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게으르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굶어 죽게 내버려두어도 된다는 주장은 좀 너무한 주장입니다. 그런데 맬서스는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심지어 더 너무한 주장을 했죠. 게으른지 여부를 따지지 않고서도 내버려두어도 된다고 주장했으니까요. 그런데 맬서스의 주장은 단순히 너무한 것을 넘어서 이상한 면이 있습니다. 맬서스는 저 책을 단순히 개인적인 믿음을 밝히기 위해서 쓴 게 아니라, 특정 신앙 집단을 대변하기 위해 쓴 거였거든요. 그리스도교는 자선의 종교입니다. 심지어 원수를 사랑하라고 명하는 자선의 종교이죠. 그러니 당연히 그리스도교에서는 게으름과 상관없이 자선을 베풀 것을 가르쳤습니다. 설혹 신스콜라주의 신학자들이 자선의 의무를 벗어나는 경우들을 다루었을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가능할 수 있는 국소적인 예외 상황으로 다룬 것이었습니다.(그들은 결의론의 대가이고, 결의론은 가능한 경우들을 세세하게 분류하여 다루니, 그들이 저러한 경우를 다룬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맬서스는 그들과 다릅니다. 맬서스는 사람들이 굶어 죽게 내버려두어도 괜찮다는 주장을 그 자체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신학적인 입장까지 포함해서 말이죠. 이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상해야 정상이고요. 그런데 맬서스는 그런 주장을 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입장을 지지한 사람들이 많았고요. 그러니 왜 저런 주장을 하였고, 어떻게 저런 것이 합당하게 주장될 수 있었는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요즘은 저런 식의 주장이 당연시되기도 하는 것 같은데, 전 아직도 저런 주장을 당연시 할 수 있다는 게 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제가 딱히 도덕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저에겐 그렇게 느껴집니다.)
맬서스는 고드윈과 콩도르세를 비판함으로써 프랑스 혁명 자체를 비판하려 했습니다. 그가 사변적vs경험적 구도를 쓰는 것도 이에 개입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사변을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사변”은 본래 이성에 입각한 관조를 의미 했습니다. 그런데 근세에 이르러 논증적 앎 및 연역적 앎 일반을 포괄하는 용어로 확장되죠. 예컨대 17세기에 등장한 “체계적 지식” 주창자들이 “사변적”이라고 특징 지어지곤 했습니다. ‘에피쿠로스적’, ‘광신적’, ‘독단적’, ‘신비적’ 등과 함께 말이죠. 1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저런 체계론들은 수세에 몰립니다. 진리를 선포하는 수많은 체계들이 난립하였고, 그 중 어떤 것이 올바른지를 가릴 기준은 부재하였기에 (내전으로) 자멸하게 된 것이죠. 이런 맥락 속에서 비코는 저런 조류들을 비판하고, 대안적인 방식의 체계적 지식 구축 방법으로 자신의 철학을 제안합니다.(비코는 이런 작업을 “자서전”이라는 형식을 통해 수행합니다. 그의 자서전은 “지적 전기”이자, 자신의 철학을 설득시키기 위한 비코 식의 <방법서설>이었습니다.) 비코의 대안이 무엇이었는지는 차치하고, 비코의 비판을 요약하자면 이러합니다. 비코는, 논증적 앎은 형식적으로 타당한 체계가 무수히 많을 수밖에 없고, 그것들 중 무엇이 옳은지는 형식적으로 확증할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콰인이 떠오릅니다만, 이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수학의 실재성을 비판하는 논증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골 레파토리었고요.) 비코는 “사변”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영국에서는 저런 치들을 비판할 때, “사변”이란 표현이 사용되곤 했습니다. 흄은 철학을 두 종류로, 하나를 사변 철학, 다른 하나를 도덕 철학으로 구별하는데, 이것이 그러한 유행의 흔적인 것이죠. 실제로 흄은 <탐구>를 통해 사변 철학에서 주창되는 “연역적 앎”을 비판합니다.(통속적으로 알려진 것과 다르게 흄은 인과 개념 자체는 비판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사변에 대한 비판은 연역적이고 논증적인 지식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변을 비판하고 경험을 중요시한다고 해서 추론을 부정할 이유는 없습니다. 비코나 흄이나 모두 추론을 긍정했죠. 추론 없는 경험은 지식으로 취급되지 않았습니다. ‘empiricist’란 단어가 돌팔이를 뜻했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었죠. 사변을 비판하는 것은 추론 일반을 비판한다기보다는, 원리적으로 타당한 주장일지라도 그것이 경험에 근거하지 않으면 올바르지 않을 수 있다는 비판을, 혹은 원리적으로만 타당한 주장들은 무의미하다는 비판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비판”이 프랑스 혁명 비판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을 부정할 때, 그 이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조금 웃긴 일일 수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그리스도교인이라면, 혹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인간 모두 신이 주신 권리를 갖고 있고, 존엄하게 대우 받아야한다는 주장 자체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부정하면 꼴이 우스워지죠. 그런데 저런 주장이 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는 주장과 결합하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전통적 질서를 부정하고 새롭게 재구성할 수 있는 게 되니까요. 때문에 맬서스는 저런 이념 자체가 가진 타당성을 긍정하면서도, 그것을 통한 사회 개혁을 부정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이성을 통해 올바른 사회의 모습을 생각해낼 수 있고, 그에 따라 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주장을 공격하기 위해 “사변”을 공격한 것이지요. 이런 식의 공격은 프랑스 혁명에 대한 비판에서 흔했습니다. 버크도 비슷한 방식으로 공략하죠. 하지만 맬서스는 이를 좀 더 구체적이 개념 싸움으로 끌고 갔습니다. “자연법칙” 개념/규범을 공정함으로써 말이죠.
맬서스는 콩도르세와 고드윈을 비판할 때, 자신이 말하는 법칙은 그들이 말하는 법칙과 달리, 미래에나 일어날 일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항상 일어나는 일을 가리킨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고드윈이나 콩도르세에게 자연법칙은 현재에도 발견될 수 있는 항구적인 규칙성이 아니었습니다. 자연법칙은 본성에 입각한 법칙을 의미했습니다. 본성에 합당한 방식으로 관계를 이루어 그 관계들이 안정적일 수 있는, 이상적일 수 있는 질서가 자연법칙(혹은 자연법)이었습니다. 현 상태가 이상 상태일 이유는 없기에, 그들이 말하는 자연법칙은, 자연법칙임에도, 현재적이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약간 기이해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들이 생각한 자연법칙의 이런 이상적인 성격에 의해 그들은 (그들의 특징으로 여겨지곤 하는) 진보progress 혹은 향상improvement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향상의 가능성을 주장할 때 그들은, 과거 사실들에 대한 증거들을 미루어 보았을 때 확인될 수 있을 규칙성을 근거로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합리적 직관(이게 사변입니다.)에 기초하여 파악될 수 있는 원리들과, 해당 원리들로부터 연역될 수 있는 합당한 관계들의 명석판명함을 내세웠죠.(“너 이게 틀렸다고 말할 수 있니?”라고 되물으면서 말이죠.) 물론 이상적인 자연법칙이 현실적인 것처럼 보이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이 그런 규범을 부정하고 외면할 만큼 끔찍하지 않다면 충분히 향상을 시도해볼 수 있다고 여겨졌습니다.(칸트의 전략도 딱 이겁니다.) 맬서스는 바로 이 “시도 가능성”을 부정하려 합니다.
맬서스는 추측적 역사학에서 자주 전제되곤 하는, 지질학에서는 ‘동일과정설’로, 철학에서는 ‘현행주의’라고 번역되는 actualism을 표방합니다. 현행주의는 직관으로 포착할 수 있는 선험적 원리를 부정/거부합니다. 현재 확인 가능한 규칙성들만을 인식 가능한 대상으로 여겼고요. 그런데 현재의 관점으로만 세상사를 인식할 수 있다고 전제하면, 세상에 설명되지 않는 게 너무 많아집니다. 현행주의는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그런 규칙성들의 규모(시간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를 확장시킵니다.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그것의 규모가 충분히 크다면, 기적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는 경이로운 일들이 설명된다는 것이죠.(예컨대 산맥의 형성 등)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입장이 매우 합리적인 주장처럼 보일 수 있는데 기계론이 신학적이고 생기론이 과학적이었던 것처럼, 이쪽도 매우 신학적이었습니다.(이게 반과학적인 이유는, 우발적 사건들을 모두 부정하게 되어 현상에 부합하지 않는 추론을 옹호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보존하게 되어서입니다. 실제로 빙하기의 증거들이 나왔을 때 그것의 증거효력을 근거 없이 부정한 것도, 진화는 설명 불가능한 사태이니 진화론은 불합리하다고 주장한 것도 이쪽 조류입니다. 게다가 현재를 정상상태로 여겨야할 이유도 불분명했고, 마음대로 시간과 공간을 늘리는 것도 비합리적이었습니다. 켈빈 경이 물리학적으로 계산될 수 있는 태양의 나이에 근거하여, 지구의 나이가 수십, 수백배 더 많다는 지질학자들의 전제를 공격한 것은 불합리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다윈 또한 문제적이라고 인정했고요.)
이런 조류는 마가렛 제이콥에 따르면 뉴턴주의적 합리주의를 표방한 광교회파 신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쪽에서 파생된 조류거든요. 뉴턴주의적 합리주의에서는 개체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부정했습니다. 오직 일반적인 규칙성만이 인식의 대상일 수 있다고 여겨졌죠. 그런데 이 조류에서는 저런 규칙성이 섭리로 여겨졌습니다. 뉴턴이 저 세력의 상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보편인력법칙”이 가진 “보편”의 “법칙”이란 이미지에 근거하여, 우월한 자들의 열등한 자들에 대한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적합해서였고요.(뉴턴 본인도 그런 생각을 갖고 있던 놈이었고요.) 만물이 중력 법칙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듯이, 세상에는 예외와 이탈이 간혹 있더라도, 지속적으로 통제(‘조절’의 다른 번역어)됨으로써 유지되는 질서가 있단 거죠. 저 시대만 해도 엄격한 결정론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탈들이 관찰되니까 당연한 것이죠.(사실 결정론을 믿는 사람들은 좀 맛탱이가 간 사람들입니다...) 당장 달의 섭동만 해도 그런 사례였죠. 달의 섭동 예측은 항해에 매우 중요했기에 당시에 매우 중요한 문제로 여겨졌습니다.(현상공모도 많았고요.) 하지만 뉴턴조차도 풀지 못했고, 뉴턴은 그것이 풀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실제로 고전역학으로 못 푸는 문제입니다. 삼체문제거든요. 라플라스가 이 문제를 풀어 스타가 됩니다. 그의 풀이법은 특수한 것이었음에도, 라플라스는 저걸 일반해인 것인 양 주장하며 결정론을 주창합니다. 당연히도 수많은 예외들이 있었고, 고전역학에 입각해 풀릴 수 있는 문제와 그렇지 않은 문제를 구별할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저런 걸 주장하니 당대 물리학자들은 라플라스를 미친놈 취급 했고요. 저런 문제들을 구별하는 일은 20세기 초반 푸앵카레가 군론을 활용하여 성취해냅니다.) 때문에 뉴턴은 저런 미세한 불규칙성은 그 자체로는 질서를 결여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럼에도 뉴턴은 우주의 질서를 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법칙의 지배를 통해 저것들이 통제됨으로써 불규칙성을 질서가 포괄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죠.(실제로 그렇게 주장했고요. 우중들의 불규칙성을 통제하여 한 국가가 성립할 수 있다는 비유를 말하면서.) 그렇기에 거시적으로 규칙은 성립합니다. 지배의 법칙에 의해 불규칙성들이 통제/조절될 수 있으니까요.(사실 이건 <프린키피아>를 좀 분석하면 더 잘 드러납니다. <프린키피아> 2권에서 뉴턴은 유체역학을 다루는데, 자신의 유체론에 입각해 뉴턴은 데카르트의 유체 우주가 지속 가능하지 못하다고 증명합니다. 이 문제는 나비에-스트로크 방정식이 나올 때까지 미스터리가 됩니다. 달랑베르가 뉴턴의 유체역학에 따르면 일상적으로 관찰 가능한 유체 현상마저도 불가능한 것이 된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죠.) 맬서스는 저런 법칙 개념을 인구의 문제에 적용합니다.
맬서스는 자신의 법칙 개념에 입각해, 세상의 빈곤은 제거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제거하려고 시도되어서도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지구의 자기조절, 생태적 균형과 비슷한 주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물론 비슷하지 않습니다.) 법칙의 지배를 통해 인구가 “조절”, 혹은 “통제”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저 법칙의 조절과 통제는 인간에게 더욱 가혹하게 적용됩니다. 인간이 인구 문제를 더욱 자주, 더욱 강하게 겪기 때문이죠. 맬서스는 인간에 대한 인구법칙의 가혹함이 (영국에서는 문명의 본질로 여겨지던) 기술의 향상의 원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문명의 조건, 혹은 인간성의 원천으로 삼아버립니다. 문명과 향상 자체가 저런 것들 덕분에 가능한 것이고, 빈곤이 계속되고 쓰레기 같은 인간들이 도태되도록 방치해야, 신이 계획하신 문명의 발생과 향상이 지속가능하다는 것이죠. 물론 맬서스는 신의 계획 자체를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신이 계획한 것이 있다면, 그렇다는 것이죠. 그리스도교적으로 자연세계는 구원을 위한 정거장일 뿐 그 자체로는 의미 없는 곳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결함투성이고 방향성이 없어도 맬서스에게는 문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문명과 향상을 말하는 이들에게는 저것이 문제가 됩니다. 그들이 말하는 문명과 향상이 바로 저 조건에 근거를 두고 있으니까요. 빈곤 퇴치, 개선을 시도하는 일이 불합리한 것이 되거든요. 문명과 향상의 조건이자 원동력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 자기논박, 혹은 자기파괴를 주장하는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죠.
맬서스의 주장은 여러 모로 쓰레기 같습니다. 자신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은 열등하고 도태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고, 자선과 봉사를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미안함조차 갖지 않겠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자선과 봉사를 실천하며 세상을 좀 더 낫게 하겠다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비난해야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죠. 뭐 맬서스의 주장이 쓰레기 같다는 사실과 별개로 그것이 당대에 핫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다만 저 주장이 핫했던 것은 그것이 과학적인 주장이고 논박 불가능해서여서는 아니었습니다. 과학사가들이 주장하듯, 저 책은 비과학적이고 결함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당대에 이미 많은 이들에게 반박되었고요.(사실 그래서 <인구론>은 판이 거듭될수록 맬서스 자신을 옹호하기 위한 잡다한 근거들로 뒤범벅되며 두껍고 쓸모없는 책이 되었습니다. 초판이 가장 명료하고 의미 있습니다...) 오늘날 저 책이 과학적이라고 떠드는 치들은 역사학자들이 아닙니다. 괜히 그런 게 아니죠.(사실 그들은 이 책을 대단하게 보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걍 옛날 사람이 맞는 얘기했다고 우쭈쭈하는 것이죠. 심지어 그들이 옳다 생각하며 찬양하는 맬서스의 주장들은 당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상식이었습니다.) 맬서스는 임의적으로 특정 사례만으로 일반적인 규칙을 주장했습니다. 당연히도 사례들을 자의적으로 선택한 것이 문제적일 수밖에 없죠. 심지어 그렇게 취사선택한 사례들도 문제적이었습니다. 설명력이 부족했거든요. 당연히 당대 과학자들은 그가 아메리카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왜곡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아메리카의 현 상황을 비추어 보았을 때 결과적으로 틀렸음이 확인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습니다.(인구가 맬서스가 주장한 것 이상으로 증대되었거든요.) 뭐 근데 <인구론>이 비과학적이었다는 것과 별개로, <인구론>은 합리적일 수 있었습니다. 저게 과학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도 저 주장은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실제로 그런 사람들이 많았고요. 특히 영국의 경우 18세기 동안 빈민 수가 폭증해서 이전처럼 빈민 구제를 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기에, 저런 주장이 필요하기도 했고요. 물론 전 이런 식의 합리성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래서 전 빈민구제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빈민들을 구제할 방법을 찾아 나선 청교도들에 더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기존의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마주했음에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지식과 실천 속에서 길을 찾으려 했던 그들의 의지에 감동을 느끼기에 그러한 것이죠.
뭐 그래도 맬서스의 책도 훌륭한 점이 있습니다. 맬서스의 책을 선구적인 사회과학 연구서로 보지 않는다면 말이죠. 맬서스의 책은 어떤 특정한 주제에 대한 이해 자체를 지향하는 책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맬서스의 책이 궤변을 일삼는 팜플렛에 불과하다고 폄훼해야하는 것도 아니고요. 연구 이전에 설득의 목적이 있긴 하죠. 하지만 설득이 가능할 수 있도록, 스스로가 입증하는 것이 있는 책이라면 언제나 “연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두아의 마르실리우스가 쓴 <평화의 수호자>처럼 말이죠.(물론 <인구론>은 <평화의 수호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인구론>의 장점은 종합적인 단일한 관점을 제안하는 데 있습니다. 다양한 주제들과 다양한 논의거리들을 본인이 주장하고 싶은 하나의 테제와 일치할 수 있게 배치하고 있죠. 자연법칙, 섭리, 인간의 역사, 문명, 향상, 인식 가능성, 개선 가능성, 혁명, 빈곤, 자선, 인구 등의 개념들이 일관성이 있으면서도 하나의 테제로 통일되는 방식으로 배열되고 있습니다. 연구라면 당연히 이런 체계성을 갖춰야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생각보다 이게 당연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거든요. 그러니 이 책처럼 자신의 실천 맥락까지 고려하며 의식적으로 “실천”하는 저작은 생각보다 적은 것이죠. 대단하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쓰레기 같은 것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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