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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최근의 생각들

중층결정
중층결정은 중층인과를 전제한다. 그러나 이 인과는 이중적이다. über는 과잉과 어긋남을 모두 함축할 수 있으며, 우리는 중층인과의 이중성이 중층결정의 본질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한다. 중층결정은 고대와 현실의 이중적 결합을 가리킨다. 과거도 고대고, 현재도 고대며, 미래도 고대다. 하지만 현실과 고대는 구별되며, 우리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주술을 실행한다. 미래에 투사할 때 중층인과는 언제나 과소결정이다. 수많은 주술 매체들이 난립하지만, 그것들 모두 한갓 은유에 불과할 뿐 실재가 아니다. 반면 과거의 해석에 있어 중층인과는 언제나 과잉결정이다. 결과는 이미 존재한다. 문제는 그 존재의 배후에 있을 인과의 사슬을 결정하는 행위이다. 우리가 중층인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인과 순서의 역전이며, 발생적 순서를 거슬러 올라가는 정당성의 순서인 것이다. 우리의 정신은 언제나 너무 많거나 너무 적다.

역사라는 거울
역사는 거울이다. 하지만 그 거울은 거울을 통해 제작된 거울이다. 르네상스의 화가들이 자신들의 얼굴을 그리는 거울상과 그림을 제시하면서도 정작 본인을 뒤통수로 등장시키며 우울에 빠진 것처럼, 거울은 스펙타클을 창출하지면 결국 허구에 불과하다. 역사는 결과가 아니라 탐구이다. 역사-비평 사전의 올바른 번역이 “엄정한 탐구를 기반한 사전”이 되어야하듯, 역사는 탐구 행위지 결과일 수 없다. 우리는 거울상과 자신을 혼동하곤 하지만, 결국 거울 대칭은 위치 이동과 크기 변화로 합동이 될 수 없는 관계이다.

통각과 의식, 그리고 양심
통각apperception을 ‘의식’으로 번역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잘못된 번역이다. 통각은 의식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지, 의식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런 혼동은 <순수이성비판>이 방법에 대한 책임을 망각하기에 생겨난다. 칸트가 말하듯 <비판>은 현관을 가리키지 신전을 가리키지 않는다. 신전은 쓰여지지 않는 <자연 형이상학>이며, 이는 완결되지 않는 기획이다. 그렇다면 통각은 무엇인가? 감각을 종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의식과 무엇이 다른가? 통각은 이미지를 총괄하지만, 의식은 언어를 총괄한다. 이러한 구별은 프로이트의 것이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 의식은 언어였고, 무의식은 이미지였다. 하지만 이러한 구별이 프로이트의 것만은 아니다. 칸트에게 있어 통각은 한편으로는 이미지를 종합하는 창구였지만, 모든 이미지를 다루는 창구라는 점에서 이미지화될 수 없는 기호였다. 그것의 정체는 초월표상이며, 초월표상은 이미지로 환원될 수 없다. 그렇기에 통각은 언어가 되며, 언어 창출의 창구가 된다. 우리는 여기서 언어와 이미지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어야한다. 이미지의 질서는 초월질서가 아니다. 무한판정으로 나아갈 수 없다. 하지만 모든 의미, 모든 법칙, 모든 질서는 무한판정을 함축한다. 그것은 크립키가 지적했듯, 무한성에 기초한다. 이러한 의미의 신비를 가장 잘 이해했고, 가장 잘 세속화한 것은 로크였다. 그는 그렇기에 의식consciousness의 발명자였다. 그가 양심conscience에서 추출해낸 신조어-신개념 의식은 양심의 세속적 측면이다. 양심이 불완전한 시간세계-자연세계를 완성해주는 초월세계로의 창구이듯, 의식은 불완전한 세속세계-정치세계를 완성해주는 도덕세계로의 창구이다. 하지만 이 창구는 언제나 그렇듯 비어있으며, 규정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말들의 이동일 뿐이다. 그렇기에 로크는 말의 이동을 통제하는 그물망을 개발한다. 그가 사물의 정치와 평행하는 말의 정치의 창시자이며, 철학을 기호학적 활동으로 규정한 선지자인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칸트는 그의 작업으로 완수되지 않는 무한판단의 영역, 로크라면 전쟁을 통해 “신의 뜻”을 가름해야할 문제에 대해서 다룰 수 있는 것과 다룰 수 없는 것을 구별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칸트는 무한판단 변증론의 창시자답게, 문제를 세분화였다. 언어로의 창구로 통각을, 초월질서로의 창구로 양심을, 그 사이의 모호한 반성적 판단의 창구로는 의식을 제공하였다. 그에게 의식은 그렇기에 반성적 판단력의 영역이며, 역사(탐구)의 영역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거울을 비추고 다시 비추며 중층결정들의 계보들을 추적하게 된다.

열정과 광기
열정의 부재는 동경을 낳는다. <에쿠스>의 마틴처럼. 그는 소년의 말 숭배를 동경한다. 그 자신은 그리스인이 되지 못한 존재니까. 그는 차라리 휠덜린처럼 미치는 것이 나았을지 모른다. 물론 그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너는 달려봤어?”라는 물음 앞에서 말을 잃을 유령들이 가득한 세상이니. 허나 답은 에쿠스 숭배에 있지 않다. 문제는 어떤 숭배이냐이지, 숭배인가 아니냐가 아니다. 전통 종교의 장점은 소년의 고통을 낳지 않는 숭배 구조라는 것이고, 그것이 사라진 것은 역사적 조건 변경 때문이지 정신의학자들 때문은 아니다. 마틴의 말처럼 소년도 언젠가는 남들과 똑같은 존재가 되어 쇠로 된 말을 타고 아스팔트를 달리겠고, 그것은 에쿠스와의 “질주”일 수 없을 것이다. 개성의 말살. 마틴은 문명을 이렇게 요약한다. 하지만 그 죄악이 정신의학에 국한될 이유도 없으며, 문명 전체로 확대될 이유도 없다. 루멧은 <네트워크>에서 TV에 책임을 전가하지만 이 또한 부당하다. 소외는 부산물이지 목적이 아니다. 소외의 극복이 중요한 것이고, 가능한 종교가 중요한 것이지, 책임은 중요치 않다. 소년과 그리스 종교라는 고대에 모든 것을 전가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것은 주술행위이거나 숙명론에 불과하다. 중요한 과제는 그 사이에서 얼마나 많은 경로들을 펼치고, 얼마나 뛰어난 건축물을 올리는가이다.

건축과 철학
“남의 돈으로 꿈을 이루는 직업”, “도시라는 대의를 무시하는 이기주의자들” 건축가들에 대한 말들이다. 이는 모두 합당한 지적이다. 건축가는 기술자와 도시공학자 사이에 위치하는 존재이며, 고객과 판결관 사이의 존재이다. 그들은 예술가도 아니고, 기술자도 아니며, 도시공학자도 아니며, 세일즈맨도 아니다. 그렇기에 건축가들에게는 반성이 요구된다. 건축학자들이, 혹은 건축가가 “인문학”을 말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과거의 건축가들이야 근대 건축물을 보존해달라고 떼쓸 뿐 이유를 대지 못했던 존재이지만(말 나온 김에 말하자면, 이는 애초에 잘못된 요구이다. 설득을 해야 할 것은 건축가들이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에게 근대 건축은 구식의 건축일 뿐 어떤 정신적 의의도 없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에 근대성은 존재하지 않고, 근대 건축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건축가들은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도시 속에서 하나의 건물을 세운다는 의식은 예외 속에 신이 깃든다는 문장과 어울린다. “신은 디테일에 깃든다.” 이 문장이 미스의 것이든 아비의 것이든, 중요한 것은 신은 법칙보다는 예외에, 추상보다는 구체적인 것에 깃든다는 사실이다. 기술자와 정책가 사이, 학자와 사업가 사이, 유대인과 독일인 사이, 비전문가와 전문가 사이에 있기에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이는 건축가와 철학자를 닮게 만든다. 건축가는 설득해야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정책가와 고객 사이에서 설득해야한다. 이것은 그의 꿈이지만, 고객의 꿈일 이유가 있고, 이것은 한 건물을 위한 것이지만, 도시를 위한 것일 이유가 있다. 하지만 어느 것도 전제되지 않고, 어느 것도 건축가의 손을 떠나서는 사실일 수 없는 허상들이다. 그들은 앎으로 찍어내릴 수도, 상대의 욕망에 호소할 수도 없다. 객관과 주관 사이, 추상과 구체 사이에서만 그들의 언어는 존재한다. 철학자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진리는 상식이다. 하지만 상식은 전제되지 않기에 진리는 전제될 수 없다. 앎으로 찍어누르는 것은 상식일 수 없고, 그렇다고 그것이 당연하기만 한 것이여도 상식일 수 없다. 톰 페인이 그러했듯, 상식은 선언되고, 옹호되고, 알려져야 할 종류의 것이다. 본성상. 규범성은 언제나 사이에 존재한다. 그저 필연이어도 규범이 아니며, 그저 우연이어도 규범이 아니다. 가능한 것과 현실적인 것 사이에서, 우연과 필연 사이에서, 법칙과 예외 사이에서, 일반성의 진리를 확보하는 것이 철학이고, 건축이다. 우리는 그 사이의 고리들을 연장하며, 그것들이 도시 속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그리고 우리의 고객에게 필요한 기능을 가늠하고 실현시킨다. 언제나 작품은 하나이지만 그 경계는 모호하다. 건축도 책도 언제나 주변과 함께 하며, 시간을 이겨낸다. 수많은 잔영 속에서 원형을 모색하고, 그것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구별하는 dispensation라는 reason을 형성해내는 것이 우리의 임무다. 피라미드에서 파빌리온 사이에 놓여있는 우리지만, 우리가 항상 무에서 시작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모범들이 만들어 내는 파장 속에서 우리는 잔영과 원형들을 구별하며 실재와 허상을 구별해낸다. 모든 것이 알레고리인 것은 아니다. 트롭들이 현실을 이룬다. 단지 우리는 트롭과 그것들의 은유들을 구별하면서 상징의 궁전을 세울 뿐이다. 이렇게 목적들의 왕국이 세워질 것이다. 비록 왕이 없을지라도 이 웅장함에 우리가 그것을 왕궁으로 부르고 싶어질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