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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칸트 관련 뻘얘기 - 종교와 철학?

딱히 목적 있는 글을 쓸 필요는 없을 듯하다.

물론 칸트 관련해서 씨부릴 것이지만 말이다.

 

논자시 때문에 칸트를 다시보고 있는데, 칸트를 다시 보니 새로운 게 보인다.

어떤 의미에서는 흄과 비교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허나 흄과의 비교는 역사적이라기보다는 유형적이다.

지금 비교할 종교철학적? 종교적? 그런 문제에 대한 흄의 입장을 칸트는 몰랐을 것이기 때문이다.(뭐 짐작을 했을 수는 있겠지만, 칸트의 흄 독해를 생각해보면 실질적으로 올바른 짐작을 했을 것 같지는 않다)

 

 

일단은 이런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종교란 것은 욕망에 기반한 것이든 뭐든 도덕성을 가능케 하는 몇몇 믿음들을 정당화하는 믿음 체계라고 할 수 있다.(이신론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1) 영혼불멸

2) 도덕적 책임 가능성(자유가 붙을 수도 있고, 인과응보가 붙을 수도 있다)

3) 이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신의 실존

 

흄은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 심드렁한 입장이지만, 본인도 이러한 믿음들이 무너지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탐구>11장에서 진술되는 것처럼, 그러한 믿음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도덕적 실천을 추동할 수 있게 하는 믿음이기도 하며, 그러한 믿음 없이 수행되지 않을 도덕적 행위들도 있단 것이다.

다만 이러한 믿음을 허용할지 말지는 그저 실천적 이익만으로 결정내릴 수 없다.

그 자체로 불합리한 믿음이라면 애초에 믿어지기 어렵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뭐 간단히 말하자면 이러하다. 지금이야 멍청한 사람들이 많아 믿고 있는 것이고, 똑똑한 사람들이 등장하면 믿어지지 않을 것이란 소리가 되겠다.

그런데 저런 믿음이 계몽으로 인해 저해되고, 저런 믿음이 저해될 경우 도덕이 몰락한다면, 계몽은 추구될 합리적 근거가 떨어질 수 있는 활동이 될 것이다.

나름 이런 모순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인데, 이러한 모순은 논리적인 것이라기보다는 현실적인 긴장 요소다.

흄은 이것에 대해서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는 합리적인 귀결만을 확인한다.

이성적으로, 사례를 판별하지 않고, 사변철학을 통해서 도출될 귀결은 계몽이 도덕을 저해하냐 따위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저 도출 가능한 것은, 적어도 저런 믿음을 계시 따위로, 기적 따위로, 아무런 근거 없이 걍 믿으라는 식으로 강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연구를 통해서 저런 믿음이 합당해질 근거를 쫓는 것은 아직 열려 있는 문제고(다만 여기서 흄은 유통되는 설계논변은 대체로 구리다는 입장이긴 하다), 이 문제를 한 가지 가능한 방식으로 결정한 저작은 <종교의 자연사>가 될 것이다.

뭐 저런 작업에서 흄은 그저 몇몇 사례들 가지고 이렇냐 저렇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고, 비교 작업을 통해서 무엇이 더 효율적이고, 합당한 것인지, 일종의 발전도를 가지고 종교를 분석했다고 보면 되겠다.

뭐 이렇게 보면 종교학의 본래 표현 중 하나는 비교종교학이며, 종교학의 아버지 중 한 사람으로 흄이 꼽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란 소리가 되겠다.

 

흄 얘기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고 있다.

그러니 칸트를 여기에 왜 얹기 시작하는지를 얘기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사실 흄에서 얘기를 멈춰도 되는데, 여기서 문제의식을 약간 변경하면, 훨 더 재미난 얘기가 나오니까 걍 해보는 소리다.

 

칸트는 저런 믿음들 자체가 유통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저런 믿음을 이성적이지 않은 형태로도 갖고 있고, 그런 믿음을 갖고 있으면, 본인의 도덕성에 대해 잘못 이해하기는 하여도, 적어도 도덕적 행위가 불가능하다는 믿음 따위를 갖진 않을 테니 말이다.

 

외려 저런 믿음을 합리화하는 방식들 중에 뻘짓이 있고, 그게 저런 믿음들을 훼손하고, 도덕성에 대한 불신을 초래한다는 것이 칸트의 진단이다.

 

그럼 그런 뻘짓이 무엇인가?

독단적인 형이상학-신학이다.

물론 이것은 독단성 자체로 병크인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중적 독단성이다.

 

모든 지식은 어떤 의미에서 독단적이다.

지식이 없는 이들에게 폭력을 가하기 때문이다.

무지한 사람들은 앎이 있는 사람들에게 복종해야한다는, 그런 폭력성을 지식은 갖고 있다.

이런 폭력성 자체를 칸트는 부정하진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폭력성이 지식 성립 자체에도 성립하면, 해당 지식은 붕괴한다는 게 칸트의 진단이다.

뭔 소리냐하면 이런 것이다.

 

아까 저런 세 믿음을 보장해주는 믿음 질서(종교적 교리 같은 것) A가 있다.

그런데 왜 A가 올바르냐에 대해 누군가가 물을 수 있다.

거기에 대한 답이 븅신이면 그건 문제란 것이다.

물론 이런 대답 가능 유무는 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는 올바른 지식을 가지고서도 븅신 같은 대답을 할 수 있다.

수준 낮은 기하학자들은 짓궂은 사람에게 골머리를 썩을 수 있으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원리적인 것이다.

정말로 합당한 비판에 해당 믿음이 보존되는지가 원리적으로 보장되느냐의 문제이다.

이게 보장되지 않으면 지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합당한 추론을 따르는 이들이 하나의 방법을 공유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이것은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B판 서문 도입부에서 선언된다. 학문이냐 아니냐는 방법이 원리적으로 공유가능하고, 해당 방법으로 공통적 목표를 설정하고 실리적인 성취를 반복 재생산할 수 있냐에 달려 있다)

 

이게 아까의 폭력과 다를 게 뭐냐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런 차이가 있다.

앎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기본적인 욕망에 따라 믿음을 갖는다.

하지만 해당 믿음이 구체화될 때는 사회적 규제를 따른다.

사후세계를 믿는 것 자체는 자연소질의 영향이지만(쉽게 말해 본능적인, 꽤나 일반적인 욕망이란 소리다. 사실 이런 욕망이 일반적이라고 하는 것은 선험적인 근거에 의한 게 아니라, 경험적 근거라고 할 수 있겠다. 칸트가 자기 자신을 멜랑콜리형 인간으로 분류한 것이나, 당대 삶의 끔찍함을 생각해보면 뭐 그런 믿음이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말이다), 어떤 사후세계를 믿느냐는 사회적인, 그러니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맥락에 따르는 법이다.

그런데 저런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 혼란 그 자체면?

그러면 믿음이 퇴행하는 것이다.

역사적 문화적 맥락이 공고하고, 꽤나 효율적인 믿음 체계를 제공할 때 믿음을 가질 사람이 믿음을 갖지 않게 되는 일, 불합리만 믿음 체계(공리적으로 생각했을 때 인 믿음 체계...)를 믿는 사람이 늘어나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맥락은 자기가 똑똑하다는 사람들에 달려 있는 법이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그런 구체적인 믿음을 스스로 판단 내리지 않는다. 대체로 남들이 믿으면 믿고, 믿었을 때 나쁠 게 없으면 그 믿음을 유지한다.

문제는 자기가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스스로가 합당하다고 믿을 근거가 없으면 믿지 않고, 이에 조롱을 하는 둥 사람들의 불신을 자극한다.

그러니 이런 놈들의 뚝배기를 깨야하는데, 이런 놈들의 뚝배기를 깰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합당한 논증을 제시하는 일이 되겠다.

그런데 합당한 논증의 끝이 학문이 아니었던가?

그러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학문이 설립되지 않은 영역은 공적인 신뢰가 불가능하다.

지들끼리도 서로 헐뜯고 싸우는데, 남들이 볼 때 그게 어케 합당하고 질서 있는 분야가 되겠나.

그러니 문제가 생기는 거다.

사람들은 학자라고 행세하는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들에 불신하고, 되는대로 믿게 된다.

그러면 혼란이 커지고, 불합리한 믿음이 커지고, 불신이 커진다.

 

칸트가 저런 불신, 무신앙 문제, 리베르땅 같은 놈들(방탕아)이 느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드는 (자기가 진리를 알고 있다고 뻐팅기면서 스스로가 똑똑하다고 자부하는) 멍청이들 때문이라고 욕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해결책은 역시나 비판이다.

본인이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입증 책임을 지는 주장에 기초한 철학이다.

 

이게 흄과 어케 다르냐면 이런 것이다.

 

흄에게 있어 철학은 소수의 것만은 아니다.

흄은 본인의 독자를 한편으로는 좀 유별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이 꽤나 보편적인 듯 말한다.

하지만 사실 저런 게 정확히 어케 구조화되는지는 중요한 문제이다.

유별난 사람들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꽤나 중요한 문제니 말이다.

이는 괜히 자신의 독자를 넓게 잡아서 느슨한 소리만 하게 되는 경우와, 자신의 독자를 좁게 잡아서 정말 도움 안 될 세밀한 소리만 하게 되는 경우로 갈리게 만드는 문제이니 실천적으로도 꽤나 중요하다.(나는 언제나 이 양극단을 어떻게 피해야하는가를 고민한다. 뭐 좋은 해결책은 찾지 못했지만 말이다. 적어도 학자들만을 설득하는 글은 쓰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그들은 설득될 존재가 아니니 설득시킬 이유가 없다)

 

영국이야 교양측이 꽤나 두터웠고, 독자 수준을 좀 높이 잡아도 될 나라였지만, 독일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니 칸트에게 이 문제는 더 절실히 느껴졌을 것이다.

게다가 독일에서 그래도 세밀하게 탐구를 진행하자는 볼프 덕에 세밀한 철학 연구가 터를 잡은 줄 알았는데, 그걸 뿌리 뽑으려는 정신병자 같은 이상한 놈들(천재적 정신을 외치는 아는 거 없는 븅신들)이 갑자기 늘어나서 그나마 좋은 것도 망치려고 드니 더욱 이 문제를 의식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방금 얘기한 저런 정신병자들의 출현은 칸트 본인이 하는 얘기다. 물론 칸트는 좀 더 얌전히 얘기하고, 저런 유행은 일시적인 현상에 불과하니 걱정할 것 없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저건 문제화가 되면 더 문제니 무시가 최고의 답일 테니...)

암튼, 저런 것을 의식하고 있으니, 칸트가 학자들을 대상으로만 <순수이성비판>을 쓰고 있는 것임을 꽤나 당당하게 천명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데카르트나 흄은 칸트와 다르다.

칸트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설득해야할 대상은 일반 교양인이 아니라 학자라고 확신했고, 일단 얘들이 제대로, 실리 있는 토론을 해야 교양층이 형성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뭐 사실 이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문제 비슷하다. 학자를 설득하는 것보다 걍 교양인을 꿈꾸는 평범한 상식인을 설득하는 게 쉬울 뿐만 아니라 규제력도 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뭐 근데 이게 칸트의 판단이 틀렸다고는 할 수 없는 게, 칸트의 언어가 사실상 학문적 철학을 형성하게 만들었고, 물리학 같은 분과를 성립하는데 직접적으로 활용되었고, 대체로 특정 학과의 성립은 칸트 언어와 관련 있는 것으로 여겨졌으니, 칸트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다.(칸트를 한번도 읽지 않은 엘리아데가 신칸트주의자 중 한 명으로 분류되는 것은, 종교학의 자율성을 주장했기 때문이란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특정 학문의 자율성을 주장할 수 있는 꽤나 합당한 언어는 칸트주의 언어 말고는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뭐 요즘은 그런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이 없어서 문제지만...)

다만 칸트와 다른 방향으로 실천한 데카르트나 흄도 성공적이라면 성공적이었고, 다윈의 경우 칸트 만큼이나 학문 언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고, 그의 전략은 교양층을 설득하여 븅신 같은 학자들을 규제하는 전략이었단 것을 생각하면 이쪽도 좋은 전략이다.

뭐 전략 자체에 진리는 없고, 맥락과 상황과 능력에 맞게 이를 운용하는 것이 전략의 진리이니 당연한 소리가 되겠다.(군사적 전략은 언제나 모루와 망치 전략이었다. 그럼 전략적 우위는? 당근 상황에 잘 맞게,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는 방식으로 모루와 망치를 실행하는 게 전략적 우위가 된다)

 

 

뭐 갠적으로 이 점에서 난 칸트보다 흄을 선호하는 듯하다.

장르적으로 생각할 때,

데카르트의 meditation

로크의 essay

흄의 enquiry

칸트의 critique

헤겔의 phenomenology

프루스트의 research

니체의 genealogy

비트겐슈타인의 investigation(다만 이것은 untersuchung의 번역어라 11 대응 번역어는 아니다)

이 중에서 나에게 젤 맞는 스타일은 enquiry인 듯하다.

뭐 갠적으로 흄 철학 자체는 극혐하는 편이지만(난 좀 광기 들린 인물이 좋다. 흄과 스미스 같은 놈들은 개극혐...)

뭐가 되었든 글쓰기의 모범으론 흄이 최고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흄 스타일로 칸트 논증을 변환시키는 게 훨 더 보기좋고 이해하기 좋단 것을 잘 알기도 하고...

하여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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