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3시 12분. 개가 짖는 소리에 깼는지, 개를 짖게 한 공사 소리에 깼는지,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었고, 나를 깨운 무엇을 안과 밖에서 찾고 있었다. 악몽을 꾸었는지, 소리에 놀랐는지, 나는 놀라 있었고, 나를 놀라게 한 무엇은 이미 떠난 후였다. 한가지 분명해보였던 것은 내가 무엇인가를 놓쳤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것의 부재를 직감하고 그 빈자릴 쫓고 있었다. 거부하기 위해서였든,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든.
산산이 부서진 이름, 허공에서 헤어진 이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 그 이름으로 불릴 주인은 신체가 보존하는 몸서리쳐지는 흉터다. 우리는 이 이름을 제정신으로 부를 수 없다. 알코올의 자격으로, 분열과 섬망의 자격으로, 단절되지 않는 아우성으로 그 이름을 부를 수밖에. 무의미로, 무능력으로, 존엄이 바닥을 쳤을 때 그 이름은 불려진다.
바닥을 쳤을 때, 그때 들려오는 소음이 우리가 찾던 이름이다.
“한 인간의 본성은 술버릇을 통해 밝혀진다. 그의 정체는 술취한 모습이다.”
칸트는 이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부정은 다음과 같이 해석될 때에만 진리일 수 있다. 술버릇은 그가 애써 감춘 자기 자신이 아닌 자기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그의 본성은 자기 자신이지 자기 자신이 아닌 자기 자신이 아니기에, 술버릇은 그의 본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술버릇은, 그가 그인 한 드러날 수 없는 그의 육체의 아우성일 뿐이다.
술만 마시면 우는 사람들이 있다. 평소에 울지 않던 이를 울게 하는 것은, 그가 너무 적게 울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이 울었기 때문이다. 그는 울지 않음에도 충분히 많이 울었기에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그는 술을 마신다. 취한다. 자신을 잃는다. 자기 자신을 잃고서야 눈물을 흘린다. 자기 자신인 한 울지 못했으니까. 참았던 오줌이 나온다. 이불에 지도를 그린다. 다시 덮지 않을 이불인 것처럼,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꺼이꺼이.
관조는 피로를 불러일으킨다.
피로함. 소진됨. 피로와 소진을 밖에서 그려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피로와 소진은 안과 밖의 경계에 의해 정해진다. 안과 밖 사이의 경계로서가 아니라, 안이라는 것과 밖이라는 것의 원천으로서. 피로는 외부의 마모를, 소진은 내부의 마모를 가리킨다. 그 속은 너무 마모되어 마찰을 잃어버렸다. 모든 것이 자연스레 움직인다. 마치 내가 없는 것처럼.
마찰이 없다.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이것만이 소진을 표현하는 언어이다. 감정의 부재로 소진을 표현하는 것은 너무 과도하다.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감정이 많은 것이 소진을 표현하기도 한다. 사물의 부재/과잉, 의미의 부재/과잉, 세계의 부재/과잉, 신체의 부재/과잉 모든 것이 소진과 마모를 표현할 수 있다.
소진과 마모를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남는 장사를 하며, 자본을 모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달린 빨대를 찾고, 빨대를 꽂을 즙이 가득한 표면을 물색해야 한다. 내가 기생하는 것에 기생하기 위해, 내게 기생하는 것에 기생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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