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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과 도시계획 보충 (추가)

<부갱빌 여행기 보유>를 지시하기 위해 '보유補遺'라는 표현을 지켜왔지만, 저 책에 대한 나의 실망으로 그냥 일상적인 표현인 '보충'을 쓰기로 함. 이하 미독에게 보내는 편지.


도시 속의 삶을 다루는 책을 몇 권 읽고 미독의 흥미를 끌 만한 정보들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최근 생각 중이던 다른 주제들이 제 독서와 화합하며 절 우울한 결론으로 이끌더군요. 절 낙담하게 만드는 주제들을 공유해보려 합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든, 도움을 주는 것이든 말이죠.

시설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를 다루는 일에 대한 저의 회의에서 시작하고 싶군요. 사람들의 기대는 정말 중요합니다. 제가 정말 말하고픈 것들 중 하나이죠. 기대, 신뢰, 약속, 책임. 하지만 모든 기대가 의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확천금을 기대하는 일처럼, 허망한 기대들은 문제로서는 다뤄질 수 있어도, 의미 있는 규범으로는 다뤄질 수 없습니다. 그러한 기대가 현실을 만들고 있을지라도, 그 현실을 외면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이 정말로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전 인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분석과 규범의 간극을 고려할지라도, 모든 것이 기록되고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일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이 전제를 받아들일지라도, 이것을 쉽게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말해질 가치가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할 기준이 확고하지 않다면, 누군가의 인생을 심판하는 오만을 범하는 것이 될테니까요.(제가 자주 얘기하지만, 전 은근 카톨릭적입니다. 보들레르와 해러웨이가 카톨릭인 것처럼 말이죠ㅋㅋ) 그렇기에 제가 지금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러한 기준입니다.

기준을 말하기 위해서 얼마 전에 제가 겪은 일화를 다시 얘기하고 싶네요. 서로 다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마치 하나인 것처럼 “계급”으로 말하는 일을 이제는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저의 고백에 연구실 사람 한 명이 이런 식으로 반박했습니다. “현장에 가보지 않아서 그렇다. 가면 그들이 하나인 것을 느낄 수 있다.” 전 이렇게 대답했죠. “현장에 가 본 인류학자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자 그 사람은 “학자들 따위는 알려고 하니까 느낄 수 없는 것이다. 가면 그냥 느낄 수 있다.” 피곤해서, 그리고 누군가에게 날선 말을 내뱉기 싫어서 적당히 피했지만, 그런 발언들을 쏟아내는 사람에게 전 경멸과 혐오를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란 사람은, 본인이 “학자”면서도, 다른 학자들에 대해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에, 단 한 권의 인류학 서적도 읽은 적 없고, 단 한 명의 인류학자도 만나본 적 없으면서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에, 단 세 번 현장에 방문하고, 그저 김밥이나 얻어먹고 온 사람이 평생을 현장에서 보내는 사람들에게 저런 식으로 말하는 것에 경멸과 혐오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니까요. 제가 기운이 넘쳤다면, 아마도 날선 말을 내뱉으며, 당신은 피해자들의 고통을 착취하고 있고, 당신의 환상 속에서 알량한 선함을 뽐내고 있을 뿐인 위선자라고 비난했을 겁니다. 물론 지금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런 가상의 반박이 아닙니다. 저 사람과 인류학자들을 다르게 만든 무엇인가입니다.

인류학자들은 저 사람과 달리 쉽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인류학자들은 현장을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현장에서 만나는 사람이 하나로 묶여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요. 제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인류학자들이 저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인류학자들은 단순히 학문적인 규범 때문에 저런 윤리를 고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현장에 오래 머물면 깨달을 수밖에 없는 진실이라 인류학자들이 저런 “앎”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인류학자들이 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저런 윤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진실을 느끼고 있어서입니다. 많은 현장에서 인류학자들은 “그들”에게 그들의 일원으로 인정받습니다. “그들”은 그 인류학자가 다른 이방인들과 다르게 자신들과 다르지 않다고 보증합니다. 하지만 인류학자들은 그런 인정에 감사하면서도 불편함을 느낍니다. 인류학자들은 그것이 진실이 아니란 것을 느낍니다. 그것이 진실이 아닌 이유는 인류학자에게 그들이 연구대상이어서가 아닙니다. 물론 연구대상이죠. 하지만 현장에 오래 머물면서 그들 한 명 한 명을 알게 된 사람에게 그 사람들이 한갓 연구대상일 수는 없습니다. 연구대상이면서도 그 이상이죠. 때문에 이것 때문일 수는 없습니다. 인류학자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자신과 그들이 하나의 운명으로 묶이지 않는다는 진실을 느끼고 있어서입니다. 숲이 개발되고 자신이 함께 하던 사람들이 쫓겨 날 때, 인류학자도 그들과 함께 저항하고, 그들과 함께 슬픔을 느끼고, 그들과 함께 분노하고, 그들과 함께 절망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류학자들은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질 일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들”은 뿌리 뽑힌 채 어딘가로 이주해야하겠지만, 인류학자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진실을 말이죠. 그 사건이 저 인류학자에게 평생의 상처로 남을지라도, 그가 더 이상 그 이전과 같은 사람으로 남을 수 없을지라도, 그는 집으로 돌아갑니다. 집을 떠나는 “그들”과 다르게 말이죠. 인류학자들은 이 진실을 느끼고 있기에, 그들의 호의에 감사하면서도 불편함을 느낍니다.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면 위선일 테니까요. 인류학자는 그래서 쉽게 말하지 않는 겁니다. 학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느끼는 책임감 때문이죠.

제가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도시 연구에서 정말로 필요한 무엇을 얘기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리고 이게 제가 얘기한 위험한 무엇, 다른 분야들을 빠르게 훑으며 그 합리성을 포착하는 작업을 하면서 생겨나는 회한,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에 “불과”한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현실들에 처음에는 화가 나고, 그 다음에는 경멸과 회한이 느껴지다가, 결국에는 그러한 현실에 익숙해지면서 생겨나는 “지루함”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전 언제나 예술이 가상임을 강조합니다. 정말로 현실을 보고 싶다면, 현실을 직시하고 현실을 연구하라고 말하면서 말이죠. 그럼에도 예술이 진실임을 옹호하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전 평소에 그런 사람들에 대해 제가 내놓을 반박을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 또한 너무 날선 말이라 그렇습니다. 예술 또한 진짜 같은 체험을 제공해줍니다. 하지만 예술은 예술로 끝납니다. 공포 영화를 볼 때, 손에 땀이 나고, 심장이 벌렁거리고, 무서워 비명을 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그토록 현실적이고, 그토록 몸이 현실에서처럼 반응하지만, 그것은 현실이 아닙니다. 그것이 절대 현실일 수 없게 하는 단 하나의 차이가 있거든요. 영화 속 현실을 현실로 생각해 도망치는 관객이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죠. 정말로 그것이 현실이라면, 귀신이 출몰하고, 살인귀가 배회하는 게 정말로 현실이라면, 관객은 도망쳐야합니다. 하지만 관객은 관객이고, 구경꾼에 불과하죠. 그래서 도망치지 않습니다. 도망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식조차 하지 못해도, 그것이 현실이 아니고, 그 자신에게 어떤 실제적인 위협도 아니란 사실이 전제되어 있는 것이죠. 예술이 진실이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전 이렇게 말할 겁니다: 구경꾼이면서 당사자인 척하는 위선자들이라고 말이죠.

제가 도시에서 느끼는 것은 저 진실입니다. 얼마 전 제가 그런 얘기를 했을 겁니다. 제가 말하는 빛나는 것들 중에 제 것인 게 없다고, 제 자신의 체험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없고, 그런 게 있다고 하는 사람들은 허풍쟁이처럼 보인다고. 전 이게 저란 사람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넷은 이게 우리가 직시해야할 “도시의 현실”이라고 말하더군요. 우리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마치 영화 속의 일처럼 구경하고 있을 뿐입니다. 전쟁을 다루는 영화를 보며 팔다리가 흩어지는 장면에서 환호를 보내던 관객들은 즐거운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전쟁에서 팔을 잃은 세넷의 친구를 보며 불편한 표정을 드러냅니다. 그들에게 있어 그런 사건들을 스크린 속일이지 현실의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구경을 하러 온 것이지 현실을 마주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자신이 구경한 일이 현실이란 사실을 목격하자 불편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현실로 그것을 체험하고 싶진 않았거든요. 실제로 도시의 삶을 생각해볼 때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모두 그런 것들입니다. 맥루헌은 이런 특성을 “촉각적”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물론 이 표현은 많은 오해를 낳았죠. 촉각은 원래 (자기자신의) 존재 감각이고, 느리지만 꾸준하게 중심을 되찾게 해주는 감각이었거든요. 맥루헌의 진단을 다른 학자들이 저런 전통적인 감각론과 연결하면서 많은 오해가 생겨났죠. 하지만 맥루헌의 의도는 저런 전통적인 감각론과 무관했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은 언제나 대상을 가리키죠. 귀로 듣는 것이나 코로 느끼는 것도 언제나 외부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촉각은 좀 다를 수 있습니다. 고통은 외부의 대상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 대상에 대한 주의를 유발하지만, 고통 그 자체는 언제나 자신에게만 속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나에게서 느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외부의 무엇을 지시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외부의 무엇은 “원인”일 뿐이지요. 맥루헌이 촉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런 특징이었습니다. 나에게만 속하는 감각으로서의 촉각.

현대 도시는 감각의 과잉으로 특징 지어진다고, 스펙터클이 넘쳐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었죠. 하지만 “스펙터클 사회”이란 진단이 표면적임을 비판자들이 입증하여 그런 주장은 박살이 났습니다. 스펙터클은 넘쳐나죠. 하지만 그런 것들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고, 원래 스펙터클로 말해지던 것과는 다르거든요. ‘럭셔리’와 ‘최고급’이 이제 아무런 의미 없는 단어인 것처럼 스펙터클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도시를 처음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은 “우울”이었습니다. 보들레르는 파리의 우울을 증언합니다. 그런데 그가 증언하는 우울은 멜랑콜리가 아닙니다. 보들레르는 저 표현을 발자크에서 빌려왔는데 발자크는 “런던의 우울”을 말하는 영국 문학이 프랑스의 현실이 되고 있다는 (또 다른) 우울한 진단 속에서 “파리의 우울”을 말한 것이었습니다. 발자크와 보들레르가 느낀 파리의 우울은 지루함이었습니다. 모든 게 덧없이 흘러가고, 모든 게 다르지만 그것들의 차이는 무의미하기에 “차이”일 수 없다는 감각이었죠. 그들이 느낀 지루함은 똑같은 것들의 순환에서 비롯되지 않았습니다. 차이는 넘쳐납니다. 하지만 바로 그 현실로부터 비롯되는 단조로움이었죠. 빈 캔버스와 모든 것들이 그려진 캔버스 모두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것처럼 그들은 아무 것도 없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얼마 전 얘기한 “엔드게임”인 것처럼, 그리고 적도 동지도 없을 때 분투하는 일이 “쌩쑈”인 것처럼 말이죠.

현대 도시에는 분명 많은 기대들이 있습니다. 많은 환상들이 있고요. 하지만 그것들이 정말로 의미 있는 하나의 현실을 이루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 제가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카카오 오픈 채팅을 통해 동네 모임에 나갔을 때 깜짝 놀랐다고요. 서울에 그 어떤 연고도 없이, 동네에 아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이, 혼자서 살고 있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요. 그런 사람들이 서울에 정확히 몇 명일지 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수십만이어도, 혹은 수백만이라도 이상하지 않은 것도 분명하죠. 그때 전 그런 사람들을 좀 더 알고 싶다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낼 무엇인가를 발견하여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고, 그 사람들이 주목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에 너무나도 화가 난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때 열심히 토로했지만, 저것 또한 그냥 제가 인류학자면 연구하고픈 주제에 불과했습니다. 저 또한 제가 앞에서 얘기한 위선자들과 똑같은 것이죠. 제 위선을 깨달음과 동시에, 전 이제 저런 연구 자체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공통의 것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들은 그것을 의식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공통성을 의식하기 위해서는 많은 상호작용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피곤한 일이죠. 그들은 이미 일 때문에 피곤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피곤함”을 감수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은 기껏해야 연애할 한 명을 찾는 게 최선이라 생각할 테니까요.

세넷은 비슷한 문제를 지적합니다. 도시를 발전시키기 위해 우리는 도시 속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들을 제거해왔습니다. 그렇게 어려움들을 제거했기에 도시는 편안한 삶을 제공하게 되었죠. 그런데 우리는 그 편안함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사람들과 얘기는 하죠. 수많은 사람들을 볼 수도 있고요. 하지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구경할 뿐이고, 누군가와 얘기는 나누어도 진실한 대화는 나누지 않습니다. 이게 편안함을 주기 때문이죠. 정치가 고달픈 일인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과 무엇인가를 함께 하는 일이라서 그런 것이죠. 피곤한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정치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죠. 도시가 적당한 거리를 제공하는 것처럼요. 그런데 이렇게 얻어낸 성취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문제이긴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정말로 극복해내고 싶은지, 불편함을 감수할 수 있는지 확신하긴 어렵습니다.

세넷은 고통과 공감을 얘기합니다. 그런 얘기는 세넷 말고 많은 사람들이 해왔죠. 제가 혐오하는 사회운동가들이 줄창 떠들어대는 것이기도 하고요. 당연히도 세넷은 그들과 다른 얘기를 합니다. 세넷은 감정적인 반복재생산으로서의 “공감”을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세넷이 말하는 공감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같은 운명을 선택하겠다는 결단입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가 변하기 시작했을 때, 아이들이 뛰어 놀던 공원에 마약상들과 그들을 보호하는 폭력배들이 배회하기 시작했을 때, 더 이상 새로운 이웃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능력이 있다면 좋은 동네로 떠나고, 능력이 없다면 관심을 끄고 삽니다. 세넷 본인이 살고 있는 그리니치의 현실처럼 말이죠. 그곳은 옛날에도, 그리고 세넷이 <살과 돌>을 쓸 때에도 이주민들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있죠. 그 전에는 색다른 문화를 겪게 되는 놀라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1994년의 그리니치 빌리지는, 차이들이 넘쳐나지만 그 어떤 차이도 교류되지 않는 공허한 곳이거든요. 세넷이 말하듯 차이가 소통을 낳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갈등조차 낳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연결되지 않는 차이를 “다원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것이고요. 그런데 그리니치 빌리지에 사는 모두가 차이를 끌어않을 엄두조차 낼 수 없습니다. 그것을 바꿀 수 있을 방법조차 상상하기 힘들고요. 세넷은 이 현실의 엄정함과 자신의 무능을 고백합니다. 세넷은 그래서 <살과 돌>이 종교적인 책이라고, 책을 마무리하기 전에 독자들에게 그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되돌아오길 바라지만, 되돌아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무엇인가를,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지만 간증하게 된 사람처럼 말이죠. 그는 고통을 정말로 공감할 수 있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것이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결단과 정말로 공유될 수 있는 운명이 아니라면, 그는 그것이 자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 받을 것을 각오하고 용기 내어 간증하려한 무엇이 아니라고, 그것과 정말 다른 것이라고 말할 겁니다. 그것이 왜 다른지 아무도 납득하지 못할지라도 말이죠.

전 세넷이 말하고 하려는 게 무엇인지 알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이 제가 경멸과 혐오를 느낄 수밖에 없게 만든 “가보면 안다”는 식의 체험은 아닙니다. 오히려 바로 그런 체험을 거부하게 만드는 무엇인가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그런 위선처럼 모호하고 위태로운 것을 알기에 쉽게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넷은 분명 이런 위험을 감수하려 했습니다. 쪽팔림을 각오한 것이죠. 그런데 세넷은 이런 쪽팔림을 최대한 피할 수 있게 감수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한 “회피” 때문인지 이 책을 다시 번역하게 된 임동근 선생이 무엇인가 이상함을 느끼게 된 것 같고요. 역자의 말에서 임동근 선생은 이상야릇한 말들을 꺼냅니다. 과거에는 아무 것도 모르기에 기꺼이 번역했지만, 많은 것을 알게 된 지금 이 책을 번역하는 일이 정작 자신에게 어떤 의미일 수 있을지 도저히 찾지 못한 사람의 고백 같은 것들을 말이죠. 저 또한 비슷한 심정을 느낍니다. 체험에 호소하는 것과 다르기 위해서 내놓아야할 것, 본인이 감수해야할 것이 무엇일 수 있을지 아직 모르겠거든요.

어제 만난 누군가에게 20세기 후반의 자기파괴적인 수행적 예술이, 고대의 고행자들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대가로 자신의 힘과 자신이 숭상하는 신을 간증했듯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대가로 자신이 세상에서 목격하고 있는 현실 속의 악을 간증한 것과 같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실천은 꽤나 숭고한 일일 수 있을 것 같다고 얘기했고요. 하지만 전 그것이 절대로 답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예술은 기껏해야 가상이니 취할 수 있을 답이라고 전 생각합니다.) 물론 악처럼 보이는 것들은 헐벗은 사실로서는 선도 악도 아니고, 그것을 악이라고 규정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내놓아야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것을 위해, 남들을 희생시키지 않고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자신의 몸뚱아리뿐일 수 있다는 것도 유일한 정답인지는 모르겠지만 납득할 수 있는 답변이고요. 하지만 제가 고민하는 문제가 기껏해야 한 명의 육신을 바치는 것으로 그 현존이 담보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정말로 실체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단 얘기죠. 제가 고민을 시작하게 만든 것이 애초부터 “실체 없음”의 가능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저 또한 현대의 도시인입니다. 심드렁하다고, 지루하다고, 그래서 우울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죠. 왜 상식에 불과한 것이 상식이 아닌지 전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공부해보면 다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도 그 비슷한 얘기들이 전혀 소통되고 있지 않고 비슷하다는 것조차 너무나도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는 것이 이해되지 않고요. “새로운 것”을 쫓아 정말 다양하게 이것저것 연구했지만 결국 다 비슷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럴 때면 실망하면서도 안도하는 제 자신을 마주하게 된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고요. 제 몸뚱아리를 바친다고 해서 그 가치를 인정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제 쪽팔림이 누군가를 설득시킬 수 있을지도 전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해피 아워>의 남편이 쪽팔림을 감수하며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을 간증했을 때 단 한 명도 납득하지 않은 것처럼요. 하던 일을 계속하겠지만, 어쩐지 제가 느껴왔던 것이 멜랑콜리로서의 우울이 아니라 depressed로서의 우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데이비드 하비의 책에 대한 제 추천은 제가 늘어놓는 백마디의 말보다 하비 본인의 한 문단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래서 직접인용으로 갈음합니다.

격렬한 변화 단계를 거치고 있는 도시를 어떻게 볼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까 하는 이슈는 섣불리 손대기 힘든 과제이다. 발자크 같은 소설가와 도미에 같은 화가들은 흥미롭지만 직접적이지는 않은 방식으로 그 과제를 다루는 길을 개척해나갔다. 그러나 각 도시를 개별적으로 다룬 수많은 연구와 논문이 있는데도, 그 가운데서 특별히 기억할 만하거나 그 속의 인간적인 조건에 관해 혜안을 제시하는 것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좀 묘하다. 물론 예외도 있다. 내가 칼 쇼르스케의 <세기말 빈>과 같은 결과물을 만들어내진 못하겠지만 나는 항상 그것을 닮고 싶은 모델로 생각해왔다. 그 연구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엄밀하게 말해, 한 도시 내에서 이루어지는 물질적 생활과 문화 활동 및 사고 유형에 관한 수많은 관점을 살펴봄으로써 그 도시에 관한 일종의 전체적인 감각을 전달하는 일을 해내는 그 방식이다. 도시에 관한 글 가운데 큰 관심을 끄는 것이 있다 해도 대개는 단편적이고 특정한 관점에 국한될 때가 많다. 그래서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를 함께 보고자 한다면 난국에 봉착한다. <세기말 빈>이 그 특별한 마술을 부리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 난국은 도시 연구와 도시 이론이 전반적으로 처해 있는 상황이다. 도시 “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설명하는 이론은 잔뜩 있지만 도시에 “대한” 이론은 부족하다. 또 도시에 대한 기존 이론들은 일차원적이고 도식적이어서, 도시에서 겪는 경험의 본질인 복잡성과 풍부한 내용의 알맹이는 없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따라서 일차원적인 방식으로는 도시와 도시적 경험에 쉽게 접근할 수 없다.


물론 하비가 이 야심을 충분히 잘 해냈냐고 묻는다면 전 아니라고 대답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건 하비의 능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대한” 이론이라면, 제가 앞서 얘기한 그런 근본적인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는 가혹한 현실 때문에 그런 것이죠. 개인적으로 전 세넷의 책이 더 와닿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비 책이 더 쓸모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ㅎㅎ


심오한 성찰처럼 보이지만, 사실 별 게 아닙니다.
인류학에서 원래하던 “타자의 삶을 연구한다는 게 과연 정당할 수 있는가?”라는 고민을 제 식으로 반복한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저의 진짜 결론은 위선과 진정성을 구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전 이 글을 쓰면서 이 글에서 비난한 연구실 동료를 미워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게 되었고요. 뭐 애초에 나쁜 사람은 아니란 걸 알고 있어서 미워하고 있지도 않았지만요... 제가 얘기를 나누는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입니다. 보통 제 문제 때문에 사이가 안 좋아지거든요.)
그리고 위선과 진정성의 구별을 확고히 하려는 시도는 비겁함으로 이어집니다.
행동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게 되니까요.
위선과 비겁함 중에 하나를 고르라면 전 위선을 고를 겁니다.

뭐 그리고 애초에 진정성을 소리 높여 말하는 사람들은 믿으면 안 됩니다.
루소가 그런 예인데... 전 루소의 말을 일단 믿지 않습니다. 태생적으로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사람이거든요. 저랑 비슷한 놈입니다. 그러니 일단 의심하는 게 낫습니다.(자주 얘기하는 거지만, 루소의 헛짓거리에 대해서는 “쉬운” 독해가 언제나 옳은 독해입니다. 루소가 진정으로 사랑한 여자는 테레즈였다고 어느 불문학자가 씨부렸던데... 루소는 테레즈를 착취한 거죠. 그걸 모르는 게 바보입니다. 루소의 삶이 언제나 그렇죠. 저랑 같은 부류의 인간 쓰레기라 너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여간 진정성 호소는 보기에도 좋지 않고, 비겁함을 낳는다는 얘기입니다ㅋㅋ
제 글의 진짜 주인공은 비겁함과 위선 사이에서 양 극단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기예로서의 희생제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