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저번부터 생각을 정리해서 전하려고 했는데, 요즘 읽은 것도 꽤 되고, 이것들을 어떻게 연결해야할지 고심하고 있었습니다. 논자시 준비 등으로 인해 정신적으로 좀 산만하게 된 것도 있고요... 그래도 저에게 자극을 주셨고, 저는 이에 반응하게 되네요. 최근의 생각들 중 미독을 생각 나게 한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면 이런 그림이 그려질 거 같습니다.
제가 최근 본 것들은 예전부터 계속 보고 있는 “장소place” 문제들, 인류학 수업을 들으면서 보게 된 여행기와 민족지(etnology이든 ethnography이든)의 탄생, 생태학 개념의 역사, 공화정 담론, 양식사(미술사) 등이고, 이것들은 모두 수렴하긴 합니다만, 어디서 시작해야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요.
여기서 미독이 자극을 주었던 “수집”이라는 키워드를 활용해서 한번 수렴시켜보겠습니다.
일단 “수집”에 앞서서 우리는 질서를 이해해야합니다.
이것은 장소 담론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장소와 공간이 다른 것은, 장소가 구체적이라는 것이고, 장소는 특정한 관계 맺기를 가능케 하는 특정한 공간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만 이 공간이라는 것은 건물이나, 좌표로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나 사물이나 생각일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들을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는 것으로 전환하는 표상 기구들” 정도로 요약하고 싶고, 이는 한편으로는 인식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술적입니다. 표상과 의례는 함께 가는 것이고, 이것들이 하나의 시스템을 이루는 것이지요.
이것들이 시스템을 이룬다는 것은 과거에도 언급한, 고전학적, 종교학적 성과랑 관련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그 대립들을 축소 해석할 수 있는 툴을 발견했기에, 뭉뚱그려 얘기하자면 이러합니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이든 피에르 베르낭의 과학이든, 결국 여러 개체-관념을 하나의 질서로 통합한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즉 각 개별적인 것들이 집단을 이루는 것인데, 이게 하나의 질서로 인식된다는 것이지요. 이것은 단순히 구체적인 것들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꽤나 추상적인 것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고(이에 대한 연구는 우리의 뒤르켐-모스가 탁월하게, 두 번이나 해냈습니다), 바로 추상-관념 속의 질서가 앎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을 기능주의랑 엮자면 이러합니다. 이 추상 세계 속에서 구체적인 것들이 하나의 질서를 이루려면 일종의 특화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구별도 모호하고 갈등이 커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니 도덕적인 기능이든 뭐든 간에 각 역할들로 개별자들이 개성화되고, 그 개성적 기능들이 하나의 순환고리를 형성하면 그것이 질서라는 것이지요. 이렇게 형성된 질서는 부분들로 전체가 이루어지는데, 그 관계 속에서 상호 규정을 통해 부분-전체론이 형성된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뭐 여기서 이제 생태학으로 넘어가야합니다.
생태학은 바로 저 부분과 전체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부분들이 전체로 환원되지도 않고, 전체가 부분으로 환원되지도 않는, 고유성과 개성화로 질서 지어진 기능적 총체가 생태인 것이지요. 그리고 이 “기능”들이 바로 “장소”입니다. 이는 린네든, 다윈이든 이후 생태학 담론에서 계속 반복되는 개념인데, place, niches(생태학적 지위를 가리키는 단어), faculty, office(이는 의무란 뜻도 있습니다. 뒤에서 다루겠지만, 이것은 도덕학적인, 혹은 정치학적인 의미와 연결되는 한 고리입니다)는 함께 가는 단어이고, 이것들은 바로 저 생태학적 질서를 전제할 때, 그 기능들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생태학은 당연히 전체라는 질서를 전제하고, 그것들을 이루는 자리들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태학이란 단어는 ecology이지만, ecology는 원래 economy와 구별되지 않았고, economy는 그리스어 oikonomia에서 오긴 했지만, 중세를 거쳐서 dispensation이란 관념을 표현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dispensation은 법학과 신학 모두에서 쓰이는 단어인데, “신의 섭리로 구별된 자리들” 정도로 생각하시면 됩니다. 법학의 dispensation의 reason은 시간적 구별 원리, 공간적 구별 원리만큼이나 핵심적인 구별의 원리였고, 질서를 향해있었거든요.
뭐 이쯤에서 수집으로 이야기를 넘어가야겠네요.
여기서는 수집을 이중화해야합니다. 한편으로는 의식적인 수집 행위들이고, 다른 하나는 유입이라는 사실들이지요. 후자를 얘기하면 제가 언제나 언급하는 그래프턴의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을 언급해야하고, 관계 맺기의 팽창으로 기존의 것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들의 유입 가져온 충격을 언급해야합죠. 그것이 기이한 것이든 호기심의 대상이든, 아니면 괴기스러운 것이든, 새로운 것이든 뭐든 간에 “새롭다”할만한 것들이 유입되었고, 그것이 전통적 질서 관념에 충격을 준 것은 분명합니다. 저런 새로운 것들에는 사물들과, 정보들과, 심지어는 “경험들”도 존재했죠.
여기서 “경험들”에 주석을 달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 실험은 19세기 실험실의 의미로 거의 국한되었지만, 원래 실험과 경험은 같은 단어입니다. experience와 experiment는 동의어였고, 이는 18세기까지도 동의어로 쓰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여기서의 실험이 반드시 기이한 것을 뜻할 필요는 없는데, 기이한 것을 내재화하는 것과 연관을 맺기는 한다 정도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튼 저런 유입들로 신의 dispensation의 reason이 통하는 economy of nature가 애매한 상황이었고, 이를 새롭게 극복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당대에는 구별되지 않아서 대립된다고 하긴 뭐하지만 대립할 잠재성이 있기도 하고 인적으로 구별되는 경향이 있다가 결국은 구별되고 대립하게 되는 두 “방법”이 있지요. 하나는 공시적인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통시적인 작업입니다. 공시적 작업은 자연학-박물학적인 수집 작업과 소위 “데카르트적 자연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업입니다. 통시적 작업은 둘 모두 수집에 기초한 자연사와 역사학이지요. 이런 조류에는 데카르트적 자연과학을 제외하고는 수집은 무조건 들어가는 키워드가 됩니다. 그리고 데카르트 쪽에서도 당연히 베이컨주의가 결합될 수 있고, 베이컨주의와 결합되면, 실험에 기초한 경험들의 총체로서의 합리적 사고로서의 과학이 될 수 있지요.(여기서 실험은 실험실에 국한된 게 아니라 모든 이성적 점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적으로 검토된 모든 개별 경험들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일종의 수집이 가미되죠.
수집이라는 키워드를 이해하기 위해는 애호가적 수집을 먼저 이해해야합니다. 역사학에서는 호고가(antiquarian)가 있듯이, 다른 쪽에는 여행가-탐험가들이 있는 것이지요. 이들의 수집행위가 근본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수집 테크닉들은 하나로 수렴하지 않았고, 이것들이 무슨 의미인지도 불명확했습니다. 취미 생활로 했으니 당연한 것이지요. 이런 다양한 테크닉들을 하나의 학문으로 만드는 게 “근대 학문” 운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수집들의 규칙들을 체계화하여 하나의 총체를 이루고, 이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고유한 구조-질서를 확보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왜 economy of nature와 economy of mind(thought)이 함께 가고, 둘이 은유적으로 연결되는지, 아니면 직접적으로 연결되는지 애매한 복잡한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저 두 언어는 19세기 이전에도 사용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칸트도 “자연의 경제”란 단어를 쓰고, 자신의 철학적 작업에 “경제”라고 말합니다. 이는 부분전체론적 관념이 포함되면 당연하게 가능해지는 언어 사용입죠)
이는 세계와 자아의 관계를 설명하는 데에서 둘의 공통점과 차이가 중요해지기 때문이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소우주-대우주 공명(correspondence)이라는 언어로 설명하면 이해가 쉽지요.
세계와 인간은 조화만 아니라 갈등도 갖습니다. 이는 소우주와 대우주가 어쨌든 각각의 우주(economy)로 분리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요. 하지만 소우주와 대우주는 조화도 가능한데, 이는 소우주와 대우주가 공명하는 덕분입니다. 이는 둘이 닮았고, 이러한 닮음을 고도화하면 얻어지는 적극적인 상태입죠. 허나 여기서 끝나면 재미가 없죠. 이 소우주 대우주 관점에 “역사”가 도입될 수 있거든요. 신은 인간의 소우주를 가변적인 것으로 만들었고(인간의 본성은 無이다), 인간의 소우주가 변화하고, 이에 따라 소우주와 대우주의 상응도 변화함에 따라 대우주도 바뀔 수 있다는 사고가 가능한 것이거든요.(이러한 사고는 중세 때부터 있었습니다) 즉, 소우주 대우주의 합일을, 단순한 합일이 아니라, 지양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인간과 자연의 지위 관계는 복잡하게 얽히는 것이지요. 인간의 역할을 어떤 것으로 규정하는지, 어떤 생태학적 지위를 주는지, 어떤 “기능들”을 검토하는지 따위가 모두 중요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검토들이 복잡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야기하는 것이 19세기의 사회담론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뭐 여기서는 자세한 설명이 어려운데, 핵심은 인간과 자연을 분리시켜서, “정신의 경제”로 “자연의 경제”를 복속시켜야한다는 입장과, “정신의 경제”와 “자연의 경제”는 크게 다르지 않고, 다른 복속보다는 공감과 연민을 통한 연대 확장으로 이해할 것이냐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후자가 당연히 나아보이지만, 후자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입장이었고, 전자는 시대적 불안과 위기를 해소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반전평화와 인류애 증진을 연결하면서도, “전쟁의 영광”을 유지할 수 있는 적극적인 언어였기에 당연히 전자가 성공합죠.(재미나게도 이쪽의 대표가 헉슬리고, 후자의 대표가 다윈입니다. 즉 진화론 자체도 이 대립에서 이미 쪼개지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뭐 전 여기서 당연히 국제정치, 영구평화, 공화정 지향적 정치담론, 세계공화국 지향 등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는 미독의 관심이 아닐 것 같고, 바르부르크나 벤야민으로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 둘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독일 낭만주의자들과 제가 사랑하는 보들레르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의 핵심 키워드 중 하나는 “거울”인데, 이게 바로 문제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거든요. 다윈에게도 드러나는 사고이지만, 자연의 경제 또한 인간의 과학적 활동을 통해서 얻어지는 정신적 질서입니다. 그러니 결국 자연의 경제와 정신의 경제는 단순히 대립하는 것이 아니고, 거울들의 비춤이라는 것이 낭만주의-보들레르의 핵심 의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거울 관계는 자기지시만하는 것이 아니라 비춤을 통해 상응하는 것이고, 거울과 거울들을 겹침으로써 비춤을 복잡화할 수 있다는 게 저들의 통찰입니다.(사이버네틱스로 이해하시면 편합니다) 이런 관점에서는 무엇이 진리냐보다는 무엇이 비추어지고 그 비춤은 다시 무엇을 비추냐는 것이고, 자신의 작업 결과물(역사, 비평, 시, 학문 등)은 다시 자아라는 거울로 비추어지는 또 다른 거울이고, 이를 비추어냄으로써 또 다른 반사를 만들어냅죠. 뭐 이게 보들레르의 거울론과 상응론의 연결고리이고, 보들레르는 소멸하는 현재들로 이루어진 현대성 속에서, 순간적이나마 포착해낼 수 있는 공통 창구(모티프)를 포착하려고 했다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게 흔히 말하는 보들레르의 “감정의 물질화”, “우울의 사물화”인데, 이는 공유될 수 있지만 의미는 없는 소재들을 공유될 수 있는 감정과 정신으로 만들어낸다는 기획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무튼 여기서 벤야민과 바르부르크로 넘어가면 이러합니다. 이 둘은 “역사”를 저런 거울로 이해했습니다. 당연히도 이러한 역사는 “아” 다르고 “어” 다른 것이고, 해석과 해석함이 순환하는 관계이지요. 바르부르크의 핵심 물음은 르네상스라는 역사적 사태가 아니라, 르네상스인들이 가지고 있는 “부활”이라는 의식 자체였습니다. “그들은 왜 고대를 꿈꾸었던 것일까?”라는 물음이고, 이 속에서 현재와 과거와 미래가 얽혀 있는 복잡한 관계와 감정의 이중성을 이해하는 거이지요. 한편으로 과거는 현실의 원천, 규정성의 근거가 된다는 점에서 “악”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그 과거에서 고대라는 찬란함이 등장하기에 “선”이 됩니다. 즉 현재라는 시점은 단순히 현재가 아니라, 과거들이 교차하고 있는 장소이고, 이 속에서 미래들도 교차되는 것이지요. 뭐 좀 아이러니한 표현을 쓰자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고대이며, 야만이란 소리가 되겠습니다. 벤야민에게도 이런 의식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역사와 현재를 어떻게 보냐는 인식적 사태 자체가, 현실을 왜곡한다는 것이고, 현재라는 시간대가 여러 시간대가 중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 “역사”(서사적 의미에서)가 중첩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중첩은 단순히 “사실” 문제가 아니라, 사실과 인식이 교차하는 지점이고, 소우주와 대우주의 공명 지점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런 공명 공간 속에서 공유될 수 있는 장소를 창출하고, 그러한 장소를 매개로 여러 사물-행위자(정말 사물과 인간 모두) 모두가 특정한 관계를 맺으며 매개항을 창출할 수 있을 거라는 뭐 그런 이해입죠.
이것들에서 주목할 것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사이버네틱스를 취하면서도 이를 법칙적이라기보다는 중층결정적인, 실천-해석-효과 차원으로 이해한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한편으로는 총체를 그리지만, 이는 “부분으로서의 총체”고 이들의 작동들에 의해서 작동되는 총체라는 관념이 될 것입니다. 후자는 에스노그라피의 기술 때문에 떠올랐고, 전자는 바로 이 에스노그라피에서 작가와 대상들, 독자들의 관계를 그리는 데에 효과적이기에 가져온 것입죠.
저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구체적인 학문들과 시대 의식들, 물질에 대한 의식들을 보고 있고, 여기에는 워낙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를 연구하는 사람들도 꽤나 나뉘어 있어서 제가 멋진 창조물을 만들기는 힘든 상황입니다. 뭐 사실 그런 점에서 전 다윈과 바르부르크의 “우울”을 잘 이해할 수 있고(뭐 이것이 피치노의 “우울”, 뒤러의 “우울”, 루소의 “우울” 칸트의 “우울”, 제르맨 스탈의 “우울”, 샤토브리앙의 “우울”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학문적 구도뿐만 아니라 삶이 많이 공감가더군요. 자신의 능력-산출력에 대한 회의, 이 회의를 해소하는 수단으로서의 수집, 하지만 수집물의 방대함에서 공포를 느끼고, 이는 악순환을 이루기도 합죠. 뭐 둘은 우울을 어떤 의미에서는 극복했고, 그렇기에 저런 “위대함”을 창출한 것이지만, 그 공포와 무기력감과 걱정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인지 알기에 저를 섣불리 비유하고 싶지 않네요.
무튼 좋은 책들은 많고, 미독이 언급한 “유형”은 유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지향한다는 말에 대한 저의 주석입니다.
P.S. 노스롭 프라이의 유형도 전체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가 말년에 성서를 다룬 것은 절망에서 비롯된 우울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것을 지향했을 가능성이 있다 저 생각합니다. 카프카, 벤야민에 전 프라이를 추가해서, 성서적 역사의식을 추구했던 인물들로, 동근원적인 공포와 그 공포 속에서 한 줄기의 희망을 찾아 헤맸던 여정들로 그려내고 싶네요. 아우어바흐도 비슷한 작업을 했는데, 그가 통사를 다뤘다면, 저는 저 시대만으로 다루고 싶단 생각도 듭니다. 그렇게 되면 아우어바흐의 여정도 그려낼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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