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2020년 여름
7월 13일 오후 2시 51분 현재.
서울에는 비가 왔고, 나는 밤새 잠을 못 자 피곤했다.
아이들이 버스에 탄다.
3313 버스기사는 비에 젖어 미끄러운 바닥에 아이들이 넘어질까봐 23초 더 정차한다.
이것을 소유한 사람은 그와 나와 너뿐이다.
이것은 오롯이 우리만의 것이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 전회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를 얘기한다. 이는 민간설화와 다르게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에 버금가는 혁명을 본인이 하고 있다는 어설픈 자기자랑이 아니다. 칸트는 구체적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작업을 분석하고, 그의 작업을 모범으로 삼고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연구는, 형이상학적 고민을 제쳐두고, 현상(들)과 이를 조직하는 이론의 관계를 규명하였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즉 태양이 지구를 돌든, 지구가 태양을 돌든, 그런 것은 중요치 않고, 현상들을 분석할 수학적 이론이 중요했다는 소리다. 바로 이 관점전환이 칸트의 코페르니쿠스 전회의 정체이다. 칸트는 우주와 신이 아니라, 세계와 우리가 맺는 관계를 보아야한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전회”가 코페르니쿠스의 전회를 모방한다고 주장할 뿐이다.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말할 뿐이다. 코페르니쿠스에게 뉴튼이 있었듯, 그에게도 누군가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할 뿐이다. 여기 어디에도 자기자랑은 없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 혁명
코젤렉 개념사 시리즈의 <혁명> 항목에 칸트는 혁명에서 회전의 의미를 제거한 인물로 등장한다. 혁명, revolution은 회전을 뜻하고, 이것이 우리가 아는 혁명을 뜻하게 된 과정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설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의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의 제목에 등장하는 “회전”에서 파생된 용례라고 한다. 뭐 이런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증명은 어려운데, 뭐가 되었든, “회전”이란 말이 “혁명”이라는 말을 뜻한 것은 그렇게 직선의 과정은 아니었다는 소리가 되겠다. 코젤렉 개념사 시리즈에서는 칸트가 여기에 중요한 의미변화를 함축하는 용례를 제공했다는데 나는 이러한 해석에 동의할 수가 없다.(비명을 지르는 텍스트를 침묵 시키는 일은 언제나 나의 능력 밖이다) 일단 칸트는 코페르니쿠스의 전회를 얘기하지 혁명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는 혁명을 얘기할 때는 “천구의 회전” 비유를 가져온다. 학문이 전회를 통해 설립할 수 있는 “공간”을 창출하면, 천구가 규칙적으로 회전하듯 학문도 규칙적으로 진행된다는 얘기다. 그는 별의 회전에 학문의 탄생을 비유하는 것이다. 이는 항성의 주기운동 같은 안정성과 합법칙성이 학문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말로 칸트는 오히려 규칙성, 안정성, 닫힌 원의 은유를 통해서 학문의 "혁명"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혁명은 앞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원 안에서의 순환일 때, 닫혀있을 때, 그럴 때 그것은 완전한 것(독일에서는 닫힌다는 것이 완전하다는 것을 뜻하곤 한다. 피히테가 그렇기에 “닫힌 상업 사회”를 주창한 것이다. 닫힌 상업 사회는 꼴통 사회가 아니라 완전한 사회다. 피히테 체계 내적으로도 그렇고 언어상으로도 그렇단 소리다)일 수 있다. 여기 어디에도 오늘날의 “혁명”은 없다.
P.S. "혁명"의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발견”의 의미를 파악해야만 한다. 당시 “발견”은 발명이나 기만과 구별될 수 없는 단어였다. 때문에 한편으로는 그것은 완벽한 새로움을 뜻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하나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허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결국 가능성은 여럿이다. 칸트는 분명 하나의 혁신을 기획하고 있다. 그는 혁명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지 못할 종류의, 불안과 공포 속에서 혁명을 완수해야만 했던 프랑스 혁명기의 혁명가는 아니었다. 이러한 감정, 혁명은 시작되었지만, 이는 통제를 벗어나있고, "나"의 "혁명"이 진정한 혁명일지 아닐지 모른다는 불안감, 이는 <앙시앙 레즘과 프랑스 혁명>의 저자가 발견/발명해낸 "새로운" "감정"이었다. 칸트는 혁명가인가? 한편으로는 그렇다. 그는 분명 입법자이며, 입법자의 등장, 입법행위는 정체의 순환에 있어 하나의 혁명이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혁명가가 아니다. 그는 우리의 혁명가, <혁명가의 교리문답>의 저자가 밝힌 혁명가와는 거리가 멀다. 결국 문제는 발견이 무엇인가이고, 입법이 무엇인가이다. 우리는 다시 이것을 연구해내야만 한다. 입법은 발견인가 발명인가? 만약 입법이 발견이라면 왜 그 입법은 사람의 형상과 이름이 새겨져 있는가? 만약 입법이 발명이라면 왜 그 입법은 보편타당하게 우리 사이에서 하나의 질서를 이루는 것인가? 문제는 여기서 시작되어야만 한다. 법에 사로잡힐 것인가 사로잡을 것인가, 천재에 사로잡힐 것인가 사로잡을 것인가.
세미나
오늘날 철학과에서 세미나는 그저 독서모임을 뜻할 뿐이다. 발제를 포함하는 독서모임이 좀 더 엄격한 의미에서 세미나를 뜻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큰 강제력을 갖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언어사용은 여러 의미에서 아쉬울 수밖에 없다. 세미나라는 것인 대학에 등장했을 때, 세미나는 적극적인 실습 연구를 뜻했다. 고전학에서 처음 선보인 세미나는 새로운 텍스트를 현대적 도구들을 토대로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고, 그 과정에서 모든 학생은 한 명의 연구자로서 그러한 분석을 직접 실행하여 내보여야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론적으로 배운 지식을 활용하게 되고, 적용에 있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확인/평가할 수 있었다. 때문에 세미나 수업을 통해 훈련된 학생들은 한 명의 연구자로서 졸업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 명의 교수자로서 졸업할 수 있었다. 사실 이 두 영역이 상호의존적이란 게 세미나라는 이념의 본질이기도 하다. 우리의 편견과 달리 물리학 또한 고전학 세미나들을 모범으로 성립하였고, 이러한 실습의 교육적 효과(학생 교육과 연구자 육성이라는 이중의)를 통해 “물리학”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학문을 생산해낼 수 있었다. 한 학문의 생산성은 바로 이 현장, 세미나라는 형식을 통해 드러나는 앎의 현장과 이 현장에서 현장연구를 수행하는 연구자들, 그들의 모범들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세미나에서 현장은 무엇이고 모범은 무엇인가? 세미나를 통해 연구자 및 교수자를 육성해낼 수 있는가? 물론 지금 여기에서 두 물음에 대한 답은 부정적이며, 세미나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도 없어 미래조차 불투명하다는 것은 확고한 사실이다. 물론 혁명은 가능하다. 내가 얼마 전 술자리에서 반복해서 말했듯, “충분한 시간만 보장되면 가능하다.” 100명의 동료와 50년의 기간만 보장된다면 대한민국 전체를 바꿀 수 있고, 20명의 동료와 10년의 기간만 보장된다면 대학을 바꿀 수 있다. 허나 둘 다 보장되지 않을 것 같다. 그렇기에 불가능하다. <단상들>에서 적었듯이, 이미 공모는 불가능해졌다.
학문 혹은 시
시 읽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시인은 좋아한다. 보들레르 빠돌이 중에 나보다 보들레르를 잘 이해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보들레르 전공자를 만난 적이 없어서 하는 헛소리다. 나에게 “보들레르 전공자”는 일곱 개의 음절과 하나의 여백으로 이루어진 존재이다. 구별불가능자의 정체성은 사치에 불과하다) 이문열이 <시인>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창동의 <시>를 참 좋아한다. 문제는 결국 운명이다. <타이페이 이야기>에 나오듯, 정말로 정신을 가진 인간이라면, 나이가 들수록 운명을 믿게 된다. 아니 운명에 대한 믿음이 강요된다. 앎이 강요되듯이.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아 부어도 10cm의 간극을 좁히지 못하여 고발당한다. 모든 힘을 다하여 역사의 흐름을 바꾸려고 하지만 자신의 이름은 역사 속에 패배자로 남는다. 리튼 보고서의 치밀함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중일전쟁을 막지 못하였고,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를 막지 못하였고, “2차대전”이라고 불리는 두 전쟁 중 한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것을 비난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운명이었으니까. 때로는 모든 노력을 쏟아 부어도, 그가 바라는 것이 헛된 꿈이 아니더라도, 운명은 절망을 강요한다. <나라야마 부시코>에서처럼 사랑하는 어머니를 산에 버려야만 한다는 인간의 규칙이 때로는 “자연법칙”일 수도 있다. 결국 썩은 달걀로 좋은 오믈릿을 만들어내야한다는 불가능한 요구가 우리의 자연법칙인 것이다. 우리의 본성이 곧 자연일테니까. 그래서 난, <복수는 나의 것>을, <나라야마 부시코>를, <타이페이 이야기>를,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을(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에드워드 양의 영화는 영어 제목이 진짜 제목이다. 이 영화의 진짜 제목은 “단 하루의, 단 하루의 밝은 여름날”이다), <하나, 그리고 하나>를,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시>를 좋아하게 된다. 운명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것도 할 수 없겠지만 정신은 그래도 살아있는 것이라는 가녀리고도 위태로운 위로에 감동을 느끼게 된다. 학문은 제도다. 그런데 적당히 잘 굴러가는 제도로서의 학문으로, 학문은 실현되지 않는다. 학문은 나에게 달려 있지 않다. 앎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것이 학문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적당히 잘 굴러가는 제도조차 없는 우리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일 수 있겠지만, 바로 이 학문의 냉담함 앞에서 메이지 시대의 지식인들은 절망했다. 그들에게 "시"가 주어졌을지라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비참함이 좀 더 아름다울 수 있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그들의 아름다움을 마음 속에서라도 그려보면서 즐거움을 느낀다. 그들의 삶을, 마치 시처럼 곱씹으면서. 베를린 학술원이 서울 학술원이 될 수 없다면, <물리학 연보>가 <철학 연보>가 될 수 없다면, 내가 마그누스가 되어 베를린 물리학회 대신 서울 철학회를 잉태시킬 수 없다면, 내가 가우스처럼 한 별자리를 이룰 수 없다면, 결국 남는 것은 시인의 길뿐인 것 같다. 하긴, 보들레르 또한 “저널리즘”의 꿈이 있었기에 그 역시 나에게서 달아날 것이다. 결국 나에게 남은 것은, 이창동의 <시>와 이문열의 <시인> 사이가 아닐까. 내가 물었던 질문은 다시 내게 돌아온다. 메아리처럼. “당신은 학문을 할 준비가 되었나요?” 아직은 이 질문에 답할 수가 없다. 아니 영원히 대답하고 싶지 않다. 그것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괴로우니까. 하지만 설사 내가 그 답변을 영원히 할 수 없더라도, 내 삶이 끔찍히도 비참하더라도, 그저 추하기만 하지 않기를. 이것은 부디 나에게 달려 있기를. 욕심이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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