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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단상들 - <중단된 식사>를 위하여

여기 검은 상자가 있다. 그 상자에는 출입구가 하나씩 있다. 무엇인가를 넣으면 다른 것이 나온다. 나온 이것을 거꾸로 집어넣으면, 처음 넣었던 것이 다시 나온다. 입력과 산출이 대칭적이다. 그것은 “상호성”의 징표를 갖고 있다. 그것의 나온 것과 들어간 것이 꼭맞는다. 한 구멍에서 다른 구멍으로밖에 나올 수 없지만, 그래도 그 두 구멍 모두 출입구라고 불릴 수 있다. 그것은 교환을 매개하는 교환소이다. 우리는 이 검은 상자를 “과학”이라고 부른다.

 

검은 상자는 블랙박스다. 우리는 그 상자의 봉인을 풀고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 불랙박스는 열릴 수 있기에 닫혀 있는 것이다. 검은 상자의 뚜껑을 연다. 그러자 수많은 연결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온다. 우리는 그 상자에서 하나의 입구와 하나의 출구만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뚜껑을 열자 그 속에는 수많은 구멍과 수많은 연결통로들로 가득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연결통로는 닫힌 상자의 보이지 않는 “연결통로”와는 전혀 다르다. 뚜껑이 열리게 되자 보이게 된 것들은 입구와 출구가 명확하다. 출입구는 없다. 입구와 출구만이 있다. 그래서 출구에서 나온 것을 다시 출구에 넣을 수 없다. 비대칭적이다. 그것은 교환소가 아니다. 그것은 증여의 관계, 혹은 기생의 관계라고 불린다.

 

증여와 기생은 일방적이다. 이 관계를 일방통행로에 비유하는 것은 2% 부족하다. 이 관계는 도로와 다르게 비어 있지 않고 내용물로 가득 차 있다. 상수도와 하수도처럼. 깨끗한 물이거나 더러운 물로 가득 차 있다. 흐르고 있다. 폭포처럼 단절이 있다. 폭포는 거슬러 올라가길 거부하는 일방적 관계를 표현한다. 그 격차의 위압감을 통해. 시간의 화살처럼. 이 관계는 일방적이다. 순환하지 않는다. 때문에 먹이사슬과는 다르다. 그렇기에 “기생”이다.

 

상자 안은 구멍들로 가득하다. 그곳은 세계의 다공성을 표현하는 공간이다. 그곳은 세계의 다수성plurality을 표현하는 공간이다. 하나의 구멍은 다른 하나의 구멍으로 이어진다. 모든 구멍들은 서로 다른 구멍으로 이어진다. 그 연결들은 모두 다르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한 구멍은 다른 세계를 표현한다; 상이한 꿰뚫음perspective으로. 검은 상자를 열게 됨으로써 우리는 상자 속의 수많은 구멍 속에서 상이한 광경들을, 상이한 인식들을, 상이한 신체들을 편력하게 된다. 그렇다. 우리는 잡다 속에 있게 된다. 편력생활은 한 입으로 두말하기를 요구한다. 두말이 나오는, 아니 여러 말이 나오는 입이라는 기관이야말로 편력생활의 유일한 친구다. 유일한 무기다. 바로 이 친구, 이 무기를 벗삼는 일, 한 구멍에서 여러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 바로 이 특별한 기관을 활용하는 기술을 나는 “철학”이라고 부른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말씀은 소리로부터 비롯되고, 소리는 소음으로부터 비롯된다. 차이의 차이화만이 유의미성을 낳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한다. 태초에 소리가, 아니 소음이 있었다.

 

도시는 소음을 낳는다. 하지만 도시를 낳는 것 또한 소음이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세상의 이치는 기울기와 미끄러짐을 뼈대로 삼고 있다. 기울기와 미끄러짐에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린다. 철학자들은 이 편차에 기생하여 세계를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시작은 미약해도 끝은 창대할 수 있다. 이것이 기생의 이치다.

 

조화가 체계라면, 체계는 시간과 공간 너머에 있게 될 것이다. 시공을 넘어서는 것은 감성을 넘어선다. 감성을 넘어서는 것은 관심의 대상일 수 없다. 체계가 관심 너머라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음으로부터 차이가 비롯된다. 차이들은 관심으로 분기한다. 오직 관심만이 차이의 차이를 낳고 차이의 차이만이 존재를 낳는다. 무관심의 대상은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무관심한 것, 아무래도 상관 없는 것, 차이 없는 것, 무차별적인 것, 그렇기에 아무 것도 아닌 것, 무nothing이다. 조화는 체계일 수 없다. 체계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다. 체계는 체계”이다”. 그것은 없지 않고 “있다”.

 

체계는 조화가 아니다. 그 속에는 소실, 유출, 마모, 실수, 편차, 소음이 가득하다. 그것들은 체계에 항상 잔존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들이 체계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불변하는 자연법칙이다. 이것이 자연법칙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 사실이 아니다. 사실은 주어진 것일 뿐이다. 진짜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어떤 의미에서 자연법칙일 수 있느냐는 것이다.

 

소실, 유출, 마모, 실수, 편차, 소음은 항상 체계 안에 있다. 그것들은 집요하게 체계 안으로 되돌아온다. 천장 위의 쥐가 되돌아오듯이. 그것들은 집요하게 소리를 낸다. 때로는 웅성거림으로, 때로는 아우성으로. 그것들은 집요하다. 그렇기에 이렇게 말해도 진리일 것이다. 그것들은 체계의 일부이다.

 

소실, 유출, 마모, 실수, 편차, 소음이 체계의 일부라고? 그렇다. 오류와 불확실이 인식의 일부이듯, 무의미와 소음이 소통의 일부이듯. 우리는 쥐 또한 집의 일부라고 말하게 될지 모른다. 오히려 우리는 그 기생충들이 집 그 자체인 것 아닌지를 걱정해야할 것이다. 그들이 주인이고, 우리가 기생충이 아닌지를. 쫓겨나갈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다.

 

철학자는 체계를 다룬다. 체계는 조화가 아니라 소실, 유출, 마모, 실수, 편차, 소음이다. 그렇기에 철학은 신학도 논리학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쟁에 속하고, 체계를 다루는 일은 전략에 속한다. 철학자는 전쟁의 이론가이다. 그들은 모루와 망치만을 최고류로 갖는다.

 

전쟁은 일이다. 일은 노동이다. 노동은 고난이다. 일이 잘 풀려가지 않는 것이야말로 일이 잘 풀려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니, 일이 잘 풀려가지 않고 있는 덕분에 일은 잘 풀려간다. 이 진실이 불합리한가? 이것을 불합리로 여기는 것은 꼰대가 미덕의 이름으로 변화하지 않음을 정당화하듯이, 이성의 이름으로 변화하지 않음을 정당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합리와 불합리를 나누는 이성이란 것, 그것은 관조라기보다는 행동이고, 지성이라기보다는 전략이다. 그렇기에 이성은 항상 변화만을 편애한다. 기동전의 정언명령은 여기에서도 통용된다. “멈추지 말 것” 멈추는 순간 패배는 당신을 먹어치운다.

 

근대의 고유성은 청결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근대의 독특함은 더러운 것의 구별에 놓여 있지 않다. 근대의 독특함은 더러운 것을 어디에 둘 것인지의 문제에 놓여있다. 우리가 근대인인적 없는지를 알고 싶다면 다음의 문제를 탐구해보아라. 그 많은 더러운 것은 어디로 가는가? 당신은 근대인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오류와 무질서 유동성, 소음 우연, 실패라는 더러움이 흘러가는 장소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근대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더러운 것이 놓인 곳이 바로 근대니까.

 

생산을 생산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문제를 너무나도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다. 문제를 문제라고 부름으로써 문제라는 문제를 넘어가는 문제를 넘어갈 테니까. 생산은 어디에서 목격되는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체감遞減이라는 자연법칙은 생산에까지 손을 뻗는다는 사실이다. 창조보다는 모방이 남는 장사다. 기생하는 일이 노동하는 일보다 낫다. 기생이 아니라, 노동을, 모방이 아니라 창조를, 재생산이 아니라 생산은 언제 어디서 생겨나는가? 하지만 이것을 잊어선 안 된다. 육하원칙은 “누가”로 시작된다.

 

창조보다는 모방이 남는 장사다. 시간은 오직 새로운 것만을 파괴한다. 새로운 것에는, 특출 난 것에는, 창조에는, 그것의 탄생에서부터 그것들을 부식시키는 그림자가 덧붙는다. 그것들의 새로움을 갉아 먹는 기생충들이 들끓는다. 하지만 기생충들이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창조로부터 창조와는 아무것도 상관없는 것들을 배설해낸다. 더러운 것들을 쏟아 낸다. 소음을 쏟아낸다. 그것들은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 그들이 생산하지 않은 산물을 가지고서, 생산되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쏟아내며. 그들은 진정한 대식가에 진정한 대변가이다.

 

이 잔치를 끝낼 수 있는 것은 제작자일 수 없다. 시간의 이빨은 불변하는 자연법칙이다. 누구도 그 이빨을 피해갈 수 없다. 기생하는 것들이 벌이는 잔치를 중단하는 것은 소음뿐이다. “쿵”하는 소리. “쾅”하는 소리. “똑-딱”하는 소리. 이 소리는 어디서 흘러나오는 것일까? 기생하는 것들은 자신들의 몸을 잘 살펴야할 것이다. 소음을 내는 것은 기생하는 것이니까.

 

남는 장사를 쫓는 일, 그것은 뒤를 잡는 일이다. 시선 뒤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생한다. 뒤를 잡는 일, 그것이야말로 득을 보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기생충을 찾는다. 눈을 밝히고서. 소음이 들리면, 식사를 멈춘다. 소음을 낸 범인을 찾기 위해서. 식사를 멈추는 수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미 뒤를 잡아 기생하는 일, 식사보다도, 나의 뒤를 잡고 있는 놈의 뒤를 잡는 일, 나에게 기생하고 있는 놈에 기생하는 일이 더욱 남는 장사니까. 우리는 식사를 멈추고 입을 다문다. 약간의 소리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 귀를 쫑긋 세우고, 눈을 밝히고, 찬찬히 주변을 살핀다.

 

충족이유. 어떤 이들은 이것을 찾기 위해 온 관념을 다 뒤질 수 있을 것이다. 불로초를 위해서라면 온 세계를 뒤질 수 있듯이. 그러나 충족이유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불로초를 찾을 수 없듯이. 하지만 그것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불로초를 찾을 수 없는 이유와 다르다. 불로초는 세상에 없다. 그렇기에 찾을 수 없다. 충족이유는 찾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충족이유의 부재 때문은 아니다. 찾아진 충족이유는 충족이유일 수 없기 때문이다. 기생하는 것들은 자신을 안 보이는 곳에 숨긴다. 기생충처럼. 그들은 보이지 않는 “안”에 자리 잡는다. 보이지 않는 것, 찾을 수 없는 것, 그것이 기생의 조건이다. 충족이유는 이 조건 안에 자리 잡고 있다. 충족이유는 찾을 수 없음을 조건으로서만 충족이유일 수 있다. 그것은 찾을 수 없음으로써 기생한다. 우리는 이유가 아니라 소음만을 찾을 수 있다. 충족이유는 기생충이다.

 

호의와 환대는 적개를 불러일으킨다. ”배은망덕하구나!” 후회해도 늦었다. 이 또한 불변하는 자연법칙이니까. 호의와 환대는 주는 것이기에 받는 것이고, 주인 노릇함으로써 기생하는 것이다. 베푸는 자는 항상 무엇인가를 준다. 하지만 그것은 독이 발린 빵이다. 그는 독이 발린 빵을 준다. 독의 위험을 감수하는 생명수당은 주지 않으면서.

 

우리가 반복을 그칠 때 합의가 성사된다. 바로 이 때 우리는 감사를 표한다. 감사는 반복이 아니라 중단을 위한 것이다.

 

오늘날에는 너무 많이 합의하거나 너무 적게 합의한다. 무한히 많게 합의하거나 전혀 합의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살에 닿는다. 모든 것은 닿을 수 없지만 볼 수는 있는 것이다. 모든 일은 이미 합의가 이루어져있다. 모든 일은 영원히 협상 중이다. 모든 것에는 정가가 있다. 정가에 사면 바보다. 모든 것은 일회적 부동산이다. 모든 것은 항구적 동산이다. 모든 것은 순간적이다. 모든 것은 영원하다. 검은 무한과 하얀 무한 둘 중 하나만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자본주의는 스펙터클을 창출하는 만화경이거나 맹인의 더듬거림이다.

 

우리는 흰 것과 검은 것 사이에서 사물들을 창조해야한다. 적당한 협상을 성사시켜야 한다. 협상을 위해 철학을 배워야한다. 철학은 전략을 가르쳐준다. 무엇을 모루와 망치로 삼을 수 있는지 연습문제를 통해 배운다. 물론 실전은 다르다. 하지만 다르지만은 않다. 문자로 구별되던 것은 감각으로 구별된다. 보는 것과 만지는 것이 하나가 되기 시작한다. 거리감과 공간감이 정물화를 그려낸다. 우리는 샤르댕이된다. 우리는 다빈치가 된다. 우리는 플라톤이 된다. 그래서 나는 샤르댕이고, 나는 다빈치이며, 나는 플라톤이다. 우리는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디오니소스다, 니체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눈과 몸 덕분에. 고정된 것과 움직이는 것을 덕분에.

 

소음이 찾아온다. 식사는 중단된다. 모두가 침묵한다. 침묵을 깨며 말한다. "중단된 식사를 위하여" 감사를 올리며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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