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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실재론이라는 문제

이하 카톡 복붙(K와의 대화 보론)





어제 얘기가 머릿속에 맴도는데, 이 논의는 굳이 스캔론을 읽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얘기이기도 하고, 스캔론 책은 아마도 다음주에나 올 거 같아서 그냥 미리 얘기합니다.

아마 제가 한 얘기들이 모호하게 들렸다면, 이게 여러 논의맥락들을 전제하면서도 그걸 언급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주변적인 얘기들을 한번 꺼내보려고 합니다.

일단 어제 논의되었던 핵심 주제는 “이유reason에 대한 실재론적인 관점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 문제를 스캔론의 논의맥락과 독립적으로, 즉 윤리학적인 문제와 독립적으로, 학문적 실재론에 대한 문제로 이해하고 썰을 풀었던 것이고 그걸 좀 얘기해보겠습니다.

일단 과학적 실재론의 문제에서 시작하는 게 좋겠네요.
전통적인 과학적 실재론의 물음은 관찰 불가능한 존재자 x에 “존재한다”는 술어를 부여할 수 있는 조건을 파악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어떤 이론에서 상정하는 존재자들이 관찰 불가능함에도 그것들이 “존재자”이며, 심지어는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원소들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두 가지 문제로 좌절되는데, 관찰불가능함에도 그러한 존재자를 상정하는 것이 합당한 그러한 조건을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것과,
그러한 조건을 찾아낸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원했던 “세계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원소들”이라는 주장은 성립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왜 후자의 문제가 발생하는지는 명백합니다. 사실 전자의 문제랑 돌고 도는 거거든요.
어떤 조건 C에서 이론 A가 상정하는 존재자 x의 존재가 정당화된다고 해봅시다.
문제는 조건 C가 이론 A에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란 것이지요.
이론 B 또한 조건 C를 만족하고 이론 B에서 상정하는 존재자 y의 존재 또한 정당화됩니다.
그런데 이론 A와 이론 B는 상충하는 것이지요.
예컨대 과학과 형이상학, 과학과 신화, 과학과 종교 따위의 구도가 그대로 반복됩니다.
원자가 존재하는 것만큼이나 신도 존재한다 이런 주장이되니 그들의 원래 의도는 좌절되는 것이지요.

게다가 이러한 문제는 과학 내부에서도 성립하는데, 과학 이론이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즉 과학이론 A와 과학이론 B가 모두 조건 C를 충족시킨다고 할 때, 과학적 미결정성이 그대로 성립합니다.

이때 문제는 좀 복잡해지는데, 현재 존재하는 이론 사이의 갈등, 과거 이론과 현재 이론 사이에서의 갈등으로 이중적으로 갈등이 심화되기 때문이지요. “과거 이론은 그럼 틀린 것인가?”라는 문제와 “과거 이론과 현재 이론이 똑같은 것인가?” “과거 이론과 현재 이론은 그저 다른 것인가?”라는 문제가 계속 나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 문제를 다루기 전에 인식론의 역사로 넘어가지요.

인식론은 인식론으로 보통 번역되지만 어원상 지식론에 가깝지요.
20세기 초중반 지식에 대한 이해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지식” 정도였고, 딱히 큰 논의는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게티어가 2페이지 짜리 논문으로 지식이 생각보다 큰 문제 거리라는 걸 보여주게 됩니다.(제가 생각하기로는 “정당화된 참인 믿음=지식”이 상식이었다기보다는 게티어가 우리는 그렇게 보는 거 같은데 이게 문제다라고 해서 생긴 도식 같단 생각도 듭니다)

게티어 문제는 사례인데 그 사례는 이런 문제입니다.

즉 “정당화”와 “참”이 독립적일 때 이게 진짜 지식일 수 있냐는 것이지요.
정당화가 되긴 했는데, 그 정당화가 참은 보장해주지 못한 경우가 가능합니다.(사실 정당화와 참을 구별하면 이런 독립성은 당연한 겁니다. 강샘은 그래서 플라톤이 정당화=참으로 이해한 거라고 말씀하시죠)
때문에 내가 믿은 정당화의 이유가, 실제로 그것이 참인 이유와 다를 때, 객관적으로 그것은 지식이라고 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간단한 문제의식이지요.

문제는 이 문제가 졸라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뭐 초기에야 이걸 쉽게 해결하려고 하였죠.
참인 체계에 호소하는 거에요. 자연과학은 하나라는 전제를 갖고, 자연과학 및 이것의 존재론을 토대로 정당화하면 참=정당화라는 것이지요.
뭐 근데 아시겠지만 이건 말도 안 되는 헛소리죠.(순환논법)

결국 이 문제는 정당화와 참의 간극은 받아들이되, 정당화가 얼마나 “합리적인” 근거를 통해 이루어지는지로 해결법들이 수렴됩니다.

문제는 이 합리성이 무엇인가가 애매한 것인데, 대체로 이것이 “사회적”이라는 것에는 거의 모두가 인정하게 되었지요.(인지과학적 접근이든 자연과학적 접근이든 지식사회학적 접근이든 결국 지식-사회 문제로 갑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이런 귀결에서 시작하지 않는 사람이 많아서 문제인 상황이지만, 그래도 지식의 문제는 단순 명제의 문제도 아니고 그러한 명제를 받아들이는 논리적-형식적-명제적 조건이 아니라, 꽤나 가치 판단이 개입되어 있는 사회적 조건이라는 것이 인식론의 발전에 의해 확보된 전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전제들에서도 다시 논쟁이 강해지는데, 사회적인 것이 무엇인가? 지식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할 때 구성되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따위의 문제가 계속 나오기 때문이지요. 이론이 구성되는 것인가, 믿음이 구성되는 것인가, 개념이 구성되는 것인가, 의미가 구성되는 것인가, 사실이 구성되는 것인가, 존재가 구성되는 것인가 따위의 파생적 문제입니다. 뭐 제가 자주 강조해서 아시겠지만 이게 존재가 구성된다고까지 나아가면 존재론적 전회라고 불리는 물결과 관계가 생깁니다. 다만 이런 입장은 졸라 오래되어서 새로운 것도 아니고, 존재론적 전회로만 이해할 필요는 없지요. 중요한 것은 존재 술어 부여가 사회 의존적인 것 아니냐는 문제이지요.

일단 여기까지를 전제하고 존재 술어부여와 이러한 술어 부여의 합당함에 대한 논의들을 고려하면,(사실 여기서 언어철학적 문제도 개입됩니다. 의미를 심리상태로 보지 못한다는 관점과 전문가들의 지식이 의미 적용에 규제력을 갖는다는 사실 등으로 의미의 외재적-사회적 성격에 대해서는 이미 받아들여야하는 상황이지요)
1) 존재 술어부여는 객관적인 사태에 대한 것임에도, 그것이 단순히 사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식적인 합당함에 의해서 정당화되어야만 그것이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2) 이러한 정당화는 사회적이다.
라는 구도가 되지요.

즉 자연과학이든 뭐든 간에 일단 사회적 정당화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이 전제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맥키를 비판하자면, 맥키는 자연과학의 정당화는 자신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전 지적한 것이지요.

다만 이것의 해결책이 그럼 뭔데?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이제 2)의 통찰에서 시작되는 조류들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쪽에는
a) 사회적 정당화는 궁극적으로 경로의존적이며, 이는 진화론적인 적응을 통해 이해될 수 있다
b) 사회적 정당화는 궁극적으로 정치적이며, 이는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적 총체 이룩으로 이해될 수 있다
정도의 두 입장이 있습니다.
뭐 두 입장이 모순될 필요는 없긴 합니다만, 뭐 일단 두 쪽은 대립한 역사가 길어서.... 뭐 그렇습니다.

전 여기에 일종의 c안을 낸 것인데
c) 사회적 정당화는 근본적으로 재귀적 구조를 통한 자기생산 시스템을 통해서만 이해되어야지, 그렇지 않다면 사회의 동일성이 확보될 수 없다. 이러한 자기생산 시스템은 시대에 따라 변했으며, 진화론적인 적응을 걸쳐 변화하였고, 이는 현대적으로는 “민주주의적”인 시스템의 우월함을 가리키고 있다
가 되겠습니다.

뭐 사실 이게 새로운 입장이라고 전 생각하지 않고, a안 b안 나올 때부터 세부로 들어가면 이런 입장들이 있어왔어요.(베이트슨 및 라파포트)
자주 들어서 이제는 아시겠지만, 전 베이트슨, 라파포트, 기어츠 빠돌이라 저런 관점을 그냥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 뒤로 더욱 진척된 모델법도 안 나왔고요.

뭐 여기서 이제 다시 스캔론으로 가자면 이러합니다.

저는 저런 구도에서 사회적 총체로서 지식을 적용하는 것도 옳긴 하지만, 지식은 개인이 갖는 것이기도 하다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뭐 굳이 말을 분화하자면 사회적인 지식과 개인의 앎은 다른 것이지요. 그리고 사회적으로 규제력을 갖는 존재의 범위(domain)는 실재론과 무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실재론이냐 반실재론이냐를 구별짓는 기준이 될 수 없지요. 무조건 실재론이 됩니다.(설사 반실재론이라도!) 결국 실재론인지의 문제는 개인이 앎을 적용하는 데 있어서의 태도 문제에서 갈린다고 생각하고, 실재론자인지 아닌지는 단순히 특정 이론을 믿는지의 여부에 갈린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믿는지의 문제에 달려 있다는 것이지요.

뭐 이런 문제 구별은 고중세 전통이기도 합니다.
특정 명제를 믿는 것과 그 명제를 가지고 특정한 실천까지를 해내는 것을 구별하고, 전자를 명제적 앎, 후자를 습속으로서의 앎으로 여긴 것이지요.
뭐 당연히도 고중세에서는 후자를 중요시하였고, 이것이 진정한 앎이라고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전 당연히 이 전통에 절 동일시하고(이쪽의 유명 사상가가 오캄이지요) 있는 상황이고,
마흐, 푸앙카레, 아인슈타인, 뒤엠 등등 모두 이쪽이고 심지어 칸트도 이쪽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스캔론에 대해서도 비슷한 어떤 것을 기대하고 있는데, 결국 본인이 이유들에 대해서 그 실재성을 주장한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해명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이고, 이게 구성론, 계약론자들과 달라지는 지점이 될 “도대체 무엇이 구성된다는 것인가?”라는 사회적 구성론의 문제에 대한 그의 고유한 답을 기대하는 것이지요.

결국 존재 술어의 문제인데 이게 감성-윤리의 문제가 되어야하는 거 아닌가?가 저의 물음이고 스캔론도 이쪽일까?라는 입장인 것입니다.

뭐 그리고 전 이런 의심-고민이 철학사적으로 꽤나 당연한 경로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철학, 언어철학, 심리철학, 인식론 모두 이런 논의를 가리키지 않는가란 생각이...
분석철학을 한다고 하면, 당근 “사회적”이란 게 뭔지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져야한다고 전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