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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anti에서 para로: para플라톤-되기를 위하여

최근 안티에 대해서 설명할 일이 많았다.

이런 저런 글을 쓰면서 안티가 붙은 것들의 의미를 설명해야 그 개념을 비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티-정복일 수도, 안티-히어로일 수도, 안티-종교개혁일 수도, 안티-그리스도일 수도, 안티-오이디푸스, 안티-나르키소스일 수도 있다.

 

나는 안티가 반대를 의미하기만 하는 것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반대하는 것을 넘어서, 대응하고, 대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은 단순히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하는 것을 대신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대신은 대체와는 다른 무엇이다. 대체는 원래의 것의 흔적을 남겨둔다. 그것은 대리충족을 가리키기에 여지를 남겨둔다. 그것이 넘침이든 부족이든. 하지만 여기서 내가 가리키고 싶은 대신은 몸뿐만 아니라 영혼마저도 강탈한다. 그들은 타자가 아니다. 그것은 타자조차 아니다. 그것은 나의 결여에 불과한 것으로 섬멸되어야하는 비존재에 불과하다. 그것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것의 흔적과 그것이 아닌 것의 흔적이 구별되지 않기에.

 

이런 점에서 안티는 일종의 반사회적 전쟁상태를 암시한다. 그것은 슈미트적인 의미의 정치이다. 적의 섬멸만을 목적으로 한다. 그것이 악이고, 자신이 선임이 입증됨으로써만 자신의 가치가 정해지는 deep play.

 

deep play. 판돈이 많이 걸린 게임. 벤담은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했지만, 기어츠는 온갖 곳에서 이것이 목격된다고 말했다. 인간은 deep play에 판돈을 거는 어리석은 자들이다. 하지만 바로 그 어리석음이 인간이 인간이게 한다. 인간은 사피엔스의 칭호만큼이나 데멘스의 칭호가 잘 어울리는 동물이기도 하다. 인간은 어리석음으로써 인간이 된다. 아니, 인간은 어리석음으로서 인간이 된다.

 

안티의 게임은 판돈이 큰 게임이다. 적과 아군이 갈리고, 존재와 비존재의 게임이 벌어진다. 판돈은 존재 그 자체를 향해있다. 그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 이상이다. 여기서 게임이 끝나면 그들의 존재는 악으로, -존재로, 결여로 남겨진다.

 

안티의 게임은 그렇기에 위험하다. 안티를 말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그들은 분명 홉스적 전쟁상태를 숭상하는 자들일지어니.

 

니체의 안티-그리스도이든, 들뢰즈의 안티-오이디푸스이든, 카스투르의 안티-나르키소스든 안티는 모두 이러한 전쟁상태를 각오하는 투사들의 언어이다. 만약 카스투르의 비판이 맞고, 들뢰즈가 <안티-오이디푸스>에서의 한계를 <천개의 고원>에서 극복했다면, 그것은 안티의 이름을 벗겨내었기 때문이지, 사회 개념에 종속되었기 때문은 아니다. 만약 그것이 정말로 사회 개념에 종속되었기에 한계적이었다면, 그것은 바로 전쟁상태를 각오하게 만드는 사회 개념에 종속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질투한다. 우리의 질투는 야훼의 질투와 다르다. 야훼는 못난 자들이 빛나는 것에 분노를 느끼고 괴롭히는 질투를 갖지만(이는 엄하다는 의미에 가깝다. 오늘날로 따지면 갑질이겠지만) 우리는 빛나는 것을 탈취하고 싶어서 질투하는 존재이다. 우리의 질투는 닮음을 내포한다. 우리는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음으로써 그의 주름을 흉내 내는것이다.(나는 여기서 기어츠의 involution 개념을 내어놓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군가에 대적할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우리의 질투는 대적을 요구한다. 그것은 닮음과 차이를 동시에 인식하게 하는 감성형식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닮음을, 다른 한편으로는 차이를 인식시킨다. 우리는 질투를 통해 사이에 놓인다. 우리는 양쪽에 대적함으로써 다른 존재가 된다. 우리는 질투를 통해 분열적 사유에 들어선다. 우리는 나도 나도 아닌 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

 

중요한 것은 대적의 형식이다. 대적함은 하나가 아니다. 모든 것이 다양하다는 평범한 진리는 여기서도 통용된다. 대적은 하나가 아니고, 우리는 대적할 것인지 대적하지 않은 것인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어떤 대적을 선택할 것인지를 고민해야한다. 우리의 대적은 운명이다. 하지만 떠날 것인지 남을 것인지를 선택함으로써 우리는 영원히 울려퍼질 무사 여신들의 분노의 노래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당파성을 선언할 수밖에 없다. 나또한 대적할 것이다. 오직 안티라는 대적 형식에 안티가 됨으로써.

 

나는 여기서 안티를 안티할 하나의 쓰임을 가져오려고 한다. 바로 “para”라는 대적형식이다. 우리는 이 대적형식을 파라켈수스라는 이름을 통해서 접할 수 있다. 한 기이한 인간의 삶과 그에 대한이야기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켈수스를 넘어서려고 했는가? 어떤 학자들은 그렇기에 그에게서 수수께끼를 발견한다. 켈수스를 넘어서겠다는 작자의 켈수스와의 닮음 속에서 그는 한 인간의 역겨운 이중성을 발견하고 고함을 외친다. “이 작자는 그의 악명이 가진 허구성만큼이나 내용적으로도 허구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새로운 물음을 가져야한다. “그 기이한 인간은 정말로 켈수스를 넘어서고 싶어했던 것일까?” 그리고, “그 기이한 인간에게 넘어섬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켈수스의 이름 앞에 붙을 수 있는 것은 많다. pata-, meta-, anti- 등등. 그는 그 중에서 para-라는 말을 골랐다. 그가 이러한 선택항들 속에서 발견한 para의 넘어섬은 무엇이었을까?

 

pata- 이것은 허구로의 진입을 가리킨다. pata의 넘어섬은 단일한 총체를 넘어서 다양성으로 진입시킨다. 하지만 그렇게 발견된 다양성을 실제적이지 않게, 오직 허구적으로만 향유하게 만든다. pata의 넘어선 현실 속에서 인간은 광인과 구별되지 않는다. pata의 넘어섬은 진실과 허구를 뒤섞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한다. 선택지들은 늘어나지만, 그 선택지들의 선택은 불가지론이라는 독단에 의해 선택된다. , 선택되지 않음이라는 선택만이 강요된다.

 

meta- 이것은 진리로의 진입을 가리킨다. meta의 넘어섬은 눈앞에 보이는 것을 고정하고, 그 배후의 진리를 추적하는 기술이다. 이것은 탐정술의 극치이다. 이 넘어섬 속에서 현실 또한 하나이고, 넘어선 현실 또한 하나이다. 세계의 총체성은 총체성과 총체성의 순환 속에서 총체적으로 완성된다. 그렇기에 시간은 영원하면서도 하나이면서도 반복된다. 시작도 끝도 없지만 그 것은 하나며 단일하며 정형적이다.

 

anti- 이것은 전쟁상태로의 진입을 가리킨다. anti-의 넘어섬은 적의 흔적을 섬멸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서 눈에 보이는 현실은 부정되어야만 한다. 이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여기저기에서 소란스러운 외침이 계속된다. “우리는 깨어나야한다!” 영지주의와 매트릭스는 이렇게 하나 되고, 우리는 현실을 부정하는 넘어섬들이 가진 죽음을 불사한 폭력 앞에서 벌벌 떨게 된다.

 

para- 이것은 이탈을 가리킨다. para의 넘어섬은 배후 세계로의 진입이 아니다. 그것은 현실과 다른 현실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것은 현실 속에서의 현실들을 발견한다. 눈앞의 현실은 하나가 아니다. 이 점에서 메타라는 왕관이 붙은 자들은 고루하다. 눈앞의 현실은 다양하다. 배후의 현실은 그렇기에 바로 이 눈앞의 현실의 다양함을 가리키는 부정의 언어일 뿐이다. 여기서의 부정은 거부보다는 정해지지 않은 선택의 여지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파라의 넘어섬 속에서 자연의 능산성이라는 원형적 사고를 발견할 수 있다. 자연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자연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무엇도 아니다. 자연은 이것이며, 저것이며, 그렇기에 이것이기도 하고 저것이기도 한 무엇이다. 자연은 창조이다.

 

파라켈수스의 기이함은 이렇게 해결된다. 그는 영원한 구원을, 자연 배후의 진리를 쫓지 않았다. 그는 자연 자체를 쫓았다. 그는 여기서 자연의 풍부함과 다양성을 발견했다. 인간은 무엇을 하면 되는가? 파라의 왕관을 쓰고 선택을 하면 된다. 이것도 저것도 고른다. 이 현실과 저 현실을 고른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들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가? 우리의 삶은 서랍이 많다. 그렇기에 공존할 수 있다. 하지만 공존은 척력을 낳기도 한다.

 

para는 옆으로 구른다. 그것은 밀려나가는 무엇이다. 파라켈수스의 천재성은 바로 이 척력을 형상화하는 재주였다. 그는 밀려나감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밀려나가면서 또다시 선택을 한다. 그는 더 많은 것을 고르고 더 많이 밀려나간다. 그의 밀려남은 그의 힘이 아니다. 그는 현실들이라는 타자의 힘을 원료로 삼는다. 그는 para의 이름에 걸맞은 타고난 parasite가 되는 것이다.

 

파라켈수스에게 켈수스는 무엇이었는가? 그는 힘이었다. 자신을 끌어당겼다가 던져버리는 힘의 원천이었다. 그는 켈수스라는 행성 덕분에 스윙바이할 수 있었다. 그는 켈수스 덕분에 표류를 멈추고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의 행성만큼이나 켈수스라는 행성에 감사하였고, 그렇게 그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것은 출발지도 목적지도 아니었기에, 그는 그에게서 굴러 나왔다는 의미에서 para-라는 왕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당당하게 그의 기생충임을 선언한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대적함은 이것이다. 무엇의 전체를 얘기하는 것은 구별불가능자의 동일성을 받아들이는 형이상학적 궤변이다. 대적하는 자들과의 닮음과 차이를 잘 파악해야한다. 섣부르게 차이를 하나로 규정지으면 그들은 그들의 악의 형성을 내재화하게 된다. 악마 사냥은 악마의 과업인 법이니까. 우리는 이렇게 형이상학을 거부하는 이들이 형이상학을 꿰차게 되는 경험적 진리의 선험적 원리를 포착하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pata-의 왕관을 쓴 자들이 어째서 불가지론의 미소 짓는 가면을 쓰고 우는 짐승들이 되는지 이해하게 된다.

 

진정한 불가지론은 형이상학이 아니라 윤리학을 통해서 실천된다. 그것은 모름을 모름으로 남겨두지 않고, 차이들 속에서 표류함으로써 실현된다. 우리는 이 진리를 포착해냄으로써, 제임스 그레이가 <잃어버린 도시 Z>에서 드러내고 싶었던 여행의 한 형태를, 데이비드 봄이 doxaproblem 대신 para의 왕관이 씌어진 paradox라는 이동의 한 형식을 표현한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그레이가 복원reform한 퍼셋의 진술을 여기서 다시 기억하고 싶다. "우리는 녹색 사막이 녹색 사막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음을 깨닫기 위해 여행을 한다."

 

잃어버린 적 없지만 잃어버린 도시라고 불릴 수밖에 없는 그 Z는 현실이라는 녹색 사막을 횡단하게 만든다. 현실은 언제나 paradox. 하지만 그것은 paradox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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