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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나의 사물이 진리가 될 수 있는가?

옛날에 쓴 글. 최근 관련된 책을 읽게 되어 생각이 났다. 생각난 김에 공유한다.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에 비추어 본 예술 작품의 진리

 

 

 

1. 들어가면서

  하이데거는 예술 작품과 진리를, 진리와 예술을 함께 말한다. 하이데거는 심지어 예술 작품의 본질이 ‘진리사건Wahrheitsgeschehen’과 다르지 않다고도 말한다. 그런데 예술이나 예술 작품을 진리와 함께 말하는 것은 당연할 수가 없다. 예술 혹은 예술 작품이 진리와 무관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 혹은 예술 작품이 진리와 연관이 있다고 말한 철학자가 하이데거 한 명뿐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러한 주장은 그렇게 기이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하이데거가 예술 작품으로 거론한) 그리스 신전 같은 건축물이 어떤 의미에서 진리를 품고 있을 수 있을 것인지는 매우 불분명하다. 어떻게 문장이 아닌 사물이 진리를 품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이러한 사례들에서도 예술이 진리와 연관을 가질 수 있는지는 하이데거의 예술철학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할 수밖에 없다.

  본고는 이러한 의문에 대답하려 한다. 이를 위해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을 제시하고(2장), 하이데거의 진리 개념에 비추어 예술 작품의 진리 및 예술적 진리 개념을 해명한다(3장). 결론으로 본고의 한계와 의의를 다루고 글을 끝마치겠다.

 

2. 하이데거의 개시 진리론

  하이데거의 예술 진리론을 분석한 설민의 논문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전통적인” 표상주의 진리론과 후설의 확증론적 진리론을 비판하며, 그것들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개시진리론을 제시하였다. 표상주의 진리론이란 외부의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일치하는 것을 진리라고 여기는 철학적 입장이다. 외부 대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외부의 대상은 같은 것일 수 없다. 외부의 물질적 대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물질일 수 없다. 그것은 물질적인 대상에 대한 생각일 뿐, 그 자체로 물질적인 대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 외부 대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과 외부의 대상은 다르다. 이 구별되는 두 가지의 것, 표상하는 것과 표상되는 것이 일치할 때 참이고, 일치하지 않을 때 거짓이라고 보는 것은 꽤나 상식적인 입장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철학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려운 입장이다. 표상하는 것과 표상되는 것이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표상주의에서는 외부의 대상과 우리의 생각을 엄격하게 구별한다. 외부의 대상은 물질이고 우리의 생각은 정신이다. 생각과 정신은 동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다른 종류의 것이다. 그런데 그것들이 그토록 다르다면 일치 또한 불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같은 것이 아니라면, 서로 공유하는 것이 있을 때에만 일치가 성립할 수 있다. 예컨대 물질적 대상에 내재된 구조와 물질적 대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내재된 구조가 동일하다면 일치는 성립될 수 있다. 물질적 대상에 내재된 구조는 물질적 대상이 아니지만, 물질적 대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내재된 구조와 같은 것일 수 있고, 이 경우 일치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물질과 표상이 공유하는 무엇인가가 같은 덕분에 일치가 성립된다. 그런데 이는 표상주의 진리론과 충돌한다. 외부의 대상과 그것에 대한 우리의 표상이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대상과 구별되는 그것에 내재된 구조가 우리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표상주의 진리론에서 주장된 외부의 대상이 일치에서 배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 이상 표상주의 진리론일 수 없게 된다. 표상주의 진리론은 그렇기에 합당한 철학적 입장일 수 없다.

  후설의 확증론적 진리론을 비판하고 이와 하이데거의 개시론적 진리론을 구별하는 일은 어려운 일인 것처럼 보인다. 후설과 하이데거 사이에 공유되는 철학적 입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후설과 하이데거 모두 표상주의 진리론을 거부한다. 그들은 일치가 표상과 대상 사이에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고 진단했다. 물론 어떤 대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그 대상과 구별된다. 하지만 그 생각은 대상과 독립적으로 다뤄지며 일치 여부가 판단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형이상학적 존재자를 상정할 이유는 없다. 내 방에 걸려 있는 그림을 내가 생각한다면,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 그림이지 그림에 대한 나의 생각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은 그 자체로 맞거나 틀리다. 우리의 생각이 올바르다면, 그것은 자기동일적 확증에 근거하여 참인 것이다. 이러한 확증에서는 표상과 대상의 간극은 성립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두 개의 것 사이에서 일치가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것이 그 자체로 확증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개시 진리론도 이와 비슷한 면이 있다. 하이데거는 예술의 진리가 작품 안에서 성립한다고 말한다. 작품이 진리를 드러낸다고 말한다. 이때 작품과 진리는 표상과 대상처럼 서로 동떨어져 있지 않다. 물론 하이데거 철학에서도 작품과 진리는 구별될 것이고 그래야만 하겠지만, 적어도 그것들이 표상주의 진리론에서처럼 형이상학적으로 구별되는 독자적인 두 종류의 무엇으로 구별되지는 않을 것이다. 작품과 진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이 어떤 진리를 드러낸다면, 그 작품은 그 진리를 드러냄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며, 그 진리는 그 작품을 통해 드러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다. 작품과 진리는 표상과 진리처럼 일치하거나 일치하지 않거나할 수 없다. 일치하지 않는다면, 즉 어떤 작품이 진리를 개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애초에 작품일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작품과 진리는 독립적이지 않다. 후설이 자기동일적 확증이라고 말한 것을 하이데거는 진리 개시로 말한 것처럼 보인다. 하이데거의 진리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심화할 필요가 있다.

  후설의 자기동일적 확증과 하이데거의 진리 개시가 구별되는 단서가 하나 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존재자의 구별이 바로 그 단서이다. 하이데거는 철학을 통해서 사유해야하는 것은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렇다면 존재자와 존재는 어떻게 구별되는가? 하이데거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대상들은 존재자라고 말한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말한다면 그것은 존재자일 것이다. 딱딱하고, 따뜻하고, 유용한 것 등등 우리가 사물에 부과하는 모든 것은 존재자에만 부과될 수 있다. 어떤 존재자를 바로 그것이게 하는 무엇인가인 존재는 그런 식으로 말해질 수 없다. 그렇게 말해진다면 그것은 존재자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전통적인 방식, 예컨대 학술적이고 논리적인 방식의 글쓰기 대신 우리가 하이데거의 책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방식으로 철학을 수행한 것은, 그가 말하려고 한 것이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존재자를 말하는 방식으로는 존재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일성 또한 그렇다. 하이데거는 동일성에 대해서도 여러 방식으로 말한다. 문자적으로 볼 때는 그렇게 엄격하게 구별될 필요가 없어보이는 ‘das Selbe’와 ‘das Gleiche’을 구별하며 동일하다의 의미를 부여한다. 동일한 존재에 대해 사유하는 것과 동일한 존재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진리 개시가 후설의 자기동일적 확증과 다르다면, 바로 이러한 차이에 근거하여 다를 것이다. 표상주의 진리론과 다르다는 점에서는 구별될 수 없겠지만, 진리가 성립하는 근거에 있어서는 둘은 구별되기 때문이다.

 

3. 예술작품의 진리

  후설의 자기동일적 확증과 구별되는 하이데거의 진리 개시에 비추어 하이데거가 말하는 작품의 진리를 고려할 때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 있다. 하이데거의 모방 예술론 비판이 그것이다. 하이데거는 모방 예술론을 명시적으로 비판한다. 그럼에도, 하이데거의 모방 예술론을 연구한 한충수가 지적하듯이, 이 또한 섬세하게 독해될 필요가 있다. 하이데거가 예술의 모방, 다시 말해, 예술이 가진 사물을 재현하는 능력을 부정했다고 보는 것은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의 재현적 특성을 예술의 본질에서 배제하였다. 하지만 하이데거가 예술이 어떤 것을 재현한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은 아니며. 어떤 것도 재현하지 않는 예술을 찬양한 것도 아니다. 잭슨 폴록의 액션페인팅 작품처럼 그 어떤 것도 재현하지 않는 예술도 존재하지만 하이데거가 저러한 작품을 반드시 높이 평가할 이유는 없다. 그가 비록 재현을 예술의 본질에서 배제했을지라도, 재현하지 않는 예술을 좋은 예술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재현하는 그림이어도 좋은 예술일 수 있다. 하이데거가 자신의 예술철학을 설명하며 언급한 고흐의 구두 그림은 분명 구두를 재현하는 그림이다. 하이데거가 그 그림이 개시하는 진리를 말할 때, 그는 구두와 무관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는 분명 그림 속 구두를 통해 구두에 대해 말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작품의 진리, 즉 작품을 통해 개시되는 진리가 작품이 재현하는 사물과 무관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모방 예술론을 비판한 이유와 사물을 재현하는 예술의 힘을 예술의 본질에서 배제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충수에 따르면 하이데거는 그러한 예술이 특정한 대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복제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기 위해 그러한 비판을 가했다. 구두를 있는 그대로 그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있는 그대로의 구두”가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구두를 볼 때 우리 눈에 보이는 바로 그 시각상이 전부라면, 그림은 필요하지 않다. 사진을 찍는 것이 더 쉽고 더 정확할 테니 말이다. 그런데 사진으로 있는 그대로의 구두를 찍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다. 도대체 어떤 구두를 찍어야 있는 그대로의 구두를 찍은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종류의 구두가 있다. 심지어 과거에도 다양한 종류의 구두가 있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토록 많은 종류의 구두들 중에 어떤 종류의 구두를 찍어야 있는 그대로의 구두일 수 있을까? 뿐만 아니라 하나의 종류 안에서 정확히 어떤 구두를 모델로 삼아야 있는 그대로의 구두를 찍을 수 있을까? 눈에 보이는 것을 모방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있는 그대로의 것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말하는, 바로 그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려주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구두는 세상에 널린 많은 구두들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다. 그 구두는 무의미하고, 그 구두를 그린 그림 또한 무의미할 것이다. 만약 어떤 구두 그림이 유의미하다면 그것은 단지 어떤 특정한 구두를 보이는 대로 그려내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우리 눈에 치이는 많고 많은 구두들을 볼 때 우리가 보는 시각상이 아니라 구두 자체를 그려냈기 때문에 그것은 특별할 수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시각상이 아니라 구두 자체를 그렸기에 특별하다고 해서, 그것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무엇인가를 그려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구두의 이데아를 그려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예술 작품이 그 자신 속에서 설립하는 진리는 그 작품과 분리된 무엇인가가 아니다. 하이데거가 고흐의 구두 그림을 설명할 때 그는 그 구두 그림에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구두의 이데아가 그려져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고된 농사를 짓는 아낙네의 구두 그림이라고 말한다. 고흐의 구두 그림이 아낙네의 구두 그림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문자 그대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하이데거는 고흐가 농사 짓는 아낙네의 구두 그림을 그렸다고 말한다. 고흐의 그림 속 구두가 구두의 이데아가 아닌 것처럼, 그 구두는 농사 짓는 아낙네의 구두로서의 이데아가 아니다. 그 구두는 구체적인 무엇, 어떤 농사 짓는 아낙네의 특정한 구두다. 누군지 모르고, 우리가 마주한적 없을 뿐, 그 구두는 어느 누군가의 특정한 구두다. 그럼에도 하이데거는 그것이 예술 작품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개시하는 진리를 전한다. 그것은 특정한 구두를 그린 그림이지만, 세상에 널린 많고 많은 구두들의 시각상과는 다르다. 물론 그것 또한 시각상이다. 그 구두 그림 또한 시각상이며, 그 시각상은 이데아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시각상에 불과하지 않다. 그것이 단순한 시각상이 아닌 것은, 그것이 개별적인 특정한 구두임에도 불구하고, 그 개별성을 넘어서 구두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덕분이다. 그것은 구두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준다. 개별적인 구두를 넘어서 구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줌에도 그것은 개별적인 구두다. 고흐의 구두 그림은 바로 그 구두 그림임으로써 구두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것이 다르게 그려졌다면, 더 이상 그 구두 그림일 수도 없었고, 구두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 구두 그림은 바로 그 구두 그림임으로써, 바로 그 누군가의, 바로 그 종류의, 바로 그 형태의 구두를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재현함으로써 구두가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것은 추상하고 일반화하지 않으면서도 구두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렇기에 그것은 예술 작품이다. 바로 그 작품으로서, 바로 그 작품임으로써, 그 자신 안에서 진리를 개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것의 본질을 드러내는 존재가 됨으로써, 다시 말해 하나의 예술 작품은 어떤 것을 현성wesen함으로써 현성한다. 개별적인 존재자면서도 개별자를 넘어서 존재를 드러내는 바로 그 개별자를 예술 작품이라는 하나의 개별자로 완성해냄으로써 예술은 존재자를 넘어선 존재의 진리를 증언한다.

  이러한 의미의 진리를 염두에 두면 신전 같은 건축물이 진리를 개시하는 것 또한 이해될 수 있다. 어떠한 신전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세워진다면, 그것은 그 존재만으로도 진리를 개시한다. 바로 그 신전이 그곳에 바로 그 방식으로 세워져 있다는 것만으로도 진리를 개시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종류의 수많은 신전이 존재한다. 어떤 것은 이미 사라져 그 흔적들만이 발견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고, 어떤 것은 폐허로 남았고, 어떤 것은 지금도 신전으로 있겠지만, 그것들 모두 존재한다. 어떠한 신전이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거기에 있다면, 그 신전은 그토록 많고 많은 신전들 사이에서, 바로 그 신전으로, 바로 그 자리에, 바로 그 방식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특별할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그저 닳고 닳은 폐허에 불과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그러한 특정한 신전을 넘어서 신전 자체를 드러낼 수 있다. 그 신전이 굳이 그렇게 그 신전으로 존재하게 한 그 모든 것이 그 신전에 담겨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신전이 그러한 형태로 세워진 것도 특별하다. 다른 형태로 세워질 수 있음에도 그것은 바로 그 형태로 세워졌다. 그 장소에 세워진 것도 특별한다. 다른 곳에 세워질 수 있었음에도 바로 그 곳에 세워졌다. 그렇게 남은 것도 특별하다. 세상에서 사라져 발견을 기다리는 채로 남아 있었을 수도, 지금까지 사용되는 신전일 수도 있었겠지만, 바로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더 이상 신전으로 사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기억하고 찾아오게 하는 곳으로 남아 있기에 특별할 수 있다. 그 신전이 바로 그 신전이게끔 하는 모든 것이 바로 그 신전을 예술 작품으로 만든다. 그것은 존재자의 개별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예술 작품일 수 있다는 점에서 개별성을 넘어선다. 그것을 개별적이게 하는 모든 것들이 수많은 존재자들과 그러한 존재자들의 가능성을 넘어서, 그것을 바로 그 신전으로 만드는, 본질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술가가 예술 작품으로 만들지 않았음에도 신전은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그 자신을 (재현representation하지 않고) 현시presentation함으로써 진리를 개시한다.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임을 드러냄으로써, 무수한 개별자들 사이에서 무수한 가능성들 사이에서 바로 그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하나의 무엇이 된다. 그렇기에 그것은 현성한다. 그는 개별자를 넘어서 존재를 드러내는 존재자가 됨으로써, 바로 그러한 진리를 증언한다. 신전 또한 그렇기에 현성함으로써 현성하는 예술 작품일 수 있다. 그것이 드러내는 것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에 재현하지 않을 뿐, 존재를 증언하는 하나의 시각상으로 계속 남아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예술 작품일 수 있다.

 

4. 마치면서

  예술 작품의 진리는 존재를 증언한다. 그런데 예술 작품의 진리가 존재를 증언한다면, 그것은 다른 진리와 무관할 수 없다. 물론 진리가 하나뿐인 것은 아니다. 진리는 다양하다. 과학적 진리, 역사적 진리, 논리적 진리 등등 많은 진리들이 이를 증명한다. 그런데 예술 작품의 진리가 존재와 맞닿아 있다면, 그것은 저 다양한 진리들 사이에 나열될 수 없다. 과학적 진리, 역사적 진리, 논리적 진리가 있듯이 예술적 진리 또한 있고 저러한 진리들과 무관하게 말해질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술의 진리는 다양한 진리 중 하나에 불과할 수 없다. 그런데 만약 예술의 진리가 다른 진리들과 충돌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이데거는 반 고흐의 구두 그림이 농사를 짓는 아낙네의 구두 그림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 미술사가가 입증했듯이 반 고흐의 구두 그림 속 구두는 농사를 짓는 아낙네의 구두도 농부의 구두도 아니다. 습지에서 농사를 짓는 네덜란드의 농부들은 가죽 구두 대신 나막신을 신고 농사를 지었기 때문이다. 가죽 구두를 그린 이상, 그것은 적어도 “농사를 짓는” 아낙네의 구두 그림일 수도 없는 것이다. 이는 추측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반 고흐가 그린 구두는 농부 아낙네의 구두가 아니라 반 고흐 자신의 구두였다는 것이 역사적 진리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말한 반 고흐 구두 그림의 진리는 오류 아닌가? 그럴 수 있다. 하이데거에게 교황처럼 무오류의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철학자 하이데거를 모욕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하이데거가 틀렸다는 것으로 문제가 끝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시작된다. 반 고흐의 구두 그림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술 작품이 아니었던 것인가? 그것이 예술 작품이 아니었다면 도대체 하이데거는 왜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 착각했는가? 어떻게 예술 작품이 아닌 것이 예술 작품으로 착각될 수 있는가? 예술 작품으로 착각되는 예술 작품 아닌 것도 예술 작품처럼 진리를 개시하는가? 아니면 진리를 개시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인가? 진리를 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어떻게 진리를 개시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거짓된 진리를 개시하는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반대로 그것이 예술 작품이었지만 하이데거가 그것이 개시하는 진리를 잘못 파악한 것인가? 만약 하이데거의 말처럼 예술 작품이 진리를 개시하고, 예술 작품이 개시하는 진리는 그저 예술 작품에게 다가가면 알려지는 그런 것이었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 진리를 잘못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들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지, 정말로 답할 수 있는 문제들인지, 그러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하이데거가 말한 예술 작품의 진리를 계속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지는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이러한 어려운 문제가 남을지라도, 본고에서 강조한 예술 작품의 진리 또한 의의가 있다. 이러한 진리 개념을 통해서 예술 작품들에 대한 하이데거의 철학적 의미 부여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하이데거는 세잔의 후기 작품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런데 세잔의 후기 작품들에 대한 하이데거의 가치 평가는 그의 후기 철학과 무관하지 않다. 하이데거가 다음과 같이 말하기 때문이다: “세잔 고향에서의 이 날들은 철학 저술들로 이루어진 모든 도서관만큼의 가치를 갖는다. 세잔이 그림으로 그렸던 것처럼 누군가가 그토록 직접적으로 사유할 수 있다면!” 하이데거는 세잔의 그림을 그림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그의 그림이 철학책이라고 말한다. 그것도 한 권의 책이 아닌 방대한 도서관 같은. 그는 세잔의 그림이 사유를 가르쳐준다고 말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세잔이 사유했다고 말한다. 세잔이 철학자들이 해야만 할 사유를 했다고 말한다. 철학자들처럼 사유한 것이 아니라, 철학자들보다 더 잘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바로 그 하이데거가 부러움을 표할 정도로 탁월하게 했다고 말한다. 그것이 책이 아니라 그림에 담겨 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에서 사유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형이상학의 극복을 위한 그의 작업은 사유에 근거한다. 하이데거가 세잔의 작품에서 목격한 것이 사유라면, 세잔의 예술을 높이 평가한 것이 그의 작품이 제공하는 감각적인 즐거움 때문이 아니라 그가 기획하는 철학의 모범이었기 때문이었다면, 하이데거가 세잔을 높이 평가한 것은 철학적 평가이다. 그런데 그림은 그림이고 철학은 철학인데 어떻게 그림이 철학의 모범이 될 수 있는가? 이는 본고에서 논의된 진리 개념을 통해서 좀 더 납득 가능한 방식으로 해명될 수 있다. 예술이 특정한 개별자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개별자를 통해 존재를 증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철학과 같은 것일 수 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예술은 철학과 똑같은 것das Gleiche을 말할 수 없는 똑같은 것은 아니겠지만, 철학과 같은 것das Selbe을 말할 수 있는 같은 것일 수 있다. 그렇기에 설민이 강조한 진리의 다양성으로는 이해될 수 없을 철학과 예술의 동형성이 본고에서 다루어진 예술 작품의 진리로는 이해될 수 있다. 아직 많이 부족하겠지만, 본고의 이러한 접근 또한 의의가 있다고 강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