 자신의 사상과 그 자신의 철학으로 살아 숨쉴 수 있다면! 이것은 어려운 요구이다. 불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말과 글을, 이론을, 사살을, 철학을 하도록 요구하는 진실은 이 불가능성을 요구한다. 이를 배신하는 것은 자신을 배신하는 것이.. 더보기
칸트 관련 뻘얘기 - 종교와 철학? 딱히 목적 있는 글을 쓸 필요는 없을 듯하다. 물론 칸트 관련해서 씨부릴 것이지만 말이다. 논자시 때문에 칸트를 다시보고 있는데, 칸트를 다시 보니 새로운 게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는 흄과 비교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허나 흄과의 비교는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유형적이다. 지금 비교할 종교철학적? 종교적? 그런 문제에 대한 흄의 입장을 칸트는 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뭐 짐작을 했을 수는 있겠지만, 칸트의 흄 독해를 생각해보면 실질적으로 올바른 짐작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일단은 이런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종교란 것은 욕망에 기반한 것이든 뭐든 도덕성을 가능케 하는 몇몇 믿음들을 정당화하는 믿음 체계라고 할 수 있다.(이신론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1) 영혼불멸 2) 도덕적 책임 가능성(자유.. 더보기
최근의 생각들 중층결정 중층결정은 중층인과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 인과는 이중적이다. über는 과잉과 어긋남을 모두 함축할 수 있으며, 우리는 중층인과의 이중성이 중층결정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한다. 중층결정은 고대와 현실의 이중적 결합을 가리킨다. 과거도 고대고, 현재도 고대며, 미래도 고대다. 하지만 현실과 고대는 구별되며, 우리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주술을 실행한다. 미래에 투사할 때 중층인과는 언제나 과소결정이다. 수많은 주술 매체들이 난립하지만, 그것들 모두 한갓 은유에 불과할 뿐 실재가 아니다. 반면 과거의 해석에 있어 중층인과는 언제나 과잉결정이다. 결과는 이미 존재한다. 문제는 그 존재의 배후에 있을 인과의 사슬을 결정하는 행위이다. 우리가 중층인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과 순서의 역전이.. 더보기
anti에서 para로: para플라톤-되기를 위하여 최근 “안티”에 대해서 설명할 일이 많았다. 이런 저런 글을 쓰면서 “안티”가 붙은 것들의 의미를 설명해야 그 개념을 비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티-정복일 수도, 안티-히어로일 수도, 안티-종교개혁일 수도, 안티-그리스도일 수도, 안티-오이디푸스, 안티-나르키소스일 수도 있다. 나는 안티가 반대를 의미하기만 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대응하고, 대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단순히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하는 것을 대신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신은 대체와는 다른 무엇이다. 대체는 원래의 것의 흔적을 남겨둔다. 그것은 대리충족을 가리키기에 여지를 남겨둔다. 그것이 넘침이든 부족이든. 하지만 여기서 내가 가리키고 싶은 대신은 몸뿐만 아니라 영혼마저.. 더보기
단상들 – 니체를 위하여 단어는 중요치 않다. 한 사람의 본성으로부터 백가지 체계가 나올지라도, 이것은 모두 하나의 철학일 수 있다. “인간적인 것”의 정체는 시간으로부터 생겨난 고통이다. 이것은 분명 고통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건강함의 징표이다. “절대적인 고독을 견디지 못했기에 나 자신을 전달할 수 없었다.”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것을 고안해낸 일은 기분전환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사실 숨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도 했다. 16개의 항목. ‘유럽의 니힐리즘’ 단상이 아닌 체계적인 글을 위한 초안. 그렇기에 “하나의 논박서” 큰 철학, 큰 예술, 큰 정치, 큰 건강. 니체는 “크다”를 이곳저곳에 붙인다. 크다는 것, 그것은 뒤meta를 잡는 일과 같다. 어떤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 일은 언제나 그것을 “작게” 나.. 더보기
단상들 - <중단된 식사>를 위하여 여기 검은 상자가 있다. 그 상자에는 출입구가 하나씩 있다. 무엇인가를 넣으면 다른 것이 나온다. 나온 이것을 거꾸로 집어넣으면, 처음 넣었던 것이 다시 나온다. 입력과 산출이 대칭적이다. 그것은 “상호성”의 징표를 갖고 있다. 그것의 나온 것과 들어간 것이 꼭맞는다. 한 구멍에서 다른 구멍으로밖에 나올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두 구멍 모두 출입구라고 불릴 수 있다. 그것은 교환을 매개하는 교환소이다. 우리는 이 검은 상자를 “과학”이라고 부른다. 검은 상자는 블랙박스다. 우리는 그 상자의 봉인을 풀고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불랙박스는 열릴 수 있기에 닫혀 있는 것이다. 검은 상자의 뚜껑을 연다. 그러자 수많은 연결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다. 우리는 그 상자에서 하나의 입구와 하나의 출구만을 볼 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