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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단상들 – 니체를 위하여

단어는 중요치 않다. 한 사람의 본성으로부터 백가지 체계가 나올지라도, 이것은 모두 하나의 철학일 수 있다.

 

“인간적인 것”의 정체는 시간으로부터 생겨난 고통이다. 이것은 분명 고통이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건강함의 징표이다.

 

“절대적인 고독을 견디지 못했기에 나 자신을 전달할 수 없었다.”

 

차라투스트라와 같은 것을 고안해낸 일은 기분전환을 위한 것이기도 하였지만, 그것은 사실 숨기 위해 고안된 것이기도 했다.

 

16개의 항목. ‘유럽의 니힐리즘’ 단상이 아닌 체계적인 글을 위한 초안. 그렇기에 “하나의 논박서”

 

큰 철학, 큰 예술, 큰 정치, 큰 건강. 니체는 “크다”를 이곳저곳에 붙인다. 크다는 것, 그것은 뒤meta를 잡는 일과 같다. 어떤 것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는 일은 언제나 그것을 “작게” 나는 “크게” 만든다. 아이들은 멀리 떨어진 인간들을 “작은 인간들”이라고 부른다. 마치 그것들을 손에 쥘 수 있는 것처럼. 아이들은 그들을 손에 쥘 수 없었지만, 큰 인간들은 그들을 손에 쥘 수 있다. 큰 인간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리두기이다. 말리서 봐야 작게 보인다. 거리의 파토스는 이렇게 등장한다.

 

뒤를 잡는 일은 언제나 승리를 가져온다. 큰 정치를 위해서는 뒤를 잡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메타에 대항할 안티 메타가 필요하다. META. Most Effective Tactic Available. 가용할 수 있는 메타의 수가 크고 작음을 결정한다. 많은 것을 쥔 자만이 승리할 수 있다.

 

병을 다루는 일, 건강을 유지하는 법을 배우는 일, 이것이 “현명”해진다는 말의 의미이다.

 

자유는 그 자체로를 목적으로 한다. 자유는 계속 뒤를 잡는다. 손아귀에 넣는다. 망각한다. 그럼으로써 자유를 이룬다. 기억과 망각을 재배치하면서, 잊을 것은 잊고 기억할 것은 새롭게 기억함으로써, 자유는 오직 자신의 힘만을 드러낸다. 이 재배치들, 이 변화들, 이 변환들, 이 “생성”들은 무작위의 산물이 아니며, “자유의 고양”이라고 명명될만한 질적 도약을 함축하고 있다. 이 생성은 임의성을 뜻하지 않는다. 자유는 자기 자신이 됨으로써 순환하지 않고 증대된다. 증대되기에 우리는 그것을 “힘”이라고 부른다. 이 힘은 보는 힘이다. 보는 눈을 다루는 힘이다. 복잡함과 단순함, 산만함과 몰입, 운동과 정지 사이에서 그는 수를 놓는다. 손바닥에 놓고 상대 수를 앞지르면서, 그는 상대에게 “신의 한 수”로 보일 수를 아무렇지 않게 힘들이지 않고 갖다 놓는다. 그렇기에 보는 눈은 힘이다.

 

적을 만들어야한다. 나의 안식처이자 나의 비교항이 될 그 이중적 존재를. 敵과 籍은 항상 상호적인 법이다. 그러나 그것은 주어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발견되고, 창조되어야만 한다. 이는 꾸며내는 것과는 다른 제작이다. 철학자는 어항을 기억해두고 물고기를 포획할 정도의 현명함을 가질 필요가 있다. 주의하라. 한발자국이라도 잘못 딛는 순간, 모두가 박장대소를 하며 위조자로 몰아갈 테니.

 

철학은 강요로부터 비롯된다. 위기는 철학을 강요한다. 하지만 철학함이 영원히 강요의 결과물인 것은 아니다. 철학자들은 강요된 것에 올라탈 수 있는 뛰어난 기마궁사이다. 그렇기에 뛰어난 철학자들은 강요하는 일에 있어 탁월한 존재이기도 하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이름이 달린 진리를 강요했고, 바울은 예수의 이름이 달린 진리를 강요했다. 하지만 이 강요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듣는 이와 말하는 이 모두 진실한 덕분이다.

 

큰 철학은 작은 건강들과 작은 철학들을 손에 쥐고 있다. 수많은 작은 병들은 고유한 작은 죽음을 반영하고 있다. 작은 철학은 바로 그 작은 죽음들을 치료하는 작은 건강이다. 큰 철학은 이것들 모두를 자기 손에 쥐고 있다. 그렇기에 그것은 큰 건강을 품는 “보편의학”이다. 보편의학이 만능일 수 있는 것은 만병통치약을 발견해서가 아니라, 세상의 병만큼 많은 약을 갖고 있는 덕분이다.

 

보편의학의 이념을 꿈꾼 이들은 변용의 대가들이었다. 그들은 금이 아니라 건강을 쫓는 의사들이기도 했다. 철학자들은 삶을 문제로 변용하고, 문제들이 가져오는 열병passion을 동력으로 하는 기관을 제작해낸다. 이는 열린계에 속하기에 “영구기관”의 꿈도 헛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para-의 이름을 가진 것들, 옆으로 구르는 것들을 낳는 하나의 어미를 찾을 수 있다.

 

para-celsus, para-bole, para-praxia, para-digma 그리고 para-site

 

거리가 상대적이라고? 뱁새가 봉황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봉황이 뱁새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러한 주장을 일삼는 이들은 너무나 인간적이지 못해 무능해진 자들이다. 너무나 인간적인 루나족들은 신들의 “무능함”을 올바르게도 “능력”이라고 이해한다. 루나족들이 구별해내는 무수히 많은 종류의 숲의 새들을 신들은 구별하지 못한다. 신들에게 있어서 그 다양한 것들은 그저 “닭”에 불과하다. 숲의 새들을 신들이 구별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맹금 또한 가금에 불과한 존재이기 때문이지, 그들의 인식적 무능에 따른 것이 아니다. 봉황은 뱁새를 뱁새보다 더욱 빠삭히 알고 있기에 뱁새를 이해할 수 없다. “개들이 멍청해서 푸마에게 당했다”고 말하는 루나족의 말은 이렇게 이해될 수 있다. 신들은 모든 것을 포괄하지만 열등한 자들의 무능까지 포괄하지는 않는다.

 

인류학자들, 역사학자들은 맥락의 대가이다. “이것은 어디서나 통한다!” 그들은 이러한 말을 듣고선 웃음을 참지 못한다. 균열을 찾아내고, 사기꾼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이러한 싸움에서 그들보다 능숙한 이는 없다. 하지만 철학자들은 이들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작게 만든다. 그렇기에 그들이 한 걸음 걸으면 세상 모든 것들이 변한다. 그들은 아주 멀리서만 볼 수 있는 큰 건물, 인간이 지은 것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산맥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 인류학자들, 역사학자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들 또한 멀리서 이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으니까. 멀리서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을 만큼 크니까. 멀리서 보면 빈틈을 찾을 수 없다. 균열은 돋보기와 현미경을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다. 그들은 눈에 맞지 않는 안경으로 전투에 임하게 되는 것이다. 철학자들 또한 그들 만큼 베테랑인 것이다. 철학자들은 지는 싸움은 하지 않는다.

 

철학의 역사를 섭생법의 역사로 다시 쓰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다. 피타고라스와 브라흐마의 섭생법은 철학과 종교의 탄생을 알리는 징표이다. 먹고 싸는 일만큼 건강에 중요한 일은 없다. 우리가 철학자들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단 한 가지는, 후식으로 나오는 말과 글이라는 음식물을 먹고 싸는 일에도 주목하는 일이다.

 

고통과 건강은 하나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능한자들은 무감각자들이다. 찌르면 말하는 것이 지각知覺의 오랜 쓰임이다. 돌도 두드리면 소리가 난다. 두드려도 소리가 없는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지각이 없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존재도 없다.

 

의사는 병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들의 고통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들의 이해는 그들의 무능을 포괄하지 않는다. 의사는 그들의 열병을 동력원으로 삼는 엔진을 설계하기 위해 그것들을 이해할 뿐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선 그들 또한 그 열병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죽음에 이르는 병, 죽음이라는 병, 죽음의 병, 이 병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감각증 환자는 의사가 될 수 없다. 그들은 병에 걸려 있지만, 반응하지 않는 존재이기에, 그들은 지각도 존재도 없다. 그것은 무능의 극단이다. 악보다도 더욱 존재하지 않는 비존재의 극단이다.

 

쾌락주의자들과 욕망주의자들이 세상에 가득해보이지만, 사실 그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쾌락주의자들은 모든 것이 쾌락에 의해 움직여진다고 말하지만, 그들은 당장 고통과 함께 하는 쾌락의 이상야릇한 경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그들은 마조히스트를 못 본척할 뿐이다. 이들은 무능아이다. 욕망주의자들은 쾌락은 배제하고 욕망에 의해서 모든 것들이 움직여진다고 말한다. 이점에서 그들은 쾌락주의자들보다야 낫다. 하지만 욕망의 대상들이 만들어내는 스펙타클들, 그 변천들에 대해서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금기와 멍청한 일을 구별하지 못한다. 세상 그 어느 집단에서도 “불에 손을 대지 말 것”을 금기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멍청한 일에 불과할 뿐이다. 쾌락주의자들은 금기와 멍청한 일도 구별하지 못하는 멍청한 이들이기에, 이들에게 어울리는 말은 ‘저능아’다. 무능아와 저능아를 한 데 모아 보았자, 그 능력은 참으로도 미약하다. 세상이 그들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일지라도,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철학자들이 그들보다 더 많이 존재한다. 양적 논리는 질적 논리와 함께 가는 법이다.

 

나에게 달린 일과 나에게 달리지 않은 일을 구별하는 것. 이것은 철학함 그 자체와도 같다. 이러한 경구를 ‘스토아’의 이름으로밖에 말하지 못하는 자들은, 단 하나의 불량품을 보고 공정을 문제 삼는 멍청이와 같다. 그들은 안타깝게도 스토아의 이름밖에 듣지 못했기에, 노예가 되는 법을 자유인이 되는 법으로 착각하며 산다. 복종하는 법만을 배우는 노예들은 가축과 다르지 않다. 도살장에서조차 꼬리를 흔드는 개새끼와도 같다. 그들은 죽음 앞에서도 꼬리를 흔드는 타고난 노예들이다.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 자식은 부모와 닮음으로써 부모의 대리물이 된다. 그렇기에 자식은 부모의 부재를 나타내는 기호sign이다. 부모는 자식을 낳고, 이 자식이 또 자식을 낳는다. 그렇게 종이 이어진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의 기호학은 이렇게 일반 언어학이 된다. 현세대는 조상들의 부재를 나타내는 기호이자, 후손들의 실재를 나타내는 흔적이다. 그렇기에 현세대의 인물들은 닮은 것도 닮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부재와 흔적에 불과하다. 깨진 도자기의 파편처럼 그들은 조립됨으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진짜 자식은 그렇기에 부모를 닮지 않는다. 진짜로 존재하는 인물들은 부모를 가장 적게 담고, 시원적 조상, 최후의 후손을 가장 많이 닮는다. 부모를 닮지 않은 아이들에 주목한 사람들은 아동학자 따위가 아니라 신을 모시는 사제인 것이다. 그들은 그들에게서 모세, 키루스 대왕, 리쿠르고스, 솔론,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본다.

 

무당의 탁월함은 해석하는 힘에서 비롯되지 다른 어떤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은 그런 점에서 참으로도 진실이다. 진정한 사도는 혈통 좋은 야고보가 아니라 근본 없는 바울이었다는 것을 기억하라.

 

차가운 침묵보다는 뜨거운 욕설이 득이 된다. 뜨거운 것들은 불쏘시개라도 된다. 예의를 아는 자는 그렇기에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 말 없는 미소는 노예들에게나 할 예의차림이다.

 

amor fati. 정신은 운명에 대한 믿음을 강요한다. 그것은 믿음이라기보다 앎이다. 그것은 선택의 여지없이 강요된다. 중요한 것은 이를 겪어내는passion 일이다. 초연한 마조히스트의 숭고함은 그런 점에서 겪이 떨어진다. 그것은 자신의 눈을 뽑아내고 방랑하는 발이 부은 오이디푸스의 길이다. 우리는 “본 자” 오이디푸스를 더 사랑해야한다. 포유류를 기다리는 진딧물처럼, 긴 수면으로 운명을 단축하라. 18년의 침묵을 깨고 진딧물은 활강하고 착지하여 그들의 작전을 성공시킨다. 그들은 전사하지만, 남는 장사를 한다. 아모르 파티는 뒷머리카락이 없는 그 변태새끼를 후려잡는 기민함을 가리킨다. 그들은 언제나 적기kairos를 포착해낸다. 그렇기에 아모르 파티의 미학은 동면 속에서도 적기를 놓치지 않을 수 있는 단순함의 미학일 수밖에 없다. 너무 움직이지마라. 그렇다면 너는 18년의 침묵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움직이지 말라는 소리는 아니다. 남들보다 더 움직여야한다.

 

보이는 만큼만 숨길 줄 아는 이들만이 진정성이 있는 자들이다. 비가시성에 목숨을 거는 이들은 보여주는 것은 쥐뿔만큼도 없으면서 많은 것을 숨긴 척한다. 철학자는, 극도의 진정성 속에서만 살 수 있는 이 이상한 생물체는 보여주는 것들만, 보여주는 만큼만 숨긴다. 이것이 가시적인 것들과 비가시적인 것들을 조화시키는 유일한 화성 법칙이다.

 

철학자들은 보여주는 것들을 보여주는 만큼 숨긴다. 그들이 보여주는 것들을 숨기는 것은 그것이 그들의 은신처이기 때문이다. 은신처는 드러나지 않음과 동시에, 방문객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신봉하는 이들은 이 진실을 모르고 있다. 그들은 광정을 보이지 않는 곳이라고 착각하고선 근친상간을 일삼는다. 그들은 붕어빵 기계다. 그들은 부모를 닮은 아이들만 낳는다. 그들은 그렇기에 가족력에 시달리며 자연스럽게 멸종한다. 혈우병에 시달리겠지만 그 또한 그들의 죽음과 함께 끝날 것이다. 그러니 너무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정신은 신진대사의 일종이다. 신진대사는 정신이다. 신진대사의 속도는 정신에 달린 발이 움직이는 박자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이렇게 옆으로 구르는 것과 뒤를 잡는 일이 일치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다. parabolism에서 metabolism으로.

 

저자가 위대한 것이 아니라 독자가 위대한 것이다. 일단 책이 완성되고 나면 저자 또한 한 명의 독자에 불과하다. 처음에는 조금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위대한 독자가 등장하면 저자는 이제 저 아래로, 비루한 독자로 추락하고 만다. 인간을 창조한 신이 그렇게 당했듯이.

 

저자가 독자에 불과하다고? 그렇다. 저자는 독자에 불과하다.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완성된 책 그 이상이기에 그렇다. 당신이 그 섬유 찌꺼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저자를 찬양하지 않는가? 그의 영향에 의해 불안에 빠지지 않는가? 우리가 저자에게 하는 찬양은 그 비루한 허물, 그 비루한 똥 만드는 기계를 향한 것이 아니다. 신들은 오직 증기와 연기만을 취한다. 재를 취하는 것은 똥을 취하는 것과 같다. 물론 똥에서 영양분을 취하는 존재가 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단지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이 비참할 뿐이다.

 

영향의 문제. 영향이라는 문제. 영향에의 불안. 강한 이들은 방방 뛰는 건달들도 적당히 잘 이용해먹는다. 휘둘리지 않는다면, 영향에 불안 따위를 느낄 이유가 없다. 스윙 바이와 추락은 비슷해보이지만, 전혀 다르다. 추락하는 자들만이 영향에 불안을 느낀다.

 

철학자는 자연의 힘 위에 걸터앉는다. 추락 속에서 반등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성공의 열쇠일 수 있다. 곤鯀과 우禹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었다. “위대함”의 징표는 걸터앉고 방향을 지시하는 것이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 세상의 이치가 기울기와 미끄러짐을 뼈대로 삼고 있기에, 철학자는 위대할 수 있다.

 

실현 가능한 것은, 실현 가능해져서 실현 가능해진다. 하지만 모든 실현 가능한 것은, 실현 가능해지기 전에 예언된다. 발명과 발견을 이끄는 것은 광기이기에, 광기를 가능케 하는 거친 지류는 발명과 발견 이전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발명과 발견은 광기를 나타내는 기호이고, 광기는 거친 지류가 존재함을 가리키는 흔적이다. 그렇기에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는 것만 같은 □□철학, ○○이론 따위의 존재에 너무 한탄할 필요는 없다. 모든 가능한 것들 전에 바로 그 가능한 것들에 대한 씨부렁거림들이 있었음을 목격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믿기 힘들다면 음악의 역사를 들여다봐라. 마테존의 요상한 책들을 읽어봐라. 당신은 그 속에 가능한 모든 음악들이 숨쉬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가능한 것들을 창출해낼 광기들, 급류들이 가득한 경사진 산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예술에 대한 씨부렁거림의 꿈은 광기와 급류로 가득 찬 산의 정상에 올라서는 것이다. 지류들이 흘러가는 길들을 가늠하면서 그들은 거센 급류의 힘을 가늠한다. 어디까지 갈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이 진실을 모르는 자들과 예술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베토벤이 옳기에 모차르트는 틀렸다고 말할 개새끼들이다.

 

맥락 없이 읽는 사상사가가 욕을 먹는 것은 맥락을 읽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수준이 낮아 욕을 먹는 것이다. 맥락 없는 것과 맥락을 넘어선 것은 다른 것이다. 진정한 철학자들은 맥락 없이 읽지 않고, 맥락을 파괴해서 읽는다. 그들은 어디서 빠져나올지 선택하며, 맥락을 파괴한다. 그들은 급류를 합류시킬 지류들을 염두에 두고 둑을 무너트린다. 그들은 이용부호 없이 인용하는 방법을 안다. 이것은 위조자의 버릇이 아니라, 책들을 형태동역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진정한 과학자들의 버릇이다.

 

영원과 순간은 말과 글 속에서 교차한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문장이고, 의미는 휘발한다. 니체는 이 진실을 알았기에 파스칼의 기술을 훔쳤다. 시간의 침식을 견디는 것은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뿐이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지만, 모두가 이해하지 못했다는 예수의 말씀 같은.

 

너무 빠르게 읽어도 읽지 못하고, 너무 느리게 읽어도 읽지 못한다. 속도를 잘못 가늠했다면, 당신은 보는 것조차 실패한다. 존재는 속도와 함께 간다. 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의 박자와 리듬부터 흉내 낼 수 있어야 한다.

 

혼자서,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함께. 우리는 모든 행위에 박자와 리듬을 붙일 수 있다. 이것은 아재가 되는 징표가 아니라, 삶을 견뎌내는 기술을 배워냈다는 수료증이다. 그 자신만을 위해 흥얼거림은 시작되지만, 이것은 모두에게 유통될 수 있다. 하품처럼 전염성이 강하지만, 그것은 항상 자발적 전염이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하지만 그렇기에 모든 이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는 두 책, 루소의 <고백>과 니체의 <이렇게 말했다>의 영업비밀은 이것이다. 그것들은 박자와 리듬으로 이루어져있다. 전염성이 있다. 이것이 사교성sociability의 진짜 정체이다. 칸트는 이 진실을 몰랐다. 그는 같이 일할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에게 사교란 그저 밥이나 같이 먹는 일이었다. 함께 일하는 이들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가 시키지 않아도 노동요를 만들어낸다. 질서를 창출하는 힘의 원천은 바로 그 노래들이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은 틀렸다. 태초에 소음이 있었다. 바로 이 소음을 증폭시키는 대위법이 노동요다. 우리는 소음을 증폭시켜 진리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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