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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에브리팅,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어제는 <스즈메의 문단속>을 봤습니다.

이걸 보니 에에올에 대한 제 불만이 어떤 것이었는지 좀 더 잘 이해되더군요.

일단 두 영화에 대한 제 불만은 작품 내적인 것이 아닙니다.

전 둘 다 재밌게 봤고, 굳이 흠잡고 싶진 않습니다.

뭐... 이만하면 되었지 뭘 더 바라겠어요.

그럼에도 전 좀 저 영화들이 부족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불만이고, 제 기준이 과도할 것일지라도 말이죠.

<위플래쉬>의 플랫처가 “Good Job”에 분개한 것처럼, 저도 좀 과도하게 반응하고 싶습니다.

영화 자체는 괜찮고,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문화 콘텐츠라는 상품일 수는 있어도 예술일 수는 없습니다.

물론 세상 모든 영화가 예술일 필요가 있는 건 아닙니다.

예술일 이유가 없는 영화도 있고, 그런 영화도 충분히 의미가 있죠.

그런데 전 이 작품들은 예술이었어야만 했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가치를 담고 있고, 그러한 가치를 전달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실천을 수행하는 작품들에게는 높은 기준이 적용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다루는 가치가 소중한 만큼 그것은 조심스럽게, 신중하게, 책임감 있게 다뤄져야만 할 테니까요.

 

전 에에올이 관객들에게 설교하려고 안달 난 영화 같다는 인상에 처음에는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에에올에서 전해지는 메시지 자체는 너무나도 소박하고, 에에올은 이러한 소박한 메시지를 너무할 정도로 우스꽝스럽게 다루고 있거든요.

메시지가 너무 소박해서, 메시지를 진지하게 전달하지 못해서 문제일 수는 있어도, 이게 설교 영화라 문제일 수는 없을 거라고 전 생각했습니다.

이 영화를 설교 영화로 보는 것은 너무 고깝게 본 거 아니냐는 것이죠.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인상이 부당한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저야 저런 메시지에 이미 동의하고 있으니 저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겁니다.

그런데 저런 메시지 자체에 동의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문제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제가 생각하기에, 그 사람의 문제의식은 제가 느낀 문제의식이랑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전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메시지의 풍부함과 전달 방식에 문제를 느꼈고, 그 사람은 메시지 자체에 문제를 느꼈겠지만, 결국 똑같은 문제를 느낀 겁니다.

둘 모두 영화의 메시지와 영화의 서사가 충분히 연결되어 있지 않아 불만을 가진 거거든요.

 

에에올은 멀티버스를 다룹니다.

뭐 멀티버스란 모티프 자체를 전 싫어하지만, 이건 취향의 문제에 불과할 수 있죠.(멀티버스를 다룬 작품 중 재밌었던 건 <다다미 넉 장 반 세계일주>뿐인 것 같군요...)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로는 멀티버스란 모티프가 취향 문제를 넘어서 그 자체로 문제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멀티버스가 상상 가능성을 상징하든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현실성을 가리키든, 멀티버스는 그 자체로 매우 특수하고 활용도 높은 장치입니다.

그런데 이런 활용도 높은 장치를 사용하면 문제가 너무 쉬워진다는 단점이 생깁니다.

에에올에서도 마찬가지죠.

분명 문제 상황은 영화의 시작과 함께 시작합니다.

멀티버스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 집안은 문제적입니다.(에에올은 이런 긴장 상황을 인위적인 사건에 의존하지 않는 “일상”으로, 그러면서도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미칠 것만 같은 상황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감독의 연출 실력은 분명 훌륭합니다)

그런데 이런 문제 상황을 주인공이 인식하게 되고, 그 원인을 파악하게 되는 것은 모두 멀티버스로부터 비롯되는 사건에 의존합니다.

다른 세계의 남편이 찾아오면서 갑자기 사건들이 시작되죠.

이런 식의 진행은 근본적으로 문제적입니다.

물론 사건은 갑작스러울 수 있어요.(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은 언제나 “돌연” 진행됩니다)

현실은 언제나 우리의 기대를 배신하는 것이기에, 예상하기 어려운, 외적인 사건은 오히려 현실을 잘 반영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사건에 주인공이 참여하게 되는 방식이 너무 외적입니다.

이런 사건의 진행과 사건으로의 유입이 강제적이라 주인공의 능동성이 전혀 발휘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외적 사건이라고 해도, 주인공의 힘이 강하지 않아도 주인공의 능동성은 발휘될 수 있습니다.

스탕달의 <적과 흑>, 발자크의 <인간희극>에서도 결국 주인공은 무력하고, 진정한 동인은 시대와 도시입니다.

하지만 저 소설들에서 사건을 사건으로 만들고, 이야기로 만들고, 문제를 만들어내는 건 주인공들이에요.

“너무 늦게 태어났다”고 느끼든, “파리와의 담판”을 원하든, 이미 주어진 세상에 만족하지 못하며 어떻게든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바꿔보려고 하는 주인공이 저 소설들을 소설일 수 있게 합니다.

결국 주인공은 실패하고, 세상은 바뀌는 게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 인물들은 무력하고 수동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 인물들이 소설 속 이야기들을 이야기로 만들기에 그들은 능동적입니다.

사건은 그 자체로 사건일 수 없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면 사건일 수 없기 때문이죠.

저 소설들의 사건은 외적이고, 그 자신의 힘을 가지고서 인물들을 지배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러한 사건들을 사건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인물들입니다.

인물들이 가진 욕망, 희망, 꿈, 투기가 그냥 지나갈 수 있는 아무 것도 아닌 일들을 사건으로 만듭니다.

세상에 널려 있는 의미 없을 수 있는 일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기회”로 삼는 덕분에 사건이란 게 발생합니다.

그 일에 주목하고, 그 일에 몰입하고, 부단히 음모plot를 진행시키죠.

덕분에 그것들이 지나가는 일화로 끝나지 않고, 사건이 되는 겁니다.

설혹 그들이 사건으로 만들어낸 사건들이 그들의 기대를 배신하고, 그들을 파멸로 이끌지라도 말이죠.

그런데 에에올의 사건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주인공이 분명 동기부여를 하며 자신의 특별함을 깨닫는 순간이 있긴 하죠.

하지만 이런 특별함은 그냥 부여된 특성입니다.

주인공이 주인공이라서 갖게 된 특별함이죠.

주인공의 내적인 상태, 절박함, 꿈과 욕망 따위로 의미가 부여된 게 아니라, 주인공의 특성으로 꾸며진 장치에 의해서 의미가 부여됩니다.

다시 말해 인물과 극의 전개가 작위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사건들의 전개에서 인물들의 능동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메시지가 붕 뜰 수밖에 없습니다.

왜 주인공이 그런 고민을 하는지, 왜 주인공이 그런 결심을 하는지, 왜 주인공이 특별한지 따위가 모두 제시되긴 하죠. 하지만 그러한 근거/이유가 모두 인물 바깥의 멀티버스란 장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왜 주인공이 실패한 인생을 사는지, 왜 딸은 저토록 자신의 인생을 방기하는지를 모두 멀티버스의 맥락으로 치환시켜버립니다.

다른 세계의 주인공이 더 잘 성공하기 위해서 현세계가 꼬인 것이고, 다른 세계의 딸이 멀티버스의 심연에 빠져서 그런 것이라는 식이죠.

이것들은 분명 어떠한 의미에서의 “설명”이겠지만 이는 관객의 감수성에 의존한 설명입니다.

이 세계랑 저 세계가 왜 그렇게 엮여야하는지에 대한 설명 없이, 그냥 그렇다고 보여주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것이니까요.

결국 관객이 그러한 배열로부터 그러한 효과가 도출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느낄 수 있을 때, 그니까 다른 세계에서 성공하면 누군가는 실패하는 게 당연하다고 느낄 수 있을 때에만 이게 설명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장치들이 전제하고 있는 감수성이 없는 사람들한테는 설득력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메시지가 붕 떠있는 채로 계속 되풀이 되니 설교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고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를 마주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합니다.

탐정소설처럼 그냥 문제가 주어져 있고, 그게 흥미를 끌어 뛰어드는 식이면 안 된다는 겁니다.(셜록 홈즈는 재미로 사건을 수임하고, 그가 맡는 사건들은 사회 바깥의 악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지 내부의 문제가 아닙니다)

장성한 딸을 둔 어머니가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보며 자신의 삶이 문제적이라는 것을 느끼는 순간부터 그려낼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치열하게 살아 왔음에도 자신의 삶에 무엇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고민하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고민의 계기가 명확해야합니다.

평생 고민하지 않다고, 왜 이 순간에 고민을 시작했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한다는 거죠.

또한 문제의 원인을 외부로 돌려서도 안 됩니다.

잘못한 게 없을 수 있죠. 세상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위안은 될 수 있어도, 그 다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잘못한 게 아니라도, 세상도 문제지만 그게 문제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해야만 자신을 바꿀 수 있으니까요.

이런 문제 인식이 자기 비하도, 자기 연민도 아닐 때에만 가치 있는 변화가 가능합니다.

자신의 삶을 바꾸고 싶다고, 그게 성공이나 출세를 위한 혹은 생존을 위한 것은 아닐지라도 정말로 절실할 수 있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런 걸 보여줄 때 설득이 가능해집니다. 그런데 이런 설득은 설교일 수가 없습니다.

저걸 어떻게 보여줄지 고민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모르기 때문이죠.

도대체 어떤 일을 겪어야 우리가 고민을 시작하는지, 올곧이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삶이 굽이졌다는 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거기서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하는지, 도대체 그게 어떤 것일 수 있을지 알기 어렵습니다.

정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그저 생각을 바꾼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딸과 화해하고 싶은 것은 당연할 수 있죠. 하지만 화해는 당연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상처 받은 딸에게 어떻게 말을 건내야 할지, 위로의 말을 건내야 할지, 사과의 말을 건내야 할지, 아니면 변명이 필요한 것일지, 그 말을 언제 건내야 할지, 지금이 올바른 시점인지, 너무 늦은 것은, 너무 이른 것은 아닌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말을 건내는 게 자기만족을 위한 것은 아닐지, 속편하자고 딸을 이용하는 것은 아닐지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고요. 

딸의 인생을 존중하는 것을, 그의 인생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믿고 맡기는 것은 방치와 무관심일 수 있고, 관심과 진심어린 걱정은 오지랖일 수 있죠.

특별한 순간은 어떤 것일 수 있는지, 그때 정말로 진심을 전하는 한 마디 말은 무엇일 수 있을지, 그리고 그런 특별함을 계속해나가는 것이 어떤 것일 수 있는지는 그 누구도 쉽게 답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이를 말하는 것은 설교일 수 없습니다.

영화가 답을 말할지라도, 그게 답일 수 없다는 것을 모두 알기 때문이죠.

그게 잠정적인 답이라고, 자신이 발견한 한 가지 가능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잔소리일 수 없습니다.

만약 영화로 이런 것을 그려낸다면 메시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이를 고깝게 여기진 않을 겁니다.

적어도 문제에는 동의할 것이고, 그 답에는 동의할 수 없어도, 그 고민의 노력을 부정하진 않을 테니까요.

에에올에 빠진 것은 이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뭐 전 그렇다고 해서 영화 자체가 문제고, 가치가 없는 영화라고 비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 이 영화에서 말하는 메시지에 진정성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정말로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면 쉽게 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죠.

하마구치 류스케가 말하는 것처럼 영화는 무서운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없이 볼 수 있는 기록이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감독은 쉽게 확신해서는 안 됩니다.(하마구치 류스케는 이걸 배우들에게도 적용합니다. 메소드 연기를 믿지 않는다고, 연기하는 일이 긴장되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은 믿을 수 없다고, 누군가의 삶을 정말로 자연스럽게 연기해낼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진정으로 좋은 연기일 수 없을 거라고 하마구치 류스케는 말합니다)

도대체 그 사람들 삶에 무슨 문제가 있는지, 자신이 찍어내는 영화가 그들의 삶을 심판하는 것은 아닌지, 정말로 소중한 것을 제대로 담아내고 있는지, 지금 자신의 확신이 오만은 아닐지 고민할 수밖에 없죠.

너무 고민하면 영화가 나오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고민을 안 하면 안 됩니다.

적어도 가치를 전달하고 싶다면 진지하게 고민해야하죠.

자기가 너무 손쉽게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정말로 어떤 순간이어야만 누군가의 결심이 오롯이 그의 선택일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하죠.

답은 없을지라도, 그러한 고민들이 영화 속 순간을 의미 있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전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 속 어설픈 장면들을 사랑합니다.

그러한 어설픔이 그의 오류나 거짓이 아니라, 그가 짊어지려는 문제의 어려움으로 보이기 때문이죠.

영화 속 장치의 완결성이나 복잡성보다 전 이게 더 중요하다 생각합니다.

아무것도 만들지 못하는 정교한 장난감보다는, 조악할지라도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것들을 만들어내는 기계들이 더 가치 있을 테니까요.

한 작품이 그저 소비재가 아니라면, 잠깐 우리를 즐겁게 해주고 잊혀져도 되는 것이 아니라면, 전 그것이 장남감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장남감이 아무리 큰 즐거움을 줄지라도 말이죠.

 

결국 취향 차이 아니냐고 반론하면 할 말은 없습니다.

취향 차이일 수 있죠.

저에게 정말로 소중한 영화는 어떠한 것임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다른 영화를 깍아내리기보다는, 이런 영화들도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라면 더욱 만족할 수 있을 것이고요.

누군가 그걸 알아준다면, 취향 차이보다는 큰 차이임을 알아줄 거라 생각합니다.

하여간 그렇습니다...