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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독서일기

한동안 잉여짓만하다 막판 스퍼트로 몇 권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적어본다.


지배받는 지배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책이었다. 미국 학위자가 '트랜스네셔널'한 관계로 한국에서 위치한다는 주장은 백번 더 동의할 수 있겠지만,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결국 한국의 체제상의 문제와 담론 형성의 어려움을 파고들며, 인구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어떻게 활발한 비평 및 담론생산이 가능한가의 문제로 이행되어야 하는데, 계속 그 자리를 맴도는 연구뿐이다. 저자의 말처럼 연구자체는 굉장히 질적-양적으로 우월하였지만, 그렇다고 연구 내용이 좋지는 않았다.


진격의 대학교

오찬호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20대의 입장에서 20대의 관점을 최대한 견지한 저작이지만, 전작에 비해 훨씬 더 에세이적 경향이 강해졌다. 연구라기보다는 20대의 담론을 흡수한 에세이정도의 느낌? 오찬호와 마찬가지로 대학의 기업화에 대해 굉장히 문제의식을 갖고 있으며, 영어 교육에 대한 오찬호의 지적은 오래전부터 문제의식을 갖고있던 부분이지만, 그의 비판의 날은 잘못되었다고 본다. 그는 '대안이 없다'는 식의 비판을 프레임 공격이라고 굉장힌 감정적으로 대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오찬호는 대학의 기업화와 대학의 군기문제를 비슷한 맥락으로 보는듯한 견해를 표현한 부분이 있는데 이는 큰 착각이다. 군기 문화는 모두 부당하다고 느끼면서도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며, 그것을 없앤다고 해서 하등의 문제가 없지만, 대학의 기업화는 이와 반대이다. 대학의 기업화든 좋든 싫든 옳든 그르든, 현재의 시대담론이 대학 사회에 까지 체질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체질 개선은 결국 사회적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며, 학생들은 사실상 불확실한 미래에 의해 벗어날 의지조차 없는 것이다. 내가 전작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 대해서 학생들은 세태에 (억지로) 적응하기 위해 자기계발 담론에 자신을 구겨넣는다는 식의 비판을 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학생들은 취업 지향의 시대를 살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에 오찬호가 지적한 식의 교육의 종말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을 멈추자는 논의는 공허할 뿐더러 공감을 받을 수가 없다. 실제로 학생들이 영어 교육을 바란다면? 기업이 현재처럼 기업화된 대학의 학생들을 원한다면? 이에 대해 사실상 대부분의 학생들은 취업이 잘되는 방향으로 학교가 개편되길 바랄 것이다. 학교가 취업률로 본교를 소개하는 것이 먹힌다는 것은 그만큼 학생들이 그러한 지표에 대해 민감하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대학평가라는 잘못된 제도와 현 상황을 부추기는 평가지표도 문제이지만, 본질적인 문제 또한 다뤄야한다는 것이다. 과거 메이지 유신 때부터 (후쿠자와 유키치가 주장했듯이) 교육은 생존을 도울뿐더러, 권력에 가까이 가는 지름길이라는 식의 세속적 담론체계가 한반도에 이식된 이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 부분이 있다. 물론 386세대는 '자유로웠다는'식의 향수를 느낄 수 있겠지만, 이는 경제성장으로 인한 자산가치 급등으로 생긴 버블로 태어난 중산층이나 꿀 수 있었던 로망스였을 뿐더러, 실제로 그들의 자유는 취업이 쉽기 때문에 가능했던 유보적인 것에 불과했다. 게다가 실제로 386시대가 얼마나 학문적이었는지 나는 참 의문이 간다. 한국에 존재하는 학벌적 위계질서로 인해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세속적 담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은 서울대가 유일하다. 그런면에서 현재 일어나고있는 서울대의 기업화는 꽤나 상징적이라 할 수 있다. 아마도 나나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는 대학의 기업화는 막을 수 없을 것이고, 나는 그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남을지 고민해야할 것이다. 

수정)

사실 예전에 오찬호의 대학론에 대해 본격 비판을 하는 글을 쓰려다가 흐지부지된 적 있다.

그때 쓰려던 핵심 포인트가 이 글에서 쓴 나의 비판이다. 현 대학 개편은 시대 담론에 대한 대학의 반응이며, 국가-시장(기업)-학생 모두 이에 꽤나 적극적으로 동일화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대학이 나홀로 정책을 펼 수 있을까? 이는 과거 많은 사회주의적 꼬뮌이 주변 체제의 변화가 없기에, 결국 고립되어 사라진 것과 비슷한 결과를 낳지 않을까? 기껏해야 학벌담론의 영원한 승리자인 서울대나 유지할 수 있는 체계인데(그마저도 서울대는 적극적인 체제 수용자로서 기능하고 있다) 지금 어떤 대학이 변화를 막아설 수 있을까? 오찬호의 말처럼 브레이크를 밝을 수 있을까? 그렇담 과거의 미국 대학이 유럽의 종합대학에 잠식된다는 우려들은 그 흐름을 막을 자신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대학체제 개편에는 시대적 체계의 변형이 필수적이며 이는 복합적인 정치-경제적 변화를 요구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전작에 대한 비판처럼(또한 우석훈의 88만원 세대에 대한 비판처럼)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짱돌을 들면 되는가?"가 알고 싶다. (박해천도 비슷한 서술을 한다) 20대들의 모임은 앞으로도 인구구성적인 측면으로 인해 기성세대에 종속된 형태로 유지될 가능성이 큰 현실에서, "대안이 없지 않는가?"란 비판이 오찬호의 말처럼 짜증나는 언어 프레임 공격에 불과한 것인가? 나는 그 근본성에 이의를 제기한다.


서울대에서는 누가 A+를 받는가?

제목과 달리 처세론은 아니다. 오찬호가 진격의 대학교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 책이라 한번 읽어보았다. 그런데 내용이 참 아쉽다. 저자는 굉장히 세속적 학문주의(?)라 할 수 있는 세계관으로 세계를 보는듯하다. 세속적 학문주의라하면,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학문에 대한 일반적 편견이라 할 수 있다. 학문은 창의적이고 어쩌구 저쩌구 해야한다는 식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건 없다. 저자의 말대로 현 대학이 참 문제가 많고 학생들이 학문적 사명감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창의력이 없는 교육이나 협동이 부재한 교육 때문만은 아니다. 일단 창의력부터가 참 거슬린다. 저자는 본인이 느끼는 창의력의 정도로 창의력의 정도를 평가할 수 있다고 보는듯하다. 미시간 대학 학생들은 본인이 더 창의적이라고 느끼는데 한국 학생(정확히는 서울대 학생이다)들은 수용적이라는 의견이 더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미시간 대학 학생보다 한국 학생이 덜 창의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저자는 수용적인 학습을 통한 창의적 사고의 발달이라는 학생들의 의견에 대해서 일화적인 방식으로 비판을 하는데 그것이 가관이다. 본인이 일반 창의성에 대한 발표를 듣고있을 때 '미국'의 '백발' '대가'가 창의성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특수한 것이다 라고 했단 것이다. 일단 저자의 주장에서 드러나는 서양주의적 사고는 차치하고도, 그 주장이 "정말로 수용적 사고는 창의성을 없애기만 하는가?"에 대해 제대로된 답변인지는 의문이다. 평소에도 창의적인 답변을 유도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가를 논해야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난 미국의 유명 철학자가 본인의 철학경력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이 학부시절 겪은 주입식 철학사였다고 말한 인터뷰를 본적도 있다. 그 철학자는 창의적 사고의 중요성을 몰라서 저런 소리를 했을까? 보면 서울대학생들이 협동이 약하다는 등의 주장에서도 이러한 오류는 계속된다. 미시간 대학 학생들은 공정성에 대해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이 핵심인데, 이는 문화적인 차이에 기인한 것이지 어떤 것이 더 효율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다. 게다가 미시간 대학 학생들이 학점에 상관없이 팀별 활동에 더 적극적이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별 활동에 (한국보다 2배) 더 부정적이라는 것은 무엇 때문인 것인가? 저자의 대부분의 주장은 결국 우월한 서양문화와 저등한 동양문화라는 식의 이분법으로 전개되며, 한국인들은 창의적 학습을 못하며 "리더가 아닌 관리자"를 양산한다고 비난하는 세속적 비판에서 머무르고 있다. 정말로 대학교육이 리더를 필요로 하는지와 상관없이 말이다.(경영학과 학생들은 정말로 경영자가 될까?)

게다가 저자의 세속적 학문주의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서울대에 대한 알수없는 편견이다. 저자는 서울대 학생들이 중국처럼 국가에 봉사한다는 등의 사고가 없이 자족적인 것에 대해 '패기'가 없다는 식의 비난을 한다. 국가주의적인 것이 좋은 것인가는 차치하고서도, 서울대 학생은 이 시대의 리더가 되어야하고 나라를 이끌어 가는 인재가 되어야만 한다는 구시대적인(일제 시대로부터 기인한) 사고로 서울대생을 바라 보는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창의적 학습이 가능하려면 학벌주의가 타파되어야한다는 것을 저자는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이미 익숙한 학벌담론에 매몰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