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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 언어와 비극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이하 기원)을 다 읽어갈 무렵, 박가분이 쓴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고유명을 알게 되었다. 내가 댓글로 본 평은 굉장히 좋았고, '사상가로서의 고진'은 내가 고진의 텍스트를 읽는 이유였기 때문에 읽게 되었다. 초반에는 박가분의 내공에 압도되는 인상을 받았으며, 내가 기원에서 읽을 수 있던 것을 박가분 또한 그대로 짚고, 이를 몇몇 사례로 확장시키는 모습에서 매우 괜찮은 저작이란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이거 웬걸 그 이후 저작으로 이론화를 하는 데 있어, 철학적 개념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채 표현 그 자체만을 빌어와 논리를 전개하는 모습에 너무나 화가났다. 철학을 전개하는 데 있어, 꼭 정확한 독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애초에 --주의자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원류 이론을 변용하여 사용하는 법이다. 단지 변용된 개념이 합당한지가 판단 기준이 될 것이다. 허나 고유명에서 전개된 고진의 이론은, 당시 내가 느끼기에 잘못된 개념으로 잘못된 비약을 하고 있었으며, 중요한 철학적 문제(존재론적-인식론적 간극)를 너무나도 축소시킨채 왜소한 이론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박가분의 전개가 내적 완결성이 굉장히 뛰어나므로, 고진이 정말로 그런 식으로 사고를 전개했을 것이라 생각했으며, 실망으로 고진의 다음 작품을 읽지 않고 있었다.


최근에 일상용을 만나러 학교에 갔을 때 언어와 비극이 생각나 빌리게 되었다. 읽어보니 고유명에서 박가분이 언어와 비극을 차용하는 과정에서는 몇가지 과장이 있었던듯 하다. 언어와 비극 자체만 보면(아직 1장만을 읽은 상태이나)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어보인다. 일단 고진 자체가 강력하게 이론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지도 않으며, 일종의 would용법(--인 것 같지 않냐?는 식으로 독일 철학에서 자주 볼 수 있다...)으로 사고를 전개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종의 비유적 용법으로 시대를 그려나가고 있기 때문에, 특별히 거슬리는 부분은 없었다. 또한 박가분은 괴델을 잘못 이해했는지, 고진의 생각에서 괴델의 논리전개를 잘못 오용했지만, 고진은 그런 실수를 하고 있지 않았다.


흥미로운 점은 '면역학적'에 대한 개념이다. 나는 '면역학적'이란 표현을 사회나 담론체계에 적용한 사례를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통해 접했는데, 만약 이것이 고진이 주장한 맥락과 일치된다면(추측컨대 일치할 것이다), 한병철은 면역학적 반응에 대해 잘못 이해한 것이다. 그는 현대사회를 신경증적 사회로 진단을 하며, 이제 면역학적인 시대는 지났다고 말하는데, 이는 '면역학적'이란 표현에서 오는 이미지에 빠져, 근본적 개념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겉보기엔 신경증적인 것과 면역학적인 것이 다르지만, 사실 면역학적 체계는 신경증적 체계를 포함할 수 있는 개념이다. 한병철은 면역학적인 반응을 자타 구별로 규정짓고, 나 자신과 타인으로 한정짓는다. 하지만, 고진의 전개에서 볼 수 있듯이, '면역학적' 체계가 비유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나 자신과 타인이 아니라 일조의 자기규정과 그것의 걸림돌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고전경제학, 힐베르트 프로그램과 병렬될 수 있는 비유이다. 여기에는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한정될 이유가 없다. 따라서 한병철이 제시하고 있는 신경즉적 자기분열은 면역학적 체계에서도 행위체계에 부적응하는 걸림돌을 배제하는 방식의 강박증적 행동으로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이다.


이제 겨우 1장을 본 것인데, 기원보다는 언어와 비극이 좀 더 내 입맛에는 맞을듯 하다. 기원의 경우 나쓰메 소세키에 대한 부분과 문체 부분에 대한 것말고는 크게 인상을 받지 못하였고, 사실상 담론체계를 설계한다기 보다는 일종의 역사적 기법을 축소하여 표현한 것에 불과하단 인상을 받았었다. 일단 아직은 논리전개 없이 술자리에서 썰풀듯 편안하게 전개하고 있는데, 그 내용 자체는 꽤나 중요하며, 내가 잘 모르는 해체론과 맞닿아 있는듯 하여, 이래저래 자극 받을 수 있을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