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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영화 속 대사에 대해서

단 한 명에게 보내는 편지


<헤어질 결심>에 대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생겼습니다.

바로 “대사”가 그것입니다.

저번에 만났을 때 얘기 드렸듯, 전 대사를 중요시합니다.

물론 대사가 영화에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대사 없이 영화를 만들 수도 있고, 말 없이 전달하는 것이 더 특별할 수 있습니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가 그렇죠.

물론 그의 영화에는 대사가 있습니다만, 그의 영화에서 대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일본어를 못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영화들을 자막 없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의 영화에서 말해지는 것들은 모두 으레 해야만 하는 인사말 같은 것들이거든요.

그의 영화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 “소통”이 이루어졌다고 할 만한 것들은 모두 말없이, 혹은 말이 없는 덕분에 이루어집니다.

실제로 동아시아에서는 저런 식의 소통이 지배적입니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말로 증명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도 사랑은 말 아닌 것으로 증명되곤 하죠.

이런 증명의 순간에 말은 중요치 않고, 너무 진지한 대사는 그 순간의 특별함을 방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특별한 순간에 말은 그 특별함을 방해한다고 여겨지는 편이니까요.

제가 동아시아에서는 “대화”란 게 없기 때문에, 이를 연출하는 게 어렵다고 투덜거리는 건 이런 조건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사가 많은 영화들이 있고, 그 대사들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타짜>나 <극한직업> 같은 게 그렇죠.

이런 영화들의 대사는 “맛깔난다”고 할 만한 것들입니다.

티키타카가 되는 말들이고, 들으면 기억되기 쉽죠.

그런데 이런 것들은 제가 중요시하는 대사가 아닙니다.

저런 대사들은 소통을 위한 것이 아니거든요.

소통이라면 소통이긴 합니다.

밈들을 가지고서 같은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은 될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대사들은 소통을 위한 게 아닙니다.

애초부터 말해지는 것들이 그다지 말이 필요하지 않거든요.

상황은 명백하고 굳이 말로만 소통될 수 있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없습니다.

루터처럼 “이게 바로 나”라고 선언해야만 할, “나는 이게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없다”고 선포해야만 할, 그런 종류의 “말”이 아니란 겁니다.(“도대체 네가 뭔데?”에 대한 응답으로서의 말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전 이런 대사가 어떨 때 어색하지 않을 수 있을지, 어떤 상황에서 연출되어야 그런 진중함이 어색하거나 오그라들지 않게 전달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헤어질 결심>에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기교가 사용되고 있더군요.

 

<헤어질 결심>에도 제가 앞서 언급한 티카타카형 대사가 많습니다.

“이건 요양사인가 손녀딸인가, 우리 팀 에이스입니다.”라던가 “원전, 완전, 안전” 따위의 대사가 있죠.

하지만 저런 대사는 극중에서 그렇게 중요치 않습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말들은 저런 티키타카형 대사처럼 자연스럽고 맛깔나는 그런 말이 아니거든요.

서래의 말들은 기괴합니다.

문법도 이상하고, 표현도 이상해요.

평소에 사용하지 않는 단어들이, 어색하게 붙어 있습니다.(예컨대 “한국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을 하면, 사랑하기를 중단합니까?”에서처럼 ‘중단’, “제 얘기를 들어주고, 위로해준 단일한 사람”에서처럼 ‘단일’ 등)

그런데 그 말들이 엄청나게 임팩트가 있어요.

아마도 가장 임팩트 있을 대사는 이거죠.

“걱정했어요, 산에 가서 돌아오지 않아서, 마침내 죽었을까봐.”

이 대사를 듣고 전 속으로 “마침내...!?”라고 되뇌었습니다.(이런 효과가 의도했다는 걸 보란 듯이 영화 속 해준이 저처럼 되뇌더군요)

저런 이상한 대사가 특별함을 갖는 것은 둘째치고, 어떻게 영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말해질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건 서래가 외국인이라서, 외국인이면서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인이라서 그런 겁니다.

외국인이니 한국말을 잘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러니 그걸 감안해서 평소보다 더 귀기울여 듣게 됩니다.

문법적으로 이상해도, 어색한 어휘가 사용되어도 자연스러울 수 있고요.

게다가 무슨 말을 들어도 “이게 무슨 말이지?”라고 반응하며 해석하게 됩니다.(관심을 끄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이국의 여인이 말한다면, 청자가 해석해야죠)

그래서 안 이상하고, 그렇게 귀기울여 들으니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겁니다.

발회된 의미를 파악하는 걸로 끝내지 않고, 파격적인 단어에 놀라게 되고요.

그렇게 저 단어가 인상에 각인되는 겁니다. “‘마침내’라고..!?”

 

아마도 전 이런 특별한 대사에 크게 인상 받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인용한 대사가 실제의 대사인지는 모르겠지만, 단 한번 본 영화임에도 대사들을 읊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거든요.(전 기억력이 정말 안 좋습니다...)

말을 중요시하는 저에게, 신비로운, 그러면서도 파격적인 말을 던질 수 있는 캐릭터니 서래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을 테고요.

그래서 특별히 더 꽂혔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걸 생각하니 이게 제가 원하던 대사는 아니라는 것도 분명히 깨닫게 되더군요.

제가 지적했듯이, 영화 속 서래의 발언들은 모두 미스터리입니다.

수수께끼를 내는 것 또한 소통의 한 형태일 수 있겠지만, 제가 앞서 이상으로 삼은 루터의 말은 수수께끼가 아닙니다.

물론 루터의 말도 해석이 필요합니다.

또한 그것에 대한 해석은 여럿일 수밖에 없죠. 다시 말해, 루터의 말 또한 우리에게 “문제”처럼 다가옵니다.

그럼에도 이건 수수께끼랑 다릅니다.

루터의 말은 수수께끼를 푸는 것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그것이 투명하게 드러날 수 있길 바라며 자신을 내놓았을 겁니다.

그것이 해석이 필요하고, 그것이 정말로 무엇인지 파악되지 않는 것은, 루터의 말이 가진 특성 때문이 아니라 바로 루터라는 인물의 특성 때문입니다.

한 사람은 물론 이러저러한 어떠어떠한 인물일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정말로 누구인지는 그러저러한 말들로 일축될 수 없습니다.

루터라면 독일인, 중간계급 출신,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수도사, 남자 등등으로 서술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들이 루터가 누구인지를 애기해주진 않습니다.

설혹 그러한 것들이 루터에게서 분리될 수 없을지라도, 그러한 것들은 루터 자체를 이루는 것도 아니며, 루터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근거일 수도 없습니다.

그것들이 루터란 인물을 우리에게 가리켜주는 단서들이 될지라도, 우리가 루터를 마주하는 것은 그 단서들을 “통해서”이지, 그 단서들이 루터여서가 아닙니다.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 회의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밝혔습니다.

그 말들은 “이게 바로 나”라는 루터 말마따나 루터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수백년이 지난 지금도, 심지어 번역되었음에도 그 글을 통해서 자신을 내놓는 루터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이 루터가 누구인지 확정시켜주는 것도 아니고, 루터란 인물이 이 글 자체인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글을 보면서 루터를 마주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루터를 투명하게 마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글에서 우리는 루터의 여러 면모를 만날 수 있거든요.

오히려 그의 글을 읽고 그가 누구인지 헷갈릴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그 글은 루터를 마주하게 합니다.

책은 대답하지 않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글을 읽으며 루터에게 질문하고 당장이든 시간이 지나고서이든 대답을 듣습니다.

그 글을 읽으며 루터가 누구인지 단박에 깨우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루터라는 누구인가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고요.

이건 수수께끼일 수 없습니다.

말과 글로 자신을 내놓는 일은 심심풀이일 수 없거든요.

아무리 쉽게 말하고 싶어도, 쉽게 말해질 수 없는 말처럼, 혹은 아무리 쉽게 말할 수 있어도 쉽게 말해진 순간 의미가 사라지는 말처럼,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어렵게 말해진 것입니다.

자기 자신조차 모르는 자기 자신을 누군가에게 내놓는 일이기에 어렵게 말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죠.

이런 어려운 일은, 유창하게 말해질 수도 없고, 유창하게 말해진다면 오히려 어색할 겁니다.

처음 시도하기에 쭈뼛거리며 내뱉어야만 하는 말, 모든 용기를 다해 겨우 내뱉어야만 하는 말이니까요.

제가 목격하고 싶은 대사는 이런 말이고, 이는 <헤어질 결심>의 대사와는 분명 다릅니다.

 

전 이제 예술과 점점 멀어질 것 같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가 사랑하는 예술을 제외한 다른 것들에 애정이 식을 것 같습니다.

저에겐 저런 말들, 자신을 내놓는 말들이 너무나도 특별하고 소중해서 다른 말들과 같은 취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야 좀 알 것 같습니다.

그 자신의 맹세를 어기고, 진리와 철학을 배신한 루소를 미워할 수만은 없었던 이유를요.

물론 지금도 루소의 후기 작품들, 에밀 후속편을 포기하고 쓴 자서전들을 전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의 글들에는 루소란 인간이 담겨 있습니다.

루소가 진리와 철학을 배신했을지라도, 루소는 자기 자신을 배신하진 않았습니다.

아무리 말을 건내도 마음이 닿지 않는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등돌렸지만, 적어도 루소는 자기 자신에게 등돌리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때 루소는 저처럼 벽보고 얘기하는 기분을, 아니, 벽조차 없어 허공에서 소리지르는 심정이었을 겁니다.

메아리조차 들리지 않을 때쯤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게 되었을 거고요.

그때 그는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내놓는 일이 가장 절실했을 겁니다.

도대체 남들에게 내놓아야할 “나”란 게 있기나 한 것인지, 그것이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싶었겠죠.

그러니 자기 자신 앞에 자기 자신을 내놓는 글들을 내놓았을 겁니다.

“이게 누구지?” “이게 나인가?” “아니면 이게 나인가?”라고 묻고 답할 수 있게 말이죠.

이건 진리도, 철학도, 지식도, 학문도 아니겠지만, 적어도 예술일 것이고, 사랑할 수밖에 없을 그런 것일 겁니다.

하지만 이것조차 아닌 것들이라면, 전 잘 모르겠습니다.

남들에게든 자기 자신에게든, 적어도 자기 자신을 내놓을 수 있는 것만을 전 존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전 그런 것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루터나 루소처럼, 아우구스티누스처럼, 플라톤처럼, 데카르트처럼, 샤토브리앙처럼, 제르맹 네케르처럼, 니체처럼, 아렌트처럼 그 자신을 선명하게, 잘 보이는 글자로 새겨넣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에게 말을 걸고, 제 질문에 답해주는 그들의 글과 같은 것을 남기고 싶습니다.

저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누군가일 수 있는 글을 말이죠.

저에겐 이것만이 예술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만든 것”이라고 자신 있게 외칠 수 있는 것은 정신이 담긴 것뿐일 테니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