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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위대한 철학자들 사이에서의 모순

한 철학자가 위대함과 동시에 다른 철학자 또한 위대하다는 것이 그토록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일까? 칸트가 위대하다면, 헤겔은 위대하지 않고, 헤겔이 위대하다면 칸트는 조롱받야하는 것일까? 뉴튼과 아인슈타인을 동등하게 위대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 같지도 않다. 과학의 진보에 과몰입하는 이들이, 아인슈타인이 맞았고 뉴튼은 틀렸다고 말할 때에도, 그들은 뉴튼을 조롱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차라리 진보를 부정하지 뉴튼의 천재성을 부정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철학을 한다는 이들은, 위대한 철학자들을 갇히고 굶주려 동족포족에 빠지는 햄스터들로 그리는 것일까? 그들은 왜 철학자들의 만신전을 그리지 못하고 아귀지옥만을 그리는 것일까?

 

존재론이란 것은 도구이며 수단이다. 그것은 목적이 아니다. 존재론들 사이에서의 불화는 아주 사소하다. 그것은 불화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거창한 “차이”에 불과하다. 들뢰즈가 흄을 받아들이고, 베르그송을 받아들이고, 칸트를 받아들이고, 니체를 받아들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시간의 두 번째 종합에 베르그송을 위치시키고, 칸트와 니체를 통해 세 번째 종합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그가 베르그송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도구들의 제작자들을 기리고 있을 뿐이다. 많은 브랜드의 이름이, 제작자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처럼, 과학혁명기에 실험도구들을 설명할 때는 항상 제작자의 이름이 함께 했던 것처럼. 존재론에 누군가의 이름을 붙이는 일은, 어떤 것을 가리킬 수 있게 해주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해주는 장비들을 통해 사실들을 보여주며, 그 사실을 보여주게 해준 장비 제작자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과 같다. 들뢰즈가 베르그송의 이름으로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을 완수하는 것은, 그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이고, 그가 세 번째 종합으로 나아가는 것은, 그에게서 결여를 찾아내는 일이라기보다는, 그가 보여준 사실들에서 새로운 실험을 설계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철학 연구서들은 차이와 갈등, 불화와 모순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같다. 누군가의 이름을 거론한다는 것은, 그가 보여준 무엇인가를 거론하는 일과 같다. 설사 그러한 “발견”에 불만을 품고 있을지라도, 그러한 불만은 발견에서 비롯된 것일 수밖에 없다. 발견은 새로운 것을 불러일으킨다. 그 무엇, 그것의 이름, 의미, 상징에서 그들은 불화를 겪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그러한 발견을 부정하며, 발견자를 혐오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발견을 인정하고 있는 동료들이다. 그들 사이에서의 불화는 다툼과 싸움이 아니다. 그들 스스로가 가까워지기 위해 서로를 확인하는 과정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들은 서로 가까워지는 과정 속에서 투닥거리고 있는 것일 뿐이다. 토리첼리의 위대한 실험을 “기만”이라고 부정한 스콜라 철학자들과, 그러한 실험을 “발견”이라고 생각한 새로운 학자들. 발견을 놓고 왈가왈부한 것은 새로운 학자들이었고, 스콜라 철학자들은 침묵했다. 그들의 침묵은 평화가 아니라, 가까워지려고조차 하지 않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불화이다. 우리는 새로운 학자들, 파스칼, 홉스, 보일 사이에서의 투닥거림을 목격하고선, 그들을 원수지간이라 상상하곤 한다. 하지만 진정한 불화는 투닥거리는 이들과 침묵하는 이들 사이에 놓여 있지, 그 투닥거림 사이에 놓여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섀핀과 샤퍼, 라투르 모두 틀렸다. 그들은 같은 것 사이에서의 차이를 얘기하느라, “같은 것”을 잃어버린 여행객이다.

 

철학에 대해 논할 때, 다툼과 갈등을 강조하는 이들을 믿지 않는 것은 대체로 도움이 되는 경험적 진실이다. 말들은 지시를 수행한다. 말들의 지시는 형이상학적인 신비를 가정하지 않고서라도 우리에게 효과로서 드러난다. 말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인가에 다다른다. 그것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이론과 다른 누군가의 이론을 비교한다는 것은 삶이라는 현장들 속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만지고 상상하게 해주는지를 비교하는 일과 같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격언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격언을 따르는 인류학자들이 같은 현장을 부정할지라도, 우리는 서로 다른 현장에서 같은 것들을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며 같은 것에 발을 담글 수 있다. 무엇을 왜 보여주는지를 생각하면서 이론을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철학자들 사이에서 불화보다는 차이를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비교하는 일은 말들을 비교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삶을 비교하는 일이 될 것이다. 여기서 삶을 비교한다는 것은 한 철학자와 다른 철학자의 삶을 비교하는 일을 가리키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의 말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삶 속에서 그들이 보았던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며, 우리의 삶을 반추할 것이다. 여기서 비교되는 것은 나의 삶이지 다른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철학자들의 말과 글을 통해 우리 삶들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사실을 곱씹어본다면 철학과 문학의 거리는 좁혀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예술들을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찾게 되는 것은, 철학 속에서 찾게 되는 것과 같을 때가 많다. 그것은 문학을 쓰게 만드는 한 가지 마음가짐이 철학을 하게 만드는 한 가지 마음가짐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 문학과 철학을 남긴 사람들은 우리에게 왜 그것을 남겼을까? 그것은 무인도에 떨어진 한 인간이, 그 자신의 외로운 삶 속에서 바위에 어떤 흔적을 남기는 일과 같다. 그는 혼자다. 그는 그곳에서 무척이나 힘들었을 것이다. 무엇을 먹어야할지, 어디로 가야 물을 얻을 수 있을지, 무엇을 조심해야할지를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기에. 그는 바위에 흔적을 남긴다. 여기에 오게 될지 모르는 알 수 없는 누구를 위해. 적어도 그가 자신만큼 외롭고, 자신만큼 힘들지라도, 자신이 져야만 했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 그 알 수 없는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는 자신이 받지 못했던 도움과 위로를 누군지도 모르는 그 사람을 위해 남기고 싶다. 그렇기에 그는 돌에 흔적을 남긴다. 누구라도 알아 볼 수 있는 큰 글씨로. 문학을 쓴다는 것, 철학을 한다는 것의 한 가지 마음가짐은 이 사람의 마음가짐과 비슷하다. 그는 누군가를 위해 남긴다. 그는 누가 볼지 모르기에, 보편이라는 흔적을 남긴다. 문학과 철학의 보편성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보편성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그들의 고난과 그들의 깨달음, 그들의 조언과 그들의 위로의 진실함을 알기에. 그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끼기에. 그렇기에 그들의 말에 더할 게 있다라도, 그들의 흔적을 지우기보다는 그들의 흔적 옆에 새로운 흔적을, 새로운 흔적의 표식과 함께 남기게 될 것이다. 여기서부터 나는 다른 것을 보여주겠노라고. 큰 글씨로. 그들처럼.

 

이 진실을 모르는 이들이 일삼는 험담에 귀기울이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삶을 위해 철학하지, 철학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